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야밀면' 2대 김창구씨
- "구포국수에 견줘 밀가루로 쫄깃한 냉면을 만들 수 없을까 고민하다 만들어"
■짧은 기간 부산 입맛 사로잡은 향토음식
부산 밀면은 신맛 단맛 매운맛이 어우러져 향토 음식으로 자리잡았다. | |
밀면의 유래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전통적으로 경상도 지방에서 바지락 육수를 이용해 만든 밀국수 냉면이 육수를 사골이나 육류로 바꿔 변형됐다거나 밀막국수가 한국전쟁 이후 밀면으로 명칭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밀면의 육수나 고명의 식재료, 맛, 먹는 시기 등이 '동국세시기' 기록처럼 밀을 갈아 소금으로 반죽해 만든 밀막국수와 유사하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한국전쟁 통에 부산으로 피란온 이북 사람들이 냉면을 부산 실정에 맞게 개조해 만들었다는 게 정설이다. 1·4 후퇴로 함경도 흥남 내호에서 냉면집을 하던 친정어머니와 함께 피란온 정한금(작고) 씨가 1952년 부산 남구 우암동에 '내호냉면'이란 가게를 열면서부터 밀면의 역사가 시작됐다. 고향의 맛을 그리워 하며 냉면을 먹고 싶었지만 전쟁통이라 냉면의 주재료인 메밀(평양냉면)과 고구마 전분(함흥냉면) 물량이 달렸다. 정 씨는 구호품인 밀가루를 함흥식 반죽에 섞어 밀냉면을 만들었다. 경상도 사람들이 질긴 함흥냉면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도 밀면을 만들게 된 동기다. 당시 부산 사람들은 부드러운 구포국수를 좋아해 냉면 먹기를 부담스러워 했다. 반응은 꽤 괜찮았다. 이가 시원찮은 노인들도 국수처럼 후루룩 먹을 수 있는 밀면을 먹으러 이곳을 찾아왔다.
사진은 비빔밀면. | |
1969년 부산진구 동의대 인근 '가야밀면'이 100% 밀가루로 면을 만들면서 오늘날과 같은 밀면이 탄생했다. 가야밀면 주인 김봉만(75) 최말순(70) 부부는 이곳에서 자장면도 팔고 냉면도 팔았지만 장사는 영 시원찮았단다. 구포국수에 견줘 밀가루로 쫄깃한 냉면을 만들 수 없을까 고민한 결과가 밀면이다. 김 씨 부부를 도와 식당을 운영하는 아들 창구(48) 씨는 "1980년대까지 어머니께서 일일이 반죽을 손으로 만드셨다"며 "지금은 주문량도 많고 기계도 발달해 국수를 기계로 뽑고 있다"고 말했다. 처음 한 그릇에 70원이던 밀면값은 1년에 한 번씩 오르다 이제는 4000원이다. 가야밀면의 맛은 역시 며느리에게도 제조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일급비밀' 육수에 있다. 1970년대부터 돼지뼈와 한약재를 넣어 만들었다. '건강식'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고기 한 점 먹기 힘들었던 서민들이 몰렸다. 사실 가야밀면은 지점이 한 곳도 없지만 시내 곳곳에는 이 상호를 딴 밀면집이 많다. 주인 김 씨는 왜 지점을 만들지 않았을까. 이름만 내건 지점을 여러 곳 만들다 보면 제대로 된 밀면맛을 연출해낼 수 없을 것이라는 장인정신 때문이란다.
■빨리 먹을 수 있어 부산 사람에 잘 맞아
문득 칼국수의 재료도 밀가루인데 왜 밀면과 맛이 다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반죽을 해서 그냥 썰어내는 칼국수와 달리 밀면은 좀더 정밀한 과정을 거친다. 면발의 쫄깃한 질감을 살리기 위해선 소금, 반죽, 반죽 시간, 면의 삶는 속도와 헹구는 냉수 온도가 중요하다. 면발을 뽑아 끓는 물에 넣어 삶아 내고 이것을 건져 냉수에 여러 번 씻는다. 냉수로 씻는 작업은 전분의 점성을 없애 면발을 질기고 쫄깃하게 만든다. 이렇게 씻은 면을 냉각기에 잠시 넣었다 꺼내면 밀면이 완성된다.
부산시는 2001년 밀면을 부산 향토음식으로 선정했다. 100년도 안 된 밀면이 부산 사람의 입맛을 사로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부산시의 의뢰로 '밀면에 관한 연구' 자료를 낸 김상애 전 신라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부산은 여름에 더울뿐 아니라 바다를 끼고 있어 습한 기운이 많다. 이에 따라 부산 사람들은 시원한 면류를 즐겨 먹게 됐다"며 "타지역 사람들은 냉면 하나면 만족하겠지만 부산 사람들은 냉면 밀면 등 다양한 면류를 찾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밀면이 성격 급한 부산 사람들의 성향과도 잘 맞는다고 덧붙였다. 밀면의 조리가 면을 뽑아 육수에 넣기만 하면 돼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질긴 냉면과 달리 한 두 젓가락이면 후다닥 먹어치울 수 있다는 것이다. 김 전 교수는 "냉면이 고급 식재료로 만들었다면 밀면은 저렴한 밀가루를 재료로 만든 서민의 음식"이라며 "쇠뼈, 돼지뼈나 한약재, 채소류 등 육수 맛에 따라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밀면이 전국구 음식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게 스토리텔링이다. 한국전쟁 기간 만들어진 서민의 음식이지만 꼼장어처럼 추억의 음식으로 회자되진 않는다. 부산시가 향토 음식으로 지정했지만 관광객을 끌어들이려는 모습도 보기 힘들고 업주들도 노력하는 모습이 덜한 게 사실이다.
매운 음식이라고 외국인 관광객들이 먹지 않기 때문일까. 지난해 9월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페스티벌'에 참가해 부산 향토음식으로 밀면을 내놨던 문화요리학원 이경희 원장의 경험은 달랐다. 이 원장은 "처음엔 맵고 신맛의 자극적인 밀면을 일본인들이 먹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부산 음식을 알린다는 차원에서 메뉴에 넣었다"며 "육수가 시원한 물밀면에 매콤한 비빔밀면까지 하루에 500그릇이 판매되는 것을 보고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 밀면, 냉면과 어떻게 다를까
- 100% 밀가루로 압착시켜 만든 면
- 신맛 단맛 매운맛 은근히 어우러져
하지만 밀면과 냉면 모두 주문 받는 즉시 반죽의 일정량을 틀에 넣어 면발을 뽑고 끓는 물에 삶아내는 공정을 거치는 '압착면'이라는 점이 같다. 냉면과 다른 밀면만의 맛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냉면이 매콤한 맛이 주를 이룬다면 밀면은 신맛 단맛 매운맛 등 3가지가 은근히 조화를 이룬다. 밀면의 단맛은 꿀을 타거나 설탕, 물엿 등을 넣어 육수를 만들기 때문이다. 신맛은 고명 재료인 무김치, 무초절임, 무생채 등에 묻어나는 식초에서 나온다.
밀면은 맛도 좋지만 영양학적으로도 냉면에 뒤지지 않는다. 밀면 1인분(면·다대기·고명 450g, 육수 250g)의 열량은 569㎉에 불과하다. 단백질은 27.3g, 칼슘 71㎎, 철분 2.9㎎ 등으로 필수아미노산 함량도 손색이 없다. 쑥 한약재 등 다양한 식재료를 넣어 육수를 만드는 업소가 많아 웰빙 식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고명으로 이용되는 편육은 주로 돼지고기 편육이고 닭고기 채를 얹어주는 집도 있다.
부산 밀면집의 공통점은 역시 납작하고 얄팍하게 썰어내는 무김치다. 무에 설탕 소금 식초 마늘 생강과 고운 고춧가루를 넣고 무쳐 숙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