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놀라게 한 천재
신라 47대 헌안왕(憲安王) 원년인 857년, 6두품 집안에서 태어난 최치원은 세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해 열 살 때 사서삼경을 통달한 신동이었다. 그러나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6두품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신라 17관등 가운데 6등위에 해당하는 아찬 이상의 벼슬에는 오를 수 없었다.
때문에 아버지 최견일(崔肩逸)은 868년, 갓 12살이 된 최치원을 당나라로 유학 보냈는데, 이러한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최치원은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매달고 가시로 살을 찌르며, 남이 백을 하는 동안 천의 노력을 했다”는 기록을 남길 만큼 열심히 공부해 6년 만인 874년, 당나라가 외국인을 위해 실시하는 과거 시험인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합격했다.
열여덟 어린 나이에 출세길이 보장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최치원은 876년, 선주(宣州) 율수현(지금의 江蘇省 南京市) 현위(縣尉)로 관직에 올랐고 소금장수였던 황소(黃巢)가 장안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는 ‘황소의 난(875년~884년)’ 때는 사령관의 종사관으로 발탁돼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라는 글을 작성해 당나라 전역에 이름을 떨쳤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에 순응해 성공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슬러 패하는 법이다”로 시작하는 <토황소격문>은 “온 천하 사람들이 너를 죽이려 할 뿐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 의논했을 것”이라며 겁을 주기도 하고 “좋은 방책을 세워 잘못을 고치도록 하라”는 말로 회유하는 등 특유의 호소력으로 글을 읽은 황소는 걸상에서 떨어질 정도로 격렬하게 반응했고, 황소를 글로써 제압한 최치원은 단번에 명문장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렇게 중국에 17년 동안 머물며 당나라 역사서인 ‘당서(唐書)’에 열전(列傳)이 실리고, 당나라와 송나라 문인 100명의 작품을 모은 ‘당송백명가집(唐宋百名家集)’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릴 만큼 문명(文名)을 떨친 최치원은 884년, 조국인 신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 귀국길에 올랐다.
▶난세에 묻힌 꿈
당 희종이 신라왕에게 내리는 조서를 가지고 귀국한 최치원에게 헌강왕은 신라 조정에서 당에 올리는 표문을 비롯한 문서를 작성하는 직책인 ‘시독 겸 한림학사’라는 벼슬을 내렸다.
세계적인 지식인으로 성장한 최치원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인데, 안타깝게도 886년, 헌강왕이 승하한 뒤에는 외직(外職)으로 물러나 태산군(太山郡, 지금의 전라북도 태인), 천령군(天嶺郡,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 부성군(富城郡,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의 태수(太守)를 지냈다.
그러나 신라 개혁의 의지가 강했던 최치원은 894년, ‘시무 10조(時務十餘條: 급선무로 시행해야할 시국대책 10여 조항)’ 등 사회 개혁안을 건의하며 신라의 회생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는데, 중앙 귀족들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6두품의 한계와 저물어가는 시대에 발목이 잡힌 최치원은 불혹의 나이도 되기 전에 벼슬을 버린 채 경주 남산, 동래 해운대, 합천 해인사 등을 유람하며 글을 쓰고, 이름을 짓는 등 발자취를 남기다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끝으로 행적이 묘연해 지며 세상에서 사라졌다.
▶고려에서 꽃을 피운 시대를 앞선 사상가
은둔 생활로 마친 일생을 두고 신선으로 사라졌다는 설이 생길 만큼 최치원의 삶은 아쉬움을 남겼지만, 신라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그의 생각과 사상은 고려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유교를 기반으로 골품제도라는 신분제의 사회적 문제를 극복하려고 했던 최치원의 사상은 최승로(崔承老)에게 계승돼 고려의 국가 체제와 사회질서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유교ㆍ불교ㆍ도교의 가르침을 하나로 통합해서 조화시키는 ‘풍류도(風月道)’는 고려 시대의 유학과 불교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
당대에는 외로운 구름이라는 뜻의 ‘고운(孤雲)’을 호로 사용하며 뜻을 펼치지 못 했지만,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최치원의 명성은 이어지고 있으니 무릇 지식인이란 그와 같이 올곧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 하지 영원히 산다.
출처 : KBS 월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