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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금장천 물줄기는 마을 앞 농토를 적셔 주면서 효자마을 앞을 경유하여 예양강으로 유입된다. 금장마을의 인천이씨는 1650년경 이시휘(26세 李時輝 1621~1708)가 지금의 장동면 만년리 장항마을에서 입촌하여 후손들의 번손으로 한때에는 75호의 집성촌이 형성되었고, 지금은 30여호 노년층 후손이 거주하고 있다. 이중, 부산면 금장길 92-5, 상금장 마을 안쪽 깊숙한 곳에는 2009년 11월 18일 장흥군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된 독우재(篤友齋)가 위치하고 있어 소개한다.
유생(儒生) 미천(媚川) 이권전(32세 李權銓, 1805~1887)은 수신(修身)과 소유처, 재각으로 이용하기 위해 1847년(丁未) 4월 20일 초옥(草屋)으로 건축하고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자는 의미로 독우재(篤友齋)라 명명하였다. 이후 1922년(壬戌) 4월 19일 손자 소천(小川) 이인근(34세 李寅根, 1883~1949)이 지금의 모양으로 중건하였다. 이곳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낮은 1단의 기단위에 자연석 주초(柱礎)를 놓고 그 위에 정면과 배면은 원형기둥을, 측면에는 사각기둥을 세웠다. 이 집은 첫 칸을 누각과 방으로 구성하여 다음 칸은 ⅔가 방이고, 나머지는 마루이며, 마지막 칸은 마루다. 마루의 뒤 벽면은 상하 2단으로 나누어 위쪽은 위패를 모셔 사당으로 사용하고 아래쪽 문을 위로 펼치면 사당의 상(床)이 됨과 동시에 제사용품과 서책을 보관하는 수납공간으로 활용토록 되어있다. 건물 앞에는 층층이 쌓은 돌담이 있고, 아래에는 실개천과 연못이 건축미를 더한다. 이곳에서 금장마을 곳곳과 내안리 뒤 수인산(修仁山 561m) 수리봉(鳶峯)이 한 눈에 들어와 먼 발취에서 쉽게 조망할 수 있는 등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시음(詩吟) 분위기가 돋는다. 독우재는 하나의 건물을 재(齋)와 당(堂)과 정(亭)으로 사용한 선비들의 지혜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독우재에는 4점의 편액과 한지에 기록한 화운시 4점을 소장하고 있다.
①독우재액호(篤友齋 額號)는 여산인 설주(雪舟) 송운회(宋運會 1874~1965, 보성군 율어면 금천리 태생) 선생이 썼다.
②독우재상량문(篤友齋上樑文)은 崇禎紀元後四回 1850년(庚戌) 9월 썼다.
③독우재서(篤友齋序)는 1853년(癸丑) 3월 썼다. (②,③편액을 쓴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내용을 해석하면 주인 이권전이 썼음이 확인된다.)
④경차 왕고원운(敬次 王考原韻)은 1948년(戊子) 8월(中秋) 불초손(不肖孫) 이인근(1883~1949) 근고(謹稿)하다.
⑤근차독우재원운(謹次篤友齋原韻)은 여산인 소파(小波) 송명회(宋明會 1872~1953, 보성군 율어면 금천리 태생)) 선생이 썼다.
⑥차독우재중건운(次篤友齋重建韻)은 여산인 소파(小波) 송명회(宋明會 1872~1953) 선생이 썼다.
⑦독우재기(篤友齋記)는 세유조돈장(歲柔兆敦牂) 대장월(大壯月) 하휴(下休) 1966년(丙午) 2월 하순 월성인 입헌(立軒) 김종가(金種嘉 1889~1979, 남원시 송동면 영동마을 태생) 선생이 썼다.
⑧경차 독우재판상운(敬次 篤友齋板上韻)은 진양인 후천(後泉) 정철환(鄭喆煥 33세, 1901~1981 장흥읍 평장마을 태생)이 미정고 근정(未定稿 謹呈)하다.(완성되지 않는 원고를 삼가 드리다.)
미천(媚川) 이권전의 집안은 유학을 숭상하고 효와 우애를 실천하는 가풍(家風)을 이어왔다. 미천(媚川) 이권전(1876년 齋長)과 첫째 증손 소파(小坡) 이병교(1904~1979, 제10대), 현손 수헌(守軒) 이태균(1935년생, 제35대) 등 3인이 흔치않게 장흥향교 전교(典校)를 지내 유도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는 부친 이재각(31세 李在珏, 1781~1846)의 뜻을 실천하고자 독우재를 세워 후학을 강학하면서 선롱(先壟)을 보살피고 독우(篤友)와 존덕(尊德)을 중시하고 명예를 구하지 않은 성리학자로 이름하여 초당처사(草堂處士)라고 불렀다. <독우재집(篤友齋集)>이 있다.
이후 아들 금파(金坡) 이수조(33세 李洙祚, 1854~1907), 손 소천(小川) 이인근(34세 李寅根, 1883~1949), 넷째 증손 소당(小堂) 이윤기(35세 李閏基, 1914~1996) 등 4대로 이어지는 서당을 호계리에 위치한 영모재(永慕齋)와 독우재에서 운영, 후학을 양성하면서 향촌에 적지 않는 교육을 담당하였다.
<소천유고(小川遺稿)>와 <소당유고(小堂遺稿)>가 있다.
특히 소천(小川) 이인근은 1924년(甲子) 영모재에서 후산(後山) 문낙중(남평인 文洛中, 1877~1938 금자리 효자), 최창희(낭주인 崔昌熙, 1878~? 용반리) 등 15명과 풍영계(風詠契)를 조직하여 예양강 인근 정자를 유람하고 많은 시문을 남겨 향촌발전에 기여하였다. 풍영계(계장 이태균)는 후손들에게 전해져 매년 3월초경 모임을 가지고 있다. 재원(財源)은 기동리에 논 530평이 있다.
최초 풍영계(風詠契) 참여인(15명) : 문낙중(남평인 금자리 효자), 최창희(낭주인 용반리), 최동만(낭주인 용반리), 김장수(광산인 용반리), 이행근(인천인 용반리), 김석권(청주인 호계), 임종래(조양인 지천리 지동), 강신황(진주인 유량리 용동), 김병익(청주인 호계리), 이정권(인천인 금자리 금장), 이인근(인천인 금자리 금장), 백영윤(인천인 금자리 금장), 김태식(영광인 용반리), 김용규(김해인 지천리 심천), 임승현(장흥인 금자리 효자)
또한 탐진강 상류지역 유치면 단강(丹江) 주변에 위치했던 영귀정(장흥위씨 단산리)과 중류지역 부산면 예양강(汭陽江) 주변에 위치한 용호정(낭주최씨 용반리), 농월정(광산김씨 용반리), 경호정(장흥위씨 기동리), 동백정(청주김씨 호계리), 서륜당(인천이씨 용반리), 독우재(인천이씨 금자리 금장) 등 칠정(七亭)의 후손들은 1962년(壬寅) 기동리 경호정에서 "정사계(亭榭契)"를 조직하였다. 시회를 열고 친목을 도모하는 등 정자문화를 보존하게 하는 일정의 역할을 해왔다. 정사계(계장 위재원)는 매년 입추(8월 7일)에 모임을 가지고 있는 등 미풍양속은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재원(財源)은 호계리 월만마을에 논 550평이 있다.
자문 : 수헌(守軒) 이태균(1935년생, 제35대 장흥향교 전교, 인천이씨 장흥파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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