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세 개의 단락으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단락(15-18)은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야의 시신을 찾겠다고 요청하는 이야기.
두 번째 단락(19-22)은 엘리사가 여리고 마을의 수질을 정화시키는 이야기
세 번째 단락(23-25)은 엘리사가 자신을 모욕하는 어린아이들을 징계하는 이야기.
첫째 단락은 일종의 해프닝이었다. 우발적인 사건이었다.
두 번째 단락은 이적이야기이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이적이야기와 유사하다.
한번쯤 경험해보고 싶은 사건이다.
세 번째 단락은 어이없고 당혹스러운 이야기이다.
그럼, 이 세 단락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하나님은 본문을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먼저, 각 단락들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1) 첫째 단락(15-18)
지난주 본문에서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하늘로 올라갔다.
가끔 뉴스에서 미국 중서부 지역에서 강력한 토네이도가 물건이나 가축들을 일시적으로 공중 부양시키는 장면을 보셨을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다.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했다(11)
성경은 엘리야의 마지막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한다.
에녹의 경우와는 조금의 차이가 있다.
우리는 에녹이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해석한다(창 5:24)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갔다고 설명한다. 조금의 차이가 있다.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공동번역본)
일종의 실종사건이다.
어느 날 에녹이 갑자기 사라졌다. 아무리 찾아도 그를 찾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갔다고 해석한 것이다.
에녹 실종사건이다.
하지만 엘리야는 다르다. 엘리야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엘리야는 하늘로 올라갔다. 증인도 있다. 엘리사가 그 현장을 목격했다. 승천은 실종사건이 아니다.
엘리야는 공중부양정도가 아니라 승천했다.
이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한 제자 엘리사는 심히 안타까워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마지막을 목격했다.
그래서 자신의 겉옷을 찢었다(12)
유대인들은 심히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자신의 겉옷을 찢었다. 예를 들어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그리고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엘리야의 겉옷으로 요단강물을 쳤다.
강물이 갈라졌고 엘리사는 강 한가운데를 걸어서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에 도착했다.
오늘 본문이다.
이에 엘리야의 제자들이 엘리사를 엘리야의 후계자로 인정했다(15)
엘리사가 엘리야의 능력을 그대로 전수받았기 때문이다.
엘리야가 일으킨 이적을 엘리사도 똑같이 행했다.
8절과 14절 비교.
선지아의 제자들이 성령의 역사를 목격한 것이다. 제자들은 성령을 믿었다.
그런데 제자들이 황당한 요청을 했다.
사람들을 동원해서 엘리야의 시신을 수습하겠다는 것이다.
엘리사는 극구 말렸다.
하지만 이들이 계속 요청했다. 어쩔 수 없이 허락 했다.
"그들이 계속 졸라대는 바람에 얼굴을 붉히며 허락하였다"(17a, 공동번역본)
하지만 제자들의 엘리야 시신수습 작업은 실패했다.
50명의 인력을 동원해서 엘리야의 시신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17-18)
제자들이 엘리야의 승천 사실을 믿지 못했던 이유?
2) 둘째 단락(19-22)
엘리사가 여리고 체류 중이었다.
어느 날, 여리고 주민들이 엘리야를 찾아왔다.
여리고 마을 입지조건은 양호한데 수질이 부적합하다고 말하면서 수질을 정화할 방도를 알려달라고 요청(19)
임신이 안되고 유산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서는 물이 나빠서 자식을 낳을 수 없습니다"(19절, 공동번역본)
이에 엘리사는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오라고 주문했다.
그들이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오자, 엘리사가 그 그릇을 가지고 우물가로 가서 소금을 뿌리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이 물이 깨끗하게 되리라 앞으로 이 물로 인해 사람이 죽거나 유산하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공동번역본)
그러자 거짓말같이 수질이 정화되었다.
엘리사는 소금으로 수질을 정화했다.
상식적으로 과학적으로 이 과정이 이해되는가?
왜 하필 엘리사는 소금을 선택했을까? 소금으로 수질이 정화될까요?
3) 세 번째 단락
엘리사가 여리고를 떠나 벧엘로 가는 중이었다.
그 동네 아이들이 엘리사를 놀렸다.
"대머리여 꺼져라 대머리여 꺼져라"
철없는 아이들이 낯선 외부인의 외모를 가지고 엘리사에게 모욕감을 주었다.
이에 엘리사는 돌아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들을 저주했다. "엘리사가 뒤로 돌이켜"(24)
철없는 아이들이 엘리사의 뒷모습을 보면서 놀렸던 것이다.
그러자 갑자기 숲에서 곰 두 마리가 출현하여 아이 42명을 찢어 죽였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엘리사는 이스라엘 남쪽으로 내려갔다.
아주 황당하고 우리로 당혹스럽게 만드는 이야기이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사건이다.
어른을 놀렸다는 이유로 아이 42명이 죽다니?
우리는 이런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세 단락은 우리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야의 승천사실을 믿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 모두는 성령을 믿는 자들이다.
신학생들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엘리야의 승천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소금으로 수질을 정화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엘리사를 놀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이 42명이 몰살을 당했다는 성경 이야기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가 본문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자신의 이성과 상식으로 특정 대상과 현상을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해: 깨닫고 잘 알아 든는 것
이성? 생각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상식? 보통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알아야 할 사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이나 상식 수준에서 특정 대상과 현상을 이해한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다르다.
이해의 기준이 이성이나 상식뿐 아니라 그 수준을 넘어야 한다.
이성이나 상식을 무시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성도들도 이성이나 상식을 준수해야 한다. 하지만 그 수준에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왜?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이성과 상식 그 이상의 분이시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나 상식,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토대로 인하여 대상과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상식이 다르면 이해도 달라진다. 예) 일본인과 한국인의 음식 예절이 다르다.
면요리를 먹을 때 나는 소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본문의 이야기가 그렇다.
제자들이 엘리야의 승천을, 우리가 소금으로 수질이 정화된 사실을, 그리고 어른을 놀렸다는 이유로 아이들이 몰살 당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성과 상식을 토대로 사람이 승천한다는 사실 그리고 소금으로 수질을 정화했다는 사실을, 엘리사를 놀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이 42명이 몰살을 당했다는 성경 이야기를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자체가 우리의 이성과 상식밖에 계시기 때문이다.
존재방식이 우리와 다르다.
우리는 출생했지만 하나님은 출생하신 분이 아시시다. 본래부터 계셨던 분이시다.
출생이라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인간이 본래부터 계셨던 하나님을 이해할수 있을까?
그래서 그 분이 하시는 모든 일을 이해하기는 불가하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과도 같지 않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누구와도 같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이 세상 것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그분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한계 때문이요,
동시에 그 설명은 충분하지도 정확하지도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이 다다를 수 있는
한계 너머에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이성, 지식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초월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환경을 다스리는 주님이십니다. 우주적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가 절망하는 까닭은 이 주님을 온전히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주님을 신뢰할 때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일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님 뜻 안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노아가 소개된다. 6장부터 노이가 등장한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산 위에서 커다란 배를 만들기 시작했다.
바다가 아니고 산이다.
자신 혼자가 아니라 가족 전체가 산위에서 배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노아도 미쳤고, 그런 사람의 지시를 따르는 가족 전체가 미쳤다고 말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나 대상을 만났을 때 미쳤다고 표현한다.
그럼에도 노아는 그 미친 짓을 계속한다.
세상사람들이 노아의 사역을 이성과 상식으로 이해하려 했기에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신뢰하는 우리와 우리의 신앙 행위들을 이해할까요?
그래서 지금도 우리 뒤에서 우리를 향해 미친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앙생활은 미친 생활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노아처럼 이 미친 짓을 계속할 것이고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앞으로도 우리는 매일매일 이 미친 짓을 계속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과 상식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이 주님을 바라보고 신뢰함으로, 주님 안에서 그 풍성한 은혜를 받아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