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3년 다해 9월27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청주] 예수님에 대한 생각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하까 1, 15ㄴ - 2, 9
† 복음 : 루카 9, 18 - 22
빈첸시오 드 폴 성인은 1581년 프랑스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란치스코 수도원의 도움으로 공부한 그는 사제가 되어
파리에서 본당 사목자로 일했다. 빈첸시오 신부는 한때 여행 도중
해적들에게 잡혀 노예 생활을 하였다. 이 일로 말미암아 그는 고아와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고 자선
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660년에 선종한 그를 1737년 클레멘스
12세 교황이 시성하였고, 1885년 레오 13세 교황은 모든 자선 단체와
병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의 정신과 활동을 계승하려는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1833년 파리에서 설립되어 현재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 세계 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 주님께서는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예수아
대사제, 유배지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용기를 북돋우시며 성전
재건에 힘쓰라고 말씀하신다(제1독서).
★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요한 세례자나
엘리야 또는 옛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긴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구세주라고 고백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사람들은 요한 세례자나 엘리야, 또는 옛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곧 자신의 주변 인물 정도로밖에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만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그리스도’, 곧
구세주라고 고백합니다. 군중과 달리 베드로는 예수님을 삶의
중심으로 여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우리 삶의 주변 인물이 아니라 중심이라는 생각,
이것이 바로 신앙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흔히, 예수님께서
‘나’의 뜻에 따라 움직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는 예수님을 주변
인물로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우리 자신이 중심이고, 예수님께서는
이에 맞추어 움직여 주시는 존재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이며, 또한 정반대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중심이시고, 그 중심에 맞추어 우리가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는 주님께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저랬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청원과 함께 반드시 다음과 같은 기도를 덧붙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제 삶을 주관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중심이시며, 저는 그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제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 뜻대로 하소서.’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다 보면,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대로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중심이신
주님께서는 그 고난 뒤에 반드시 우리를 되살리실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예수님에 대한 생각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2013년 다해 9월27일 성 빈첸시오 드폴 사제 기념일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 루카 9,18-22
예수님에 대한 생각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옛
예언자 중의 한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여러 활동을 통해 하느님나라에 관해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침을 받은 것에 상응하는 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가9,20) 하고 고백했습니다.
‘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으신 이’ 라는 이 말은 이사야의 예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이사야61,1) 베드로의 고백은 완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
고백은 힘을 잃고 말 것입니다.
낚싯바늘만 있고 미끼가 없는 낚싯대, 아무리 낚싯바늘이 좋아도
고기가 물지 않습니다. 말만 있고 행동이 없으면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면 그에
걸 맞는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
앞에서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서있어야 합니다.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나의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나는 주님의 손에 들린 몽당연필입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수녀님은 연필을 잡은 주님 안에서 기뻐했습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무엇입니까? 나에게 있어서 주님은 도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다른 사람의 신앙을 고백하지 말고 내 신앙을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이사야53,4).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받은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이사야 53,3). ‘그는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이사 53,8). 그러나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이사53,11-12)
라고 선언한 이사야 예언의 말씀이 주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주님, 속죄의 제물이 되시고 부활의 기쁨으로 다시 오신
주님, 그분을 우리의 주님으로, 저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기쁨이 더욱
커지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성 빈첸시오 드 폴은 삶으로 주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성인은 한 때 여행 도중 해적들에게 잡혀 노예생활을
하였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그는 고아와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고 자선 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였습니다. 하나의 시련과 고통이 절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걷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고통은 은총의 다른 면입니다.
고통을 겪은 이가 고통을 받는 이를 도와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도와줄 수
있습니다. 성 빈첸시오 드 폴의 정신을 이어받는 평신도사도직
단체인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는 전 세계교회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회원들은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고 있습니다.
1860년에 네 권으로 된 [성빈첸시오 아 바울로 - 그의 생애와 시대
및 영향]을 쓴 메이나르에 의하면 빈첸시오는 신앙에 어긋나는
유혹이 날로 심해져 이 유혹에 빠질 듯하면 늘 ‘사도신경’을 베낀
종이 쪽지를 가슴 위에 얹고 그 위에 대며 믿음을 새로이 하였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그에게는 이 종이 쪽지가 믿음의 방패와 같은
것이어서 유혹에서 벗어나게 된 후에도 이 쪽지를 언제나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인은 기도했습니다. "오, 예수님, 이 몸을 당신의 사랑과 위대함에
사로잡힌 노예로 바치나이다. 그리고 제 생명과 신분과 영혼을
거룩하신 당신께 드리오며,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에게 능멸당하셨던
당신의 인생에 사로잡힌 노예가 되고, 당신의 은총으로 받은 이
생명과 저의 모든 행실을 당신께 바칠수 있게 하소서."
일상 안에서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내 할 일 다 하고 짬이 나서야 그분을 생각하는 처지가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도구삼아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먼저
감사하고, 다른 무엇에 앞서 주님의 거처를 마련했으면 좋겠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묵시21,3). 주님께서는 나의 삶의 자리에서 나를 찾고 계십니다.
내가 그분을 찾기 훨씬 전부터.....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지금 내 모습은 어떨까요?
어떤 화가가 최후의 만찬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모델들은 다 그렸는데 딱 한 사람, 유다를 그리기가 너무나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에 적합한 모델을 찾고자 했지요. 깊은 절망
속에 빠져 있는 유다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마침내
거리의 어느 구석에서 그런 사람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고, 너무나도 절망적인 모습의 노숙자였습니다. 머리는
길게 헝클어져 있고, 전혀 씻지를 않았는지 지저분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이 화가는 이 사람에게 웃으며 자기의 모델이 되어 주겠냐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에게 선금으로 얼마를 주면서, 만약
모델을 잘 해준다면 많은 돈을 주겠다는 약속까지 했지요. 이 둘은
다음 날 아침 화가의 작업실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이 사람은 정말로 오랜만에 돈을 만지게 되었지요.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거리의 노숙자로 사는 것보다 모델을 하면서 사는 것이 낫겠다 싶었지요.
그래서 첫 모델을 잘 해야겠다는 생각에, 우선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고 옷가게에 가서 옷을 새로 사 입었습니다. 이렇게 그는 말끔한
차림으로 화가의 작업실에 다음날 나타났습니다.
이 사람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화가는 화를 내면서 이 사람을
쫓아내며 말했지요.
“당장 나가시오. 누가 당신의 모습을 바꿔서 오라고 했소? 나는 당신의
원래 모습을 원했는데, 왜 그렇게 바꿔서 내 일을 망친단 말이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는 모습이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도 우리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비록 겉으로는 지저분하고 형편없어 보여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당신 앞에 나아오기를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있는 그대로의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제대로 된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겉으로만 그럴싸한
나를 만들려고 하면서 속은 온갖 죄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한
있는 그대로의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만족시켜주는
주님으로만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부르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때 제자들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의 한 분이라고 부른다고 말하지요. 군중들이
이렇게 말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단순히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기적만을 보려 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으로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 자신들을 편하게 해 줄 분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모습은 어떨까요? 온갖 위선으로 자신을 꾸미면서
주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위선을 말끔하게 씻어 버리고, 주님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베드로처럼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면서, 귀한 분으로 주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탐욕의 반대는 무욕이 아니라 만족이다. 당신이 큰 만족을 가졌다면
어떤 것을 소유하는지는 문제가 안 된다. 어떤 경우에도 당신은
변함없이 만족할 수 있다(달라이 라마).
오늘은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축일입니다. 축일 맞이하신 분..
축하해요.
정직합시다. 특히 주님께...
친구 사이인 두 사람이 동업으로 골동품 가게를 차렸습니다. 그런데
빨리 돈을 벌겠다는 욕심에 그만 모조품을 진품으로 속여 팔다가
탄로가 난 것입니다. 많은 벌금을 낸 것도 문제지만,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소문이 나서 장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둘은 의논했습니다.
한 친구가 말합니다.
“장사가 안 되는 것은 우리의 신용이 떨어져서 그런 거야. 따라서 우리
앞으로 10년 동안만 절대로 속여 팔지 말자. 딱 10년 동안만 정직하게
신용을 쌓으면 사람들이 믿어줄 거야. 바로 그때 한꺼번에 한탕하고
끝내자.”
10년을 내다보고 이 둘은 정말로 정직하게 장사를 했습니다. 10년째
되는 날, 이 둘은 다시 모여 예전에 약속했던 것처럼 한꺼번에 한탕
할 것인지를 의논했지요. 그런데 속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믿고 찾는 집이 되었고,
그래서 폭리를 취하지 않아도 돈이 벌리고 번성하는 가게가 된 것입니다.
두 사람은 말합니다.
“속이지 않아도 잘 되는데,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정직하게 살자.”
속일 것을 계획했던 사람. 그러나 정직으로 인해서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얼마나 많은 거짓 고백을
합니까? 그런데 정직하십시오. 거짓 고백을 하지 않을 때 더욱 더
주님의 사랑을 받는 내가 될 것입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예수님, 당신은 저에게 누구이십니까?
'그분께서 행복의 이유가 아니라면 그 신앙은 어긋난 것입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 다해 9월27일 연중 제 25주일 금요일 복음묵상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루카9,20)
---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내 마음 깊은 거기에 찾아와, 어느새
촛불 하나 이렇게 밝혀 놓으셨나요?
어느 별 어느 하늘이 이렇게 당신이 피워 놓으신 불처럼 밤이면
밤마다 이렇게 타오를 수 있나요?
언젠가 어느 곳에선가 한번은 본 듯한 얼굴, 가슴속에 항상 혼자
그려보던 그 모습,
단 한번 눈길에 부서진 내 영혼! 사랑이야 사랑이야 으으음.
---
바닷가 모래사장에 모닥불과 친구들.
힘 좋게 타들어가고 있는 장작들과 서럽도록 고운 빛깔의 불꽃에
눈을 주며 모두들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다.
밤하늘 그리고 별, 파도소리, 그리고 모래사장과 모닥불, 술병과
술잔 그리고 적당히 상기된 친구들의 얼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목놓아 불렀던 애창곡이었다.
30년 전 군부독재의 서슬 퍼렇던 시절,
시국의 아픔에 울분을 토하며 술잔을 기울이던 어느 밤, 어느 섬
바닷가의 풍경이다.
당시 세상 돌아가는 꼴에는 어울리지 않는 참 예쁜 가사를 담고
있는 노래이다.
첫 눈에 마음을 빼앗긴 어느 누군가를 생각하며 써내려 간 고백.
오십이 넘은 이 나이에도 그 아름다움은 소멸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을 제자들에게
던지신다.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노랫말처럼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고백의
대상은 아니었다.
갑자기 타올랐다 이내 꺼져버리는 그런 고백의 대상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가톨릭적인 분위기에서 자랐고, 성당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놀이터였다.
늘 듣는 이야기가 예수님 이야기고 성인들 이야기고 성모님 이야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예수님은 가족 같은 분이셨던 것 같다.
부모님들은 언제나 힘들거나 기쁠 때 예수님을 떠올리라고 가르치셨다.
그래서인지,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칭찬받고 싶은 일을 했을
때도 먼저 떠오르는 것은 예수님이었던 것 같다.
혼잣말을 들어주시는 분도 예수님이셨던 것 같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세뇌(?)가 된 예수님이었던 것 같다.
사실 그분 때문에 개인적 삶의 방향은 늘 폭이 넓지 않았다.
삶의 기준도 그분 때문에 늘 한 방향이었다.
그렇듯 늘 함께 하셨던 분이었다.
---
예수님, 당신은 저에게 누구이십니까?
베드로처럼 거창한 고백은 저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늘 그러셨던 것처럼, 내 삶 안에 당신은 계셨고,
제 삶의 이정표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보여드린 모습을 돌이켜보면, 세 번의 베드로의 배신은
배신도 아니었지요.
정말 등도 많이 보여드리고 말았네요.
주님,
저의 당신에 대한 고백은 이렇습니다.
당신은 제가 행복하기를 누구보다도 바라시는 분이시라고요.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2013년 다해 9월27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명확하게 답변을 하였습니다. ‘주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문득 저 자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권에는 저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혀있고, 여권 번호가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위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아무 지장 없게 통과하게 해 주시고, 필요한 모든 편의
및 보호를 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저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여권을
소지할 경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적혀있습니다. 대한민국은 경제규모가 세계 10위권에 들고, 스포츠,
문화, 역사, 과학에서도 국제사회에 위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 여권을 지니고 다니면 당당하게 통과할 수 있습니다.
저는 신앙인입니다.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뜻을 성모님께 전달하면서 구원의 역사에 등장하였습니다. 가브리엘은
소식전달자였고, 그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저 역시 저의 세례명처럼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사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믿고 있는
가톨릭 신앙은 역사가 2000년가량 되었고, 세계의 역사, 문화, 정치,
사상, 예술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이 세상에서 축복을
받고,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종교입니다.
현재 가톨릭 신앙인은 12억 명을 넘었습니다. 전 세계 인구의 17.5%가
가톨릭 신자입니다.
한 달 전쯤 한 자매님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와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세례명을 바꾸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사연은 자신이 주보성인으로
모시는 성인이 너무나 힘들고 어렵게 살았고,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자신도 삶이 힘들고, 어려운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즐겁고, 재미있게 살았던 성인으로, 예술 분야에서 성공한
성인으로 세례명을 바꾸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저는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함께 기도하고 생각해 보자고 했습니다. 한
달 정도 지난 지난주에 그 자매님이 저를 다시 찾아왔습니다. 저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님이
제게 말하는 겁니다. ‘저요, 세례명 바꾸지 않을래요.’ 그러면서 그동안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좋은 일도 많았었고, 주보성인의
삶을 따르기 보다는 세상의 명예와 자리를 너무 따라갔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앞으로 주보성인처럼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살겠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주변을 보니 다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었다고 말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십자가가 자신의 것보다
더 가볍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매님처럼 때로 우리의 십자가를 던져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굴레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럴 때 구상
시인의 ‘꽃자리’라는 시를 떠올립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 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우리들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 너의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지금 내가 지고 가는 그 십자가는 나를 구원의
강으로 건너게 해주는 고마운 다리가 될 것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말 못할 사정 많아 참고 속고 속이며
2013년 다해 9월27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말 못할 사정 많아 참고 속고 속이며
‘눈이며 코며 얼굴이 참 예쁘다’고 했더니 좋아하면서도 요상한 표정.
속으로, 눈 코 턱 볼 정형수술비 대느라 알바로 얼마나 고생했는데....
겉과 속이 달라 말 못할 사정 많아 참고 속고 속이며 사는 인생입니다.
신부님은 결혼 안했고 자식 없어 세상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모를 겁니다.
당신네들은 남편 있고 자식 있어서 사제의 독고 삶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데에 대한 주님의 답변도 상상 밖이었고요.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루카 9,22)”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구원받았습니까?
2013년 다해 9월27일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
복음 : 루카 9,18-22
< 구원받았습니까? >
유투브에 인라인 스케이트 대회 할 때 벌어졌던 재미있는 동영상이
하나 올라와 있습니다. 어디서 한 건지는 모르지만 콜롬비아 선수가
혼자 가장 앞선 상태로 결승점을 향해 질주합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니 다른 선수들은 매우 뒤쳐져 있었습니다. 콜롬비아 선수는
승리에 도취돼 손을 높이 들고 우승의 세리머니를 하였습니다. 그 때
한국 선수 하나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둘은 거의 비슷하게 결승선을 통과하였습니다. 콜롬비아 선수는
자신이 우승한 줄 알고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한국
선수가 마지막에 간신히 추월하여 우승한 것으로 판결이 났습니다.
자만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개신교 신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아보지 않았습니까?
저도 받아보았던 것 같은데 대답을 못하고 매우 망설였던 것
같습니다.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구원받았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은 이런 질문에 조금은 주저할 것입니다.
개신교 분들은 세례를 받고 또 구원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당연히
구원을 받은 것으로 확신해서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또 천주교
신자들이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다면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믿음이 없다고 판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 한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구원
받았다고 해서 다 똑같이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바오로가 셋째
하늘까지 올라간 사람을 알고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첫째 하늘까지
오른 사람도 있는 것이고 둘째 하늘까지, 혹은 넷째, 다섯째까지
있다면 그 위까지 오른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런 면에서라면
어떻게 구원을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매우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음을 증거해야 할 제자들에게 당신
정체에 대해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함구하십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러나 그 해답은 그들에게 당신이 누구인지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신 데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이 일이 완수되기 전까지는 당신의 정체를 말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완수하시지 않는다면 더 이상 그리스도가 아니신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지금 그리스도이시더라도 그리스도의 소명을
완수하지 않으면 온전한 그리스도가 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당신 소명을 완수하여 온전한 메시아, 온전한 구원자가 될
때까지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하지 말아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항상 ‘사람의 아들’이라고 지칭하시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로서의 당신의 소명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당신은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기보다는 사람의 아들로서의 겸손한 모습을
지키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사탄도 예수님을 유혹할 때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으로 시작합니다. 이미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고백하게 하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아직 당신 소명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당신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에서 하느님의 아들이 ‘되어가는’ 과정에 계셨던 것입니다.
사제서품을 받았다고, “난 사제야!”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나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며 온전한 사제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갓 사제가 된 사람과
사제 옷을 입고 관 속에 누워있는 사람과는 비록 같은 사제이지만
그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도 무언가 끊임없이 되어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우리 자신을 소개할 때는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지금 떳떳하게
‘나는 그리스도와 하나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 네비게이션으로 목적지를 찍고 차를 달리고 있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도착했습니까?”라고 물으면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목적지는 알지만 아직은 가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죽는 바로 그 순간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이미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는 것조차 어쩌면 조금은 교만함이 아닐까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열심히 걸어가시는 것처럼, 우리 또한
구원으로 걸어가는 도정에 있는 것입니다. 콜롬비아 선수처럼 1등
했다고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결승선까지는 아무 것도 정해 진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함구하라고 하신 것처럼, 구원받았다고
자신하기보다는 겸손하게 오늘 하루 더 완전한 구원을 향해 한 발짝 더
내딛는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