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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오대 십국 시대
오대 십국 시대(五代十國時代, 907년~960년)은 중국 역사에서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부터, 송나라가 건립된 960년까지,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화북을 통치했던 5개의 왕조(오대)와 화중·화남과 화북의 일부를 지배했던 여러 지방정권(십국)이
흥망을 거듭한 정치적 격변기를 가리킨다.
오대 십국의 오대는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를 뜻하며,
십국은 오월, 민, 형남, 초. 오, 남당, 남한, 북한, 전촉, 후촉을 포함한다.
역사
오대 십국 시대가 시작된 해는 당나라가 완전히 멸망한 907년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왕조로서의 당나라는 875년~884년에 걸쳐 일어난 황소의 난에 의해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고,
그 후 장안(長安)을 중심으로 관중 지역을 지배한 일개 지방정권으로 추락하여 주전충과 이극용 등 절도사 세력이 함께
존재하는 난립 상태라고 말할 수 있었다. 여기서는 대략적인 내용을 황소의 난 시점부터 설명하겠다.
당나라 완전 멸망 때까지 - 당나라의 중앙정부는 755년~763년에 일어난 안사의 난에 의해 많은 힘을 잃어버렸다.
이를 틈타 각지의 절도사 세력은 자립성이 강해져 자신들의 임지를 스스로 다스리기 시작하였고, 먼 지방의 절도사중에는 중앙에 대한 납세마저도 거부한 자가 있었다.
이에 대해 역대 황제들은 억제책을 고안해 부분적으로 절도사를 누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절도사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이용했던 환관세력이 도리어 힘을 갖게 되어, 정치에 과도하게 참여하게 되어 황제의 폐립까지 결정하게 되었다.
이런 폐단으로 중앙정부는 절도사 세력을 억누르던 힘이 사라지고, 다시 절도사들이 고개를 들게 되었다.
이러한 상태 속에서 황소의 난이 발발했다.
정부군은 추락할 때까지 추락하여 별로 강하지 않은 황소군에 대해 고전을 면치 못했고, 세간에는 황소군을 전멸시키면
자신들의 입장이 위험해진다는 것을 두려워해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말도 있었다.
황소군은 장안을 함락했고, 황제 희종은 촉으로 도망쳤다.
당의 입장에서 다행스러운 것은 황소군이 장안에서 폭정을 일삼아, 장안 시민의 실망과 분노를 샀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당나라 정부에서는 장안을 회복할 만한 실력이 없었다.
여기서 돌궐 사타족 출신의 이극용과 황소군의 간부였다가 당나라 조정에 투항한 주온(후에 당나라로부터 전충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이 활약하여 장안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해 당나라의 실력이 만천하에 폭로되었고, 황제는 명목상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 상황은 주의 동천(東遷) 이후(춘추시대)나 후한말기 헌제 등의 상황과 비슷하였다.
이 시기 중앙을 두고 다투었던 이들이 변주(汴州;현재의 카이펑)를 중심으로 산동, 하남을 지배한 주전충과 태원을 중심
으로 산서를 지배하던 이극용, 하북을 지배한 유인공이나 섬서 일대를 지배한 이무정 등이다.
그외의 지역에서도 자립한 이들이 많아 후에 10국의 기원이 되었다.
이극용의 군대는 검은색 의복으로 통일하여 이들을 통칭 갈가마귀군(鴉軍)이라 불렸고 전투에 매우 강했지만 횡폭한
행동을 많이 했었다.
주전충은 정략(政略)에 뛰어나 다른 누구보다도 한발 앞섰다.
당조정을 장악한 주전충은 황제를 꼭두각시화하고 907년 협박하여 선양을 받아 후량(국호는 단순히 양(梁)이었다.
[후](後)의 글씨는 후세의 역사가들이 구별하기 위해 붙여진 것이다.)을 건국하였다.
이로써 당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오대
후량 - 주전충이 황제가 된 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를 따르려 하지 않았던 각지의 세력은 스스로도 황제을 자칭했다.
반면 후량과 대립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화남의 여러 나라 중에는 후량에 대해 신하의 예를 갖춘 나라도 있었다.
주전충의 숙적이었던 이극용은 908년에 사망했고, 뒤를 계승한 이존욱(후당의 장종)은 후량에 맹렬한 공격을 시작했다.
후량측에서도 주전충의 실정과 추락이 심해 차례로 영토를 빼앗겼다.
거기에다 주전충이 후계자를 선택하는 것에도 실패해 내분을 초래했다.
이를 지켜본 이존욱은 연왕을 칭하던 유인공을 공격하여 그 나라를 병합했다.
자신감을 가진 이존욱은 923년 당 황제를 자칭하고 이후 후량의 수도를 함락시켜 후량을 멸망시켰다.
후당 - 이극용의 이(李)씨 성은 공적에 의해 당나라로부터 국성(國姓)을 하사받은 것이었다.
이것을 이유로 장종은 스스로가 당나라의 후계자임을 자칭하고 후당을 건국하게 되었다.
후량을 멸망시킨 후, 뒤이어 기왕(冀王)을 자칭한 이무정, 사천을 지배한 전촉을 멸망시켜 영토를 확대했다.
그러나 장종의 생각은 당나라의 위광을 되살리는 것으로 낙양(洛陽)으로 천도하고, 주전충이 폐지했던 군대에 환관을
감찰로서 파견하는 제도를 부활시켜 무장들의 불만을 샀다.
이 불만 때문에 926년 무장들이 이사원(후에 명종)을 옹립하였다.
이사원의 군이 낙양에 육박하자 금군(근위병)들에 의해 장종은 살해당했다.
새로 즉위한 명종은 환관의 배제와 절약 등을 꾀하며 전국 토지의 검사를 실시해 불공평에 대한 시정에 노력하였고,
새로운 재무기관으로 삼사사를 창설했다.
또한 자신같은 유력군인에 의한 찬탈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 직속군인 시위친군을 창설해 금군의 강화를 꾀했다.
이 삼사사는 후에 송나라에도 이어지게 된다.
명종은 오대의 나라들 중에 후주의 세종(시영)에 버금가는 명군이라 칭송받았다.
후진, 후한 - 그러나 명종은 재위 6년(933년)만에 사망했다.
3남 이종후가 뒤를 이었으나 곧 양자인 이종가에 의해 찬탈되었다.
또한 이종가는 권력의 안정을 노려 명종의 사위이며, 실력자였던 석경당을 배제하기에 이른다.
석경당은 이에 대항했으나, 혼자 힘으로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북쪽의 거란에게 원조를 요청하고 그 대가로
연운십육주의 할양을 약속했다. 이에 응답해 거란의 태종 야율덕광은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후당군을 몰아냈다.
936년 즉위하여 후진을 건국한 석경당(고조)은 요나라에게 신종하여 후진은 요나라의 위성국가였다.
중앙의 상황을 본 지방세력은 등을 돌려 남쪽의 오에게 넘어갔고,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도 속출했다.
이 진압에 나섰던 고조는 942년에 병사했다.
후에 조카 석중귀가 제위를 이었는데 그의 즉위는 거란에 대한 강경파가 주도한 것이라 거란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946년 거란(다음해 국호를 요나라라고 하였다)의 태종은 다시 친정에 나서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후진을 멸망시켰다.
요나라는 이때부터 중국을 지배하에 두려고 하였으나, 만족(蠻族)과 같이 천시하던 거란족에게 지배 당하는것을 싫어한
카이펑의 주민들은 저항하고, 또 거란의 본토에서는 중국지배에 대해 반대의식이 강하여 곤란함을 깨달은 태종은 북쪽
으로 돌아갔으나 도중 병사했다.
이것을 방관했던 석경당의 예전 측근인 유지원은 자신의 임지였던 태원에서 947년에 즉위해 후한을 건국하고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947년 카이펑을 점령했다.
그러나 유지원은 다음해 사망하고, 차남 유승우가 뒤를 계승했다.
유제를 보필하게 된 측근들은 후한의 유력자들을 배제하는 데 노력하여 차례로 군인들을 주살했다.
반란 진압에 나섰기에 이를 모면한 추밀사의 곽위는 스스로도 숙청을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고 병사을 일으켜
카이펑을 점령하고, 자신을 주살하려던 측근들을 모두 없애버렸다.
그후 한때 유승우의 사촌이었던 유빈을 옹립하였으나 생각을 고쳐 풍도를 시켜 유빈을 살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여 후주를
건국했다. 유빈의 아버지 유숭은 북쪽에서 자립하여 북한을 건국하였다.
십국
10국중 가장 강력한 국가는 중국에서도 가장 풍요로운 지대에 자리잡은 오라고 할 수 있다.
건국자인 양행밀은 양주(揚州)일대을 장악하고, 북쪽의 후량과 호각지세를 이룰 정도로 세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오나라는 양행밀의 사후, 휘하의 서온(徐温)의 힘이 커지면서 최후엔 서온의 양자 서지고(徐知誥)에 의해 찬탈
당한다.
서지고는 찬탈 후 이승이라고 이름을 바꿨고, 당나라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며 국호을 당이라고 하였다.
후세 역가사들에 의해 이 나라는 남당이라 불리게 되었다.
같은 시기 남쪽 절강 지역에는 오월이 세력을 확장했다. 건국자인 전류(銭鏐)는 소금 밀매상의 신분에서 일어나 절강
일대를 장악했다.
북쪽의 강력한 오나라, 남당과 대치했기에 항상 화북의 오대의 나라들에게 신종하면서 오나라, 남당에게 대항했다.
오월의 남쪽 복건성지역에는 절도사 왕심지가 이 지역을 장악하고 민(閩)을 건국했다.
왕심지는 내정에 힘써 복건지역의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왕심지 사후 내분이 일어나 이 기회를 틈타 침략한 남당에 의해 945년 멸망하였다.
호북성에선 형남(남평), 호남성에선 초, 광동성에서는 남한 이 할거했다.
형남은 10국 중 가장 최소국으로 주변 여러나라 전부에게 신종하여 교역의 중계점으로 번영을 누렸다.
초나라는 차의 교역으로 번영한 국가로 건국자 마은의 치세에는 경제적으로 부유했으나 사후 내분사태에 빠져 951년
남당에 의해 멸망당했다.
남한의 통치자 유씨는 아랍계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궁정은 오대 십국의 전란속에서 유일하게 문관의 힘이 강했다.
그러나 후기에는 그의 정치도 몰락하고 환관정치로 변질되었다.
사천성은 양주와 함께 부유한 나라였기에 천부(天府)라 불렸다. 이곳에서 할거한 나라는 전촉, 후촉의 정권이었다.
전촉의 건국자 왕건은 원래 소금 밀매상이었으나 사천성에 들어와 이곳을 장악하고 이땅의 풍부한 산물을 바탕으로
문인의 보호와 경서의 인쇄를 진행하는 등 문화적인 정책을 실시했다.
전촉은 925년 후당에 의해 멸당한다.
그후 이 땅에 부임한 무장 맹지상이 자립하여 후촉을 건국했다.
후촉도 전촉과 마찬가지로 문화진흥에 힘을 기울였고, 특히 당나라 말기부터 당대까지의 사(詞)를 모아 화간집(花間集)을 편찬한 것은 이 시대의 문화를 전하는 데 커다란 공헌이다.
중원의 오대왕조는 구 당나라 왕조 영역의 6할을 차지했으나, 국내정세의 불안정에 더해서 거란 등의 외적이란 요소도
포함되어, 10국의 평정에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불안정하게 세력균형이 유지되어갔다.
다만 오대 최후의 왕조 후주가 형남, 남당의 영역을 잠식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균형은 일거에 무너지게 되었다.
후주 - 즉위한 태조 곽위는 내정에 뜻을 두고, 형벌의 완화와 자작농의 양성 및 세제의 불공평을 시정하는 등의 정책을
펼쳐 연이은 전란에 황폐화된 중원의 부흥에 나섰다.
이렇게 축적된 힘을 바탕으로 천하통일의 대망을 품게 된 이가 954년에 즉위한 시영(후에 세종)이었다.
세종은 오대의 국가중 가장 훌륭한 명군으로 칭송받았던 인물이다.
세종이 즉시 실시한 것은 자립성이 강한 군인들을 억누르는 것이었다.
군인들을 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시위친군이 강대화 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분할하여 전전군(殿前軍)을 창설하
였고, 이를 강화하여 절도사 및 금군사령관도 황제에게 대항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 병력을 바탕으로 남당, 후촉, 북한, 요나라등을 공격해 영토의 일부를 빼앗았다.
그중에서도 남당에게서 빼앗은 토지는 소금의 산지로서 가장 중요한 지역도 포함되었기에, 이 땅을 차지한 것은 남당의
생사여탈권을 장악한 것이라 말해도 좋은 것이었다.
또한 군사비를 모으기 위해 폐불운동을 진행했다.
중국에서는 삼무일종의 법난이라 일컫는다.
당시는 세금을 피하기 위해 비과세인인 승려로 가장하는 사람이 많았고, 이들을 가려내 징세를 실시한다면 막대한 수입이 들어오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또 화폐를 주조하는 동이 부족했었기에 불상 등을 녹여 재이용해 [주원통보](周元通寶)라고 일컫는 동전을 주조하였다.
이렇듯 세종은 통일을 향해 착착 일을 진행해 갔으나 959년 원정에서 돌아오던 중 병사하고 말았다.
송나라 - 세종의 뒤를 계승한 사람은 겨우 7살의 시종훈이었다.
이 상황을 보고 북한은 요나라의 후원을 얻어 후주를 침공하였다.
이를 막기 위해 나선 인물이 세종의 제일 측근이었으며,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금군사령관)이었던 조광윤(후에 송나라
태조)이었다.
어린 황제를 모시고, 요나라와 싸우는 것에 불안을 느낀 군인들은 도중에 조광윤을 강제로 옹립하였다.(진교의 변)
수도에 돌아온 조광윤은 시종훈을 보호하며 선양을 받아 송나라를 건국하였다.
오대에서는 선양은 이렇듯 자주 일어났었고, 양위를 물려준 황제는 뒷날 일어날 역습을 우려해 죽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광윤은 시종훈을 죽이지 않았고, 시종훈의 자손은 남송의 멸망 때까지 두터운 보호를 받았다.
태조는 이때까지 군인이 정치를 맡았던 오대의 경향을 고치고 문치주의를 내세웠다.
과거의 정비 및 지방군대의 약체화와 중앙군의 강화, 절도사직의 무력화 등을 진행해 내부를 튼튼하게 한 태조는 후주
세종의 노선을 물려받아 통일에 대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즉 963년 중국대륙의 가장 중요한 요지라 할 수 있는 호북성의 형남을 합병했다.
그때 10국은 동서로 분열되어서 단결하여 송나라에 대항하는 것이 어려웠다.
뒤이어 965년에 사천성의 후촉을 병합하고 이땅의 풍부한 물산을 빼앗아 전쟁 비용을 보충하고 971년 광동을 지배하던
남한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975년 화남에서 최대세력을 자랑하던 남당을 멸망시키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북쪽의 북한과 남쪽의 오월뿐이었지만 태조는 당돌에서 병사했다.
이 죽음에 태조의 동생이며, 2대 황제 태종이 된 조광의에 의한 독살의혹이 있었다.
(천극불결의 의) 태종은 태조의 방침을 이어받아 통일을 진행해 978년 오월을 멸망시키고, 979년 북한을 멸망시킴으로써
천하통일을 완성하였다. 당나라 멸망 후 약 70년 만의 일이었다.
경제
오대 십국 시대는 심심찮게 각종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세금을 징수하는 관리들이 있었다.
어떤 탐관오리는 자신이 타 지방으로 발령될 때 백성들이 휘파람을 불자 몇 개월후 다시 돌아와서 휘파람세 수백 냥을
징수했다고 한다.
13-2 요
요(遼, 916년 - 1125년), 거란국(契丹國) 또는 카라 키탄(Kara Khitan)은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를
중심으로 중국 북쪽을 지배한 왕조였다.
초대 황제는 야율아보기이다. '요'는 중국식 국호이고 '카라 키탄'은 대거란이라는 의미로, 거란인들이 스스로를 가리킨
명칭이다. '키타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이란식 이름이다.
938년에 요(遼)는 지금의 북경에 두 번째 수도를 건립했고 그것을 남쪽의 수도라는 뜻인 남경(南京)으로 불렀다.
요나라는 남경 석진부(南京析津府), 즉 연경(燕京)과 이전의 중경 대정부(中京大定府)와 상경 임황부, 개봉 등의 수도가
있었다.
역사
거란의 8부족은 9세기말 당나라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발흥하기 시작하였다.
916년 질라부(迭刺部)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모든 부족을 통합하여 거란국을 세웠다.
야율아보기는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여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를 도읍으로 한 후 서쪽으로는 탕구트·위구르 등 여러
부족을 제압했고, 동쪽으로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킴으로써 외몽골에서 동만주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했다.
2대 황제인 태종 때에는 주로 중국 경략에 국력을 쏟아부었다.
936년 후진(後晉)의 건국을 도와준 대가로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획득하고 국호를 "요"(遼)라 하였다. 946년 후진을
멸망시켜 대량일대 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요나라의 가혹한 통치는 현지 주민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결국 중국의 통치에 어려움을 느끼고 철수하였다.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불안한 정국이 이어지다가 성종(聖宗) 때에 들어서 안정을 되찾았다.
성종은 송(宋)을 공격하여 1004년 전연의 맹(澶淵之盟)을 맺고, 송에서 받는 세폐(歲幣)로 재정을 확충했으며, 송과 무역
하여 경제적·문화적으로 국력이 융성하게 되었다.
또한 성종은 정치조직과 군사조직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공포하는 등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었다.
이때 고려와 북만주의 여진을 침략하여 동북아시아의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성종 이후인 흥종(興宗)·도종(道宗) 때 황실의 내분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한 가운데 요나라는 동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 완옌부(完顔部)의 추장 아구다(阿骨打)가 세운 금나라(金)와, 연운
16주를 되찾으려는 송의 협공을 받아 1125년 황제 천조제(天祚帝)가 사로잡힘으로써 멸망당했다.
요나라가 금나라에게 망해가던 이때 요나라 황족이었던 야율대석(耶律大石)은 서쪽으로 망명하여 중앙 아시아 지역에
서요(西遼)를 건국했다.(하지만 120년 만에(금나라와 비슷하게) 징기즈칸에 의해 멸망한다.)
통치 구조
요나라는 점령지의 중국인과 발해인 등을 통치하기 위해 북면관(北面官)·남면관(南面官)이라는 2중 지배 체제를 만들어
냈다.
중국인과 발해인 지역을 통치하는 남면관에서는 당(唐)식의 군현제도를 그대로 모방했고,
북면관에서는 내륙 아시아의 초원지대에 살고 있던 유목민을 거란족의 관습법으로 다스렸다.
거란족 지배자들은 중국인 고문을 두고 중국식 행정기술을 본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부족적 주체성이 흐려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 부족 고유의 의식·음식·복제 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한자를 쓰지 않고 거란 문자를 고안해
냈다.
13-3 서하
서하(중국어: 西夏 병음: Xī Xià)또는 미냑(Minyak)은 1032년에서 1227년까지 중국 북서부의 간쑤 성(甘肅省), 산시 성
(陝西省)에 위치했던 티베트계 탕구트족의 왕조이다.
전성기에는 북으로는 고비 사막, 남으로는 난주, 동으로는 황허, 서로는 옥문에 이르는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서하는 탕구트 유목민들이 간쑤 성, 알라샨, 오르도스에 세운 나라이다.
탕구트인들은 티베트 종족에 속했으며 국교는 불교였고 중국의 영향으로 문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되어 있었으며
한자에서 파생된 문자 서하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국호
탕구트족은 자신의 나라를 "크고 높은 나라"(phiow¹-bjij²-lhjij-lhjij², 大白高國)라고 불렀었다.
당나라는 탕구트족을 평하부(平夏部), 남산부, 동산부로 나누어 지배하였다.
9세기 후반 황소의 난 당시 평하부의 탁발사공(拓跋思恭)이 장안의 수복에 결정적 기여를 하여 당나라로부터 황실의 성
(姓)인 이(李)씨를 하사받고, 하국공(夏國公)으로 봉해진다.
1005년 송나라의 공격을 막아낸 덕명(德明)은 송나라와 화의하고 송 황실로부터 조(趙)씨 성을 하사받고 은주, 유주
절도사의 직책을 받는다. 1038년까지는 송나라의 신하국이었다.
서하의 송나라 침입
1038년 서하의 원호(元昊)가 조씨 성을 버리고 탕구트어에 의한 성으로 바꾸며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나라의 이름을 대하(大夏)로 정해 고대 중국 하(夏)나라의 계승을 자처하였고 연호를 천수예법연조(天授禮法延祚)로
고쳤다.
서하 문자를 제정하고 관제를 확립하는 등 독립국가의 면모를 갖추려 하였다.
서하는 송나라에게 동등한 관계를 요구하였으나 송나라는 서하 황제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1041년 서하군이 송나라 영토 근처에 집결해 호수천에서 양국 간 전투가 벌어졌는데, 송군이 패배해 전사자가 1만 3천 명
에 달했다.
그 후 2년 여간 전쟁이 계속 되었는데, 송나라와 요나라가 강화를 맺고 서하의 병사와 백성들이 느끼는 전쟁의 피로가
커지는 등 전황이 서하군에 유리하지 않게 되자 서하에서는 송나라에 강화를 요청했다.
송나라는 서하와 요나라와의 동맹을 우려하여 서하의 강화 교섭을 받아들였다.
1044년 송이 서하에게 매년 조공을 바치는 대신 서하에서는 송나라의 황제를 인정하고 신하의 나라가 되는 조건의 강화를
맺었다.
그래서 서하의 황제는 하국왕(夏國王)에 봉해졌고, 송나라는 평화유지를 위해, 사실 상 공물에 해당하는 비단 13만 필,
은 5만 냥, 차 2만근을 매년 서하국에 보내기로 하였다.
이후 서하는 송나라 및 화북 지역에 있던 내륙 아시아인인 거란족의 요나라(遼)나라와 불안한 3국관계를 유지했다.
서하는 송의 관제를 모방했으며, 독자적인 문자를 제정했다.
중국과는 달리 불교를 열렬히 신봉하여, 불교를 국교로 삼았다.
서하의 멸망
서하의 정치 상황은 갈수록 부패가 만연하고 경제 사정은 열악해져 갔다.
게다가 1202년부터 서하는 당시 국력이 신장하고 있던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의 침략을 6번이나 받게 된다.
이를 명목으로 1206년 이안전은 환종 이순우를 시해하고 왕을 자처하였다(양종).
그런 만큼 이안전은 몽골의 침임에 대비해 군사력 증강에 힘썼다.
그러나 그러한 보람도 없이 1207년 몽골의 대대적인 침입에 수도가 함락될 위기에 놓였고, 결국 이안전은 몽골에의
복속을 약속하고 자신의 딸을 보내 칭기즈 칸과 혼인시켰다.
이후 서하는 몽골의 명령을 받아 금나라와 오랜 전쟁을 치렀는데 이는 양국의 국력을 쇠퇴하게 하였다.
1211년 이준욱이 반역을 일으키자 양종은 퇴위하였으며 그 해 사망했다.
금(金)과의 오랜 전쟁으로 서하(西夏)의 국력은 급속히 쇠퇴했으며, 1226년에는 칭기즈 칸의 서정(西征) 참가를 거부하여
분노를 샀고 다시 몽골의 침입을 받았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과 국력의 소모 뒤, 결국 서하는 1227년 칭기즈 칸의 몽골군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서하를 점령한 칭기즈칸은 대대적인 민족 학살을 실시했는데, 이는 서하의 저항이 끈질겼기 때문에 칭기즈칸을 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중국 국영 CCTV의 보도에 따르면, 칭기즈칸은 서하인을 매우 철저하게 살육해서 거의 멸족시켰기 때문에 현재까지
서하인의 후손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한다.[1]
언어와 문화
서하(西夏)는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를 사용했는데, 탕구트어라고도 부르는 서하어(西夏語)는 중국티베트어족의 티베트
-버마어파에 속하며, 1036년에 공포된 서하문자(西夏文字)는 한자(漢字)와 마찬가지로 1자가 1음절 곧 1낱말을 나타내는
표의문자였다.
서하문자(西夏文字)로 <논어(論語)>, <맹자(孟子)>, <손자병법(孫子兵法)> 등의 서적이나 불경을 서하어로 번역하였고,
<신집금쇄장치문(新集金碎掌置文)>, <신집금합도(新集錦合道)> 등의 문학 작품도 전해진다.
그리고 인쇄국(印刷局)인 각자사(刻字司)를 두어 문자 보급을 위해 단어집(單語集)이나 음운조직(音韻組織)을 정리한
운서(韻書) 등의 서적을 출판하였다.
몽골에 의해서 멸망당한 후 서하의 민족과 언어는 절멸(絶滅)됐으나, 이들 서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서하 문자(西夏文字)는 오늘날에 와서 그 발음이나 의미가 파악되고 있다.
특히 서적 중에는 불경이 많은데 그 가운데 대부분은 한역 불경의 번역이므로 한자 문헌과의 대조가 가능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서하문자의 해독의 진행되었다. 지금은 완전히 해독되고 있다.
서하(西夏)는 비단길을 통한 동서 교역을 매개하며 무역의 이익을 독점하며 크게 세력을 넓혔다.
그리고 송(宋)과 활발히 교역하며 농경과 유목, 한족(漢族) 문화와 탕구트(Tangut) 고유 문화가 결합된 문화를 발전시
켰다.
닝샤 후이족 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의 인촨(銀川) 서쪽의 허란산(賀蘭山) 기슭에서 발견된 서하(西夏) 왕릉에는 9개의
황제릉을 포함해 250여 개의 묘지가 분포해 있는데, 서하(西夏) 문화의 특징을 알려주는 수많은 유물과 부장물들이 출토
되었다.
특히 서하왕릉의 능탑(陵塔)은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불릴 정도로 웅장하면서도 독특한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또한 서하(西夏)는 불교가 발달해 카라호토(黑水城, Kara Khoto)와 둔황(敦煌) 일대에 회화와 탑 등의 불교 미술 작품들을
남겼다.
불교를 국교화하여 국가에 화상공덕사(和尙功德司), 출가공덕사(出家功德司)라는 관청을 설치했고, 각지에 절이나 탑을
세우고 불교 경전을 서하어로 번역하여 보급했다.
13-4 금
금(金, 1115년~1234년) 또는 아이신 구룬(Aisin Gurun)은 여진족 완안아골타가 세운 왕조로 1115년 아골타가 국호를 대금
(大金), 연호를 수국(收國)이라고 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면서 정식으로 금나라가 역사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수도는 북송 시대에는 상경 회령부, 남송 시대에는 중도(中都)였으며, 몽골의 침략 이후로 수도를 카이펑으로 천도했다.
1125년에 여진의 금(金)왕조는 거란족의 요를 합병(거란족 중 왕족의 한 명인 야율대석은 거란족을 포섭해서 서요를 세우
나 징기즈칸에 의해 망한다.)하고 1153년에 수도를 요(遼)의 남경으로 이동하여 이곳을 중앙수도인 중도(中都)라고 불렀다. 1215년에 몽골이 중도를 불태우고 1237년에 중도 북쪽에 대도(大都)를 건설하였다.
금나라 건국 이전에 여진족들은 지금의 만주 헤이룽장 성에 거주하던 말갈족이었다.
여진족이라는 표현은 10세기 여진족 언어의 "여진"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이 단어의 기원은 현재 학계에서 합의되지 않은 상태이다.
요나라의 지배(동단국)를 받았다.
하지만 요나라의 지배가 약화되면서(지리적 요건과 시간적 요건(오대 십국시대)) 여진족들은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결국 여진족들은 거란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1115년 완안아골타라는 뛰어난 지도자가 등장해 부족을 통합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며 금나라를 건국했다.
2대 태종 때인 1125년에는 송나라와 동맹을 맺고 요를 협격하여 만주지역으로부터 요를 멸망시켰다.
1126년에 송나라의 수도 카이펑을 점령하자 이들은 권력을 잡게 되었다.
여진 군대는 장강까지 남하하였으나 회하 부근에서 저지되고 남송은 일단 국경을 방어하게 되었다.
그러나 금나라는 송나라와의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자 송나라 수도였던 허난 성의 카이펑을 공격하여 1127년에 송나라의
상황 휘종과 황제 흠종 등을 사로잡고 송나라를 강남으로 밀어냈다.
여진 부족들은 전쟁에 뛰어났으나 정착하여 수십 년을 지내게 되자 점차 스스로 유목 정체성을 잃게 되었다.
결국 이들은 중국 한족과 혼인하기 시작하였으며 남송과의 평화를 공고히 하였다.
금나라의 지배자들은 유교 이념을 따르게 되었다.
1189년에 금나라는 몽골과 남송을 상대로 두개의 전선에서 싸우게 되었다.
제8대 선종(재위 1213년 ~ 1223년)은 1214년에 몽골군의 공격을 받고 이를 피하여 도성을 베이징에서 카이펑으로 옮겼다.
1234년 제9대 애종은 몽골, 남송 연합군의 추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살함으로써 금은 건국 120년 만에 멸망하였다.
13-5 송
송(宋, 960년~1279년)은 중국의 옛 왕조이다. 960년 조광윤이 오대십국 시대 오대 최후의 왕조 후주로부터 선양을 받아
개봉(카이펑)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웠다.
국호는 송(宋)이었으나, 춘추시대의 송, 남북조 시대의 송 등과 구별하기 위해 황실의 성씨를 따라 조송(趙宋)이라고도
부른다.
통상 1127년 금나라의 확장에 밀려 장강 이남으로 옮기기 전을 북송, 이후 임안(지금의 항저우)에 도읍을 옮긴 것을 남송이라고 불러 구분하였다.
북송·남송 모두 합쳐 송, 송 왕조라고도 한다.
수도는 개봉(開封, 또는 변경), 남쪽으로 옮긴 후 실질적인 수도는 임안(臨安)이다.
훗날 원나라에게 멸망당한다.
세계 최초로 지폐를 발행한 정권이며, 상비 해군을 설치한 최초의 중국 왕조이다.
문치주의 국가로 사대부 사명 의식이 있었다.
또한 이전의 왕조들과는 달리 철권폭정을 하지 않고 문화 정치를 폈다. 시대적으로 북송과 남송으로 나뉜다.
이 시기 당나라 시대부터 크게 발전된 괭이 등의 농기구를 배경으로 점성도(占城稻)라는 안정성이 있는 조도(早稻)가
도입되어 쌀과 보리의 이모작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농업으로 인해 북송시대의 인구는 약 1억 명에 달했을 것이라 추정되었다.
송나라는 예술, 사상 및 각종 실용기술의 발달이 두드러져, 문화적으로 풍요롭던 시기였다.
제지, 인쇄기술의 향상과 시민경제의 발흥으로 인해 이때까지 일부 관료, 귀족에게 독점되던 문학, 사상 등이 시민 사이
에서도 활발하게 발전해 나가게 되었다.
역사
북송 - 후주(後周)의 전전도점검(殿前都点檢;근위군 대장)이었던 조광윤(趙匡胤)이 후주 최후의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하였다.
조광윤은 중국의 분열상태 종식을 목표로 삼았으나, 도중에 병사했다.
동생 조광의(태종 조광의)가 뒤를 이어 형의 사업을 물려받아 중국의 통일을 이루고, 과거제도의 충실을 기도했다.
과거제도는 태종의 아들 진종(眞宗)시대에 완성되었다.
과거제도의 확립은 황제 독재권의 확립을 가져왔고, 동시에 과도한 문관우대로 인해 군사력의 쇠퇴를 불러왔다.
1004년 북쪽의 요나라가 남하하자 진종은 요나라에 대해 매년 재물을 보내는것으로 화의를 맺었다.(전연의 맹약(澶淵之盟)또한 요나라의 침공과 동시에 서쪽의 탕구트족은 서하라는 이름의 나라를 세워 송나라에 반기를 들었으나, 이것도 1044년
재물을 보내는 것으로 화의를 맺었다(경력의 화약(慶暦和約). 그 결과 획득한 평화를 토대로 경제적 발전이 촉진되었다.
그러나 국방비의 증가와 대상인, 대지주 증가로 일어난 세수(稅收) 감소 등에 대해 개혁이 촉구되어 6대 황제 신종(神宗)은 왕안석(王安石)을 등용하여 국정개혁에 나섰다.
이 움직임은 왕안석의 신법(新法)이라 불리었고, 주로 영세농민의 보호와 대상인, 대지주의 억제를 목표로 했으나, 신법은 지주, 상인세력과 그쪽 출신인 관료(구법파(舊法派)의 대반대에 부딪혔다.
이들의 다툼은 나날이 격렬하게 증가하여 서서히 송나라의 국력을 기울게 하였다.
이때쯤 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은 1115년 스스로 금나라를 세웠고, 송나라는 금나라에 대해 함께 요나라를 공격하자는
약속을 맺었고(해상의 맹세), 1121년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송이 금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요나라의 잔당과 손을 잡은 사실이 드러나 금나라의 분노를 사서 1127년 카이펑이
공격당해 함락되고 황제 흠종(欽宗), 태상황(太上皇) 휘종(徽宗)을 북쪽으로 사로잡아 갔다(정강의 변(靖康之變).
흠종의 동생이었던 조구(趙構)는 남쪽으로 천도하여 임안(현재 항주)에서 황제를 선언하여 고종으로 즉위하였다.
이 이후부터 송나라는 남송이라고 불리었다.
남송 - 조구는 1127년 임안(현재 항저우)에서 즉위하여 고종(高宗)이 되었고, 송나라를 재흥했다.
처음엔 악비(岳飛)등의 활약으로 인해 금나라에게 강력하게 저항했으나, 진회(秦檜)가 재상으로 취임하면서 주전론
(主戰論)자들을 누르고 금나라와 화평을 맺고, 악비는 살해되었다.
진회의 사후 금나라의 4대 황제 해릉왕(海陵王)이 침공을 개시했으나, 금나라의 황족 완안옹(完顔雍)이 해릉왕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해릉왕는 죽고 완안옹은 금나라의 금 세종(世宗)이 되어 송나라와 화평을 맺었다.
같은 해 고종은 퇴위하여 상황이 되고, 양자인 조진(趙慎)이 즉위하여 효종(孝宗)이 되었다.
효종시대 송나라와 금나라의 관계는 안정되어 평화가 찾아왔다. 효종은 불필요한 관리의 숫자를 줄이고, 당시 남발기미가 보이던 회자(會子;지폐)의 절제 및 농촌의 체력회복, 강남경제의 활성화등 여러가지 개혁을 추진해 남송은 번영을 구가
하게 되었다.
그러나 효종이 1189년 퇴위하여 상황이 되고, 조돈(趙惇)이 즉위하여 광종(光宗)이 되었으나, 한탁주(韓侂冑) 등에 의해
광종은 퇴위당하고 반대파의 대량 탄압을 일으켰다(경원의 당금(慶元の党禁).
이 시기 주희(朱熹)의 주자학(朱子學;당시 도학(道學)이라고 불렸다)도 거짓학문이라고 탄압받았다
(경원위학의 금(慶元偽學の禁)).
한탁주는 금나라가 타타르 등의 침입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북벌을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1207년 금나라의 요청으로 한탁주는 살해되고, 그의 머리는 소금에 절여져 금나라로 보내지는 것으로 금나라와 화의를
맺었다.
1233년 몽골 제국이 금나라의 수도 개봉(카이펑)을 함락하자, 남쪽으로 도망친 금나라 최후의 황제 애종(哀宗)을 송나라군
과 협력하여 사로잡아 1234년 금나라는 멸망했다.
그후 송나라군은 북상하여 낙양(洛陽)과 카이펑을 회복하였으나, 이것은 몽골과의 조약위반이 되었기에 몽골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투는 일진일퇴를 거듭했으나, 쿠빌라이가 양양(襄陽)을 함락하면서 남송은 더이상의 저항할 힘이 없어져 1276년 몽골의 장군 바얀에 의해 수도 임안이 점령되면서 사실상 송나라는 멸망했다.
남쪽으로 도망쳐 철저항전을 계속했던 일부 황족, 관료, 군인들도 1279년 광주만(廣州灣)의 애산(厓山)에서 원나라군에게
격멸당해 이것으로 인해 송나라는 완전히 멸망하였다(애산 전투).
사회,문화
사회 - 당나라가 각지에 군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절도사의 할거를 허락하여 이윽고 오대십국시대의 전란으로까지
이르는 것을 교훈삼아, 송나라는 과거(科挙)를 본격적으로 운영하여 명실공히 문신 관료제, 문치주의가 완성되게 되었다.
황제가 사대부출신의 관료를 수족으로 사용하여 국정을 맡기는 체제는 황제전제, 군주독제라고도 칭한다.
수나라의 문제에 의해 시작된 과거제도였으나, 과거가 실제적인 의미로써 효력을 발휘한 것은 송나라 때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송나라 시대에는 역대 어느 시대보다도 매우 왕성하게 과거제도가 이루어진 시기여서 거의 3년에 1번 시행하였고,
1번에 약 3~400명이 합격하였다.
송나라의 군사제도는 위병제(傭兵制;모병제)였다. 태조는 금군(禁軍)의 제도를 고쳐 전군의 사령관직을 폐지하고 황제
직속으로 그 하부의 존재로써 장군을 사용하지 않았다.
상비군은 북송 중기에 140만 명에 달했으나, 숫자만 많을 뿐 실전 경험이 별로 없는 불안한 병사가 많았다.
사료에서도 중국 통일후의 송나라군의 전력(戰歷)은 승리한 전투가 압도적으로 적었다.
또한 보병이 주축이 되었기 때문에 기병을 주력으로 한 요나라 및 서하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많은 피해를 입었다. 또 140만에 달하는 막대한 병사를 고용하기 위해 쓰이는 군사비나 외세(요나라, 서하, 금나라 등)하고 평화유지를 위해
많은 세페를 바쳐야했기에 국가예산을 지속적으로 압박했다.
거기에 더해서 문인중시주의 때문에 무인은 매우 경시되어 중국 속담에서는 '좋은 철은 못에 없고, 좋은 인간은 군대에는
없다'라는 말이 나돌았다.
결과적으로 병사를 모집하기 위한 것에도 고생이 많아, 병사들은 죄인출신자 및 품행이 좋지않은 자들로 구성되어 채워
지게 되었기에 사기 및 규율도 낮아지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또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 병사들에게는 모두 문신이 실시되어 일반 백성들과 구별하게 하였다.
당나라 때까지는 도시는 밤이 되면 문을 닫고, 도시안의 각 지구도 출입을 금지하였으나, 송나라대에 이르러서는 이것을
폐지하여 카이펑은 밤에도 도로상에 상점이 빼곡히 들어섰고, 도시에는 사람의 모습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졌다.
문화 - 초기에는 [사대서](四大書)라 총칭하는 대부분의 서책 편찬이 차례로 이루어졌다.
송나라에 이르러 문학은 당나라 중기의 고문운동(古文運動)을 물려받았다.
이 흐름에는 구양수에 의한 송문학의 주류가 되어, 당송팔대가라 불리는 명문가가 활약했다.
팔대가 이외는 황정견, 범중엄, 사마광 등의 이름이 열거된다.
한시(漢詩)에서는 당나라대까지의 서정시에 비해 매우 일상적이고 평이한 서사시(叙事詩)가 나오게 되었다.
또 당나라말기에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한 사(詞)의 분야도 이 시기에 융성을 맞이했다.
역사분야에서는 신당서,신오대사, 그리고 사마광에 의해 편년체로 기술된 자치통감이 있다.
과거제도의 융성으로 인해 지식인은 대부분 완전히 유교를 기초로 한 인물들이 많아 송나라는 역대 어느 왕조보다도
유학(儒學)이 강했던 시대였다.
그 유학중에도 도학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학문이 시작되었는데, 후에 주자(朱子)에 의해 집대성된 주자학이 바로 그것
이다.
불교는 경사업이 진행되었으나, 이 경전의 대부분은 당시 말기였던 인도의 불교상황의 영향을 받아 거의 밀교에 속하는
경전이었다.
당나라 시대까지 이어진 강학중심의 불교는 송나라대에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실천적인 교의를 가진 선종과 정토교가
융성하게 되었다.
선종은 이 시대에 중국에서 한국과 일본에 전해져 두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도교는 황실과 인연을 맺어 크게 번영하였다. 또 민간도교였던 진대도교, 태일교, 전진교 등이 이 시대에 나타났다.
송나라 시대는 수묵화, 산수화 분야의 발흥기라 할 수 있어 다수의 작품이 그려졌다.
송나라 시대의 화단에는 2종류의 흐름이 있어 조정이 만든 한림도화원이라 불리는 국립미술 아카데미 속에서 태어난
원체화(院体画)와 민간의 사대부에 의해 생긴 문인화(文人画)등 2개가 바로 그것이다.
또 책의 분야에서는 송나라의 4대가라 일컬어지는 소철, , 황정견, 채양 4사람을 열거하는데, 휘종과 그의 재상이던 채경도 포함될 수 있다. 휘종은 금체라고 불리는 필체를 만들기도 했다.
도자기 분야에서는 현재도 도자기 마을로 유명한 경덕진이 청백자의 생산을 계기로 일대 생산지가 되었던 시기였다.
경제 - 이 시기에 이르러 강남의 경제력은 압도적으로 성장하여 화북은 소비사회로써 강남에서 올라온 식료품으로 지탱
하는 상황이 되었다.
송나라는 농업, 상업상에서 현저한 변혁이 보인 시기였고, 송나라의 경제력은 매우 높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요나라와의 단연의 맹세에 지불한 것으로 알려진 재물은 비단 20만필, 은 10만량이라고 알려진 액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거액임에는 틀림없으나(은은 일괄적으로 보면 약 11톤), 진종이 봉선의식을 거행할때 사용한 비용은 단연의 맹세에 지불한 액수의 60배에 달한다고 한다.
중국 인구는 전한말기이후 전쟁으로 인해 증감을 되풀이하여 인구는 6천만 명을 넘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북송 때에 이르러 6천만 명을 돌파하고 1080년의 계산으로는 9천만 명에 이르렀다.
그 이후 1억을 한계점으로써 청나라 시대까지 감소와 증가를 다시 되풀이하게 되었다.
이 거대한 인구를 지탱한 것은 새로운 농업이었다.
당나라 때부터 크게 발전된 괭이 등의 농기구를 배경으로 남쪽의 베트남에서 전해진 점성도라 불린 안정성이 있는
조도가 도입되었고, 또한 쌀과 보리의 이모작이 확대되었다.
중국 전역의 경제의 중심점은 이 시기부터 확실히 화북에서 강남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거기에 지역에 따라 차, 과수, 양잠 등의 생산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농업의 분업화가 진행되었다.
식료의 증산에 따라 이것을 운반하기 위한 수운(水運)도 빠르게 발달하였다. 매우 세밀한 운하망이 구축되어 운하는 전국
의 ¾ 지역을 망라했다.
수도 카이펑은 이 운하를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한 도시였기에 내부를 운하로 관통할 수 있었다.
또 이때까지 경시했던 해운기술이 대폭적으로 향상되어 정크선이 개발되어 일본, 고려부터 동남아시아, 인도에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무대로 교역망이 발전하게 되었다.
물자의 증산과 교통망의 정비는 상업을 활발화시켰다. 상인길드가 탄생하고, 상업형식이 정비되었다.
이것과 함께 약속어음이 운용되어 사천, 섬서지역에서는 세계 최초의 지폐라 할 수 있는 교자(交子)가 발행되어 유통
되었다.
과학기술 - 송나라 때에는 경제발달과 함께 각종 실용기술도 발전하여 방위자석이 발명되었다.
또 화약, 인쇄기술도 본격적으로 운용되어 사회 각 방면에서 이용되었다. 제지, 인쇄기술의 향상과 시민경제의 발흥으로
인해 이때까지 일부 관료, 귀족이 독점하던 문학, 사상 등이 시민들 사이에도 퍼져나가게 되었다.
13-6 북송
북송(北宋, 960년 ~ 1126년)은 중국의 왕조 중 하나이다. 조광윤(趙匡胤)이 오대 최후의 왕조 후주에게서 선양을 받아
개봉(開封)에 도읍하여 세운 나라이다.
국호는 송이었으나, 금나라에 의해 개봉에서 쫓겨나 남하한 뒤에는 남송과 구별하여 북송이라 불리었다.
남송과 더불어 송, 송조(宋朝)라고 한다.
역사
후주의 전전도점검(殿前都点検; 근위대장)이었던 조광윤이 후주 최후의 황제에게서 선양을 받아 건국하였다.
조광윤은 남은 10국을 정복하여 분열상태의 중국을 재통일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병사했다. 뒤를 계승한 이는
동생 조광의(趙匡義)였는데, 이 계승에 관해서 불분명한 부분이 많아 촉영부성(燭影斧聲)라는 의혹의 말이 퍼졌었다.
태종(太宗)이 된 조광의는 형의 사업을 물려받아 중국 통일을 이루고, 과거 제도의 충실을 노렸다.
과거 제도는 태종의 아들 진종(眞宗)의 대에 완성되었다.
과거 제도의 확립은 황제 독재권의 강화를 가져왔으나 동시에 과도한 문관 대우로 인해 군사력의 쇠퇴를 불러왔다.
1004년 북쪽의 요나라가 남하하여 송을 침공하였다. 진종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맞아 싸웠으나 요에게 매년 재물을
보내는 것으로 화의했다.(전연의 맹약)
또 요의 침공과 동시에 서쪽의 탕구트족은 서하를 건국하고 송에 반기를 들었으나, 이것도 1044년 재물을 보내는 것으로
화의했다.(경력의 화약)
이 맹세로 인해 평화를 얻은 송은 압도적인 경제력을 배경으로 높은 문화의 꽃을 피웠다.
이 시기에는 회화, 도자기, 한시 등 여러 분야에서도 중국 역대에서도 최고봉이라 칭해지는 작품이 적지 않게 있다.
또 경제 발전과 함께 일반 백성의 경제력도 향상되어 수도 개봉에는 밤이 없을 정도로 활기가 끊이지 않았고, 도시에서
자유롭게 시장을 열어 도단에서는 강담 및 예술인이 시민들의 귀와 눈을 즐겁게 했다.
또 후세에 이르러, 요와 서하(후에 남송시대의 금도 포함)에 재물을 바쳐 평화를 얻은 것을 재정 별 및 민족주의적인
측면에서 비난하는 의견도 있으나, 이것으로 인해 요 및 서하의 지배 계층을 추락시켜 상대국의 군사력 약체화를 초래한
것도 있고, 견직물 및 도자기, 차등을 애호하는 습관이 이들 여러 나라의 사회 전체에 널리 퍼뜨려 수입량이 증가하여
바쳐진 재물을 상회하는 재물이 송 측으로 역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어, 결과적으로 송의 경제력 강화와 연결된 측면도
있다.
신법-구법의 다툼 - 그러나 이 경제적 발전의 이면에는 사회적 모순도 진행되어 민중들 간의 경제적 격차는 매우 커지게 되었다. 또한 요, 서하에 대한 방어에 사용된 군사비가 국가재정에 커다란 부담을 안겨주었고, 그 외 대상인, 대지주의
세수(稅收)의 감소는 무시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어, 어떻게든 개혁이 요구되었다.
6대 황제 신종(神宗)은 왕안석(王安石)을 등용하여 국정개혁에 나섰다. 이 움직임을 신법, 왕안석의 신법이라고 불렀다.
이 신법은 주로 영세 농민의 보호와 대상인, 대지주의 억제를 목표로 한 것이기에 신법은 지주, 상인세력과 그곳 출신인
관료들의 엄청난 반대를 불러 일으켰다. 이들 반대파들을 가리켜 구법파(舊法派)라고 불렀다.
이 신법파와 구법파의 다툼은 나날이 격렬해져 갔다. 신법파의 왕안석에 대해 구법파의 대표자는 사마광(司馬光)이었다.
이 두 사람이 살아있던 기간에는 당파의 다툼은 높은 이념에 의한 것이었으나, 두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당리에 의한 이념
다툼으로 추락했다.
신법파가 이기면 구법파의 관료는 한꺼번에 중앙에서 멀어졌고, 법률을 모두 개정하였지만, 그 후에 구법파가 득세할
때에는 오히려 반대의 일이 벌어지는 상황이 비일비재하였다.
이러한 다툼은 국가 체제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서서히 송의 국력은 기울어져갔다.
멸망 - 8대 황제 휘종(徽宗)은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갖춘 군주로써, 그의 회화는 북송시대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에서도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황제로써 한 일은 채경(蔡京), 고구(高俅), 이언(李彦), 동관(童貫)등 황제를
이용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측근들에게 영향을 받아 자신의 예술을 위해 거대한 정원석 및 정원목을 먼 남쪽에서 운반하는 데 거액의 국비를 사용하고(화석망),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신법을 이용하여 증세를 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민중반란이 빈발하고, 군대는 이들을 진압하기에 바빴다.
이 시기 반란중 한 가지에 힌트를 얻어 이야기를 부풀리고, 강담으로써 널리 퍼져, 후에 이것을 집대성한 작품이 바로
『수호전(水滸伝)』이다.
이때 북쪽의 숙적이던 요는 중국 동북지방 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여진족은 요의 착취에 대항해 부족이 단결하여 1115년 스스로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바로 금이었다.
이 여진족을 주목한 송 정부는 금에 대해 공동으로 요를 공격하자고 약속하였다.(해상의 맹세)
1121년 금과 공동으로 출병하여 요를 멸망시키고 연운십육주의 일부를 되찾았으나, 반환 전에 연운십육주 전 지역은
금의 군대에 의해 약탈당하고, 주민들은 북방으로 강제 이주 당했기에 당분간 이 지방에서 세수를 바라지는 못했다.
이 금에 대항하기 위해 요의 잔당과 손을 잡은 것에 대해 금의 분노를 사게 되어, 1127년 개봉을 함락당하고, 황제 흠종,
상황 휘종을 북쪽으로 연행해 갔다.
이것을 정강의 변이라고 부른다. 흠종의 동생이었던 조구가 남쪽으로 도망쳐 항주에서 황제를 선언하고, 지형 및 기후
관계로 금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지 못하던 회하 이남의 땅을 확보하여 송을 재흥하였다.
이때부터 송을 남송이라고 불렀다.
정치
문치주의 - 당이 각지에 군벌이라고 불리는 절도사의 할거를 용인하여 이윽고 오대십국 시대의 병란까지 이르는 것을
본 태조 조광윤이 세운 송 왕조는 각지의 유력자 세력을 전시(殿試)를 실시하는 등, 과거를 본격적으로 운용하기 시작해
명실 공히 문신 관료체제가 완성의 영역에 도달하였다.
진나라 이전, 오호십육국 시대, 남북조 시대, 오대십국 시대의 군웅 할거 상황은 이 이후 중화 왕조에서는 근대에 이르
기까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송 시대의 지배체제는 당(唐) 시대의 귀족층이 오대십국의 병란을 통해 몰락한 후, 사대부(士大夫)라 불리는 새로운
계층이 중심이 되었다.
사대부는 교양을 지닌 부유한 시민이라는 뜻을 가진 존재로써 학문을 쌓고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가 되는 것으로 귀족
이란 혈연에 의해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합격자를 배출해 현관으로 오르는 일이 주위의 존경을 모아, 지방의
간판 같은 존재가 되어 재산을 쌓았다.
반대로 이야기 하자면 재산을 쌓을 수 있는 출세한 인간이 이 일족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존경은 받지 못하고, 재산도
이윽고 소멸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황제가 이러한 사대부 출신의 관료를 수족으로 사용하여 국정을 담당하게 한 체제는 '황제전제', '군주독재'라고도 칭
하였다.
다만 또 한편으로는 진종의 사망 후, 어리고 병약한 황제가 차례로 즉위하고, 송 황실과는 혈연관계가 없는 황태후나
태황태후가 황제의 직무를 대행하여, 정치를 안정시킨 일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러한 사대부 층은 관료이면서 동시에 지주, 대상인 이었기에 모든 문화를 독점하게 되었다.
이 이후 중국에서 다음 원나라 시대를 제외하고는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이들은 거의 사대부로 제한되었고, 그 외로는
누르하치를 비롯한 왕조 창설기의 인물과 그 주위에 있던 존재로써 이자성, 홍수전이라 말 할 수 있는 반란 지도자들
뿐이었다.
과거제도 - 수나라 문제에 의해 시작된 과거 제도였으나, 과거가 진정한 의미로 효과를 발휘하게 된 것은 송 시대라 말할
수 있다. 당나라에서는 과거를 통과하더라도 귀족층의 방해를 받아, 몇 년이 지나도 관직을 받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한유(韓愈)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송 시대에는 귀족층의 몰락으로 인해 이러한 일은 없었다.
송 시대에서의 과거제도의 주요 변경 점으로 즉 전시를 시작한 일을 꼽을 수 있다.
이때까지는 지방에서 1차 시험으로 실시한 해시(解試), 중앙에서 2차 시험으로 실시한 회시(會試)의 2종류가 있었는데,
이들 시험 위에 황제의 눈앞에서 실시한 전시를 만든 것이었다.
처음에는 전시에 의해 낙제한 사람도 있었으나, 낙제한 사람은 기본적으로 없었다. 또 그때까지 많은 수의 과거 과목
(교과의 일은 아니고, 수험코스)을 진사(進士), 명법(明法)등으로 나뉘었으나, 신종시기에 진사과 하나로 만들었다.
이 이후로 과거의 합격자를 진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과거제도에 있어서 매년 시험관이 그 해 합격자와 사제관계를 맺어 이것이 관계(官界)에 관련된 인맥의 기초가 되었다.
낙제자가 없었던 전시가 존재하는 의미도 여기에 있기에, 황제와의 사이에서 사제관계를 맺는 일이 황제의 직속 관료
라는 의식을 생겨나게 하였다.
송 시대에는 중국 역사상 가장 과거가 성행하던 시대여서, 거의 3년에 1번 시행되었고, 1회에 약 3~400명이 합격하였다.
그 중에는 수석 합격자를 가리켜 장원(状元)이라고 불렀다.
송 시대에는 그때까지 보이지 않았던 개인이 국가를 책임지려는 기개가 보였다. 신법, 구법의 다툼에서도 그 기개가.
그 원천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과거에 의해 실력으로 지위를 얻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것이다.
송 시대를 통해 관료와 관료 예비군인 학생들의 세력은 매우 강해져, 학생들의 운동에 의해 재상이 탄핵을 받은 일도
있었다.
관료제도 - 송 시대 관료제도는 북송의 원풍(元豊)년간을 경계로 크게 변화하였다.
송 초기 원풍개혁 때까지는 오대의 영향을 크게 받아, 당 제도에 의거한 관명이 기록관(寄禄官; 봉급표(俸給表)로 변화해
실제 직함을 표시하지 않는 등, 당 제도 및 명, 청 시대의 관료체계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육부(六部)의 시랑(侍郞) 및 원외랑(員外郞)은 실제로는 육부의 일을 하지 않고, 봉급의 단계를 표시하는 데
쓰였다. 이 시대의 관료 제도를 간단하게 서술한다면 아래와 같다.
중앙관제는 형식상 예부터 내려온 삼성육부(三省六部), 구사(九寺), 오감(五監)을 유지하였다.
그 중에 중서성(中書省)이 문하성(門下省)의 권한을 흡수하는 형태로 권한이 집중화된 재상부(宰相府)가 있었고,
재상은 동중서문하평장서(同中書門下平章事)라고 불리어, 1명이 아닌 3명이 선택되었고, 부재상으로써 참지정사
(参 知政事)가 여러 명 선택되었다.
재상부는 민정을 담당하고, 군사를 담당한 것은 추밀원(枢密院)이었다. 추밀원의 장관 추밀사(枢密使)와 부장관 추밀
부사(枢密副使)에 참가정사을 합쳐 집정(執政)이라 불렸고, 재상과 집정이 전체의 정무를 맡았다.
행정기관인 육부, 구사, 오감이 있으나, 이들은 실제로는 아무런 역할이 없었고, 대신하여 실제 행정을 맡았던 사직
(使職)이라 불리는 관직이 있었다.
삼사(三司) - 재정을 담당.
어사태(御史台) - 관료를 감찰.
심사원(審官院) - 인사담당.
태사예의원(太常礼儀院) - 제사담당.
심형원(審刑院), 형부(刑部), 대리사(大理寺) - 재판담당.
등의 관직이 담당했다.
예부터 내려온 관직명은 일의 내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 그 일이 단계에 존재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당나라 시대의 삼품(三品)의 위라는 것이 구품(九品)의 아래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지방관제에 의거한 최대 행정구분으로 로(路)가 있고, 그 아래에 부(府), 주(州), 군(軍), 현(縣)이 존재했다.
군사제도 - 송의 군사제도는 위병제였다. 태조는 절도사들의 권력을 제한하는 동시에, 자신의 출신모체였던 금군을
강화시켜, 이것을 정규군으로 삼았다.
이 정책으로 인해 중앙의 힘이 강해지고, 절도사가 지방에서 할거하는 것을 억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금군의 사령관에서 황제가 된 일을 교훈 삼아, 금군의 제도를 개혁하여 전군의 사령관직을 폐지하고 황제
직속으로 그 하부의 존재로써 있던 장군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정규군인 금군과 치중병이었던 상군이 있었고, 상비군은 북송 중기에 140만을 헤아렸다.
그러나 숫자만 많을 뿐, 실제 전투에서는 불안한 병사가 많았었다.
또한 문인중시주의로 다른 무인들은 경시 받아 그 결과 병사를 뽑는 것에 고충이 많아지게 되어, 병사들은 죄인출신자가
뽑히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한 대책 중 한가지로 왕안석은 보마법이라 말해지는 군제개혁안을 내놓았다. 보마법은 군마를 사육하는
일을 장려하는 것으로 보병이 많은 송군이 기병을 증가시켜 전력향상을 노리기 위해 실시한 것이었다.
개혁 - 송은 관료가 역대왕조 중에서도 가장 우대받았던 시기였다.
13-7 남송
남송(南宋 : 1127년-1279년)은 중국의 왕조중 하나이다. 조광윤이 건국한 송나라 왕조가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정강의
변을 겪으면서 화북을 빼앗긴 후, 황족 조구 (훗날 고종)가 남쪽으로 옮겨 회화 이남의 땅 임안(현재의 항저우)으로
천도하여 재흥한 정권을 가리켜 남송이라고 부른다.
역사
1126년 북송의 황제 흠종이 금나라에 의해 카이펑에서 북쪽으로 잡혀가는 정강의 변이 일어나 북송이 멸망한 후, 흠종의
동생 조구는 남쪽으로 도망쳐 1127년 난징에서 즉위하여 고종(高宗)이 되어, 송나라을 재흥했다.
처음엔 악비(岳飛), 한세충 등의 활약으로 인해 금나라에게 강력하게 저항했으나, 진회(秦檜)가 재상으로 취임하면서
주전론(主戰論)을 누르고, 금나라와 화평을 맺었다.
화평 후 진회는 완전히 권력을 장악하고, 이때까지 악비 등의 군벌의 손에 장악당한 군의 지휘권을 조정으로 되돌렸다.
또 한편으로는 주전론자들을 탄압하여 악비는 살해되고, 한세충은 은거를 하였다.
효종의 치세 - 진회의 사후 금나라의 4대 황제 해릉왕(海陵王)이 침공을 개시했다. 금나라군은 대군이었으나, 해릉왕은
권력확립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살해했기 때문에 금나라의 황족중 한사람인 완안옹(完顔雍)이 해릉왕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금나라의 유력자들은 속속 완안옹의 곁으로 모이게 되었고, 해릉왕은 군중에서 살해되었다.
완안옹은 금나라의 세종(世宗)이 되어 송나라와 화평을 맺었다.
같은해 고종은 퇴위하여 태상황이 되고, 양자인 조진(趙慎)이 즉위하여 효종(孝宗)이 되었다.
금의 세종, 남송의 효종은 각자가 속한 왕조에서 가장 최고의 명군으로 불렸던 인물들이었는데,
우연하게도 동시대에 2명의 명군이 남쪽과 북쪽에 나타나게 되어 평화가 찾아오게 되었다.
효종은 불필요한 관리의 숫자를 줄이고, 당시 남발기미가 보이던 회자(會子;지폐)의 절제 및 농촌의 체력회복,
강남경제의 활성화등 여러가지 개혁을 추진해 남송은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
한탁주 시대 - 효종이 1189년 퇴위하여 상황이 되고, 조돈(趙惇)이 즉위하여 광종(光宗)이 되었다.
광종은 아버지와는 다르게 우둔하였기에 황후 이씨의 말밖에는 듣지않았다. 황제에 불만을 품은 재상 조여우(趙汝愚),
한탁주(韓侂胄)등에 의해 광종은 퇴위당했다. 한탁주는 이 공적으로 권력의 자리에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이라 생각
했지만, 한탁주의 인격을 좋아하지 않은 조여우들은 한탁주을 멀리했다.
이것에 원한을 품은 한탁주는 조여우들을 몰아내기 위한 운동을 시작해 1195년(경원 원년) 조여우는 재상직에서 물러
났고, 경원 3년에는 조여우편에 섰던 주필대(周必大), 유정(留正), 왕난(王藺), 주희(朱熹), 팽귀년(彭龜年)등 59명이
금고(禁錮)에 처해졌다.
그 다음해에는 주희의 주자학(朱子學;당시 도학(道學)이라고 불렸다)도 거짓학문이라고 탄압받았다
(경원위학의 금(慶元僞學之禁). 이 일련의 사건을 경원의 당금(慶元之黨禁)이라 불렀다.
한탁주는 그후 10년동안 권력을 유지했으나, 뒤를 보호해주던 황후와 황태후가 차례로 붕어하자, 권력이 서서히 줄어
들게 되었다. 이때 금나라가 북쪽의 타타르등의 침입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금나라는 약체화되었다고 본 한탁주는
남송의 비원인 금나라 타도을 성공시킨다면 권력을 확고부동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북벌을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실제 금나라는 곤란한 상황이었으나, 그 이상으로 남송군의 약체화가 현저하였던 것이다.
1207년 금나라는 조기 화평을 희망하고, 한탁주의 머리를 요구하자, 이것을 들은 예부시랑(문부대신) 사미원에 의해
한탁주는 살해되고, 그의 머리는 소금에 절여져 금나라로 보내지는것으로 금나라와 화의을 맺었다.
몽골의 위협 - 한탁주을 살해한 사미원이 이번에 권력을 장악하고 그후 26년 동안 재상의 지위를 차지했다.
그 시기 북쪽의 몽골고원에서는 몽골 제국이 급속도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사미원이 사망한 1233년 몽골 제국이 금나라의 수도 카이펑을 함락하자, 남쪽으로 도망친 금나라 최후의 황제
애종(哀宗)을 송나라군과 협력하여 사로잡아 1234년 금나라는 멸망했다.
그후 몽골은 일시 북쪽으로 물러나고, 그 뒤를 송나라군이 북상하여 낙양과 카이펑(개봉)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이것은 몽골과의 조약위반이 되었기에 격노한 몽골군과 전투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허나 명장으로 널리 알려진 맹홍의 앞에서 고전을 면치 못해, 전투는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이윽고 1260년 몽케 칸의 친정군이 들이닥쳤다.
멸망 - 그러나 몽케는 이 원정 도중에 병사한다. 이때 쿠빌라이가 공격한 무창에 원군으로 온 가사도는 이들을 퇴각
시켰다. 이 전투에서 가사도와 쿠빌라이 사이에서 밀약이 있었던 것은 훗날 알려지게 되었다.
몽골을 격퇴한 영웅으로써 환영받게 된 가사도는 그 인기에 힘입어 재상이 되어, 전권을 임명받았다.
가사도는 교묘한 정치수완을 발휘하고, 공전법 등 농정 개혁에 힘쓰는 한편, 인기를 얻는것도 잊지 않아 그후 15년에
걸쳐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몽골 평원에서 아리크부케을 쓰러뜨리고 권력을 장악한 쿠빌라이가 다시 침공을 개시하여, 남송이 국력을 총동원
하여 국토 방어의 거점으로 삼았던 양양(襄陽)을 1268년부터 1273년까지 5년간에 걸친 포위전(양양 공방전) 끝에 함락
하면서 남송은 더이상의 저항할 힘이 없어졌고, 가사도는 주위의 목소리에 몽골과 싸우기 위해 출발했으나 대패했다.
1276년 몽골의 장군 바얀에 의해 수도 임안이 점령되면서 사실상 송나라는 멸망했다.
그 시기 장세걸, 육수부등 일부 군인과 관료는 어린 황자를 데리고 나와 황제로 옹립하고, 남쪽으로 도망쳐 철저 항전을
계속하였다. 1279년 그들은 광주만(廣州灣)의 애산(厓山)에서 원나라 군에게 격멸당해 이것으로 인해 송나라는 완전히
멸망하였다(애산 전투).
충신의 귀감으로 칭해지던 문천상도 2년이상 각지에서 저항전을 계속했으나, 1278년에 원나라에 붙잡혀 옥중에서 정기의
노래을 읊고 1282년에 처형되었다.
남송이 멸망할 때 나라에 순사한 충신은 다른 왕조에 비해 대단히 많았으나, 원나라의 통치 아래에서 송나라의 유민으
로써 살아남기를 계속한 사대부도 있어 문장궤범을 편찬한 사방득, 십팔사략을 저술한 증선지, 자치통감음주(자치통감의
주석서)을 저술한 호삼성 등, 문학 사학에서 이름을 남긴 송나라의 유민도 많았다.
문화
국제교역 및 농지개량등에 의해 고도의 문화를 쌓아 화중의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절강성 용천애산의 청자 및 복건성 건애의 [건애]의 별명으로 알려진 [천목다완]에 최고의 명품이 만들어진 시기이
기도 하고,
또 일본과의 사이에서 일송교역이 왕성해 선종도 이때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지는 등 일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