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만 푸르러
케네스강 (글무늬 문학사랑회)
서울에 있는 주한호주대사관 선임 통역관 직분으로 근무할 때였다. 전에 일하던 선임 통역관이 중국 북경대학교수로 초빙되어 가서 그 자리가 비게 되었다. 1980년대 초, 그 한자리를 놓고 수백 명이 응시하였다. 미국에서 심리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젊고 예쁜 여성분과 최후까지 겨루다가 결국 내가 발탁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벌써 40여년도 넘는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다.
그 후로 여러 해를 한국인들의 호주이민선발 면접 시 호주 이민관과 함께 내가 동석하였다. 엊그제 호주 수도권 지역 여성야당대표의 아버지 되시는 분이 나를 찾아와 이민 40주년의 소회를 밝히고 감사를 표하였다. 그간 참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 많은 사람 중에서도 특히 생각나는 사람들을 추억해 본다.
엘리사- 귀염둥이 여자아이 6세. 캥거루와 코알라를 보고 싶어 꼭 호주에 가고 싶다고 말했던 귀염둥이. 4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녀는 호주의 거물 정치인이 되었다. 호주 인들은 그녀의 연설을 듣기 위해 의사당 앞으로, 텔레비전과 라디오, 인터넷과 유튜브에 귀를 기울이며 환호한다.
유진과 동진 남매- 목사의 초등학교 1학년과 3학년 자녀들. 유진은 호주에 대해서 무엇이 알고 싶으냐는 이민관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호주 아이들은 울 때 무슨 말을 하며 어떻게 우는지가 제일 알고 싶다고 말했다. 유진은 해외 파송 선교사가 되었고 동진은 훌륭한 중견 의사가 되었다.
태우는 면접 시부터 좀 유별난 소년이었는데 호주에 와서는 정육점 점원으로 일하다가 자동차 정비공으로 그리고 남 호주의 끝이 안 보이는 농장에서 농부로 일하였다. 40년이 지난 지금은 거대농장의 주인이 되어 온갖 농산물을 생산해낸다. 그는 캄보디아 여행 중 만난 예쁜 소녀를 호주에 데려와 아내로 삼고 20년 동안 아들 다섯, 딸 다섯을 낳아 기른다. 가족이 함께 움직이기 위해서 14인승 미니버스를 운전한다. 센터링크에서 풍족한 돈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성희는 고운 얼굴에 미소까지 예뻐서 이민관이 칭찬하였다. 호주에 와서 남자를 잘못 만나 가정폭력에 시달리다가 끝내 이혼했다. 슬하에 딸 하나만 두고…그토록 어렸던 자녀들이 40 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호주 백인 사회와 교민사회의 중견일꾼들로 성장하였다. 의사와 변호사, 교수와 과학자, 부동산업자와 회계사, 은행 매니저와 건축가, 경찰과 군인, 연예인과 운동선수, 공무원과 요리사 등 실로 수많은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의 청소년들 중에는 많은 경우 호주에 만족하지 못하고 미국이나 영국 그리고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여러 나라로 진출하여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사례들도 많다. 그들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사연들도 더러 있다. 한수는 시드니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나서 마약과 도박에 빠진 경우이다. 그 부모는 한없이 슬퍼하였고 그는 몇 차례 실버워터 감옥에 드나들다가 마침내 젊은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부용산 시인 박기동 선생- 한국을 떠날 때 그의 나이 76세로 주옥같은 수많은 시들을 남기고도 평생 시집 한 권을 내는 것이 꿈이었다. 그는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부용산이라는 시 한 편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부용 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 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인생은 덧없이 흐른다. 성공한 사람들이나 불행한 사람들이나 모두 한 때의 존재로서 지나가는 꿈과 같다. 우리는 태어나서 열심히 한 생을 살다 사라진다. 황혼 고개를 넘는 내 인생의 석양을 바라보자니 그간 내 곁을 지나친 이들이 아련히 떠로른다. 그들이 향기로운 꿈을 이루었든 이루지 못했든, 그들은 내 인생의 소중한 일부였다.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눈길이 닿는 곳.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