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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맹세를 하는 자에게 화가 있으리라
성경본문 :마태복음 23: 16-22
16.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9.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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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인도자여!
예수님께서 질책하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과 잘못된 가르침을 묵상하며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거짓되고 어리석은 인도자들을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좀 깊이 고민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단순히 바리새인들로 대변되는 오늘날 교회 지도자인 목사들의 위선뿐 아니라,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범할 수 있는 어리석은 위선들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살던 시절 ‘Coke’과 ‘Pepsi’의 맛을 구분하는 ‘펩시 첼린지’, 즉 ‘blind test’가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음료는 두말할 것 없이 코카콜라죠. 하루에 6억 잔 이상 소비된다고 하니 말입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늘 2위에 자리한 음료가 펩시콜라입니다.
그런데 테스트 결과 압도적으로 사람들이 맛있다고 선택한 콜라가 펩시였죠.
또한 코카콜라에 중독되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테스트 결과 펩시와 코카를 구별해 내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사람들에게 콜라와 맹물을 주면서 눈을 가리고 구별해보라고 합니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질책하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우리가 유심히 구별하지 않으면 알 수 없이 유사하다는 것이죠.
오늘 말씀은 우리가 흔히 할 수 있는 ‘맹세’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잘 구별할 수 없을 것 같은 ‘성전과 성전의 금’, ‘제단과 제물’에 대한 맹세의 진정한 차이를 아냐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꾸짖으신 세 번째 저주 선언문입니다.
여기에서 ‘눈 먼 인도자’들이란 자신들의 행실도 온전치 못하면서 사람들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말하는 어처구니없는 자들입니다.
제가 군에 있으면서 참 많이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무식한 데 용감한 사람이다!”
제대로 된 방향을 모르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그런데 저는 요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똑똑한데 의도적으로 나쁜 길로 인도하는 사람이다!”
무지로 인한 범죄는 용서와 연민의 여지가 있지만 자신의 이득을 위한 의도적 범죄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눈 먼 인도자’가 신체적 결함에서 오는 것이라면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이지만,일부러 눈을 감고 잘못된 길로 인도하며 진리를 왜곡하고 있다면 심판과 화가 미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눈 먼 인도자여’라는 말씀은 자신들의 눈이 멀어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는 어리석음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를 보지 않으려고 자신의 눈을 감아버린 악한 사람들에 대한 질책입니다.
자신들도 진리에 눈이 멀어 있으면서 누구에게 진리를 말한다는 것입니까?
그렇게 말씀을 이해하고 17절을 보겠습니다(마태복음 23장 17절)
17-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이들의 어리석음이 무엇입니까? 아니, 이들의 악함이 무엇일까요?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라는 말이 무엇일까요?
악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이 참 악합니다(마태복음 23장 16절)
16.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성전에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라는 말을 NIV 성경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16. …If anyone swears by the temple, it means nothing…
즉 성전에 대고 맹세한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고, ‘성전의 금’ 즉 성물이나 제물에 대하여 맹세하면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악한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묻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23장 17절
17.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진정으로 중요한 것!
왜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을까요?
‘성전’이 하나님의 몸이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니, 성소와 지성소 그리고 제단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인데도 이들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그 맹세를 지킨다고 자신들에게 찾아오는 이득이 없기 때문이죠.
제가 이해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맹세합니다. 성전에서 기도합니다. 저에게 자식을 주시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하나님의 전에서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 . .“
이 맹세는 성전을 지키고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들어오는 어떤 이득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맹세합니다. 이번 일만 잘되면 성전을 위해 이런 물건을 살 헌금을 드리겠습니다. 이번 일만 잘 되면 정직한 십일조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축복을 허락하시면 이 번 기회에 성전에 필요한 성물을 구입할 헌금을 하겠습니다.”
이러한 맹세를 지키는 것은 당장 성전을 관리하고 치리하는 사람들에게 경제적인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당장 성전을 치리하는 자들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경제적 이득이 있는 맹세들을 꼭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태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물으시는 것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냐?
바리새인들이 맹세할 때 말하는 것을 보니, 이들은 성전보다 성전에 바쳐진 금에 더 관심이 있는 자들이요,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보다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에 눈이 먼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의 ‘값’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 사이의 관계, 신앙이 ‘친밀함’이 아닌 ‘경제적 조건’에 의해 좌우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돈으로 성전에 기여 했는가’를 판단한다는 것이죠.
예수님도 많은 비유를 통해 ‘돈’에 대해 말씀 하셨습니다.
돈이 우리의 인격과 신앙,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떤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매개체임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돈으로 친밀함을 증명하는 것과 친밀해서 돈을 쓰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을 드릴 때, 돈의 양으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거나 증명하려는 것과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해 헌금을 드리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헌금이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인 것이죠.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21장 1-3절에서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제물의 가치와 당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제물의 가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그들이 우리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보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 관심을 가지는 어리석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본래 율법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께 맹세했을 경우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민수기 30장에 말씀하고 있는데, 이들은 단지 돈을 두고 맹세한 것만 효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이 맹세 자체를 보기보다는, 맹세를 부추겨 부의 축적의 수단으로 삼았던 것은 아닐까요?
어떤 교회의 성도가 저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자신이 오랫동안 다니던 교회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와 상담하기 위해서는 상담의 내용에 따라 매겨진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님께 무엇을 부탁하려면 돈을 가져와야 한다고 합니다.
기도를 받으려면 상황의 심각성에 따라 돈의 양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고 있자니 너무 힘들어서 교회를 나왔는데 무척 혼란스럽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그 교회에 대하여, 목사님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해 달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이여!’
무엇이 중요한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참 하나님의 성전은 돈을 통해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전에서 교권을 지키려는 자들에게는 돈이 필요합니다.
성전에서 신앙을 지키는데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 명확한 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 때문에 성전에 바쳐진 ‘제물과 금’이 가치를 가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잘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에서도 돈이 필요합니다. 돈이 잘 쓰여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돈이 힘을 가지고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차지한다면 타락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돈은 성전에서 중하게 여겨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잘 사용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성전에서 돈이 거룩하게 쓰여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쓰일 때 거룩한 예물이 되지만 아무리 많은 헌금을 해도 그것이 인간의 욕망에서 나오는 것,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것이라면 한낱 돈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답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23장 19절
19.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맹세 한다면. . .이제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자들에게 친절히 설명하시는 부분입니다. 이 설명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맹세란 무엇이고, 맹세가 필요한 것인가?
마태복음 23장 20-22절
20.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지금까지 우리가 위에서 보았던 말씀에 견주어 보면, 제단에 대하여 맹세하는 것이나 제단 위에 있는 예물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 다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사실 성전 안에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대고 맹세하는 자는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께 대하여 맹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에게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33-37절에서 예수님께서 맹세에 대하여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이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보면 엄격하게 맹세 하지 말라고 하시는 듯하지만, 이 말씀의 본뜻은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맹세하고 그것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물질에 대하여 비인격적이고 무책임한 맹세를 남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인격적인 ‘하늘’에 대하여 쉽게 맹세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인 ‘땅’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
“예루살렘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아닌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인간의 능력을 과신하며 ‘머리’로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헛된 맹세를 하느니 옳으면 옳다, 아니면 아니다 말하라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맹세’가 아니라, 진실하게 살려는 인격과 삶의 노력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진정 자신의 인격과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는 맹세라면 꼭 지켜야 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닐까요?
비인격적 맹세가 아닌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맹세한다고 하면, 그렇게 쉽게 하거나 그렇게 쉽게 파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세대는 대형집회에서 목회자로, 선교사로 많이 헌신했던 세대입니다.
그런데 이런 서원이 감정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쉽게 헌신한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 주신 마음이 뜨거워서 헌신하고 맹세했다면, 상황이 변했다고 쉽게 파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약속을 지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 약속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하고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어리석은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전을 지으신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만도 못하게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히스이 고타로의 『하루 한 줄 행복』이라는 책에 보면
“하면 좋다고 생각하는 일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순간 ‘지식’은 ‘지혜’가 된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책을 보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맹세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 가운데 생각만하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의 모습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말씀을 알아도, 율법을 알아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위선’은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이며, 지식은 결코 그들의 인생을 지혜롭게 하지 않습니다.
‘화있을 진저’라는 말씀을 듣는 가운데, 주님께서 그들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렇게 살아가는 그들의 삶 자체가 ‘화’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 .
오늘 말씀은 제물에서 성전으로, 성전에서 하늘로 옮기며 점진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단이 중요한 것은 제단을 주관하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단에 제물을 드릴 때 그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전이 중요한 것은 그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전에서 행하는 예배와 하나님께 드리는 서원은 그 건물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고백한 일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하늘이 중요한 것은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보좌가 그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대고 맹세 한다면 그것은 헛된 맹세가 아니라 그것을 들으시는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 중심으로 바라보기 시작할 때 얼마나 진지하고 진실해 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참 믿을 수 없는 세상에서 삽니다.
우리가 살면서 ‘안전장치’가 있어야 한다고 참 많이 말합니다. 사람의 말과 약속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죠.
요즘 몰카와 녹음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회사에서도 상사와 대화하는 중에 직원이 몰래 녹음기를 켜 놓는다고 합니다.
자식을 어린이집에 맡겨놓은 부모들이 몰래 카메라로 감시를 합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불리하면 쉽게 자신이 저지른 일과 내뱉은 말들을 부인하는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왜일까요?
이들의 가치가 신앙적인 가치관이나 하나님 중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중심이 되면 물질 때문에 자신이 말한 것을 지키지 않습니다.
권력이 중심이 되면 권력 앞에서 자신이 한 말도 쉽게 부정합니다.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들이 세상에서의 삶을 참 부정직하게 만드는 것이죠.
오늘 말씀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인격으로 삶을 바라보도록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되게, 무책임하게 맹세를 남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신앙인이 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죠.
아마도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가장 큰 교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소망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요?
이제는 언론도, 성직자도, 정치가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거짓말하지 못하도록 증거를 잡기 위해 누군가를 의심하고 몰래 증거를 남기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하나님 앞에서 말한 것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이 세상이 달라지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