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나 무너질 때가 있다!
신명기 6장 1-9절, 마태복음서 22장 34-40절
한 문 덕 목사
[실수투성이들의 이야기]
2019년 8월에 한국 루터란아워에서 평신도를 대상으로 하는 성서 강좌에 제가 아끼는 후배 목사님이 “구약에 관한 당신의 4가지 오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4주에 걸쳐 진행되는 강좌의 첫날, 강의를 시작한 목사님은 참석한 분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구약 성서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구약 성서는 과연 어떤 책일까요?” 신학을 배운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들으면 “구약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 유대인들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주는 책으로 모세 오경과 예언서와 성문서로 구성되어 있고, 다양한 장르의 문학적 양식을 가지고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자동적으로 떠오릅니다. 구약학 개론에 나올 법한 대답을 원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에 저도 이 질문을 듣고 저 나름대로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강사의 입에서 이런 말이 불쑥 터져 나왔습니다.
“구약 성서는 실수투성이 인간들의 이야기입니다.”
4주 강의를 다 들었는데, 다른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고, 이 한마디만큼은 제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다.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일찍이 “나는 실수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Fallor ergo sum.” Augustinus)라고 말하면서 모든 인간은 실수하는 존재임을 밝혔고, 영어 속담에도 “인간은 실수하는 존재이고,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To error is human, to forgive Divin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구약 성서가 실수투성이 인간들 이야기 모음집이라는 말은 새삼 새롭게 들렸습니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러합니다. 창세기를 펴면 몇 장 넘기기도 전에 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금지한 열매를 따먹는 이야기가 등장하고, 그의 아들 카인은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해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대홍수의 환란을 이겨낸 노아도 술에 취해 아랫도리를 다 벗은 채 대짜로 뻗어서 잠을 자는가 하면, 위대한 믿음의 아버지이자 세계 3대 유일신 종교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애굽에 갔을 때, 죽을까 두려워하면서 아내까지 팔아먹습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끌어당기는가 하면, 형과 아버지를 속였다가, 결국은 외삼촌 라반에게 속임을 당합니다. 훗날 출애굽의 지도자가 되는 모세는 젊은 나이에 끓어오르는 분을 참지 못하고 사람을 죽이고 맙니다. 하나님의 눈에 들어 영원한 약속을 얻어냈던 맺었던 다윗도 자신이 저지른 불륜을 숨기고자 충직한 부하를 사지로 내몰았으며, 지혜의 왕이라 칭송을 들은 솔로몬은 말년이 되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자신의 쾌락을 위해 매년 666달란트나 되는 금을 모으고, 수백 명의 후궁을 들이며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군마와 병거를 수집합니다(신명기 17:16-17과 열왕기상 10:14-11:3 참조). 예언서를 읽어보면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지 말라는 이야기와 타락한 제사장에게 쏟아붓는 책망의 말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심판의 예언들이 가득합니다. 지혜문학에도 어리석고 교만하여 하나님을 멀리하고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고 악의 수렁으로 들어가고 마는 인간들의 이야기로 가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설교 제목을 “누구나 무너질 때가 있다”라고 정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갖춘 박사도, 엄청난 부를 소유한 재벌도, 최고의 권력을 지닌 사람도, 남 부러울 것 없는 온갖 재능을 타고난 천재도 실수합니다. 그리고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일반인보다 여러 면에서 뛰어나고 대단한 사람들이 이러하다면,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이 실수하는 것은 매우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자신은 실수하지 않는 사람처럼, 또 자신이 상대하는 남들도 실수하지 않는 사람처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작은 실수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며칠 밤 동안 잠도 자지 못하면서 자책합니다. 남의 실수를 너그러이 용서해주는 마음보다는 “왜 저 모양인가?” 하며 힐난하기 쉽고, 험담하는 것이 우리이기도 합니다.
어떤 실수들은 가볍게 웃고 넘어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실수도 있습니다. 한 인간의 인생을 망치는 치명적 실수도 있고,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실수는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온 백성을 고통의 한복판으로 내몰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실수하고도 실수인 줄 몰라 계속 실수하면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기도 하고, 실수하면서도 고집 피우다가 실패하는 인생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나 실수하는 존재이지만, 가능하면 실수를 줄이고, 또 실수하더라도 빨리 그 실수로 인한 피해와 어려움, 자책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실수를 줄이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원래의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을지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스도교적 용어로 바꾸면 우리가 어떻게 죄를 좀 덜 짓고, 사망의 법에서 빠져나와 구원과 생명의 삶을 이뤄나갈까 하는 것이고, 세상 용어로 하면 실수가 좌절과 실패로 귀결되지 않고, 자신의 성장과 성공으로 이어질까 하는 것입니다.
[삶의 세 가지 방식]
실패하는 인생을 살 것인가, 아니면 성공하는 인생을 살 것인가를 두고 물었을 때, 누구나 성공을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성공과 실패의 기준과 모양이 다르기에 “한마디로 이것이 성공이다, 또는 이것이 실패다”라고 규정짓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오늘처럼 다양성이 존중받고, 저마다의 개성을 높이 평가하는 시절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실패와 성공, 죽음의 길과 생명의 길, 죄의 법과 구원의 능력 사이에서 분명히 더 나은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삶을 잘 살펴보면 대체로 세 가지 수준의 삶이 있습니다. 첫째는 소유를 중히 여기는 삶입니다. 둘째는 활동을 중히 여기는 삶이고, 셋째는 존재가 중요한 삶입니다.
소유가 중요한 삶을 사는 이들은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열심히 활동합니다. 이들은 성공하려고 정신없이 내달립니다. 그렇게 애써서 무엇인가를 얻으면 꽤 큰 성취감이 따르지만, 이내 곧 허망한 마음이 들고, 더 큰 것, 더 좋은 것을 소유하려고 다시 투쟁의 현장으로 뛰어듭니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늘 분주하고 기진맥진하며 살아갑니다. 성공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실패하면 고통받고 상처 입고 성과 없이 희생하고 시간을 낭비하기도 합니다. 움켜쥐면 다행이지만, 상실했을 때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가진 것이 많아도 만족하지 못해 늘 마음이 늘 휑한 것이 문제입니다.
둘째 활동을 중히 여기는 이들은 소유를 중히 여기는 이들과는 달리 활동 자체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낍니다. 소유를 지향하는 사람들보다 만족도가 오래 지속됩니다. 똑같은 돈을 주고,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사게 하는 경우와 자신이 하고 싶은 활동을 하게 한 경우를 비교해보면 소유보다는 활동이 행복의 지속시간이 훨씬 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소유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자아 중심주의에 빠질 확률이 높지만, 활동은 여럿이 함께할 때 기쁨이 배가 되기 때문에 나와 남을 함께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활동은 때로 목적이 무엇인지를 망각하기 쉽습니다. 활동 자체에 의미를 두다 보니 때때로 방향성을 잃기도 하고, 덜 중요한 것에 힘을 빼기도 합니다. 활동 자체가 늘어나기 때문에 동시에 실수할 확률도 높고 뭔가 많이 하기는 했는데 남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존재가 중요한 삶으로 넘어갑니다. 자기계발과 관련된 서적들은 성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방법을 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느냐 보다 어떤 존재였느냐, 또 어떤 존재가 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다양한 경험을 하고, 외부의 자극을 받아 그에 따른 반응을 합니다. 생애 초기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사회적 지평이 넓어지면서 더 많은 사람과 만나고 그들의 기대와 평가에 따라 자신을 만들어갑니다. 신분제 사회에서 태어난 사람은 계급에 맞게 자신을 형성합니다. 종으로 태어나면 종에 맞는 삶이 펼쳐집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주의의 방식에 적합한 나를 만듭니다. 이런 나를 ‘경험적 자아’라고 부릅니다. 대체로 경험적 자아인 우리는 사회화 되는 과정에서 세상의 자극에 반응하면서 형성된 습관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진짜 내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진정 내가 잘하고 원하고 나에게 딱 들어맞는 내 자신이 아니라, 계속 가면을 만들어가면서 부단히 적응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타고난 나’(본래적 자아)와 ‘만들어진 나’(경험적 자아) 사이에 괴리가 적으면 그 사람의 삶은 대체로 행복합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는 그렇지 못합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이고, 남의 눈에는 별 문제가 없어도 그 사람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활동력 있고, 추진력이 좋고, 외향적 성격을 지닌 여성이 가부장적 사회의 질서를 잘 따르는 엄격한 부모 밑에서 자라난다면 타고난 성품과 능력은 발휘되지 못할 것입니다.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회에 적응했다고 해도 이 여성의 삶은 제대로 꽃피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래 주어진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면서, 실수를 줄이고, 실패 속에서도 다시 회복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존재에 대해서 바르게 알고, 하나님께서 주신 본래적 자아의 모습을 펼쳐나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존재가 중요한 삶]
존재가 중요한 삶에서 가장 우선 해야 할 것은 내면의 원칙을 검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기에 사람으로서 누구나 지닌 본성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외부의 사물이나 사건이 아니라,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참된 기쁨, 욕구,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친절하게 호의를 가지고 대하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따듯한 미소와 밝고 명쾌한 웃음소리, 존중하는 마음과 배려와 관심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은 안정을 누리고 쉼을 얻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실하고 아름답고 선한 사람을 만날 때 매우 행복해집니다. 자신만 챙기는 사람이 아니라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 자신이 즐기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하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감동을 받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인물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들은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애쓰지 않아도 들어맞고, 쉽게 성공을 이뤄냅니다. 따라서 우리도 진실하고 아름답고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가 될 때 나머지 것들은 저절로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업을 하면서 온갖 재정적인 문제를 안고 있던 환자 한 명이 정신과 병원의 원장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장님, 저 바깥세상이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세상이라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제가 원칙을 굽히고 절차를 생략하고 여기저기서 조금씩 속이지 않았더라면 전 자본주의 경쟁 시장에서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많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 사람은 정글 같은 세상에서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적당하게 속이고, 원칙도 어기고, 절차도 대충 생략하면서 적응했기에 파산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사람이 이 지경이 된 것, 즉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거의 파산 직전에 가게 된 이유는 바로 진실성의 원칙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사람은 신뢰할 수 있을 때 일을 맡깁니다. 최선을 다해 책임 있게 일하는 사람, 자신이 잘하는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이런 원칙에 따르려고 하기보다는 눈앞에 이익을 위해 원칙을 구부립니다.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 여기면서 속이려 듭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결국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작은 것을 탐하던 이들은 크게 잃게 됩니다.
중추 신경계 질환을 진단하기 위해 허리 아래쪽 척추의 척추뼈 사이에 주삿바늘을 꽂고 그 안에 있는 뇌척수액 몇 방울을 뽑아서 현미경으로 살펴야 하는 요추 천자(Spinal tap)라는 시술이 있습니다. 어느 한 개인 병원에서 이 시술을 한 번 할 때마다 10만원이 넘는 돈을 청구하였는데, 한 번은 환자가 몇 분밖에 안 걸리는 일에 왜 그렇게 많은 돈을 받느냐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때, 의사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삿바늘을 꽂는데 5천원 들고, 정확히 어디에 꽂을지를 알아내는데 9만 5천 원이 듭니다.” 그러자 환자는 껄껄껄 웃으며 “그렇군요. 선생님! 잘 알아들었습니다.”라고 답변합니다.
환자는 잘 알아들은 것입니다. 의사의 한 마디를 통해 의사에게 믿음이 간 것이지요. 이 의사가 실력이 있는 의사이고, 양쪽 엉덩이뼈의 능선 위인 3-4번 요추 사이 공간에 정확하게 주삿바늘을 삽입하여 자신의 질병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이 지닌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탁월하게 일을 하며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려는 사람에게 부와 성공은 저절로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깊은 내면에 있는 본성을 끌어올리게 하는 호소력 있는 고귀한 원칙을 제시하는 사람, 삶에서 그것을 보여주는 사람, 존재의 아우라가 펼쳐지는 사람에게 성공이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대영제국이 인도의 간디 한 명을 이길 수 없었던 이유이고, 남북전쟁에서 노예를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남부가 절대로 북부를 이길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어떤 작은 마을에 자기 배우자와 마을 사람들로부터 늘 ‘거저 준다.’는 말을 듣고 사는 자동차 정비공이 있었습니다. 다들 그가 차를 고치고 난 다음에 너무 적게 받는다고들 말했습니다. 다른 카센터에 가면 무슨무슨 부품을 다 교체해야 하니 30만원이 든다고 할 때가 많지만, 이 사람에게 가면 그 정비공은 턱을 잠시 쓰다듬고는 “음, 이 부분을 완전히 반대로 구부리고, 틈을 바짝 조일 건데요. 그러면 한 만 오천 원 정도 들겠습니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차에 문제가 생겨서 가져가면 그는 늘 공짜로 고쳐 줄 때도 많았습니다. “아, 선이 헐거워진 것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요. 어느 카센터에서는 새 연료 펌프와 분사기로 교체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이 정비공은 “연료 탱크 상태가 안 좋군요. 물이 들어갔습니다.”라고 말하고 탱크를 비운 뒤 새 연료를 넣어 주어서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 마을에서 이 사람에게 차를 맡기려면 언제나 줄을 서야 했고, 이 정비공은 어떤 누구와도 경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궁극적 관심에 귀를 기울여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구약과 신약의 본문의 말씀은 모두 우리에게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하고,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구약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고 으뜸 되는 계명이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실수를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 때로 실수를 해도 금방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께 지향점을 두는 것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이것을 두고 궁극적 관심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개인의 성격, 욕망, 환경 등 어떤 조건에도 흔들리거나 좌지우지되지 않는 총체적 성격의 관심입니다. 궁극적 관심은 삶 전체의 깊이와 연결되면서 주면 반드시 받아야 하는 어떤 상거래적 행위와 무관하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함 없는 열정을 쏟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관심은 높은 윤리와 깊은 아름다움을 지향합니다. 거룩함이 묻어나고 고귀한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과 뜻,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면 우리가 하는 실수는 상당히 줄어들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섬기는 사람이 다른 것을 함부로 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실수를 안 할 수는 없을 것이고, 때로 넘어질 수도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우리를 일으켜 줄 것입니다. 그래서 늘 보다 더 고귀한 원칙과 삶을 지키려는 이들은 쉽게 일어납니다. 실수가 실패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 놀라운 성공을 위한 자극과 영감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바나나 실험이 있습니다. 원숭이를 우리에 가둡니다. 우리 바깥에 원숭이의 손이 살짝 못 미치게 바나나를 둡니다. 배고픈 원숭이가 바나나를 보고 그쪽으로 가는 순간 원숭이 뒤에 있는 우리의 문을 열어 둡니다. 그러나 원숭이는 창살들 사이로 팔을 뻗치고 눈앞에 있는 바나나를 움켜잡으려고 애를 씁니다. 바나나는 원숭이 손이 살짝 못 미치는 데 있기에 원숭이가 아무리 힘을 써도 결코 잡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 며칠 동안 발버둥을 쳐도 바나나는 얻지 못하고 원숭이의 어깨만 아프고 몸만 지칠 뿐입니다. 그러나 바나나를 얻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바나나에서 눈을 떼고 몸을 정반대로 돌려 원숭이 뒤에 있는 열린 문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이 열린 문은 보지 못하고, 원숭이처럼 이렇게 눈앞에 이익에만 매몰되어 실수하면서 고달프게 살아갑니다. 성령의 능력, 하나님의 섭리에 자신을 맡기지 못하고 제힘으로 발버둥 치다가 오히려 지쳐 쓰러집니다. 원숭이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지쳐 쓰러져서 뒤로 발라당 넘어진 순간 열린 문을 보고 원숭이는 바나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회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리석은 원숭이가 되지 않길 빕니다. 지쳐 쓰러지기 전에 여러분의 존재가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십시오. 누구나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품에서 넘어지면 하나님이 안아 주시고, 하나님 품에서 넘어지면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여러분의 힘을 쓰지 말고 세차게 부는 성령의 바람에 여러분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신앙을 가장하면서 자행했던 우상 숭배와 자기도취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나머지 것은 주님께서 알아서 해 주실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내가 당신들에게 명한 모든 주님의 규례와 법도를 잘 지키면, 당신들과 당신들 자손이 오래오래 잘 살 것입니다.”라고 말했듯이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본성인 하나님의 형상을 일깨워 하나님의 아들딸로 살아간다면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은 오래오래 잘 살게 될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가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다른 생각을 품지 않게 하여 주소서. 무엇보다 하나님의 아들딸로 존재하게 하여 주소서. 가장 거룩한 분의 백성으로 품위를 지키고,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기꺼이 즐거워하며 모든 사람과 더불어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여 주소서. 세상이 말하는 성공을 좇다가 지쳐 쓰러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께서 이끄시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여 주소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도 깨닫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대림절 기간 촛불을 하나둘 켜면서 주님을 기다리며 감사와 영광을 올립니다. 주님의 은총 속에서 온전히 기쁨을 누리고, 새롭게 펼쳐지는 하늘의 질서를 맛보길 기대합니다. 어둠 속을 뚫고 참 빛으로 우리를 찾아 주시니 기쁨이 샘솟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잡다한 세상일들을 정리하며 주님 오시는 길을 닦기 위해 마음을 모으고 있습니다. 길을 잃고 비틀거릴 때마다 동방박사를 이끌었던 별을 생각하며 다시 주님 앞에 섭니다. 따뜻한 세상, 정의를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는 새 시대를 소망하며 주님 앞으로 나옵니다. 나올 때 빈손으로 오지 아니하고, 감사의 예물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 예물을 받으시옵소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삶 전체를 드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 주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우리 또한 우리의 마음과 몸을 드립니다. 주님 받으시옵소서. 돈이 전부가 아님을 기억하게 하시고, 이 예물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쓰일 때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여 주소서.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드리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여러분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여러분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야훼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 축도
하나님의 부드러운 은총이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여름날 천둥 번개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깨닫고,
겨울날 고요한 석양 속에서
창조주의 숨결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기를 빕니다.
이제는 지난 10년의 세월을 지켜 주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총이,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려는 생명 사랑 모든 믿음의 지체들 위에, 함께 예배하고 선교하는 전국의 모든 성도 위에,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길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