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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은 없다.
호세아서 7:1~7
1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그들은 거짓을 행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둑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질하며
2 내가 모든 악을 기억하였음을 그들이 마음에 생각하지 아니하거니와 이제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에워싸고 내 얼굴 앞에 있도다
3 그들이 그 악으로 왕을, 그 거짓말로 지도자들을 기쁘게 하도다
4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라 과자 만드는 자에 의해 달궈진 화덕과 같도다 그가 반죽을 뭉침으로 발효되기까지만 불 일으키기를 그칠 뿐이니라
5 우리 왕의 날에 지도자들은 술의 뜨거움으로 병이 나며 왕은 오만한 자들과 더불어 악수하는도다
6 그들이 가까이 올 때에 그들의 마음은 간교하여 화덕 같으니 그들의 분노는 밤새도록 자고 아침에 피우는 불꽃 같도다
7 그들이 다 화덕 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들을 삼키며 그들의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그들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도저히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수습 불가’의 상황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관계가 깨어지고, 재정이 무너지고, 건강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깊은 절망에 빠집니다.
오늘 본문인 호세아 7장에는 영적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려 어찌해 볼 수 없는 절망의 상태에 빠진 이스라엘의 참담한 모습이 등장합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하실 때, 오히려 에브라임의 죄악과 사마리아의 악행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말씀하십니다. 안으로는 거짓을 행하고, 밖으로는 노략질을 일삼는 총체적인 타락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설교의 제목은 <절망은 없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참담한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시는 이유는 그들을 포기하기 위함이 아니라, 진짜 소망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세 가지의 영적 원리를 통해 우리 삶의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참된 부활은 철저한 절망에서 시작됩니다.
본문 1절과 2절에 나타난 에브라임과 사마리아의 죄악은 덧칠하거나 포장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영적 의사이신 하나님께서 메스를 대시자, 그들 안에 가득 찬 곪은 상처들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십수 년 전에 제가 섬기던 교회에 나이 많으신 여집사님의 외손녀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강남에서 꽤 널리 알려진 명문 여고에서 전교 수석을 놓치지 않는 재원으로 대학 입시를 코앞에 둔 고 3 수험생이었습니다. 어느 날 생리가 끊기고 복통이 생겨서 동네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아 치료하였지만 차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강남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여 정밀검사를 한 결과 난소에 이상이 생겨 급히 수술하려고 개복(開腹)하였지만, 이미 암세포가 난소뿐 아니라 자궁 전체에 퍼져 수술로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고 다시 배를 덮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난소암 말기로 4개월을 넘기지 못하는 절망스러운 상태에 놓여 있는 여학생의 슬픈 눈빛을 보았습니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절망에 빠진 아이의 모습이 같은 나이의 제 큰딸과 겹치면서 제 마음이 슬퍼졌습니다. 이 절망의 수습 불가의 상태에서 저는 부활의 주님을 떠올렸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 아이도 살아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가 끝나면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있는 병원으로 찾아뵈어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4개월이 지나자, 신기하게 암이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병원에 가서 진찰받을 때, 엑스레이나 MRI에 심각한 병명이 발견되면 환자는 절망합니다. “아, 내 몸이 이렇게 망가졌구나.” 하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그 절망적인 진단의 순간이 바로 치료가 시작되는 첫걸음입니다. 병을 숨겨두고 스스로 건강하다고 착각하는 것이 진짜 절망이지, 병이 드러나는 것은 회복을 위한 희망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의 수습할 수 없는 죄악, 끝없이 반복되는 연약함을 마주할 때 우리는 좌절합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는 내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는 철저한 자기 절망이야말로 십자가를 붙잡게 하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인간의 절망이 극에 달했던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가, 인류 최고의 소망인 부활의 아침으로 이어졌음을 기억하십시오. 내 힘으로 수습할 수 없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일하심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죽음에 이른 예수님의 시신을 아리마대 요셉이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허락을 받아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 19장 38~40절에는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을 가져와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유대인의 장례 관습에 따라 시신을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다고 상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아도 예수님은 죽음에 이른 것이 확실한 증거입니다. 게다가 당시로는 최강의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돌무덤을 지키고 있었고, 육중한 돌무덤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판단으로는 도무지 여기서 살아 나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사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은지 사흘 만에 무덤을 뚫고, 꽁꽁 싸매였던 세마포 수의를 훌훌 털어버리고 살아나셨습니다.
이런 부활의 능력은 오늘도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죽음은 가장 절망스러운 아픔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는 이 죽음마저도 벗어날 수 있고, 살아날 수 있을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믿는 사람에게는 절망이 없습니다.
둘째, 죄의 화로를 ‘성령의 불’로 덮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4절부터 6절을 보면,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마음을 ‘달궈진 화로’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라 빵 만드는 자에게 가열된 화로와 같도다... 그들이 가까이 올 때에 그들의 마음은 간교하여 화로 같으니 그들의 분노는 밤새도록 자고 아침에 피우는 불꽃 같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식(主食)으로 먹는 빵을 만들 때 대개 마을 단위의 공동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불을 관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금이야 쉽게 불을 켤 수도 있고, 끌 수도 있지만 그 당시에는 불을 한번 꺼뜨리면 불을 지피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예 빵을 만드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화덕을 쓰지 않을 때는 불을 좀 약하게 해놓았다가 빵을 구울 때는 불을 잔뜩 지펴서 만든다고 합니다.
숯불을 피어 달구어 놓은 화덕이 얼마나 뜨겁습니까? 지금 이스라엘의 간음이 이런 잘 달궈진 화덕과 같다는 것입니다. 마치 아리따운 여인을 보고서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몸이 뜨거워지듯이 그들이 본 남편인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연애하여 몸이 단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밖의 육신의 것들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몸이 단 것을 뜻합니다. 또한 빵 만드는 자의 화덕의 불이 꺼지는 법이 없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욕도 꺼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잠시 잠잠해 보이지만 그것이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빵을 만드는 사람이 반죽할 때 반죽이 발효할 때까지 불을 좀 낮추어 놓는 것처럼 잠시 불을 낮추어 놓은 것뿐입니다. 무엇인가 계획을 세우고 있고 무엇인가 음모를 꾸미고 있기 때문에 조용한 것이지, 마음의 욕심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고전 6: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영적 음행과 육적인 음행은 내 몸을 점령하여 육신 화하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나기는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또한 이 음행의 배후에는 악한 사탄이 조종하고 있기에 더욱 어렵습니다.
이 화로는 밤새도록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육체의 정욕과 죄악의 불’을 의미합니다. 권력에 대한 탐욕, 음란, 거짓이 화로처럼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불은 끓어오르는 정욕과 같습니다. 인간의 의지나 다짐이라는 찬물 몇 바가지로는 이 거대한 화로의 불을 결코 끌 수 없습니다.
거대한 산불이 났을 때, 소방관들이 사용하는 최후의 방법의 하나가 바로 ‘맞불(Backfire)’을 놓는 것입니다. 산불이 진행되는 방향 앞쪽에 미리 불을 질러 탈 것을 없애버림으로써, 거대한 불길을 잡아내는 원리입니다.
우리 안에 타오르는 정욕과 죄악의 불을 끄는 유일한 방법은 ‘더 강력한 불, 바로 성령의 불’을 받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신학자 토마스 찰머스는 이를 “새로운 애정이 갖는 몰아내는 힘(The Expulsive Power of a New Affection)”이라고 불렀습니다. 땅에 속한 죄악과 쾌락을 이기는 길은, 하늘을 향한 더 크고 거룩한 소망으로 우리 마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눅 1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은 물리적인 불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이 땅에 임할 영적 변화와 심판,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상징합니다.
성경에서 '불'은 성령과 영적 임재를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던지러 오신 불은 사람들의 굳은 마음을 녹이고, 죄를 태워버리며, 영혼을 새롭게 깨우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와 복음의 생명력을 의미합니다. 이는 훗날 오순절에 ‘불의 혀’처럼 임한 성령 강림으로 성취됩니다.
불은 불순물을 태워 순금을 연단하는 도구입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신 복음은 세상에 임하여 거짓과 악을 명백히 드러내고, 진실한 믿음을 가진 자들을 거룩하게 정결케 합니다. 동시에, 이는 끝내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임할 영적인 심판을 예표하기도 합니다.
이 구절 직후인 51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라고 덧붙이십니다. 즉, 이 '불'은 복음이 세상에 선포될 때 빛과 어둠,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가치관의 충돌과 분리를 뜻합니다. 진리가 선포되면 필연적으로 세상과 마찰을 빚게 됩니다.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는 의미는 예수님은 이 생명과 정결의 불이 온 세상에 타오르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불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타오르기 위해서는, 그 전에 반드시 예수님께서 치러야 할 십자가의 고난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고백은 인류를 구원하고 성령을 보내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해야만 하는 예수님의 거룩한 열망, 결연한 의지, 그리고 그 무거운 사명을 앞둔 깊은 고뇌가 동시에 담긴 표현입니다.
오늘 이 시간, 꺼지지 않는 정욕의 화로가 십자가의 보혈로 씻겨지고 성령의 강력한 불로 덧입혀지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절망을 끊어내는 열쇠는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의 가장 비극적인 구절은 7절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들의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그들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고 했습니다. 재판장들이 삼켜지고 왕들이 쓰러지는 국가적 재난과 수습 불가의 상황 속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죄를 지은 것보다 더 큰 비극은,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는 교만과 영적 무감각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거센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져들어 갈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였습니다. 체면을 버리고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마 14:30). 만약 베드로가 물에 빠져가면서도 자신의 수영 실력을 믿고 혼자 발버둥 쳤다면 그는 죽었을 것입니다.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즉시 주님께 부르짖었기 때문입니다.
절망의 늪에 빠져 있습니까? 마음의 화로에서 타오르는 죄악 때문에 괴로우십니까?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부르짖을 때입니다. 기도는 수습 불가의 인생을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에 맡겨드리는 가장 위대한 선언입니다. 우리가 입을 열어 주님의 이름을 부르짖을 때, 하늘의 문이 열리고 성령의 불이 임하여 우리의 모든 절망은 소망으로 치환될 것입니다.
렘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다'라는 표현은 상황과 간절함의 정도에 따라 주로 다음의 세 가지 단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자아크(זָעַק)와 차아크(צָעַק)가 있습니다.
극심한 고통이나 억압, 위급한 상황 속에서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듯 절규하며 부르짖는 것을 뜻합니다. 두 단어는 철자만 조금 다를 뿐 성경 내에서 거의 동일한 의미와 무게로 교차 사용됩니다.
샤바 (שָׁוַע)가 있습니다.
자신을 구해달라는 간절한 요청, 즉 구원과 도움을 바라는 애타는 부르짖음입니다. 주로 시편에서 많이 등장합니다. 다윗이나 시편 기자들이 원수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거나 깊은 고난의 수렁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며 부르짖는 기도를 표현할 때 이 단어가 집중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카라 (קָרָא)가 있습니다.
‘소리 내어 부르다, 외치다’, ‘이름을 부르다’라는 뜻으로, 가장 포괄적이고 일반적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고통 속의 절규라기보다는 특정한 대상을 명확히 부르는 행위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성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기도하다, 예배하다)"라고 기록될 때 주로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한 견해는 마음의 소원을 성취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 안에 계심에 대한 확증은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할 수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내 안에 오셔서 나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하십니다. 마치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여인들이 사용하였던 놋 거울로 만든 물두멍에 비친 자신을 살피고 손과 발을 씻었던 것처럼 성령은 말씀의 거울에 비친 나의 적나라한 모습을 깨닫고 부르짖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신 말씀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탄식’은 ‘부르짖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도는 성령을 통하여 나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주권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어제 아침 기도 중에 하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예배당의 의자를 구입하는데 색을 세가지 색을 섞어서 하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지혜는 어디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하나님은 성령으로 즉각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는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라는 말씀으로 단일 색으로 구입하라고 하셨습니다. “색은 무슨 색으로 할까요?”라는 질문에 ‘연한 초록 색’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치도 푸른 풀밭을 연상하게 하는 색이라는 것입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소소한 것 까지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이 어쩌면 번거롭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씩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다스림을 받을 때 나는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능력입니다.
성령은 내게 부르짖어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며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밀한 것을 알게 하십니다. 절말의 환경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위로와 영광의 계획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분명 좌절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있는 크고 신비한 것을 누리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내가 부르짖을 때 내 안에서 나의 가는 길을 명확하게 보여주십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나의 소망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임을 알려주십니다. 이 땅에 나의 가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 있음을 깨닫고 그 나라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하늘 문이 열린 사람은 세상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절망을 딛고 예수의 이름으로 승리의 사람을 살아갑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의 죄악이 아무리 수습 불가의 상태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자기 절망의 끝에서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내 안의 정욕의 불을 끄기 위해 성령의 불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침묵하지 말고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오늘 우리의 부르짖음이 땅에 속한 죄악의 사슬을 끊고, 하늘을 향한 영광스러운 소망으로 비상하는 은혜의 시작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