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우문사로와 을지근오
우문사로가 을지근오 보다 세 살이 많은 형이다.
아버지는 한 분인데 어머니가 다른 이복형제 異腹兄弟 간이다.
그런데 아직 어린 두 형제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만나기만 하면 싸운다.
어릴 적에는 장난감이나, 이쁜 망아지를 보면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곤 하더니,
나이가 들어, 을지 근오가 열 살이 되자, 둘 사이의 관계는 더욱 심각하게 변하였다.
세 살이란 나이 차이로 인하여 우문 사로가 힘은 월등 越等하다.
을지 근오의 체격도 또래에 비하면 큰 편인데, ‘오뉴월 하룻볕이 무섭다’란 말처럼 힘으로는
세 살이란 나이 차이를 극복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을지근오는 잔꾀로서 형을 골탕 먹이기 일쑤였다.
얼마 전, 우문사로의 자랑거리인 범털이 강아지 세 마리를 낳았다.
강아지 중에 두 마리는 검은 눈동자 주변의 흰자위가 선명하다.
이제, 늑대의 혈통보다 일반 유목민의 목양견 牧羊犬 강아지가 된 것이다.
오래전부터 범털의 강아지를 탐내던 을지근오는 우문사로가 사냥을 나가,
게르를 비운 사이에 강아지 세 마리를 모두 가져가 버렸다.
사냥에서 돌아온 우문사로는 대노 大怒하였다.
아침저녁으로 쓰다듬고 어르며 애지중지 愛之重之하게 키운 강아지 3마리가 갑자기 모두 사라진 것이다.
범인은 쉽게 특정 特定 할 수 있었다.
보름 전부터 을지근오가 강아지를 탐낸다는 것을 우문사로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아버지가 막북무쌍과의 격투기 때 위기를 맞았었는데 그때, 범털이 막북무쌍에게 달려들어 아버지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다는 범털의 영리함과 용맹성에 반한 을지 근오는 범털이 낳은 그 강아지를 갖고 싶었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을지근오는 ‘형’인 우문사로에게
“강아지를 한 마리 달라”는 부탁은 결단코 하지 않았다.
그걸 눈치챈 우문사로 역시, 강아지 중 한 마리 정도는 기꺼이 줄 수도 있었지만,
을지근오의 싸가지 없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무시하고 모른체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마리도 아니고 세 마리를 몽땅 다 가져가 버리다니,
을지근오의 대범함에 우문사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사로는 탄력 좋은 등나무로 만든 봉을 들고, 을지근오를 찾아 나섰다.
이번에야말로 버릇을 톡톡히 고쳐줄 요량이었다.
형을 형 대접 제대로 하지 않고, 귀를 거슬리게 만드는 늘 빈정대는 듯한 싸가지 없는 말투와
나쁜 손버릇을 이번 기회에 단단히 교육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 묵황 야차의 게르로 가보니, 근위병 두 명이 출입구를 지키고 있었으나,
큰 왕자인 우문사로는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간다.
을지 근오의 침상 안쪽을 훑어보니, 구석에 처음 보는 누렇게 낡은 양가죽 포대가 보여 들춰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누른 강아지 세 마리가 들어 있었다.
잃어버렸던 강아지는 찾았으니, 이제는 도둑놈을 찾아서 버릇을 고쳐줘야 한다.
없어진 강아지를 찾았다는 안도감 安堵感보다, 강아지를 훔쳐 간 도둑놈이 괘씸하기 짝이 없다.
“이 녀석이”라며 혼잣말로 뇌까리며, 다시 등나무 봉 자루를 고쳐 쥐고는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니,
박인후가 또래 동무들과 놀고 있었다.
박인후는 박지형의 아들이다. 박안개의 동생이다.
“인후야, 혹시 근오 보지 않았냐?”
“조금 전까지도 같이 있었는데 활 차고 말을 타고 저쪽으로 갔다”라고 하면서 손가락으로
근오가 간 방향을 가리켰다.
분명, 동네 어귀에 있는 활터로 활쏘기 연습을 하러 간 것으로 여겨진다.
우문사로는 자신의 게르로 다시 돌아와, 등나무 막대기를 챙겨 말 안장에 찔러 넣은 후,
말을 타고 활터로 달려갔다.
그러나 저녁 무렵의 활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인들은 게르 안에서 저녁 식사 준비하기에 바쁘고, 방목되어 흩어져서 풀을 뜯던 가축들이 해 질 무렵에
게르로 되돌아오는데, 남자들은 노소 老少 분간 없이 초원의 모든 이들이 그때, 말과 양들을 종별 種別로
분류 점검하며 그 수를 헤아리고 있었다.
그러니 그 시간대에 활쏘기 연습하는 자가 있을 리 만무하다.
허탈하게 말머리를 돌려 다시 근오의 게르로 들어가, 강아지가 들어있는 낡은 양가죽 포대를
조심스럽게 안고 밖으로 나왔다.
그때 을지근오가 어디선가 튀어나오더니
“왜 내 강아지를 훔쳐가냐”며 막대기를 들고 길을 막아선다.
화가 치민 우문사로는 강아지가 들은 가죽 주머니를 얼른 땅에 내려놓고는
“그렇지 않아도 네 녀석을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이놈이 적반하장 賊反荷杖도 유수 有分數지 어딜,
형님 강아지를 몰래 훔쳐 가서 도리어 주인행세를 하려고 하냐?”
큰 소리로 호통치며 봉을 들고 을지근오를 때리기 시작하였다.
을지근오도 가만히 있지 않고 막대기를 들고 대항하였다.
둘 다 같은 다물 多勿 타봉술을 사용하며 같은 초식을 펼치지만, 무술 수련도 修鍊度가 높고,
키가 크고 힘이 센 사로가 월등히 우세하다.
더구나 우문사로는 봉을 들고 싸우고 있으나, 간간이 검술 초식을 섞어 가격하고 있었다.
그러자 아직 검법을 배운 적이 없었던 을지근오는 당황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체격과 완력, 봉술 초식까지 모든 면이 월등히 우월한 우문사로가 근오를 몰아세우더니,
몇 차례 근오의 팔과 다리 이곳저곳을 가격하였다.
근오도 나름 신속히 피하고 막으며 열심히 싸웠으나, 역시 역부족이다.
을지 근오의 위기 상황이다.
그때 우문청아가 마침 그곳으로 오다가 그 광경을 보았다.
형제간에 봉을 들고 대결하는 모습이 보통 아이들이 하는 봉술 연습이나 일반적인 무술 대련 對鍊이 아니라,
둘의 굳은 표정과 날카로운 눈빛, 사용하는 매서운 봉술 초식들이 진검 眞劍을 들고
생사 生死를 건 결투처럼 무시무시하였다.
서로가 독살 毒殺스러운 살기 殺氣스린 초식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마구 내뿜고 있었다.
이런 살기 어린 대결은 일반 아이들의 무술 수련과는 차원이 달랐다.
위험하고 살벌 殺伐하기 짝이 없다.
“너희들 무엇하는 짓이냐?”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우문청아가 크게 소리를 지른다.
그 순간 사로가 휘두른 막대기가 ‘평사작화 平射作花’란 검법 초식을 사용하여,
근오의 어깨 아래 왼 팔뚝을 스쳐 지나간다.
그러자 근오는 즉시 그 자리에 넘어지면서 들고 있던 봉을 놓아 버리고 팔뚝을 감싸 쥔다.
얼른 보기에는 큰 타격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검술을 모르는 어린 동생을 상대로 고난도의 위험스러운 검법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는 화가 치민
우문청아가 오른손으로 낚아 가로채기 수법을 능란 能爛하게 발휘하여, 재빠르게 사로의 봉을 빼앗아,
막대기의 주인인 큰아들을 때리기 시작하였다.
“이놈이 동생을 함부로 때리고 있네”
어깨와 등을 번갈아 가며 3대나 맞은 우문사로는 억울하다.
막대기에 맞은 얼얼한 등짝보다 속마음이 더 쓰리고 아프다.
“어머니 저놈이 범털 새끼를 훔쳐 갔어요”
“뭐라고?”
“저기 양 가죽 포대를 열어봐요, 강아지들이 있어요”
우문청아가 땅에 있던 가죽 포대를 들추어 보니 과연, 누른 강아지 세 마리가 서로 얼굴을 묻고는
‘낑낑’거리고 있었다.
우문청아는 을지근오를 바라보며 엄히 묻는다.
“근오, 너 범털 강아지를 가져온 게냐?”
“아니요”
“그럼, 이 강아지들은 어디서 났니?”
“큰어머니, 옆 동네 동무가 준 강아지예요”
“어머니 그놈 말을 믿지 마세요”
“믿고 안 믿고 말할 필요 없이, 확인해 보면 되잖아!”
언제부터인지, 을지근오는 우문사로를 보고는 ‘형’이라는 호칭은 아예 생략하고, 주어 主語와 목적어 目的語만
사용하여, 대화 내용을 최대한 축약 縮約시켜, 꼭 필요한 요점만 간결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그런 버르장머리 없는 대화술 對話術을 사용하는 근오를 사로는 더욱 괘씸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당당한 을지근오의 말대꾸에 우문청아는 다시, 낡은 포대 속의 강아지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크기나 누런 색깔은 같은데, 범털 새끼인지 확실치는 않아 보였다.
그러자 강아지를 잃어버리고 어머니에게 억울하게 매까지 맞은 울분을 못 참고 뒤에서 씩씩대던, 우문사로가
어머니로부터 빼앗다시피 가죽 주머니를 가로채어 강아지를 낡은 포대에서 한 마리씩 끄집어내었다.
그렇게 밝은 곳에서 강아지들을 다시 살펴보던 우문사로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진다.
분노로 가득 차 힘이 들어가 있던, 샛별처럼 초롱초롱하게 빛나던 눈동자가 갑자기 초점을 잃어버리고,
한낮의 천공 天空에 걸려있는 하현 下弦달 마냥, 빛을 잃고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어, 어” 하더니,
뒤이어 나직이 혼자 말처럼 중얼거린다.
“아니, 애들은 범털 새끼가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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