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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모텔→ 오륜대순교자성지 → 수영장대순교성지 → 조씨형제순교자묘
40.5Km 18.2Km 30.6Km
오늘 부산으로 넘어가 순례해야 하기에 이른 새벽 6시에 숙소를 나와
어제 보아놓은 24시간 영업 콩나물밥집에서 아침을 먹고
부산 오륜대 순교성지로 차를 몰았다.
44. 오륜대 순교자성지
오륜대 순교자성지는 부산에서 순교하신 8분의 ‘부산 순교자묘소’와
한국순교성인 103위 중 26위의 유해를 안치한 ‘순교자 성당’이 있는 곳이다.
이곳 부산지역 에서는 1866년 병인박해에 이어
1868년 무진년 8월4일(양력 9월 20일) 수영장대에서 이정식 요한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이정식의 대자였던 양재현 마르티노를 비롯하여 함께 옥에 갇혔던
여덟 분의 신자들( 이정식, 이관복, 박소사, 이월주, 이삼근, 양재현, 차장득, 옥소사)이
군문효수의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정식 요한은 동래출신 무과에 급제 동래 병영의 장교, 60세에 입교 회장이 됨,
가족과 함께 울산 수박골로 숨어 살다가 체포되고 47일간 동래 동헌에서
옥중생활을 한 끝에 75세에 치명당함.
이정식의 대자였던 양재현 마르티노는 동래 북문 밖 오늘날 금사동에서 살던 이로서
벼슬보다는 민간에서 존경받던 좌수였다. 체포되어 수영장대에서 치명 당할 때 42세)
그 후 명장동(동래구 명장동 산 96번지)에 묻혀있던
이정식 요한회장의 가족 네 분의 무덤만이 조사 확인되어,
1977년 9월 19일 이곳 오륜대로 이장하여 ‘부산 순교자 묘소’로 꾸몄다.
현재에는 네 분의 무덤 외에 다른 네 분의 무덤이 가묘로 단장되어 있으며,
특히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는 ‘윤지충과 하느님의 종 123위’에 포함되어
2014년 8월16일에 복자품에 올랐으며
미구에는 부산교구의 성인으로 공경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이 순교한지 100주년이 되던 해에(1968년)
순교자들의 얼과 사랑의 위업을 높이 기리고 전파하고자
‘한국 순교 복자수녀회’에서는 이곳 오륜대에 수도원을 세우고
순교자 성당을 건립하여 성지로서의 면모를 만들어 갔다.
또한 1981년에는 한국순교자 기념관 축복식과 척화비 복제,
라파엘호 모형제작, 십자가의 길, 묵주기도의 길, 성모동굴 등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2009년 3월 2일에는 한국순교자기념관은 1종 전문박물관인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으로 등록되었으며, 2013년, 10월부터는
반세기 동안 성지를 관리해온 ‘한국 순교 복자수녀회’에서
부산교구로 성지의 관리권한이 변경되었다.
부산교구는 이곳을 ‘오륜대 순교자성지’로 명명하고 전담사제를 파견하여
미사와 강론, 강의 등을 통하여 순교자 정신의 계승에 힘쓰며,
노후화된 건물의 개보수 등 본격적인 성지 정비작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한국 최고의 순교자 박물관이 있는 오륜대 순교자 성지는 현재 재 건축중이다.
☞ 성지 신축 개발 공사로 인한 정문 폐쇄 및 이용 안내(2022.8.25자)
공사기간 중 위험요소들로 인해 정문이 폐쇄 되었습니다.
성지를 방문하시는 순례객들과 차량은 정문 50m 아래「국수당」골목으로 들어오시면
임시성전과 주차장으로 오실 수 있습니다.
공사기간에도 빨마수녀원 주차장 부지에 마련된 임시성전에서 11시 미사는 매일 봉헌되며,
순교자묘지, 십자가의 길, 로사리오의 길과 외부산책로도 항상 개방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단체 순례객의 경우 식사제공 가능 / 사무실 문의)
☞ 오륜대한국순교자박물관 임시휴관
오륜대순교자성지 조성 사업 추진 계획에 따라 5월1일부터 재개관 하는 날까지 임시 휴관합니다.
그동안 오륜대한국순교자박물관을 찾아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문의 / 051.583.2923)
45. 수영장대
수영장대골은 당시 조선 시대 경상도의 동쪽을 수비하던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이 있던 곳입니다.
그리고 장대는 지휘관이 군사들을 훈련할때 올라가서 지휘를 하는 곳으로
지금 시대로 보면 연병장에 사열대라고 보면 될것 같습니다.
장대는 간혹 중죄인의 사형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박해시대에는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장이 되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신자 체포령이 내려졌을 때,
이 정식의 가족들과 동래 교우들은 피신하였다.
그런데 1868년(무진년)에 포졸들의 적극적인 신자 색출로 인해
이정식 가족들과 동료 교우들이 체포되었다.
이들에게 모진 고문과 형벌이 가해졌지만,
"가세, 가세 천당으로 가세"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굳은 믿음으로 주님을 증거하였다.
이곳 장대에서 여덟 분이 8월 4일(음)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정식 가족의 시신은 명장동으로 옮겨졌다가,
1977년 오륜대 순교자 성지 동산으로 이장하여 모시고 있다.
여덟 분의 순교자 중 이정식(요한)과 양재현(마르티노) 순교자는
2014년에 복자품에 올랐다.
부산 영남지방 천주교 박해
부산지역의 박해가 크게 시작된 것은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이 있은 뒤였습니다.
남연군묘 도굴사건은 1868년 5월 독일 상인 오페르트 일당이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다가 실패한 사건입니다.
그 당시 부산에서는 '박근기 사건'이 벌어집니다.
초량사람이었던 박근기는 '일본이 서양과 통상을 하고 있으니
조선의 신앙자유를 위해 일본을 통해 서양에 호소를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몇몇 신자들과 뜻을 같이하고
이러한 내용의 글을 가지고 다니다가 붙잡히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부산과 동래에서
서학무리를 잡아들이는 박해가 시작이 됩니다.
복자 이정식요한은 무과에 급제하여 군장교로 근무하다가
60세에 천주교에 입교한 뒤에는 첩을 내보내고 열심히 수계생활을 하여
주변 교우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1863년 다블뤼 주교가 동래 교우촌을 방문했을때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교우들과 함께 기장과 경주로 피신하였다가
갑자기 사람들이 사라지자 동래포졸들이 의심을 품게 되고
1868년 울산 수박골에서 가족들과 체포됩니다.
복자 양재현 마르티노는 이정식요한의 대자였습니다.
1868년 집에서 체포되어 통영우수영으로 이송되었다가 동래로 압송됩니다.
문초와 형벌을 받던 중 옥사장의 꾐에 빠져 돈을 주고 석방되지만
다시 체포됩니다.
이정식 요한, 이월주 프란치스코(아들), 박조이 마리아(며느리),
이관복 베드로(조카) 등 가족4명과 양재현 마르티노, 이상근 야고보,
차장득 프란치스코, 옥소사 발바라 8명의 순교자는
혹독한 문초와 형벌에도 굴하지않고
결국 경상좌수영 장대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합니다.
처형된 순교자들의 목을 장대위에 매달아 놓아 민중들에게 경고와
천주교에 대한 적개심을 갖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천주교인들의 처형장면을 지켜본 사람들에게는
"처형을 하는 수영장교들과 군졸들은 삼엄한 분위기에 위엄을 갖추었지만
사형수들은 마치 잔칫집에 나가는 기쁜 표정으로
순교했다"고 구전되었습니다.
8분 순교자의 묘는 오륜대 순교성지에 모셔져 있습니다.
(묘를 발견하지 못한 4분은 가묘와 비석만 세워져있습니다.)
46. 조씨형제 순교자 묘
부산시 강서구 생곡동 배씨(裵氏) 가문의 선산에는
배씨가 아닌 조씨(曹氏) 성을 가진 형제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병인박해 당시 신앙을 증거하고 죽음을 택한 조석빈(曺錫賓, 1825-1872년?)과
조석증(曺錫曾, 1834-1872년?) 형제 순교자의 유해가 문중의 선산에 묻히지 못하고
선산을 앞에 둔 배씨 문중 선산에 묻혀 있는 것이다.
경상남도 김해 지방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당시이다.
경상도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의 다른 지방들과 마찬가지로
천주교인들을 징계하기 위해 떠나보낸 귀양길이
오히려 유배지에 복음을 전파하는 계기가 되곤 했다는 것은
어쩌면 하느님의 섭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박해의 서슬에 체포되어 유배형을 받은 이학규에 의해
김해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밀양 박씨 문중의 순교자
박대식(朴大植, 빅토리노) 가정의 선대(先代)가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박대식의 부친 박만혁(?-1810년)이 김해군 진례면 시례리(詩禮里)에서
이학규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후 그의 아들 대붕 · 대흥 · 대식 3형제가
모두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 막내인 박대식이 1868년 대구 관덕정 형장에서 순교했다.
어찌 되었든 이들의 입교 이후 진례, 녹산, 노루목 등에 신자촌이 형성됐고,
1839년 기해박해 때는 밀양 단장(丹場)의 가물리와 법흥리 등의 신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감으로써 이 지방의 신자촌들이 더욱 번성했다.
원래 뼈대있는 유교 집안이었던 창녕(昌寧) 조씨 김해파의 30대 손으로,
부친 조대연의 5형제 중 셋째와 넷째로 태어난 석빈과 석증은
천주교로 개종한 뒤 열심히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조씨 형제는 모습과 나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으나 다 같이
학문과 인품이 뛰어났으며 한문 성경을 한서 속에 감춘 나무상자를 매고
주로 양반들을 찾아다니면서 천주학 연구와 전교에 앞장섰다.
생곡의 배씨 사랑방에도 자주 들러 유학(儒學)과 서학(西學)의 비교 연구에 힘썼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2년 뒤인 1868년 무진년에 두 형제는
가락면 상덕리 편도 부락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동래 아문으로 끌려간 이들은 배교를 강요하는 관헌에 의해 혹독한 고문을 당하지만
배교를 완강히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 김해읍 왜장대에서 순교했다.
고문을 하는 사람조차도 이들의 굽힘 없는 신앙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지만
결국 조씨 형제는 참수형을 선고받았다.
관헌은 먼저 형 석빈을 가차 없이 참수하고 나서
다시 동생 석증에게 회유와 협박으로 배교하기를 강요했다.
하지만 그는 “형님의 목에 십자가 꽃이 피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자기도 속히 참수해 주기를 간청함으로써
마침내 그 역시 참수되어 형제가 함께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갈대에 싸여 온 형의 거구와 이엉에 덮여 온 동생의 왜소한 알몸은
사학죄인(邪學罪人)이라 하여 조씨 문중의 반대로 선산에 묻히지 못한 채 방치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웃의 고(故) 배문한(裵文漢) 신부의 3대조(祖)인
배정문(裵禎紋) 공에 의해 집 뒤 언덕 밭에 암장되었으며,
그 후 배문한 신부 본가에서 4대에 걸쳐 순교자 조씨 형제의 묘를 보호 · 관리하여 왔다.
형 석빈은 손(孫)이 없었고 동생 석증은 아들이 있었으나
그나마 아들 대(代)에서 후손이 끊겼다고 한다.
그 후 이들 형제의 순교 사실에 관한 구전이 배씨 집안을 통해 대대로 전해오다가
1989년 6월 19-20일 부산교구에 의해 묘지 발굴과 확인 작업이 이루어졌다.
1995년 5월 29일 교구장 이갑수 주교의 집전으로
순교자 형제 묘소 단장미사를 봉헌하였다.
형제 순교자 묘소 앞에는 묘비를 겸한 돌 제대를 세웠고,
1997년 11월 12일에는 부산교구 교회사연구소 ·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
배문한 사제 사랑 기념사업회에 의해 묘소 주변에 십자가의 길 14처
(최봉자 레지나 수녀 조각)를 설치하고 묘소 뒤 바위 위에 대형 돌 십자가를 세웠다.
또한 1998년 8월에 형제 순교자 묘 바로 아래에 있는 고 배문한 신부
(1994년 8월 5일 삼척시 인근 바닷가에서 물에 빠진 신자들을 구하고 선종)의
생가(生家)를 개수하여 순례자들이 쉬었다 갈 수 있게 강당과 방도 마련하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