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야( 野)
현 서쪽 15리에 있다. 김지로(金智老)가 처음으로 이곳에 살기 시작하여 크게 황폐한 곳을 개간하고 집을 웅장하게 지었다. 안동시랑 변계손의 아들 변청원은 김지로의 사위가 되어 가야로 들어와 이 마을에 시거하는 사람이 되었다. 생원 윤의정(尹義情)의 부친 관(寬)이 변청원의 손녀에게 장가들어 가야에 시거하였다. 김생명·박사희·류빈·우의현이 모두 선비였는데 김지로의 인척으로 함께 살았으며 자손이 번창하였다.
--- 분천(汾川)
현 동북쪽 10리쯤에 있다. 영천 이씨의 세거지이다. 영천 이씨의 예안입향조는 군기소윤 이헌(李軒)으로 농암 이현보의 4대조이다. 현 서쪽 사천(沙川)에 이거하여 예안사람이 되었다. 맏아들 파(坡)가 분천으로 이거한 뒤 자손들이 귀하고 번성하였다. 이파의 후손 이효손·이성손·이흠·이균·이현보(문과)·이문량·이희량·이중량(문과)·이계량·이숙량(진사)·이현우·이현준·이수량·이국량(생원)·이광승·이윤량(문과)·이연량·이성승·이운 등이 분천 인물조에 나온다. 재미있는 사실은 다른 마을과는 달리 영천 이씨 외의 다른 성씨의 사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월천(月川)
현 동쪽 7리에 있다. 옛날에는 사는 사람이 없어서 초목이 무성하고 원숭이와 토끼들이 떼지어 다녔기 때문에 세속에서 마을 이름을 전하기를 솔내(率乃)라고 하였다. 권수익(權受益)이 부라촌에서 태어나 이곳의 빼어난 경치를 보고서 이곳으로 옮겨 살려는 생각이 있었다. 갑인년(1494)에 가시나무를 베어내고 터를 닦아서 시거하여서 옛 이름인 솔내를 고쳐서 월천(月川)이라 하였다. 권수익의 외손인 조목이 이 마을에서 살았기 때문에 월천으로 호를 삼았다. 권수익과 권수익의 후손 권곤(진사), 권운(문과)의 이름이 월천인물조에 보인다. 조대춘은 권수익의 사위가 되어 예천에서 이거하여 월천에 시거하였다. 그의 아들 조목은 권시중의 스승으로 퇴계의 문인이다. 그의 아들 조수붕(진사)과 조석붕(문과)의 이름이 보인다. 채승선은 권곤의 사위가 되어 이 마을에 시거하였으며 생원,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그의 아들 채운경과 손자 채간의 이름이 보인다. 채승선의 외손자 박수의의 이름이 보인다.
---지삼촌(知三村)
현 남쪽 5리에 있다.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였던 우탁(禹卓)이 이원백의 사위가 되어 단양에서 이거하여 이곳에 살기 시작하였다. 이 마을 이름이 지삼이 된 것은 우선생의 학문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셋이라는 것은 도학을 앎, 예의를 앎, 절조를 앎이며 합해서 지삼이라 이름한 것이다. 우탁의 후손 우원광(문과)·우원명·우침·우의·우홍균·우봉생·우형손·우형원·우경현·우형원·우경현·우인현·우희신·우성적이 지삼촌 인물조에 보인다. 무과 출신 손정(孫玎)은 우봉생의 사위가 되어 이 마을에서 살았으며 그의 아들 손문백과 손문중의 이름이 지삼촌 인물조에 보인다. 황희(黃熹)는 손문중의 사위가 되어 이곳에서 살았으며, 김정준(金廷準) 역시 손문중의 사위로 이곳에 와서 살았으며 문과에 급제하였다.
---한곡(寒谷)
현 동쪽 15리에 있다. 이 마을은 옛부터 전하기를 초목이 숲을 이루어 단지 화전민 한 집만이 살고 있었으나 예안 토성인 김효우(金孝友)가 대대로 현 서쪽 사천에 살면서 본 현의 향임으로 상리의 장점(匠店)이 있는 곳을 왕래하면서 이 마을을 살펴보니 땅은 비옥하고 샘을 물맛이 좋아 농사를 지을 수도 있고 마실 수도 있었다. 이에 이거하기로 마음먹고 이 마을에 집을 지었다. 그의 네 아들은 숭조·흠조·문조·계조이다. 숭조는 일찍 두 눈이 멀었고, 흠조(欽祖)는 문과에 급제하여 제주목사를 지냈는데 영천으로 옮겨갔다. 숭조와 계조의 자손들이 매우 많이 불어서 시내 좌우로 퍼져 살았다. 남응기는 계조의 사위가 되어 마을 오른편에 와서 살았다. 숭조의 4대손 택룡은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만년에 능운대 벽 아래 정사를 지었는데 와운이라 하였다.
예안 토성이 아닌 사족들의 예안 입향 동기는 대다수가 처가 동네로 장가든 데서 비롯하였다. 그 말은 처가에 정착했다는 것이고, 재산도 물려받았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처가 중심으로 살아가므로, 처가에 후손이 없는 경우, 즉 딸만 있을 경우에는 외손자가 제사를 지내게 되며 이것을 외손봉사라고 불렀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온 사회가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되었다. 이를 극복하려는 조치로 주자가례가 강행되면서 남성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처가로 장가든 인물, 즉 여러 성씨를 가진 사위들이 자리잡으면서 여러 성씨가 함께 살아가는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러다가 조선후기에 들어 점차 여자를 받아들이는 형태로 바뀌면서 단일 성씨 마을이 굳어져 갔고, 자연히 배타성이 강한 성향을 보이게 되었다. 우리가 전통마을을 되살린다면 당연히 혼성마을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배타적이기보다는 조화를 이루는 마을사회를 창출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뛰어난 사위들을 받아들여 융성했던 예안지역 전통마을의 전설을 되살릴 수는 없을까? 지금은 비록 물 속에 잠겨 버려 용궁의 이야기가 되었지만, 요즘 딸만 둔 가정이 많은데다가 여성들의 권익이 날로 높아지는 추세를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
첫댓글 조선조 까지는 대개 이런 풍습이 많았다지요.
오천(외내) 얘기중에 ....봉화현 사람이었던 금재(琴 )가 오천에 살게 된 것은 예안김씨 이조판서 김담(金淡)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부분은 오류가 있습니다. 일휴당 금응협의 아버지 금재는 외내 광산김씨 입향조 김효로의 따님에게 장가 들었고 금재의 아버지 금치담이 문절공 따님에게 장가들었지요... 부연하여 설명 올리면 외내마을은 문절공 제2자 만균 선조가 외내 광산김씨 김간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만석꾼 부자로 예안을 호령하며 세거하였으나 무후하여 처종질인 탁청정 김유를 시양자로 삼았는데, 외내 광산김씨 융성의 물질적 기반이 만균 선조가 남긴 재산에서 비롯되었다지요.
한편 외내마을과 마주보고 있는 강건너 천전(내앞)마을 입향조는 백암 선조의 차자 번계공의 제5자인 장사랑공 옥 선조로 만균 선조 사후 100여년이 지난 후 영주에서 이거하여 터전을 잡았는데, 이때 외내마을에는 금응협의 손자이자 옥 선조의 매부인 금호겸이 살고 있었죠... 따라서 내앞마을 입향조 옥 선조(처가는 닭실마을)는 내앞마을 인근에 있는 외가(도산 의인마을)와 매가(외내마을)를 연고로 새로운 터전을 잡은 걸로 추정됩니다.
자연부락 명칭도 많이 달라졌지요 . 온계는 온혜, 오천은 외내, 지삼촌은 지삼의, 부라는 부포, 가야는 모란, 분천은 부내, 월천은 다래, 한곡은 한실이라고 불렀습니다.
보충 설명 감사 드립니다 . 연구할 숙제를 마련하게 되었내요여러 문중과의 혼맥 관계를
오늘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
권겸(權謙)은 예안 김씨 小良의 사위 이시며 ,따님은 영천이씨로 출가 (이 李欽)하시여 효절공(孝節公) 농암 이현보의 모친이 되시며 ,권씨부인은 곧 문절공 선조 생질녀 아들 권수익(權受益)은 洪先祖 따님과 혼인 맞으신지요 <족보 참조>
그럼 권수익은 내외종 사촌간 결혼했다는 얘기인데요, 그 당시에는 안동권씨 동성동본간에도 혼인을 한 기록이 안동권씨 성화보에 흔히 보이기는 하더군요 ? 그리고 금치담이 오천에 산것이 아니고 그 아들 금재가 오천으로 장가를 들었기 때문이죠.
통찬공 홍 선조는 퇴계의 조부 이계양과 동서간이 되고(예안 모란 영양김씨 김유용의 사위들), 김유용은 영천이씨 이흠의 조부 이파의 사위, 김유용의 고모부가 금재의 고조부 금척이고, 금재는 딸 둘을 모두 퇴계 집안으로 출가 시키죠 (퇴계의 장자 이준은 금재의 사위, 금응협의 매부) 따라서 진성이씨 중 퇴계의 후손은 모두 금재의 외손들이죠(안도,순도 영도) , 이준의 사위는 의성김씨 김용, 이순도의 사위는 번계공 김지선, 김용의 자 김시정은 백암의 사위, 김지선의 사위는 금응협의 손자 금호겸 , 이렇듯 연비가 사갈처럼 얽혀져 있습니다.
東岩公(李詠道) 차녀 : 백암선조 며느님 되시고,퇴계 손서(金涌)의 삼남 (是禎) :백암선조 넷째사위,장사랑(李純道) 따님은 곧 번계 할매이시니 ...둘째 따님(李有道)은 온계공 이해의 며느님이 되시여 삼백당 후손은 곧 선김의 혈손 ~그리고 일휴당 손부는 번계공 따님이 되시죠 ~~이어 서애 손녀(류진의 따님):과는 동서간이 되구요 ...귀학정으로 출가하신 풍산류씨(류진따님) 자손은 따님만 두분 , 현재 종부는 상주 우천에서 오시면서 동생댁은 천운정에서 가셨지요
...번계공 따님은 온계공 이해의 며느님이 되시며 ...부분은 백암선조 따님으로 수정이...~~이어 서애 손녀(류진의 따님):과는 동서간이 되구요 ...이 부분은 무슨 뜻이죠? 누구와 누구가 동서간?
번계공(김지선) 따님 은 4형제 생산하시고 , 수암공 류진 따님께 출계 시키면서 봉화금씨 와 선김에 연관된 혼맥 또한 지나칠수 없는 관계라고 할수가 있겠내요
그래도 이해가 안되네요? 번계공 따님과 수암공 따님이 외내 금씨네댁에서 동서간?
기타 자료실 288 번 일휴당 ~~~참고해 주세요
@叔榮 오래된 글입니다.
오늘 우연히 보았습니다.
삼백당 선조께서는 온계 선조의 손자시라 백암 선생 선생의 따님은 온계 선조의 손부가 되십니다.
저와 제 처의 선대의 얽히고 설킨 혼맥을 찾아보니 백암 선생과 마흔 건이 넘든 혼맥을 맺고 있었습니다.
李碩(生員,密直副使)-子脩(松安君,判典儀寺事)-云侯(司僕寺正)-禎(府使)-繼陽(老松亭,進士)-埴(進士)-瀣(溫溪,文科)-寗(漫浪,進士)-有道(三栢堂)
숙영님, 집성촌별로 입향조를 좀 알려 주심이...공주파 포함해서요
여기 선성지의 기록은 16세기 임란전까지의 기록으로 보이고요.. 우리 시대에는 지삼의, 다래, 한실마을은 민촌으로 전락되었고요, 가라골 사는 광산김씨와 대사에 사는 진성이씨 는 아류로 취급했죠. 예안 바닥에는 평산신씨와 안동권씨들이 주도권 쟁탈을 하고 있었고, 부내 영천이씨와 도산 처처의 진성이씨 그리고 외내 광산김씨 정도를 반촌으로 취급했죠
대사에 사는 진성이씨 : 도산면 단천리를 지칭 하나요 ? 진성이씨 대동보 수단을 접수하는중 일파만파 커지는 직계 와 서계의 구분관계로 아이러니한 이야기로 시련을 격고 있다고하나요~~~
석규 할배요, 꼬리말로 올려 놓으신 안동 일대의 집성촌 역사와 혼맥을 독립된 자료로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저 보고 들은 얘기를 꼬리말로 남겼을 뿐인데, 고명하신 고문님께서 주문을 하시니 송구스럽습니다. 틈 나는대로 올려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먼저 숙영님께서 우리 문중 집성촌별 입향조 계보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