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8세기에 작성된 寧海 載寧李氏 族稧案
내용 및 특징
이 자료는 17~18세기에 적성된 영해지역 재령이씨의 족계안이다. 이 계안은 계원들의 명단인 座目과 계원들이 지켜야할 규칙을 정한 完議로 구성되어 있다. 좌목에는 총 26명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들은 입향조인 이애의 6~7세손들과 사위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성씨인 사위 1명을 제외한 나머지 25명의 구성원들은 형제, 叔姪, 再從관계로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이들은 영해, 영양, 안동, 경주, 의성 등지에 흩어져 살았는데, 완의를 보면 친족간의 화합과 상부상조를 위한 본 계안을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족계의 성격을 가진 본 계안은 당시 영해를 중심으로 주변 고을의 명망있는 사족들과 혼인으로 인해 흩어진 친족들 사이의 상부상조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재령이씨가 영해에 입향한 것은 李璦(1480~1561)때 부터지만, 이들 가문이 재지사족으로서 기반을 굳힌 것은 손자인 李涵 부터이다. 이애는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자 李殷輔와 차자 李殷佐를 거치면서 분파 되었다. 李殷輔(1520~1580)는 2남 1녀를 두었으며, 李殷佐는 1남 2녀를 두었다. 이은좌의 아들 李濬이 僉正을 지냈고, 그의 아들 李時中이 무과에 급제함으로써 가세가 번창하게 되었다.(僉正公派) 이애의 장자인 이은보의 경우 그의 두 아들 李光玉과 李涵(1544~1632)대에 이르러 이광옥은 아들이 없어 대를 잇지 못하였지만, 이함이 5남 1녀를 두었다. 이후 그의 아들인 李時淸, 李時亨, 李時明, 李時成, 李時震 대부터 안동, 영해, 예안 등지의 명문가와 혼인을 맺으면서 영남의 명문가에 편입될 수 있었다. 또한 이들 형제로부터 영해파가 분파하게 되었다. 본 계안에 입록된 인물들은 대부분 이애의 6~8세손이 된다. 이들 중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李之炫, 李之煜, 李之煥, 李之熲, 李之炳 등은 이애의 7세손으로 淸溪 李時淸(1580~1616)의 증손이 된다. 이시청은 당시 영해지역의 유력가문인 務安朴氏 朴弘長(1558-1598)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조부 李莘逸(1598~1658)은 영양 주실(주곡리)에 입향한 漢陽趙氏, 壺隱 趙佺(1576-1632)의 딸과 혼인하였다. 부친 李楷는 東萊鄭氏 榮後의 딸과 결혼하여 이지현 등의 5형제를 두었다. 이지현(1639~1716)은 鶴峯 金誠一의 玄孫인 金燮의 딸 의성김씨와 혼인하였으며, 동생 이지욱의 장자인 李仁培(1664~1746)를 양자로 들였다. 生員이지욱(1641~1701)은 鵝洲申氏 漢老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한노는 梧峯 申之悌(1562~1624)의 증손이 된다. 현감을 역임한 이지환(1649~1725)은 丹陽申氏, 永川李氏, 蔚珍張氏와 혼인하였는데 자녀는 없다. 현감이지경(1652~1670)은 의성김씨와 혼인하였다. 통덕랑이지병(1658~1720)은 丹陽申氏와 혼인하였지만, 후사가 없기에 李之{火+雋}의 아들 李春培(1702~1784)를 양자로 들였다. 춘배는 大興白氏 履祥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백이상은 淡庵 白文寶(1303~1374)의 후손이다. 李之炯, 李之燦, 李之熽, 李之爀 또한 이애의 7세손으로 愚溪 李時亨의 증손이 된다. 이시형은 贈判書武毅公 朴毅長의 딸 務安朴氏와 결혼하여 李傅逸(1601~1641)과 李後逸(?~?)을 두었다. 이부일은 淸州鄭氏와의 사이에 4남 1녀를 두었는데, 장자인 李杓(1625~1710)은 晦齋의 曾孫인 李暾의 딸 驪州李氏와 혼인하여 이지형 등의 4형제를 두었다. 차자인 李柲(1634~1691)은 퇴계의 증손인 참봉李嶷의 딸 眞城李氏와 혼인하여 李之燧와 李之{火+龜}형제를 두었다. 계안에 기재된 이지귀(1669~1742)는 瓢隱 金是溫(1598∼1669)의 후손인 金三重의 딸 義城金氏와 혼인하였다. 이후일의 아들 李枅은 경주김씨와 혼인하여 1남 3녀를 두었는데, 사위인 漢陽趙德臨 역시 이 계안에 기재되어 있다. 석계 이시명의 손자이자, 李尙逸의 양자인 李檼(1657~1723)은 晦齋의 후손인 李垙의 딸 驪州李氏와 혼인하였다. 양 어머니는 西厓의 손자인 修巖 柳袗의 딸 豊山柳氏이다. 친부는 李隆逸이며, 친모는 近始齋 金垓의 증손인 金礎의 딸 光州金氏이다. 李檼은 3형제를 두었는데, 장자인 李之爚(1681~1706)은 瓢隱의 현손인 金之鐸의 딸 義城金氏와 혼인하여 李馨遠(1701~1778)을 두었다. 이형원은 武毅公의 후손인 朴宗相의 딸 務安朴氏와 혼인하였다. 이은의 둘째 동생인 李槾(1669~1734)은 처음 족계의 座目이 만들어진 후인 병자년에 추록되었다. 李之熤과 李之{木+隺}은 李時成의 증손이다. 이시성과 부인인 昌原黃氏 사이에 자식이 없어서 이시명의 아들인 存齋 李徽逸을 양자로 들였다. 그러나 이휘일 역시 부인인 무안박씨와 풍산김씨 사이에 후사가 없는 관계로 李玄逸의 아들 李檥(1648~1685)를 양자로 들였다. 李檥는 近始齋 金垓의 증손인 金礎의 딸 光山金氏와 혼인하여 이지익과 이지확을 낳았다. 李之熤(1666~1716)은 鳳城琴氏와 李之{木+隺}(1675~1718)은 安東權氏와 혼인하였다. 이러한 座目외에도 이 족계안의 성격을 알려주는 完議가 있어서 참고가 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각 계원들은 三婚과 四喪에 扶助를 하며, 吉禮에는 白米 5승, 乾大口 1미씩을 준비하여 주는데, 만약 자녀가 없는 계원은 본인이 원할시 2巡은 넘긴다. 初喪시에는 喪布 1필, 草席 2립, 條索 30파, 生麻 1근 8냥을 준다. 형제가 많은 계원은 상포와 생마를 각 계원의 것을 합하여 주며, 초석과 조삭은 2건을 준다. 장례시에는 백미 3승씩을 갖추어 주며, 四喪 미만의 계원이 원할시에는 상포 1필을 빌려준다. 길흉사에 계원들은 함께 모여 그 일이 마칠 때까지 있는다. 계원의 길흉사에 이유없이 불참할 때는 그 경중을 쫒아서 벌을 준다. 유사는 매년 춘추 講信때에 교체하며, 강신시 酒米 1승씩을 유사집에 거둬 보낸다. 盤果는 매번 계원 각자가 가져오되 다섯 그릇을 넘지 말며, 味數는 계에서 각 10말(斗)을 내는 것은 有司가 조처하여 마무리를 짓되, 五味를 넘지 말 일이다. 유사가 서로 바뀔 때에는 계에 남은 곡식과 물건을 종이에 적어서 傳與하며, 만일 유사를 그대로 할 시에는 교체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외에도 계원들이 규정된 약규를 어겼을 시에는 죄의 경중에 따라서 상중하로 나누어서 벌을 주고 있었다. 즉, 서로 부조하는 일을 성실히 하지 않거나, 유사가 자신의 일을 잘하지 못할 시에는 상벌로서 청주 한 동이와 과일 한 그릇을 내게 했으며, 아무 이유없이 계회나 길흉사에 빠졌을 때나 나이 많은 존장보다 먼저 나갔을 때에는 중벌로서 청주 한 병, 탁주 한 병, 건대구광역시 세 마리를 내도록 하였다. 하벌은 계회에 늦게 참석하거나, 좌중을 시끄럽게 하는 자로서 탁주 한 동이와 건대구광역시 두 마리를 내게 하고 있다. 이상의 완의를 살펴보면, 이들 계원은 매년 두 차례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면서 문중내의 각종 길흉사에 상부상조하기 위하여 본 계를 만들었으며, 계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도모하고 계의 운영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벌칙을 두고 있었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양반사족들이 친족들간의 相扶相助한 구체적인 사례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영해의 입향조인 이애는 아버지인 覲齋 李孟賢(1436~1487)을 여의고, 16세에 숙부 李仲賢이 영해부사로 부임할 때 따라와 영해의 大姓인 眞寶白氏와 혼인하여 그곳에 살았다. 1515년 무과에 급제하여 무안현감, 함창현감, 울진현령을 거쳐 경주판관을 역임하였고, 1560년에 통정의 품계를 받았다. 이애의 아들 李殷輔(1520~1580)는 門蔭으로 충무위 부사직을 지냈고, 그의 아들 李涵(1554~1632)에 이르러 마침내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영남사림의 본거지인 안동지방과 관계를 맺으면서 재지사족으로서의 기반을 굳혀 나갔다. 이함은 퇴계의 족손인 이희안의 딸 眞城李氏와 혼인하였다. 이함은 李時淸, 李時亨, 李時明, 李時成, 李時震의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로부터 淸溪公派, 愚溪公派, 石溪公派, 護軍公派, 通政公派로 분파되며, 영해·안동·예안 지방의 명문인 務安朴氏, 眞城李氏, 光山金氏, 安東張氏와의 혼인을 통해 영남의 주요 가문으로 편입될 수 있는 기반을 이루었다. 장자인 청계 이시청(1580-1616)은 朴弘長(1558-1598)의 딸과 2자인 우계 이시형(1586-1612)은 武毅公 朴毅長(1555-1615)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영해의 명문가인 무안박씨와 결합하게 되었다. 3자인 석계 이시명(1590-1674)은 1636년에 영양현水山(수비면)에 들어갔다가 후일에 안동부대명동으로 이거하였다. 그는 첫째부인인 光山金氏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고, 둘째부인인 安東張氏와의 사이에서 6남 2녀를 두었다. 첫째부인 김씨는 칠군자 마을로 명성이 높은 광산김씨 예안파의 후예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명성이 높았던 近始齋 金垓(1555-1593)의 딸이다. 둘째부인 장씨는 학봉 김성일의 뒤를 이어 퇴계학맥의 적통을 이어받은 敬堂 張興孝(1564-1634)의 딸이다. 일곱 아들은 李尙逸, 李徽逸, 李玄逸, 李嵩逸, 李靖逸, 李隆逸, 李雲逸로 모두 經學과 文章이 출중하였다. 그 중에서도 이휘일, 이현일, 이숭일은 학자로서 명성을 날렸으며, 이시명을 비롯하여, 이상일·이휘일·이현일·이숭일 형제와 이현일의 셋째 아들 李栽와 이융일의 아들 李槾을 七山林이라 불렀다. 4자인 이시성(1594-1682)은 황사우의 현손인 黃大仁의 딸 창원황씨와 혼인하였는데, 창원황씨는 봉화, 순흥일대의 巨姓이었다. 하지만, 아들이 없어서 이시명의 2자인 존재 이휘일을 양자로 들였다. 5자인 이시진(1609-1669)은 金埄의 딸인 의성김씨와 혼인하였다. 그의 아들 李德生(1636-1707)이 통정대부에 加資됨으로써 이시진이 통정공파의 派祖가 되었다.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7.
『載寧李氏寧海派譜』, 載寧李氏寧海派宗中, 大譜社, 2006.
『嶺南士林派의 形成』, 李樹健, 嶺南大學校出版部, 1979.
『密菴 李栽 硏究』,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嶺南大學校出版部, 2001.
이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