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아파란시스*/ 이건청
이제 나
돌아가고 싶네
300만년 쯤 저쪽
두 손 이마에 대고 올려다보면
이마와 주둥이가 튀어나온,
엉거주춤 두 발로 서기 시작한,
130cm쯤 키의 유인원
오스트라로 피테쿠스 아파란시스
고인류학자들이
최초의 homo속屬*으로 분류한
그들 속에 돌아 가 서고 싶네
학력, 경력 다 버리고
그들 따라 엉거주춤 서서
첫 세상, 산 너머를 다시 바라보고 싶네.
안보이던 세상 산등성이로
새로 뜨는
첫 무지개를 보고 싶네
실라캔스*몇 마리 데불고
까마득, 유인원 세상으로
나, 가고 싶네
그리운,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아파란시스
* 초기 영장류 중의 하나. 한 개체의 화석에서 골편 40% 정도가 수습
되어 발굴 영장류의 대표성이 있음
* homo屬. 현생인류와 그 직계 조상을 포함하는 분류 속.
* 3억 6천만년에서 6천 5백만년의 지층에서 화석으로 발건되는 육
지척추동물의 조상 물고기. 1938년 이후 살아 있는 실물이 발견되
어 충격을 주고 있음
코스모스 꽃밭에서/ 이건청
들판을 가득 채운 꽃들이
꽃들끼리 모여서 무슨 모의를 하는지
꽃밭이 둘레를 키우고
목소릴 엮어
무슨 구호를 이뤄내는 것인지
나는 다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체 게바라도, 피델*도
뒤섞인 꽃들 속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엔 불가능의 꿈을 갖자고*
꽃 하나가
곁의 꽃들을 흔들어 깨우고
다시 옆의 꽃들을 흔들어 깨우면서
깃발이 만들어지고
난만해진 깃발을
펄럭이며 혁명 만세를 외치는
늦가을이
꽃밭을 가로지르며
씨앗들을 다독여주러 오는 걸
보고 있다
늦가을 들판 그득 꽃이 피었다
일제히 흔들린다
만세, 만세다.
산양 / 이건청
아버지의 등 뒤에 벼랑이 보인다.
아니, 아버지는 안 보이고 벼랑만 보인다.
요즘엔 선연히 보인다.
옛날, 나는 아버지가 산인 줄 알았다.
차령산맥이거나 낭림산맥인 줄 알았다.
장대한 능선들 모두가 아버지인 줄만 알았다.
그때 나는 생각했었다.
푸른 이끼를 스쳐 간
그 산의 물이 흐르고 흘러
바다에 닿는 것이라고,
수평선에 해가 뜨고 하늘도 열리는 것이라고
그때 나는 뒷짐 지고 아버지 뒤를 따라갔었다.
아버지가 아들인 내가 밟아야 할 비탈들을
앞장서 가시면서 당신 몸으로끌어안아 들이고 있는 걸 몰랐다.
아들의 비탈들을 모두 끌어안은 채,
까마득한 벼랑으로 쫓기고 계신 걸 나는 몰랐었다.
나 이제 늙은 짐승 되어
힘겨운 벼랑에 서서 뒤돌아보니
뒷짐 지고 내 뒤를 따르는
낯익은 얼굴 하나 보인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쫓기고 쫓겨
까마득한 벼랑으로 접어드는 내 뒤에
또 한 마리 산양이 보인다.
겨우겨우 벼랑 하나 발 딛고 선
내 뒤를 따르는
초식동물 한 마리가 보인다.
새야 / 이건청
새야
작은 새야
손가락
한 매디만 한 새야
풀씨 ㅤㅁㅕㅈ 개 따 먹은 힘으로
피이 피이
우는 새야
새야/ 이건청
오늘은 내 어깨에
기대서서 울지만
내일엔
누구 가슴 찾아가서
울래.
산에게/ 이건청
붉게 타는 단풍 앞에서
내 말은 한갓 허사虛辭일 뿐
붉은 단풍은 붉은 단풍의 진심을
나이테에 새긴다.
나무들이
단단한 나이테를 새겨 넣듯
나도 말 하나 새기고 싶다.
단단한 말,
둥치째 잘려도 선연한 말,
짙고 치밀한 흔적들이
둥글게 둥글게 입을 다문
그런 말 하나 새기고 싶다.
가을에 나무들은 붉게 물든다.
아름드리나무들이
가랑잎을 떨어뜨려 가는
이 소리 없는 시간의 운행…
그리고 먼 산에 새겨지는 나이테,
이 무량의 침묵 앞에서
나는 말을 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