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럭 저럭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되었고, 또 새로 시작한다는 기분에서일까
아무튼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성적표를 받고 보니 뜻밖에도 반에서 1등이 되었고,
평균 90점 이상이라 특대생이라고 한 학기 사친회비등 납부금도 면제받았다.
학비를 면제받는다는 것은 넉넉지 못한 가정에서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 열심히 공부해서 특대생(장학생)을 유지하도록 하라는 격려를 할 법도 하건만,
우리 부모는 교육열이란 조금도 없었던지, 아니면 온 관심이 먹고 사는데 있었는지
부자지간에 학업이나 진학 얘기는 한번도 서로 의논한 기억이 없다.
나 자신도 아무런 야망아나 목적의식도 없었으니 그저 되는대로 였다.
아버지는 사업이 잘 되었던지, 밭은 더 늘어나서 네 군데나 있었다.
그중 학교 앞 땅을 배나무 과수원으로 만들고 목조 2층집을 지어서 이사한 것은 고2 때였을 것이다.
밭이 많다는 것은 내겐 일거리만 많다는 것일 뿐, 오히려 원망스러운 일이었다.
등교하기 전 새벽 일찍 보리밭에 가서 잡초를 뽑는 일, 하루 이틀에 끝나는 일도 아니고,
아침 이슬에 신발 적시며 쪼그리고 앉아서 두 세골 씩 호미로 풀을 뜯으며 나가는 것, 정말 지겨웠다.
허리에 다리끼를 메고 고추 따는 일... 허리가 끊어질 듯해서 가끔씩 허리를 펴고 등을 두드려야 했던 일...
그래도 해질무렵 일을 끝내고 농기구를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 올 때의 그 홀가분한 기분...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매일 그렇게 일한 것은 아니겠지만, 방과 후 내 멋대로 친구들과 어울려 논 기억이 그리 많지않다.
하숙하거나 자취하는 친구들을 볼 때 "저 아이들은 얼마던지 공부할 수 있고 또 마음대로 놀 수도 있겠지..." 정말 부러웠었다.
고3 시절은 내겐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아버지는 사업이 망해서 아침마다 찾아오는 사람들은 빚쟁이들이였고 먹을 쌀도 없었다.
노란 옥수수 가루로 죽을 쑤어서 연명하였다. 학교 납부금도 제 때 낼 수 없었었고...
한번은 학교 시험 때 였다.시험 시간에 납부금 내지 못한 학생들을 칠판 앞으로 불러 내었는데, 한 7, 8명 되었을까?
납부금 내지 못했다고 시험을 못치게 한 것이다. 홍명표 선생 한테 뺨을 쥐어뜯기고 집으로 내어 쫒겼다.
"가라면 가지 뭐.." 그대로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 온 기억이 난다.
졸업 수학여행을 부석사로 간다는데, 여비를 못내서 가지 못했다. 그건 별 문제도 아니었다.
그러나 졸업 앨범을 사지 못한 것은 얼마나 후회스럽고 원망스러웠는지...
졸업 후 채소밭 거름을 주려고 학교 화장실에 똥을 퍼서 똥지게로 나르던 일...
몇달 전엔 나도 이 학교에 교복을 입고 드나들던 어엿한 학생이었거만, 나의 이런 신세를 아는 사람은 없엇을 것이다.
여름날 저녁 멱감으러 동강 철교밑으로 가곤 했었다. 그땐 철교가 지금의 동강대교 자리에 있었다.
어두운 저녁, "우르르르..."소리와 함께 철교 위를 열차가 지나가면,
나는 멍하니 바라보며 차창가로 비치는 여행객들을 얼마나 부러워 했는지 모른다.
"아~ 저 사람들은 저기 앉아 여행하는 동안은 얼마나 마음 홀가분 할까..?"
물론 그들도 나름대로 걱정거리가 있을 것이고 고민거리도 있겠지만 그래도 저 순간만은 마음 편할 것 같았다.
나는 어쩌다 자석에 붙은 쇠붙이처럼 이렇게 영월 구석에 꼼짝없이 달라 붙어있는 신세가 되었는가..
오라는 곳도 없고 갈 곳도 없었다.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절이엇다.
입대하면서 열차를 타고 영월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것으로 내 암울했던 시절도 어느정도 끝났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왜 이런 구질구질한 얘기를 쓰는가? 나는 외치고 싶은 것이다.
"나는 학교다닐 때 공부 잘해서 출세해 보겠다고, 친구들도 거절하고 공부만 하는 그런 모범생이 아니었다"라고...
1학년 때 잠시 우등생이 되어 그런 인상을 풍겼는지는 몰라도 그 후의 나는 공부와는 거리가 먼 보통학생이었다.
비록 함께 어울려 놀지는 못했지만 그건 내 집 환경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싫어함을 받고 경원시 된다면 좀 억울한 일 아닌가...
설혹 학생 때는 철없이 그렇다 해도 나이 70이 된 지금에도 그렇게 나를 대한다면 난 어떡하라는 것인가?
첫댓글 나도 농사를 지었지만 학교다닐때는 논밭에가서 일을 못하게하며 공부하라고 해서 고등학생 까지는 일을 안했지 특히 외삼촌이 한집에있으면서 우리일을 해주니 나는 일 안했지 졸업하고 이년농사하는데 는 힘든일은 안하고 외삼촌이 하자는데로 도와주는정도였는데 내가 철이 없었던거지...
벽암님은 자식의 교육을 위해 배려해 주시는 좋은 부모님을 모셨군요..요즈음은 대부분 학부모들이 자녀들에 대한 교육열이 크지만요..지금 돌이켜 보면 우리 부모님의 교육열도 좀 문제가 되겠지만,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의지나 야망이 없었던 게 더 큰 요인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나도 십리 밖 팔괴리에서 세벽밥 얻어먹고 통학하며 단어 수학공식 외우며 방가후에는 집으로 뛰어가 소풀비 나르는것이 내 임무가 되였다. 고생스리 공부한 이야기 한이 없을 터,,,,,,,,,,,,
읍내에 살던 나도 그랬으니, 팔괴리 인산님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더구나 집에서 소까지 기르는 농가였으니 인산님의 고생은 진짜 고생이었을 것입니다..
기병님의 지난 인생얘기를 들으면서 나도 미처 몰랐던 일 들이 너무나 많다. 학교 납부금을 못 내서 홍명표 선생님 한테 기합 받았다는 얘기와, 돈이 없어서 졸업 앨범도 못 사고 수학여행도 못 갔다는 얘기는 오늘 처음 듣는다. 물론 나는 광산과를 다녔으니 과가 달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가 몰랐던 기병님의 사연이 너무 많은 것이다. 그리고 농사일에 대해서는 나도 초등학교 시절 집에서 조금 거들고 했던 기억이 있는데..농사는 정말 힘들어 못 하겠더군. 물론 입바른 소린지는 몰라도..산에가서 나무 하다가 벌에 쏘여 한 반은 죽다가 살아난 일도 있고..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은 얘기지. 아련한 추억에 잠기는 오늘이다...
졸업 앨범은 울산에 있을 때 지금은 고인이 된 김주영이 집에서 처음 보았다네..앨범을 보니까 불안스럽던 마음이 좀 풀리더군.. 그전 까지는 동창들을 만나도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고 서로 알아보지 못하면 어떡하나하는 쓸데없는 걱정도 했었으니..ㅎㅎ
공부도 잘 했고 성품도 좋고 그만하면 집안도 좋고 그런데 사업이 안돼서 고생을 했다. 기병이는 학교 다닐때나 졸업해서도 잘나갔고 친구들이 인정해주고 알아주는 친구다. 공무원을 했으면 출세했을 친구지요. 사람 됨됨이 반듯하고 사람 차별안하고 성품도 좋지요 똥고집은 누구나 다 있으니 말할것 없고 소상하게 솔직하게 올려준 글에 호감이가고 감동적입니다. 우리 4-7의 보물단지 입니다. 이해심 많고 나무랄때없는 참으로 좋은친구입니다. 기병이하고 함께 있으면 늘 편하고 따뜻함을 느낍니다. 긴 글 쓰느라고 수고 했네요 나 바빠서 나갑니다. 저녁에 댓글 또 알아보겠습니다.
나는 글씨를 잘 못 쓰는 악필인데, 그래서 공무원은 생각도 못했지.. 글씨를 잘 쓰는 일현이를 부러워 했었지...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네, 글씨를 잘(?) 못써서 노트필기를 하지 않았는지, 노트필기를 하지 않아서 글씨가 늘지 않았는지..ㅎㅎ
부잣집 아들냄이로만 생각했던 내 판단이 수박 겉핧기였던가 보다.나도 고3때 부석사 수학 여행비를 못내서 못갈 형편이었는데 내옆에 짝궁인 성태현이가 대납을 해줘서 갔다왔다. 그고마움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모두가 암울하고 어려웠던 시대에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이런 우리가 지금 누구를 경원시하고 미워하고할 이유도없고 또 그럴 나이도 지났다.친구여 모든걸 훌훌털고 일어서라~그리고 앞을 직시하며 달려가라.모두 어깨동무하고 손에 손잡고..*^^*
댓글 아니달고 워데 갔당가? 부자집 아드님이 맞지요. 기병이 아버님은 당꼬쯔봉, 그러니까 밭때기나 붙치는 농사꾼은 평생 한번도 입어볼 수 없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그 쯔봉을 입으신걸로 기억이 되네요 안경도 쓰시고 양복을 입으신걸로 기억이 됩니다.
아버지는 군청 말단 공무원 특히 산림계에서 오래 일하신 것 같다. 그래서 목상을 부업으로 하게 된 것이고...
기병님 먼옛날 청소년기 3부까지 읽으면서 어느집 없이 딸이든 아들이든 맞이는 부모대행이란 사실과 부모님들께서 머리좋은 맏아드님을 학업에 열중토록 배려치 않은점이 서운하신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요즘부모처럼 그렇게 밀어주셨더라면 대한에 역사가 달라질뻔도 했겠습니다 누구나 그런 어려움 겪은 우리들이기에 오늘을 살고있겟지요 기병님 4탄에는 무슨사연이 실릴까 기대합니다.
하하 4탄요? 4탄은 없을 것입니다..부모님에 대한 서운한 생각, 전엔 그런 맘이 없었는데, 이상스럽게도 이제와서 더욱 그런 맘이 드는군요.. 제대 후에는 비교적 평탄한 직장 생할이었고..어딜 가나 비록 강원도 산골 공고 출신이지만, 모교의 이름에 먹칠은 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지요..
기병이 너무나 가슴 쓰라린 옛 이야기네...지나고 보면 아름다운 추억도 될수 있네그려...
언젠가 내가 하숙하거나 자취하는 애들이 부러웠다는 말을 했을 때, 너는 냉방에서 발발 떨며 자던 또 다른 어려움을 나에게 얘기해 주었었지...
별로 상쾌하지도 못한 나의 얘기를 읽고, 이렇게 따뜻한 댓글로 위로도 하고 격려도 해 준 친구들의 따뜻한 정에 새삼 고마움을 느끼며 감사하는 마음이다.. 실은 더 어려운 여건에 있었던 동창들이 많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 그런 친구들에 비하면 나야말로 철부지의 투정에 불과 할 뿐...다만 이렇게 얘기를 털어 놓음으로써 서로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