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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고린도전서 9장 24절로 27절 말씀 설교자 / 조한우 목사
믿음의 경주
어제 우리 김지영 선생님의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제가 반주를 시켜서 처음에는 한 손으로 소프라노와 알토로만 반주를 했었는데, 이제는 양손으로 찬송가를 4부로 얼마나 연주를 잘 하는지 몰라요.
하여튼 우리 김지영 선생님은 우리 칠정교회에서는 최고의 교회 반주자이며 단 한명 밖에 없는 주일학교 선생님이고, 우리 교회에 유일한 청년입니다.
진주에 있는 경상대학교를 다니다가 그만 두고 서울 사이버 대학교에 편입을 해서 다니면서 면사무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기 동생 학비도 보태고 자기 학비도 벌어가면서 그렇게 어렵게 공부를 하더니 드디어 어제 졸업을 했습니다.
제가 너무나 대견스럽고 기뻐서 서울까지 직접 조 집사님과 김지영 선생을 태우고 졸업식에 다녀왔습니다.
사회복지사 1급 시험도 3월 달에 발표가 나겠습니다마는 합격을 할 것으로 믿고 있고, 졸업을 하루 앞두고서 원지에 있는 민들레 어린이 집에 보육교사로 취직이 되어서 내일부터 출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교회 일꾼이기 때문에 취직을 해서 어디 다른 곳으로 가게 되면 어쩌나 싶어서 얼마나 고심을 하면서 기도를 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까운 곳에 직장을 주셔서 교회를 섬기게 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제 졸업생이 1500명이라는데 막상 졸업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5, 6백 명 정도 밖에는 안 되는 것 같더라고요.
아무리 바빠도 졸업식에는 참석을 할 것 같은데 얼핏 보기에 3분의 2정도는 그 자리에 참석을 못한 것 같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어제 졸업식에 가서 보니까 서울대학교 성악과 교수가 축가를 부르고 EU(유럽공동체 연합) 대사가 축사를 하고 정말 대단하던데, 그 영광의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일반 학교처럼 출석 수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동영상으로 강의를 들으면서 학점을 이수해야 하기 때문에 이게 보통 결심 가지고는 하기 어려운 거예요.
어떤 사람은 자기 친구에게 대신 강의를 들어 달라고 하고요, 심지어는 친구에게 대신 시험을 쳐 달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몇 년동안 시간은 흘러서 사이버 상에서 출석도 한 것으로 되어있고, 시험도 치룬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정작 자기 실력은 하나도 늘은 것이 없는 거예요.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 각종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는 여러 기회들도 다 놓쳐 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남들은 학사모를 쓰고 캠퍼스에서 사진을 찍으며 기뻐하고 있는데, 정작 열심히 학교 생활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 참석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얼마나 뻘쭘(사투리?)하겠어요?
자격증도 못 땄죠? 취직도 못 했죠? 그러니까 그 자리에 못 오는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미 4년 과정을 다 마쳤고 등록금도 다 냈습니다.
졸업생으로서의 자격이 다 있어요.
그러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해서 참석을 못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말씀하는 경주자들과 상 받는 자에 대한 비유의 말씀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경주자들은 상을 받기 위해서 달리는 겁니다.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경기장에서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이미 상은 누구에게나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경주에 참가하기만 해도 다 상이 주어지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왜 상을 못 받을까요?
자기 스스로가 떳떳하지 못해서 상을 못 받는 거예요.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 고린도 지역에서는 오늘날의 올림픽과 비슷한 이스미안(Isthmian) 경기가 2년에 한 번씩 열렸었다고 합니다.
이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일 년 내내 이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서 땀을 흘리면서 훈련을 하게 됩니다.
아주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 되고요, 때로는 적절한 체중을 유지하기 위해서 밥을 굶어야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은 오직 한 가지 목표를 위해서 모든 것을 참고 또 참습니다.
그 목표가 뭐예요?
이기기 위하여! 그리고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을 받기 위해서!
그 한 가지 목표를 위해서 모든 고통을 다 참고 견디는 겁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순간에 머리에 월계관을 쓰게 되면 그 영광은 말할 수 없이 크고 기쁜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 지상주의에 사로잡혀 있어요.
교회 안에서도 성공, 성공, 성공…, 온통 성공에 모든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데요, 신앙은 성공이 목표가 아니고 승리가 목표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경주 가운데에는 여럿이 어울려서 하는 경기도 있지만 자기 혼자 하는 경기도 있습니다.
남을 때려 눕혀야 자기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경기가 있어요.
역도 선수나 창던지기 하는 선수들이나,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김연아 선수처럼 피겨 스케이팅 선수들은 누구랑 싸우는 게 아니잖아요?
자기 혼자 부단히 노력을 하고, 실력을 쌓고, 게을러지려는 자신을 스스로 쳐서 복종케 만드는 겁니다.
이러한 노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목표가 분명한 사람만이 해 낼 수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까, 여러 경기 종목 중에 두 가지를 예를 들고 있죠?
마라톤과 권투입니다.
그 중에 현대 올림픽의 꽃이라고 불리는 마라톤을 생각해 보세요!
마라톤 구간의 거리가 얼마죠? - 42.195km
100리가 넘는 거리를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 같은 속도로 달리는 거예요.
인간이 달릴 수 있는 마라톤 최고 기록은 1시간 58분대라고 하는데, 적어도 백리가 넘는 거리를 두 시간 안에 달려야 우승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마라톤을 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습니다마는 달리는 동안 고통이 대단합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요, 다리는 감각이 없어지는 것 같고요, 눈앞이 빙빙 돌면서 현기증이 일어납니다.
실제로 마라톤을 하다가 죽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뛰면서 별 생각이 다 듭니다.
‘그냥 포기해 버릴까? 좀 천천히 걸어가면서 쉬었다가 다시 달릴까?’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상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죽어라 달리는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 순간 골인지점의 테이프를 끊을 때에 그 감격과 기쁨은 말할 수 없는 겁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것을 뭐 하러 해? 나 같으면 안 해! 안하고 말지…’
그런데 그걸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할까요?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맨발의 기봉이’라는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장애인으로 태어나서 남들이 볼 때에는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 것처럼 보이는데도 이 사람은 달리는 게 그렇게도 좋대요.
달리면서 바람을 느끼고, 달리면서 길가에 자란 풀들은 손으로 만지면서 행복하게 뛰는 거예요.
신앙생활이 ‘영적인 싸움’이다, ‘악한 영과의 전쟁’이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생각만 해도 힘들고 어렵고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이지, 신앙생활을 즐겁고 기쁘게 해 보세요.
얼마나 주 안에서 행복한지 모릅니다.(할렐루야?)
남들은 늦잠 자고, 놀러 가고, 자기 편한 대로 사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때요?
주일이 되면 더 바쁩니다.
남들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고 교회에 가야 되잖아요?
주일은 쉬어야 하기 때문에 엿새 동안은 남들보다 더 부지런히 일을 해야 되니까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그러나 우리들은 ‘맨발의 기봉이’처럼 즐겁고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할렐루야!)
사실 옛날에 고린도 지방에서 있었던 운동경기에서는 고작 우승자에게 주어졌던 것이 솔잎이나 월계수로 만든 관이나 꽃다발 같은 것이었거든요.
며칠 지나고 나면 다 시들고 마는 그 시시한 것 하나 얻기 위해서 그렇게 죽을 고생을 다했던 겁니다.
왜냐하면 승리하는 자에게는 영광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때요?
우리에게는 어떤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따라해 봅시다! “생명의 면류관”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1:12)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무엇을 주시겠다고요?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개역, 계2:10)
하나님께서 주시는 면류관은 솔잎이나 월계수로 만든 면류관이 아닙니다.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될 줄 믿습니다.(벧전 5:4)
우리가 받을 면류관은 의의 면류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합시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할렐루야!)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아멘!)
그런데 여러분 상을 받기 위해서는 지켜야할 규칙이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뛴다고 다 되는 게 아닙니다.
한참 열심히 뛰었는데 실격이 되는 사람이 있어요.
골인 지점은 저쪽인데 엉뚱한 데로 뛰는 사람은 실격입니다.
따라합시다!
“푯대를 향하여!”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4)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꼭 푯대를 향해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해서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였다고 말했습니다.(고후1:8)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승리의 면류관을 받은 줄 믿습니다.
그래서 26절 말씀에 사도 바울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
목표가 있다 이겁니다.
제 작은 아들, 혜상이가 요즘 기타를 배우고 있어요.
누가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고 학원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인터넷에 들어가서 여기 저기 검색해 가면서 혼자 독학으로 배우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기타, 색소폰, 바이올린, 클라리넷, 드럼, 피아노…
한 가지씩 한 가지씩 악기를 배우고 있는데, 전문가처럼 잘 하지는 못해도 그냥 그런대로 잘 해요.
그런데 얘가 얼마나 열심인지 몰라요.
한번은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기타를 들고 나오는 거예요.
화장실에 앉아서 X을 누면서도 기타를 치면서 연습을 한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엉덩이를 까고 그 냄새 나는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이걸 두들기며 기타 연습을 하고 있었으니, 얘가 기타를 잘 치게 될까요? 못 치게 될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걸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보통으로 할 생각 마세요!
뭔가 달라도 달라야 됩니다.
봉사를 해도 남들 보다 더 열심히 해야 되고요, 헌금을 해도 남들 보다 배는 더 열심히 해야 되고요, 예배를 드려도 남들보다 더 먼저 나와서 열심히 드려야 되고요.
뭐든지 열심히 해야 면류관을 받게 되는 거지 대충 대충 해서는 상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을 보세요!
“운동장에서 달음질 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 할렐루야!
권투 얘기를 마저 해야 되겠네요.
26절 말씀 마지막에,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그랬잖아요?
권투 경기 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이기고 한 사람은 지잖아요?
두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지는 사람은 고개를 푹 숙이고서 상대방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주먹질을 해 댑니다.
그러다 보니까 허공에 대고서 헛방질만 하는 거예요.
기운은 기운대로 다 빠지고 실컷 두들겨 맞고서 KO패로 지고 말아요.
그런데 이기는 사람은 가만히 보면 눈썰매가 매섭더라고요.
정확하게 보고 정확하게 펀치를 날립니다.
그러니까 실수도 없고 힘을 낭비하지도 않아요.
결국 한방에 상대방을 때려눕히고 승리하는 걸 보게 됩니다.
우리 교단에서는 300만 성도 운동을 하고 있는데요, 각 교회마다 20%씩 전도를 해야 됩니다.
우리 교회는 5, 6명 정도 전도를 해야 되는데, 방법을 잘 알아야 되요.
한번 가서 교회 가자고 말해 놓고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됩니다.
권투 전수가 권투를 하듯이 집중적으로 공격을 해야 되는 거예요.
이건 교회에 나오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그렇게 전도를 하면 안 됩니다.
자꾸 찾아가고, 자꾸 권면을 하고 만날 때 마다 이야기를 하고, 볼 때마다 자꾸 같이 교회에 가자고 권면을 해야 되요.
전도하는 것도 집중 공격을 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꼭 잊지 말아야 할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다같이 27절을 봉독하시겠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버림을 받게 될까봐서 얼마나 염려를 많이 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영원히 썩지 않을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몸을 친다는 말은 헬라어로 휘포피아조(ὑπωπιάζω)라고 하는데요, 권투에서 상대방에게 두들겨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버림을 받게 될까봐 두려워서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철저하게 고통을 받으면서 절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버림을 받게 된다는 말은 아도키모스(άδὀκιμς)라고 하는데요, 화로에 금 조각을 넣어서 함량이 미달된 쇳조각은 버린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에 주님의 자녀로 적합하지 않은 자는 버림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끝까지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날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계7:17)
원래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겁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고통스럽고 지루할 때도 있는 거예요.
그러나 신앙생활은 장거리 마라톤과 같습니다.
묵묵히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은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미련하게 허공만 치는 것이 아니라 뱀처럼 지혜롭게, 그리고 비둘기처럼 순결하게(마10:16), 옛날에 모하메드 알 리가 그랬다고 했나요?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날카로운 공격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벧전5:8, 9a)
베드로 사도의 권면입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 : 24)
지금 우리들은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달음박질은 한 사람에게만 상이 주어지지만, 믿음의 경기는 하나님 앞에서 승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상급과 면류관이 주어지게 되는 줄 믿습니다.
마지막까지 잘 참고 이기고 승리하시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