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철이 와도 안 돼”
필자가 동네 어른들이 느티나무 밑에서 바둑
두는 모습을 어깨 너머로 넘겨다보던 1970년
대 초, 해결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바둑일 때
어른들 입에서 자주 새어 나오던 말이다.
그만큼 조남철 선생이 독보적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었다.
선친은 조남철 선생 나이 14세 때, 일본 ‘기타
니 문하생(1937년)’으로 입문케 하여 정식으로 바
둑 유학을 보냈다.
선생은 조선인의 신분으로 온갖 고초를 다 겪
으면서 부친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배워 나가
1941년 일본기원에서 정식으로 입단했다.
1944년에 귀국하여, 해방을 맞아 한국 최초로
한성기원을 설립(1945년)한 선생은, 후진 양성에
기틀을 다지게 되는데 그것이 현대바둑 보급의
시초가 된다.
1950년 프로 기사 단위 제도를 확립하여, 이것
을 계기로 1955년 한국기원이 창립되었다.
오늘날 전문 직업으로 자리 잡은 프로제도, 대
학에 바둑학과가 생기게 된 것, 바둑 TV의 활성
화, 한국 바둑이 세계 정상에 우뚝 설수 있었던
것 등은 조남철 선생이 이루어 놓은 큰 업적이
아닐 수 없다.
통산 30회 우승했으며 14번이나 준우승했다.
조남철 9단의 주요 저서로는, [위기 개론],
[바둑 첫걸음], [바둑에 살다] 등 26권.

[바둑에 살다]에는, 1962년 당시 6살이던 ‘한국
의 바둑신동’ 조카 조치훈을 일본으로 유학을 보
내는데 그 기념대국으로 임해봉 5단에게 5점을
놓고 이긴 사진이 실려 있다.

임해봉 5단 대 조치훈 바둑신동 5점 지도기(1962년
당시 6세) 가운데는 조상연 형이고 조남철 선생.
오늘날의 조치훈 9단이 있기까지는 조남철 9단
의 헌신이 따른 결과이리라.
한국 바둑발전을 위해 노고를 인정받은 조남철
선생은, 1989년 한국 프로기사로서는 최초로 정
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고, 타계(2006
년. 84세) 후에는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은관문화훈장을 수여받는 조남철 선생님.
좌측 뒤에 故 김수영 사범님, 가운데 사이 김인 사범님,
오른쪽 뒤에 故 강철민 사범님 모습이 보인다.
한국 현대 바둑의 개척자이며 대부였음이 틀림없다.
더욱 계승발전 시켜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히는
일은 이제 후손들의 몫이다.
한국 바둑계에 큰 족적을 남긴 조남철 국수는, 1
923년 서해안의 황금어장인 줄포만(전북 부안군)
에서 태어났다.

조남철 선생의 생가.
선생의 生家 앞에 서니 1980년대 공영 TV 방송
에 출연하여 “바둑은 모냥(모양)이 좋아야 한다”
고 역설하시던 모습이 섬광처럼 떠오른다.

세상이 계속 변하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자연
적으로 도태되기 마련인 시대라지만, 차분한 어
조로 말씀하신 그 말은 참으로 진리다.
그 감칠 맛 나는 해설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지만
좋은 말씀은 자기도 모르게 밑줄을 긋게 한다.
누구도 할 수 없었던 것을 해내는 것은 용기다.
심장을 두드리는 선생의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