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사시는 형님이 좀 편찮으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명년 해돋이는 형님댁에서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예전에 쓴 글 하나 올립니다. 淸鄕
세월이 참 유수와 같다더니 하나도 틀리 지 않은 듯합니다.
이 동생이 벌써 쉰이니 띠 동갑이신 형님은 올해로 예순 둘이 되시나 봅니다.
언제까지나 만년청년으로 남을 것 같던 형님의 얼굴에도 이제는 깊은 주름이 내려앉고 있음을 지난번 보았을 때 비로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들 귀한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나 금지옥엽으로 자랐지만 워낙 천성이 맑았기에 조금도 엇 나지 않고 반듯하게 사신 형님이십니다.
힘겨운 시절을 거쳐 겨우 서울생활에 막 자리를 잡을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어른께서는 떠나온 고향을 한시도 잊지 못해 하였고 형님은 그 어른의 뜻을 흔쾌히 받들어 용단을 내렸습니다. 서울 가산을 정리하여 다시 고향 가까이로 간다할 때 고생모르고 사신분이 험한 농사일을 어찌할까 걱정도 했었지요.
하지만 역시 형님은 달랐습니다.
초보나 다름없는 농작물 재배였지만 오직 땀과 집념 하나로 정말 열심히 사셨음을 저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서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몇 번의 시행착오도 겪었을 것이며 우루과이 라운드니 FTA와 같은 시련 속에서도 끝내 굴하지 않고 당당히 이겨내시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예전, 어쩌다 시골을 찾으면 새벽 훼치기 무섭게 경운기 시동부터 걸던 형님에게 저는 새벽잠을 깨운다고 투덜거렸지요. 모처럼 도회지를 떠나 한적한 자연 속에서 쉬다가고 싶은데 온 길에 일이나 하자며 싱긋이 웃던 형님이 때론 밉기까지 했었답니다.
그래도 올라 올 때는 항상 차 트렁크가 비좁다 싶을 만큼 이것저것 챙겨주시는 형수님의 모습은 살아 계셨음 분명 그리 하셨을 어머니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제가 채권자들과 합의를 보지 못해 유치장에 있을 때 형님이 소리 없이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고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 녀석 얼굴을 보면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아 안 보고 그냥 가렵니다. 이 돈으로 합의를 봐서 나오도록 해요."
농촌에서 그 큰돈을 만들려면 등골이 휘고 뼈가 바스라질 만큼의 고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어찌 전들 모르겠습니까?
세월 지나고 그 후로도 몇 번의 고비가 닥칠 때마다 변함없이 항상 힘이 되어 주셨던 형님이십니다. 저에게 세상살이는 언제나 녹록치 않았고 그래서 오늘도 여전히 형님 앞에 못난 동생으로만 남아 있으니 참으로 면목 없고 죄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 동생도 이제는 독하게 마음먹고 다시 일어서고자 합니다. 형님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으로서 더 이상은 세상을 부끄럽게 살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말입니다.
앞으로는 세상 앞에 절대로 속임을 당하지도 않을 것이며 못난 우를 범하지도 않겠습니다. 마음이 평온하다는 것만큼 큰 축복도 없다는 것을 형님 내외분을 통하여 분명히 배웠기 때문입니다.
과수며 들녘의 손길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바빠진 계절입니다. 할 일은 많고 두 분의 연세도 이제 초로(初老)로 접어들었으니 행여 건강이라도 해치실까 사뭇 걱정입니다.
아무쪼록 형수님과 더불어 언제까지고 건안, 또 건안 하옵소서.
서울에서 동생 均 올림
2007년 샘터, 우루사 공동주최 편지공모전 우수상
첫댓글 형님만한 사람이 없네요
동생 챙겨주시는 마음
굉장히 순하고 착해보여서요
세월 흘러
형님 얼굴에 주름살 보며
안타까워 하시는 정연균 시인님
마음 함께 합니다
도시 생활이 편하셨을텐데요
시골 생활이 그런데로 재미있으셨던
모양입니다
동생 힘들었을때
손내밀어 주시는 형님덕분에
많은 도움이 되셨네요
강사할 일이지요
정착가닝 멋진글
올려주셔서 즐감입니다
날이 춥습니다
건강하시고
향필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