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스프, 근성
이원
입맛 없는, 오후 그 사내는 수도꼭지를 비틀어, 라면을 요리할 물을 받는다 그리고는 가스 레인지의 손잡이를 좌의 세계, 끝까지, 돌린다, 파란 불꽃이 싱크대에 놓여진, 매끄러운 빨간 라면봉지를 향해 탁탁, 튕기며 타오른다 말간, 물이 불을 끌어당기며 끓기 시작한다 봉지를, 뜯는다, 하나의 조직으로 똘똘 뭉쳐진 라면 한 덩어리와 밀봉된 스프 두 개가, 들어 있다 그 사내는 우선, 끓는 물에 여기저기 흩어져 맴도는 부스러기들을, 쏟아붓고 뭉친 놈을 반으로 뚝뚝 분질러, 넣는다 저고리 고름 말아 쥐고서 누굴 기다리나 낭ㆍ랑ㆍ1ㆍ8ㆍ세··· ··· 창문을 타고 들어오던 뽕짝 몇 가락도, 보글보글 섞여 들어간다, 물의 사방에 흩어진 부스러기들이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덩어리는 반으로, 잘렸어도 여전히, 건재하다 성급한 물방울들이 뭉쳐진 라면 사이 사이를 비집고 터져오르기도 한다 그 사내는, 덩어리 사이를, 젓가락으로 휘휘 젓는다 느닷없는, 소용돌이 속에서 제각기 떨어진다, 물 속에 잠긴다, 일순간에 색깔이 확 변한다 라면이, 정치적인, 순간이다 무장 해제된 라면 가락 사이에 스프, 두 개를 쏟아붓는다 가벼운 야채 스프는 물에, 쉽게 풀린다 그러나 건더기 스프는 쏟아져 들어가는 순간부터 라면을 뻘겋게, 잠식하기 시작한다 스프는, 급격하게 물에 퍼진다 라면은 순식간에, 전폭적으로, 뻘건 국물 속에 수용된다 라면이, 최대의 격변기를 맞는 순간이다, 드디어 라면은 완전히 해체된다 스프와, 라면 가락이 뜨겁게 섞이는 냄비 속 여기저기에는 한반도의, 지도 같은 균열이 생긴다 잠깐 동안 쏴한 김이, 시야를 차단한다, 그 사내는 가스레인지의 불을 한 단계, 낮춘다 몸을 거꾸로 바로 뒤틀던, 라면 가락들이 일제히, 잠잠해진다 평정을 되찾은 냄비에는 말라붙은, 뻘건 스프 찌꺼기들이 가장자리에, 달라붙어 있다, 그 사내는, 젓가락으로 뻘건 국물 속에서 길게, 라면 가락을 건져올린다 그러나, 단시간의 뻘겋고 강도 놓은,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라면 가락은 여전히 희고, 매끈하다 아, 희고, 매끈하다 소쩍꿍 ···소쩍궁 ··· ···소쩍궁 ···소쩍궁 ··· ··· 자르르르 윤기나게 흐르는 뽕짝, 가락이 냄비 속으로 꼬불꼬불, 넘어 들어간다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문학과지성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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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 |1968년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
1992년 계간 《세계의 문학》에 「시간과 비닐 봉지」외 3편을 발표하면서 시단에 등장.
시집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 『사랑은 탄생하라』.
첫댓글 이 시 역시 <작법반> 수업에 등장해서 부분 인용한 바 있습니다.
<작법반>의 교재인 『현대시작법』(오규원)에서 인용된 시 「라면」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호출된 것이지요.
교재의 「라면」은 개괄 묘사이지만, 이 시는 세밀 묘사입니다.
「라면, 스프, 근성」이란 제목에서 '근성'이 나타난 부분이 어디인가 찾아보시면, "하나의 조직", "라면이, 정치적인, 순간이다", "최대의 격변기", "잠식하기 시작한다", "한반도의, 지도 같은 균열" 등에 내포된 시적 깊이(사물 또는 세계를 보는 깊이)를 파악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저렇듯 시에서 쉼표를 많이 사용한 것은 술술 읽히는 내용을 지체시키고 형식적으로도 낯설게 하기 위한 시적 장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창작반>과 <퇴고반>을 비롯하여, <작법반>의 샘들께서 「라면」을 개작하실 때 도움이 되실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