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치료사도 보편적인 사랑 없이 치유할 수 없다
사랑의 치유
사랑은 단순한 충동이 아니다.
사랑은 진리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법칙이다.
-라빈드라나스 타고르
신화의 메커니즘은 사랑의 메커니즘이다.
우리는 모두 사랑과 욕망을 담은 하나의 생각이 미세한 유전자적 물질로 결합되면서 잉태되었다.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사랑이 우리를 양육했으며,
우리는 처음부터 어머니의 사랑과 가까이 연결되어 있어서 따로 떨어져 있다는 의식이 없었다.
사랑의 힘이 생명을 잉태하고, 양육하고, 그것에 정체성을 줄 수 있다면,
사랑은 틀림 없이 우리 안에 있는 지성이 한 부분일 것이다.
<중간 생략>
우리의 세포 속에도 똑같은 안내자가 있다. 그것과 상의하지 않고는 이식을 가진 생명체나 지성의 충동이란 있을 수 없다.
사랑이 지성을 안내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진화의 흐름 속에 있는 한 떨어져 날 수 없는 끈이다.
이 끈은 우리의 자아로부터 우리 생각의 입구를 지나서 우주의 현관까지 이어진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특성을 보여주는 DNA로부터 사랑의 일부분을 가져온다.
좀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면 사랑이 진화를 부드럽게 이끌어간다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진화는 오직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삶 역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진화는 ‘무자비한 힘’이라기보다는 순수한 욕망의 연속이다.
사랑은 너무나 순수하고 직접적이다.
사랑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쁘며,
가장 순수한 사랑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누군가에 대한 순수한 자각이 강력한 힘으로 그를 변화시키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만이 자연의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든다는 것을 자각할 때
창조적인 삶이 펼쳐진다.
이것은 모든 결정의 경험에서 느끼게 되는 깨달음이다.
사랑을 접촉하는 순간 삶의 원재료는 하나의 목적을 갖게 된다.
사랑이라는 창조적인 힘을 통해서 사람들은 기쁨과 불멸성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가장 강력한 힘은 하나 됨이다. 한순간에 이해하기는 힘들겠지만, 그것은 일상적인 삶에서도 존재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집과 아이들과 정원을 사랑한다. 결국 이 감정이 무한대로 확장되어 ‘나는 우주를 사랑한다.
이 우주는 내 것이다.’라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스와미 사치아나다는 이 생각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했다.
하루는 밭에서 일을 하다가 손가락을 다쳤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나는 상처를 깨끗이 소독하고 붕대를 감았다.
만일 그 상처를 내버려 두었다면 손가락이 세균에 감염되어 내 몸전체가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주의 몸,
즉 전체 우주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우주의 다른 부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듯 단순한 추론에서 시작해서 우리는 삶을 더욱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차이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 환상이라면
차이가 없는 실재를 볼 때 우리는 환상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사랑은 실재의 참모습을 드러낸다.
스와미는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이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 그에 속한다는 것과
전체 또한 당신에게 속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느낌이 당신으로 하여금 사랑하게 하고,
그 사랑이 치유를 불러온다.
어떤 치료사도 보편적인 사랑 없이 치유할 수 없다.
당신이 단지 한 개인이 아니라 전체 우주의 한 부분임을 깨닫는다면
누구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두려움이 없는 자는 언제나 살고 있고, 두려워하는 자는 매 순간 죽는다.
자신이 전체 우주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이것은 단지 하나의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대로 믿기가 힘들다. 하지만 ‘깨달음’은 하나의 생각 이상이다. 그것은 자각의 순간 실재가 변화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의 자각이 실재와 접촉할 때 새로운 어떤 것이 깨어난다.
‘신물리학’의 전위에 있는 과감한 사상가들 가운데 한 명인 데이비드 봄은
하나됨에 대한 자각이 과학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숨겨진 질서’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서 우주 안에 있는
모든 물리적인 사건들을 연결하는 데 이용했다. 어느 한 부분에 대한 총체적인 지식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사랑을 나누거나 ‘신비한’ 시각에 의해 인도될 때 보편적인 지식과 접촉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어떤 사람은 통합된 의식의 차원에서 다른 것들을 결합시킨다. 봄은 그것을 이렇게 묘사했다.
100명의 사람들이 실재의 깊은 층을 인식하고 집단적인 마음을 두드린다면, 그들의 에고는 사라지고 하나의 의식이 형성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고도로 통합된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부분들을 하나로 만드는 것과 같다.
새로운 물리학은 또한 우리의 우주, 곧 우주적인 몸이 처음부터 전체였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과학이 이르게 될 결론은 이것이다. 물질과 에너지의 들끊는 변화는 전혀 실재를 갖고 있지 않거나, 아니면
전체의 바탕에 깔린 질서와 비교할 때 허약하고 간접적인 실재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간의 지혜가 최대한 표현한
것에 따르면 ‘전체성’의 진정한 실재는 바로 사랑이다.
자연과 우리의 내면에서 서로 연결된 질서는 발견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과학은 자신의 믿음 체계를 통해서 그것을 자각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메를로 풍터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진리 안에 있으므로 그 밖으로 나갈 수 없다. “
실제로 ‘나의 우주’를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에 의해 인도되는
순수한 지성의 우주로 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모두 멋지고 영감을 주는 생각들이다.
우리는 이것을 모든 종교의 모든 성인의 말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그 말에 동의하고,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삶에 실제로 적용시켜 변화를 끌어낼 수 있을까?
사랑은 점점 성장할 수 있다. 우리는 자각할 때마다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완전히 이용할 수는 없었다.
사랑을 이용하는 것은 치료하는 것이다. 사랑은 전혀 힘들이지 않고 자아의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올 때,
그것은 건강을 창조한다. 어릴 적 엄마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사랑과 자비심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새롭게 사랑과 접촉할 때에만 아이들의 몸은 불안한 긴장 상태와 감정적으로 굶주렸던 세월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매우 실용적이다. 우리가 의식 속에서 사랑을 느끼는 순간 그것은 쓸모가 있게 된다.
사랑이 넘치고 자비로운 사람들,
즉 사랑과 함께 지성을 사용하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가장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이 궁극적으로는 이기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랑이 날마다 그들을 회복시키고 새롭게 해 주기 때문이다.
생명이 충만한 상태
그것이 바로 사랑이고, 자각이 충만할 때
그것은 사랑을 가져다준다.
모든 지성의 충동은 다름 아닌 사랑이라는 생명의 원천으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더욱 높은 차원에서 자각할 수 있으며,
그런 다음 사랑이 단순함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사랑이 하나의 생각이나 회망, 감상일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의 한 부분이자 우리의 생명의 호흡이 될 것이다.
이 책 끝부분에서 말하겠지만, 사랑의 원천으로 다가가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우리의 의식이 자연스럽게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0228~ 0224
출처 > 도서 [마음의 기적] 디팩 초브라 지음 // 도솔 옮김
≪후기≫ 유성 박한곤
마음이 햇빛같이 건강해야 육체의 대지는 시들지 않는다.
마음이나 몸이 혹여 불편할 때
자연의 힘에서 사랑의 정기를 찾아내자.
아침 태양이 동쪽에서 솟아오르기 전에
동녘에서 태양의 태동을 감지할 수 있다.
지구촌의 생명줄 형성이
대기의 옷자락에서
‘밝음’ 으로 변해 오는 신비에서 감지할 수 있는 그 순간.
모든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사랑의 질서 안에서 살아가리라'고만 기도하면
우리의 영혼이 공중부양-空中浮揚됨을 느낄 수 있다.
그 속에 뇌가 만들어내는 전달물질로
힘든 각자의 영혼을 다독여서 달랠 수 있고
하루를 소박한 행복으로 버티기에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