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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 무렵, 점심때가 다 돼서야 서휘경의 점심을 챙겨주기 위해 움직였을 때다. 문득
풍기는 비릿한 혈향(血香
)에 천상신의는 여태 느껴보지 못했던 불길한 느낌을 갖게 된다.
‘혈향... 분명 청소는 제대로 했...!!??’
천상신의가 잠시 생각하다가 최악의 상상을 하고 점심을 팽개친다. 그리고 방문을 확
열어젖힌다.
“... 휘경아...”
천상신의가 얼이 빠진 채로 바닥에 주저앉는다. 그러자 곧이어 금문택이 얼굴이 새파
래진 채로 달려온다.
“사부님, 무슨 일로...”
천상신의가 몸을 떤다. 그리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얼굴을 가리며 방 안으로 가리킨다.
“... 서, 서... 서휘경...”
심장에 은장도가 꽂힌 채로 백의와 이불을 붉은 선혈(鮮血)로 물들인 채 잠든 소녀,
서휘경을 보게 된 것이다.
“... 끝내... 끝내 이 할애비의 말을 무시하고... 으흐흑...”
천상신의가 문 앞에 주저앉아 오열하고 있는데 반해, 금문택은 마치 뭐에 홀린 사람처
럼 천천히 서휘경에게로 다가간다.
죽은 사람 같지가 않다. 마치 잠든 것만 같은 얼굴이다. 얼굴에 묻혀져 있는, 말라붙
은 핏줄기만 아니라도 말이다.
‘... 끝내 네가 선택한 길은... 죽음이야...?’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나오지도 않을 눈물을 쥐어짜 보지만, 그런다고 눈물이 나올 리
가 있겠는가. 때마침 들어온 서찰로 눈을 돌린다.
곱게 놓여져 있는 서찰 두 통... 금문택은 그중에서 천상신의의 이름이 써져있는 것을
주워들고 천상신의 앞에 날린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써져있는 서찰 겉봉을 뜯는다
.
내용은 너무도 간단하다. 단 두 글자가 적혀 있었으니까.
‘용서(容恕).’
“... 바보 같은... 알면서도... 꼭 죽어야만... 꼭 이 길을 택해야만 한 거야...?”
평소 서휘경의 필체와는 너무도 틀리다. 게다가 종이엔 눈물자국, 그리고 힘겹게 자신
의 마음을 적어야만 했던 슬픔과 아픔이 절절이 묻어나는 것 같았기에, 금문택의 눈에
서는 결국 조금씩이나마 눈물이 고인다.
‘울지 말자, 금문택... 울지 말자고...’
금문택은 찢어진 입술을 다시 힘껏 깨물고 자기 자신을 타일러본다. 하지만 결국은 둑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끝없는 눈물을 다시 한번 쏟아내고 만다.
‘서휘경... 넌 내가 중원으로 건너온 이후, 처음으로 정(情)을 느낀 사람이다.
너만 있으면 되는 거였는데... 널 만나서 행복하기만 했는데... 왜 네게 얼굴 보는 것
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을까...!!
왜 그러지 못했을까... 내가 조선인이라서...? 그래서... 역시 그래서겠지...?’
금문택 역시 천상신의와 다를 것이 별반 없다. 두 손으로 가슴팍을 움켜쥐더니, 답답
한 가슴을 제어할 길이 없어 엉엉 소리 내어 오열하고 만다.
얼마나 울었을까. 어느새 눈물을 뚝 그친 금문택의 눈은 죽어있다. 산 사람의 눈동자
같지가 않다.
‘서휘경... 난 널 용서하지 않겠어. 난 널 믿었다. 그나마 이곳에서 날 사랑해줄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여인이라고...
널 용서하기엔, 배반당한 내 마음을 식힐 길이 없다.
이손문은 내가 없앤다. 그리고 보란 듯이 다른 사람 만나 조선으로 가서 행복하게 살
고 말 테니, 저승에서 똑똑히 두고 보라고!!’
유서를 읽고 넋이 나가버린 천상신의를 뒤로하고 몸을 일으킨 금문택은 서휘경이 자신
에게 내준 애검, 풍운검(風雲劍)과 천상신의가 선물한 다른 한 자루의 검을 둘러메고
산장을 빠져나간다.
‘이손문은 내가 죽인다. 방해하는 자는, 중원무성 무사들이라고 할지라도 용서치 않
아.’
주체할 수 없는 감정 탓인지, 금문택의 두 눈은 증오(憎惡)의 화신(化神)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금문택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옆으로 물러선다
.
시간은 벌써 유시(酉時)를 지나고 있다. 오열한 뒤 두 시진 정도는 넋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천상신의는 아직 넋을 놓고 있다고는 하지만...
지금 금문택이 서 있는 곳은 자그마한 불당(佛堂)이다. 승려도 없고, 규모도 무척이나
자그마한 불당이다.
‘복수할 수만 있다면 좋습니다. 색존이란 작자를 죽일 수만 있다면... 제 목숨을 내
놓겠습니다...’
하지만 색존 이손문이란 작자를 찾아야 죽이던가 말던가를 할 것 아닌가. 사실 그게
제일 막막한 것이다.
‘부처님, 찾아서 죽일 수만 있게 해 주십시오. 그거면 충분합니다. 휘경이 뿐만 아니
라, 그 작자에게 치욕을 겪어야만 했던 이들을 위해서라도...
복수를 위해 불법(佛法)을 읊어야만 하는 소생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불당에서 발길을 돌리는 금문택의 얼굴은 표정 하나 없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인 것 같고, 오로지 두 눈에서는 찢어버릴 듯한 진한 살기만 느껴질 뿐
이다.
벌써 꼬박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지났다. 미친 듯이 장주(長州) 주변의 산을 배회한
금문택을 급히 뒤쫓는 사람이 있다.
“어르신, 봉려산(鳳麗山)에서 금 소협을 봤다는...”
“봉려산?!”
초로의 노인, 인자하게만 생긴 노인은 하인이 가리킨 봉려산을 향해 서둘러 경공술을
전개시킨다. 천상신의... 그다. 그가 죽어라고 금문택을 쫓는 사람이다.
산을 얼마간 돌다 보니, 아니나 다를까 마치 무혼자(無魂者)처럼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는 금문택이 눈에 들어온다. 아니,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다. 경공술을 쓰고 있는 것이다.
“나와라, 빌어먹을 자식아... 나와... 제발 나와...”
똑같은 말만 되뇌며, 그것도 얼마나 많이 되뇌었으면 목소리조차 갈라지고 있는 금문
택의 몰골에 천상신의는 다시 눈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끼고 서둘러 달려가 금문택
의 왼팔을 잡는다.
“그만둬라, 문택아... 너마저 잃을 수는 없다.”
천상신의의 진실한 마음이다. 외손녀를 잃었는데, 제자까지 잃는다면 무슨 재미로 세
상을 살아가겠는가?
“전 이미 이 세상에 없는 겁니다... 휘경이가 죽은 이상, 저란 존재는... 이미 이 세
상에서 없앤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그런 천상신의에게 돌아온 금문택의 말은 끝내 천상신의의 마음을 찌른다.
“바보 녀석!! 산 사람은 산 사람이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야! 괜히 너까지 여기
말려서 죽을 필요는 없지 않느냐!”
울먹이며 사정조로 얘기하는 천상신의를 아랑곳하지 않고, 금문택은 천상신의의 손을
뿌리치며 다시 걸어간다.
“죽이기 전까지는... 그놈을 죽이기 전까지는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사부님.”
그 말을 남기고, 금문택은 마치 습지에 물이 흡수되듯 그곳에서 스르르 사라진다. 그
러자 천상신의는 주먹을 움켜쥐며 금문택의 뒤를 쫓는다.
‘너까지 잃어서는 안 돼... 이미 가슴앓이 할 만큼 한 나란 걸 너도 알잖느냐...
지금의 넌 결코 이손문을 당해낼 수 없다. 그자의 음천수관음(蔭千手觀音)을 맞고는
나조차도 버틸 수 없어!!’
손톱이 손의 살을 찔러 핏줄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천상신의는 과거의 쌍검
류 달인이니만큼, 그 정도는 아무런 고통도 아닌 듯이 서둘러 사라진 금문택의 뒤를
쫓는다.
반각이나 흘렀을까? 봉려산을 헤매고 있던 천상신의는 눈앞에 놓여진 상황을 보고 자
신도 모르게 그리로 다가간다.
“어이, 이봐! 괜찮나?”
“흐... 크으윽...”
한 백의인(白衣人)이 검에 도륙당한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그
의 동료로 보이는, 똑같은 옷을 걸친 자들이 그 백의인을 업으며 한소리 한다.
“상처가 꽤나 깊어. 대체 누구 짓이지?”
“설마 그 색존 놈의 짓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지!! 누가 색존더러 검을 쓴다고 하던가? 그자는 음공(陰功)의 달인,
검은 쓰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럼 대체 어떤 자식이냐는 말이냐, 우리 중원무성 무사에게!”
그들이 막 하산하려던 찰나, 곁에 땀을 줄줄 흘리며 서있는 천상신의를 보고 의아한
얼굴로 묻는다.
“노인장은 대체 누구시오? 뉘시길래 이런 늦은 시간에 여길 돌아 다시니는 거요?”
다른 백의인이 거의 시비조로 묻지만, 금문택은 침착한 얼굴로 나지막하게 대답한다.
“... 천상신의라 하오.”
“!!”
삽시간에 이들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물든다. 왜 모르겠는가? 무림에서 은퇴한 뒤, 이
곳 장주 한구석에서 의원 생활을 하고 있다고 알려진 쌍검류의 달인인 그를.
“모,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불찰을 용서해 주시길...”
“됐소, 됐소. 그보다 환자의 상처부터 봅시다. 출혈이 심한 것 같던데...”
부상자를 업고 있던 백의인이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는다. 부상자를 업고 있던 백
의인의 옷은 벌써 피에 흥건하게 젖어있다.
혹시나 해서 상처를 훑어보던 천상신의는, 선명하게 남아있는 상처자국에 경악을 하게
된다.
‘상처를 만든 흉기(凶器)는 검... 그리고 한 자루가 아닌 두 자루다...!!’
천상신의가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부상자의 혈도를 짚고 재빨리 상처를 지혈한다.
“누가 옷 좀 찢어 주시겠소?”
천상신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상자를 업었던 이가 옷자락을 거칠게 찢는다. 북!
! 하는 실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옷자락이 덜렁거린다 싶더니, 어느새 그게 천상신의
의 손에 쥐어진다.
“보아 하니, 중원무성의 무사님들 같으신데... 맞소?”
상처를 꽁꽁 묶으며, 천상신의가 묻는다.
“아, 그렇습니다.”
“중원무성 분들께서 이런 곳은 웬일로 오신 거요?”
“그게, 최근 이곳에 색존 이손문이 출현했다는 소식을 듣고 성주님의 명령으로 정예
병 백 명을 이끌고 내려온 것입니다.
여기 봉려산에 그자의 행방을 봤다는 이가 있어, 지금 막 천라지망(天羅地網) 구축을
마치고 포위망을 좁혀가던 차에 이런 봉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젠 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천상신의는 지혈도 마쳤겠다, 상처도 묶었으니 이젠 이
들에게 볼일이 없다.
“환자분을 데리고, 당장 의원(醫院)으로 떠나시오. 하지만 노부의 의원으로는 오지
마시구려. 급한 일이 있어, 노부는 잠시 이곳을 떠나야 할 사정이 있기 때문에 기다려
봐야 소용없소!”
그 말만 남기고, 천상신의는 바람처럼 그곳에서 사라진다. 색존이 이곳에 나타났다니,
그는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문택이보다 내가 먼저 네놈을 찾아야 한다. 녀석의 실력으로는, 아직 색존을 당해낼
수가 없어.
손녀 원수는 내가 갚겠다, 색존 이손문!! 네놈의 그 독보행(獨步行)도 이젠 끝이다!!
’
속으로 그렇게 부르짖으며, 천상신의는 금문택이나 이손문 둘 중 하나가 눈에 띄길 간
절히 기원한다. 절대 큰꿈은 꾸지 않는다는 그가, 두 마리 토끼를 한번에 사냥하리라
고 마음먹을 만큼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헥... 헥... 젠장, 중원무성 자식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계곡이다. 그곳에서 입가에 흐르는 핏줄기를 닦는, 양손에는 온
천수라도 단박에 얼려버릴 것만 같은 냉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는 이 중년인은?
“큭... 큭큭. 하지만, 그런 졸개들로는 이 색존께는 너무 시시하지. 아암!”
전체적으로 혈의(血衣) 차림이다. 옷자락이 듬성듬성 찢어져 거기서 피가 듬성듬성 배
어져 나오고 있지만, 혈의를 입고 있는지라 눈에 띄지도 않는다.
“백(百)이 하나로 덤벼들어야 날 이길까 말깐데... 독고천 놈, 사무종 하나 쓰러트린
걸로 무게 되게 잡는데... 큭큭, 방심하다가는 뼈도 못 추린다는 걸 아셔야지.
다음 목표는, 독고천 놈의 딸이나 잡아다가...”
손을 탁탁 털며 앞으로 걸어가려던 색존 이손문, 그는 문득 전신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살기를 느끼고 몸을 한차례 떤다.
“누, 누구냐?!”
터벅... 터벅...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문득 등에 흐르는 식은땀을 느
끼고, 침을 꿀꺽 삼키더니 안력을 돋우고 자신을 죽일 듯이 바라보는 사람을 바라본다
.
“... 소년?”
흰 마의(麻衣)를 걸치고 있는 소년이다. 하지만 도저히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살기를
뿜어내고 있는 사람이 소년이란 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이손문은 눈을 비비고 다시
마의소년을 바라본다.
‘믿을 수가 없다... 여태 봐 왔던 어느 눈빛보다 강렬한 살기를 띠고 있어...!’
이손문은 자신이 느낀 공포를 애써 부정해 보지만, 어느새 자신은 그 공포를 인정하고
있는 꼴이 되고 만다.
“... 당신은 누구지?”
두 자루의 검을 갖고 있다. 그리고 검에서는 방금 전에 피를 머금은 듯, 핏방울이 바
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다.
“중원무성 사람이라면 비켜라. 색존이란 놈을 찾기 전까지는, 중원무성 사람이라도
살려놓지 않을 테니까.”
많이 거친 음성이다. 하지만 거기에 지지 않겠다는 듯, 공포를 느낀 자신이 부끄러운
듯 이손문은 눈을 부릅뜨더니 마의소년의 면전을 향해 소리친다.
“어린놈아! 이 색존 어르신도 못 알아다니, 따끔한 맛을 봐야 네놈이 정신을 차리겠
다는 것이냐?!”
그러자 놀랍게도 더 이상 강해지리라 상상도 못했던 소년의 눈에서, 처음보다 더한 살
기가 폭사된다. 그에 이손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한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인간의 눈빛이 아니다. 일주일은 굶주린 채로 토끼를 사냥해서 막 잡아먹게 되는 호랑
이보다 더한 눈빛이다.
“네놈이 색존 이손문이란 작자였구나... 각오는 됐겠지...?”
금문택이 양손에 든 검들을 천천히 들어올린다. 월광(月光)이 두 검에 반사되며 소름
끼치는 살기를 뿜어댄다.
두 자루의 교차하는 검... 그중에서 한 검은 놀랍게도 검신(劍身)이 짙은 청색으로 물
들어 있다. 그를 보고 이손문은 믿기 힘들다는 듯 소년과 검을 동시에 바라본다.
“서, 설마... 네놈, 풍운검을...?”
“잘 알고 계시는군. 그럼, 내가 누구 제자인지는 알 수 있을 테지.
지옥에서 염라대왕이 묻거든, 천상신의의 제자 금문택이 보내줬다고 해라.”
몸이 위험하다고 신호를 보내는 소년을 상대하지 않고 도망칠 것이냐, 아니면 소년을
없애고 검을 뺏을 것인가... 하고, 이손문은 잠시 극심한 고민을 해본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너무 간단하다.
“큭, 애송이놈. 네놈을 죽여...”
“죽는 건 네놈이다, 눈 삔 자식.”
금문택은 어느새 이손문의 뒤에서 싸늘한 어조로 중얼거리고 있다. 그에 반사적으로
이손문이 쌍수를 뻗어 공격을 막으려 해보지만, 어느새 두 자루의 검은 자신의 등을
할퀴고 지나간다.
“크윽...?”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다. 정신이 혼미해지려는 찰나에 의식을 챙기고 황급히 뒤로 물
러서 보지만, 금문택의 살기는 자신을 구석에 몰린 생쥐로 만든다.
“네놈은 이곳으로 와서 내게 가장 잘 대해준 사람을 겁탈했다. 죽어 마땅해.”
금문택의 좌수에 쥐어진 검이 다시 월광에 번뜩인다. 그러자 이번엔 숨 끊어지는 듯한
비명 대신 불똥 튀기는 소리가 요란하게 계곡을 메운다.
“흐, 흐흐... 애송이놈아, 비록 내가 방심하긴 했지만... 본래 실력을 쓴다면 네놈
따위는 간단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겠느냐?”
손에서 뿜어내고 있는 냉기만으로 금문택의 검을 저지한 것이다. 하지만 금문택은 거
기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선 뒤, 곁에 있는 노송(老松)에다가 이손문의
피가 줄줄 흐르는 풍운검을 탁탁 털어낸다.
“털어내 봐야 소용은 없을 테지... 어차피 또 묻게 될 테니까.”
오만방자한 금문택의 말 탓일까?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이손문은 갑작스레 금문택을
급습한다.
“음천수관음!”
이손문, 그의 나이는 약 쉰. 그간 겁탈해 온 사람들 숫자만 세더라도 꼬박 천(千)명을
넘는다. 그중에는 일개 필부(匹夫)의 딸도 있고, 첫날밤을 지내야 할 새신부도 있다.
그들의 음기(陰氣)를 어느 정도씩 흡수해서 만든 그만의 기술, 그게 음천수관음이다.
“크하하하, 애송이놈! 훗날 저승에서 만나면 아는 척도 하지 마라!”
이손문은 포효하는 표범처럼, 비상(飛上)하는 이무기처럼 금문택의 심장을 노리고 날
아든다. 전광석화같은 속도로 쓴데다가 자신 최고의 기술을 믿고 있는 탓에 이손문의
얼굴엔 잔인한 미소마저 걸려 있다.
“이놈, 죽어랏!”
금문택의 가슴에 손이 닿았다. 분명히 닿았다. 하지만 자신의 손에 닿고 있는 것은 금
문택의 가슴이 아니라 한 그루의 노송이다.
“...!!”
얼른 피해야 한다고 본능이 말하고 있다. 하지만 본능대로 움직이기 전에, 이미 그의
뒤에서는 금문택의 풍운검이 그의 어깻죽지를 노리고 잔인하게 날아온다.
써억... 하고, 마치 무를 베듯 이손문의 오른팔을 베어버린다. 바닥에 떨어진 팔뚝을
보고, 그제야 이손문은 고통에 찬 비명을 터트린다.
“으아아아악!!”
그 비명소리가 너무도 컸던 탓일까. 얼마 안 가서 금문택의 두 귀에 신속하게 다가오
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온다.
“늙은이, 나이를 먹었으면 적당하게 놀아야지... 왜 죄 없는 소녀들을 겁탈하고 발광
을 부려... 응...?”
이손문은 잊고 있었던 것이다. 풍운검을 자유자재로 갖고 놀 수 있는 자는, 풍운검의
내력 덕택에 무공 수위가 세 배 이상은 올라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제, 제발... 사, 살려만 주...”
“비참하다.”
바닥을 간신히 짚고 있는 이손문의 왼팔마저 바닥에 뚝 떨어진다.
“크아악!!”
떨어진 팔의 손가락이 까닥까닥 움직이고 있다. 비위 약한 자가 있었더라면, 기절하고
도 남았을 광경이다.
고통에 울부짖는 이손문을 아랑곳하지 않고, 금문택은 계속해서 풍운검을 이리저리 긋
는다.
“즐거웠겠지... 죄 없는 소녀들을 맘대로 유린(蹂躪)하고 있었을 때는.”
금문택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풍운검을 쥔 우수에 힘을 준다. 그리고 섬전(閃電)을
초월하리라 예상되는 속력으로 이손문의 두 다리를 그어버린다.
“끄... 끄어어억...!!”
이젠 고통에 목소리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있다. 두 다리마저 끊어버린 것이다.
“천하에서 가장 고통스런 죽음을 맞게 해 주마, 이손문...”
인과응보(因果應報).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다. 지금 이손문의 꼴과 가장 잘 어울리
는 말이기도 하다. 이손문의 끊어진 사지(四肢) 자리에서는 피가 꾸역꾸역 새어나온다
. 그를 보고도 금문택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다.
그때다. 별안간 주변에서 경악성이 들리기에, 금문택은 고개를 슬쩍 들어 그들을 바라
본다.
“저... 저 소년은 대체 누구야...?”
“세, 세상에... 저, 저기 사지가 잘린 건 설마...”
“새, 색존 이손문이다!!”
“이, 이손문이 저지경이 되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중원무성 무사들이다. 그리고 그들 사이엔 천상신의도 끼어있다.
‘... 저 처참한 광경을 만든 인물이... 문택이란 말인가...’
중원무성 무사들이 금문택 주변을 둥글게 에워싼다. 그리고 지휘자인 듯한 자가 금문
택에게 묻는다.
“소협은 대체 누구시오? 누구기에 이자를 이리도 처참하게 살해한 것...”
그때, 금문택이 고개를 돌리더니 잔인한 미소를 짓는다. 아니, 마치 얼굴이 악마처럼
보일 정도다. 그리고 다시 한번 풍운검을 들어올려, 이번엔 전력으로 이손문의 심장을
향해 내리꽂는다.
“... 꺼어억...”
외마디비명과 함께, 색존 이손문이란 존재는 중원에서 영원히 지워진다. 게거품을 물
고 있던 이손문이 눈을 까뒤집고 전신을 경련하다 뻗어버린다.
너무도 비참한 말로(末路)다.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치고는, 너무도 섬뜩하면서도 비
참한 죽음이다.
중원무성 무사들이 모두 얼어버린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무렵, 금문택은 고개를
들어 힘을 줘서 풍운검을 뽑는다. 촤아아... 하고 이손문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피
가 금문택의 얼굴과 옷을 적힌다.
“... 철혈쌍검(鐵血雙劍)이라고만 알아들 두시오. 큭큭...”
피에 젖어 섬뜩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금문택의 얼굴 탓에, 중원무성 무사들은 발이
얼었는지 꼼짝도 하지 못한다. 아니, 주변엔 적막감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귀거래혜] 20.시작된 신화(神話)
천상신의의 일고 긴 이야기가 종결된다. 허무하다는 듯한 얼굴로 내원 천장을 바라보
고 있는 천상신의 얼굴엔 힘이 없다. 외손녀와 함께했던 추억들이 떠오르는 듯, 천상
신의는 슬픈 기색을 띠면서도 간간이 미소를 짓는다.
“허허... 사 소협, 노부의 얘기는 여기서 끝이오.”
“... 그렇습니까...”
자리에서 일어서며, 사문도는 금문택의 서글픈 눈을 떠올려본다.
‘왜 금 대협이 그런 눈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지... 완전히 이해가 됐다.’
천상신의에게 포권을 한 사문도는 밖으로 나간다. 보름달이 되어가는 달과 함께 초롱
초롱 빛나는 별들이 사문도를 반기고 있다.
‘남은 시간은 단 이틀... 홍무극의 팔기군은 그날 분명 이곳을 지나칠 것이다.’
마음으로 되뇌고 있는 사문도는 갈등을 하고 있는 듯하다.
‘금 대협을 끌어들이자니 시간이 너무 촉박해. 적어도 모레 술시 이후부터는 이곳을
비워야 하는데, 그 사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끌어들여야 한다니...’
주어진 시간은 겨우 이틀 남짓. 그 시간동안 사문도는 금문택을 설득하리라 마음먹는
다.
‘해 보긴 하겠지만... 이거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이로군. 먼저 갔다가 돌아오자
니 그땐 금 대협은 떠난 후고, 설득을 하자니 시간이 없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를 반복하는 것을 보니, 사문도도 무척이나 초조한 모양이다. 그럴
때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을 듣고, 사문도는 그리로 시선을 돌린다.
“사 소협... 여기 있었소?”
금문택이다. 사문도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초조한 기색이 모조리 지워진다.
“찾으셨소?”
금문택은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모조리 지운 초조함인데도 금문택은 그
기색을 알아챈 듯하다.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소? 안색이 영 좋은 편이 아닌 것 같소.”
사문도는 아니란 듯 손을 내젓는다.
“아니오. 별일 아니니 너무 심려치 마시고... 그보다 찾아온 이유를 말해 주시겠소?
”
사문도의 질문에, 금문택이 얼굴을 굳히며 조언한다.
“몸조심하시오. 쌍웅쌍화가 잔뜩 벼르고 있소이다.”
“...”
“어떻게 장주에 있다는 걸 알았는지, 눈에 불을 켜고 소협을 찾고 있소.”
“... 조언해주신데 대해 감사하오.”
사문도가 포권을 하자 금문택은 허공을 바라보며 말한다.
“당분간은 밖에 돌아다니지 마시오. 사 소협의 무공수위를 의심하는바 아니나, 그들
뒤엔 중원무성이 있으니 말이오.”
“중원무성이라... 후후.”
실소를 뱉으며, 사문도가 이빨이 거의 다 빠져버린 검을 뽑아 이리저리 휘두른다.
“...”
불나방 한 마리가 날개를 잃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저 아무렇게나 휘두른 듯하지만,
그게 아닌지라 금문택은 감탄한 얼굴이다.
“대협의 말씀은 감사하오나, 이틀 후면 떠나야 하오.”
“!?”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다. 금문택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하는 얼굴로 묻는다.
“그 말, 진심이오?”
“먼저 간 수하가 기다리고 있을 거요. 금 대협의 일 덕택에 잊고 있었지 뭐요.”
사문도는 고소(苦笑)지으며 자신이 날개를 제거한 불나방을 바라본다.
“마지막 부탁이오... 날 따라와 주시오.”
사문도의 얼굴은 진실하다. 금문택은 그 얼굴을 보기 미안한 듯 고개를 돌린다.
“... 미안하게 됐소만, 난 아직 소협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지 않소.”
금문택에게서도 희미하게 고소가 피어난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
고 있는 것이다.
“후... 알겠소.”
사문도가 한숨을 내쉬더니 금문택을 뒤로한 채 걷는다. 걸으면서도 금문택에게 하는
당부는 잊지 않는다.
“늦어도 좋소. 마음이 움직이면 떠나기 직전이라도 와 주시오.”
“... 그러겠소.”
사문도는 분명 마지막 부탁이라고 했다. 거절할 때의 금문택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사
문도의 얼굴은 차차 흐린 빛을 띤다.
‘기다려 보겠어. 이틀 후 술시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금 대협을 믿어 보겠어!’
그로부터 하루 하고도 열한 시진이 흘렀다. 술시까지 남은 시간은 겨우 반 각.
사문도는 용번과 식사 외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머릿속엔 오로지 팔기군과 금문택
생각뿐이었으니까.
잠도 푹 잤겠다, 몸도 풀어 놨겠다... 사문도는 이제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저녁때가 다 됐군. 뭐, 먹고 움직일 채비나 해봐야겠어.’
몇 개 없는 짐을 챙기며, 사문도는 주먹을 꽉 움켜쥔다. 그런 사문도의 얼굴은 긴장으
로 인해 약간 창백하게 보인다.
‘천하의 고독랑이 긴장을 하다니, 천비가 알면 기절하겠군.’
사문도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부엌이 있는 곳으로 신형을 날린다.
평소보다 일찍 도착한 사문도를, 부엌 사람들이 반긴다.
“사 소협 오셨습니까?”
“아, 예. 죄송한데, 저녁 좀 일찍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인이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안쪽으로 크게 소리친다.
“어이, 밥 한 그릇 추가다!”
“그러겠네!!”
‘추가’란 말에, 사문도는 궁금하다는 얼굴을 하고 묻는다.
“저처럼 예약을 한 사람이 있습니까?”
“네, 금 대협께서 방금 전에 왔다 가셨습니다.”
“그렇습니까...”
“... 아,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씁쓸한 얼굴로 돌아서는 사문도를 그 하인이 세운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헤헤, 손님께 죄송합니다만. 우리 금 대협께 밥 좀 갖다 주시겠습니까? 정말 송구스
러운 일이지만, 지금 일손이 한창 바쁜 시간인지라...”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 소협.”
몇 번이고 공손하게 사과하는 하인을 말리고, 사문도는 부엌 외벽에 기대어 상상의 나
래를 편다.
‘빠르면 오늘 밤이다. 빨리 나타나야 그만큼 빨리 천비에게 합류할 수 있을 터인데..
.’
사문도의 얼굴에서는 근심이 사라질 줄 모른다. 나라 걱정에다가 자신의 운명 걱정까
지 하고 있으니, 언제 한번 얼굴을 펴고 웃을 기회가 있겠는가.
‘기분이 영 별로다. 역시, 일을 확실하게 안 끝맺으니 기분까지 지저분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내리는 사문도에게, 별안간 뇌성(雷聲)같은 소리가 쏟아진다
.
“사 소협, 식사 준비 다 됐습니다! 빨리 안 갖고 가시면 다 식습니다!!!”
그러자 사문도는 얼른 상상에서 깨어나 허겁지겁 그리로 달려간다.
“네, 네 알겠습니다. 이젠 염려 놓으십시오!”
밥상엔 정확히 한 그릇의 밥과 조기 한 마리, 그리고 여름나물이 조금 쌓여 있다. 그
를 보고 사문도는 피식 웃으며 한 마디를 내뱉으며 밥상을 들고 달린다.
“조선 사람들은 검소한 사람인가 봐.”
금문택의 방 앞에 도착한 사문도는 밥상을 내려놓고 금문택의 방문을 휙 열어젖힌다.
그러자 하품을 하고 있는 금문택의 면전이 정확히 눈에 들어온다.
“으하... 소, 소협... 여긴 어쩐 일로...?”
“아... 저녁 식사 갖고 왔소.”
금문택에게로 밥상을 밀자, 밥상이 스르르 밀리더니 정확히 금문택 앞에서 멈춘다.
“맛있게 드시오. 난 이만 가 보겠소.”
“장주(長州)를 뜨는 것이오?”
금문택의 질문에, 사문도는 고소를 짓더니 고개를 내젓는다.
“... 그럼, 쌍웅쌍화와 마주칠 확률이 극히 높을 터인데...”
“직접 처리해야 할 놈들이 있소.”
“!!”
삽시간에 금문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처리란 말이 왠지 모르게 와 닿았던 것이
다.
“나오거나 하지는 마시오. 처리할 놈들만 처리한 뒤에, 이곳에서 영영 뜰 생각이니까
말이오.”
사문도의 부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금문택은 자신의 생각을 묻는다.
“... 누굴 죽이는 거요?”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들.”
“세상에 사라져야 할 자들은 없소. 사라져야 한다는 이유는, 소협 당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닐지도 모르니까.”
금문택의 말에도 사문도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젓다가 자신의 소신을 밝힌다
.
“물론 내 생각이오. 하지만 금 대협, 대장부로 태어난 이상은... 자신의 조국과 지켜
야 할 자들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검을 뽑아야만 하는 거요. 3년 전의 대협처럼.”
“!! 이, 이보시오, 사 소협!!”
금문택은 멍한 얼굴로 사문도가 서 있던 자리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바람 같은 속도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자신의 과거를 읽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 어쩔 수 없이 검을 뽑아야만 한다고...?”
혼잣말을 되뇌며, 금문택은 머리를 감싸 쥐고 기억하기 싫은 기억을 떠올린다.
‘어쩌면 난... 내 인생을 보상해 줄 수 있는 사람을... 그냥 놓쳐버린 것인지도 모르
겠다...’
마음속으로 그렇게 되뇌며, 금문택은 밥을 먹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몸을 부르르
떤다.
모르고 있다. 운명의 끈은, 이미 자신에게 감길 대로 감겨버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밥을 다 챙겨먹은 사문도는, 일단 장주의 번화가로 나왔다. 여기저기서 번쩍이는 불빛
, 야밤인데도 여전히 북적이는 사람들 등이 사문도를 감탄하게 만든다.
‘분위기는 꼭 항주(杭州)같군. 물론, 항주 홍등가(紅燈街)에 비하면 영 덜떨어지지만
.’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자들을 기다리기엔 아무래도 너무 지루할 것 같기에, 사문도는
저 멀리 보이는 ‘무림객잔(武林客盞)’이란 간판을 달고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다.
‘뭘 살까... 술은 백건주, 여아홍 정도로 해두고... 강가니까, 녹두활어(綠豆活魚)
정도는 있겠지?’
미리 살 것을 결정한 사문도가 거침없이 객잔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그 순간, 사문
도에게로 여기저기서 시선이 집중된다.
“... 고독랑?!”
“저, 저 자가 고독랑 사문도...!!”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사문도는 신경 쓰지 않고 점소이에게
다가가 무표정한 얼굴로 할 말만 꺼낸다.
“백건주 세 병이랑 여아홍 한 병, 그리고 녹두활어는 있나?”
“아, 예. 있습니다.”
“그럼 녹두활어 세 마리. 그렇게 보따리로 싸 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정확히 은자 네 푼입니다, 손님.”
술병에 마개를 쑤셔 넣고 있는 점소이가 공손하게 하는 말에, 사문도는 품에서 은자를
뒤적이더니 정확히 네 푼을 꺼내 점소이에게 던져준다.
“맛있게 드시기 바랍니다, 손님.”
사문도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보따리를 짊어진 채 자신에게 시선이 쏠려 있는 그곳
에서 발걸음을 돌린다. 바로 그때다. 별안간 사문도의 어깨에 거구의 사내가 부딪힌다
.
“뭐냐, 애송아? 왜 시비냐?”
“큭, 상대하지 마. 자네보다 열 살은 어려 보이는데, 괜히 건드렸다가 부잣집 아들이
라도 되면 어쩌려고?”
얼큰하게 취한 듯, 그 거구 사나이들의 얼굴에서 취기가 엿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가내가 쓰는 말은 한어가 아니다.
‘여진인이다... 게다가 이 정도의 거구들이라면...’
자신이 노리고 있는 자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나마 사문도의 주먹에 힘
이 들어간다.
“... 죄송합니다.”
고개를 한번 끄덕하고, 그대로 발길을 돌려버리는 사문도를 객점 사람들은 의아한 눈
으로 바라본다.
“고독랑이라면, 저 정도는 문제가 없었을 텐데... 왜...”
“쓸데없는 싸움을 피하려는 건가?”
거구의 사내들도 별 문제없이 넘어가는 터라, 그리 큰 소란은 일어나지 않는다.
“큭... 이봐, 우리 언제까지 집합이었지?”
“글쎄. 얼마 안 남았을 걸?”
“끄윽. 피곤하군. 하루쯤은 더 쉬었다 가도 괜찮을 텐데.”
“별 수 없지. 흑령(黑靈) 부장(副將)께서 보름 전까지는 속히 지원해 달라고 부탁하
셨으니까.”
“큭큭... 그래, 그래. 흑령 부장이나, 우리 제독이나... 하나같이 대단한 사람들이지
.
이 나라의 핵심인물을 제거할 일을 하시는 분들 아니냐... 응? 끄윽.”
“말은 그만하고, 빨리 봉려산인가 어디론가로 가 보자구. 늦었다고 잔소리 들을라.”
여진어로 지껄이고 있기에, 이들의 말을 알아듣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여진어
를 알고 있는 사문도는 얼굴을 굳힌 채로 객점을 빠져나가는 그들의 뒤를 따른다.
확신한 것이다. 이들은 분명 팔기군의 일원이라고... 이들을 이끌고 있는 이는, 분명
홍무극이라고.
‘흑령이라... 이거 또 예상치 못한 변수가 등장했군. 이들의 얘기를 들어봐서는, 필
시 무공 실력은 홍무극 이상일 터인데...’
저절로 그쪽 사람들이 걱정된다. 하지만 이제 막 벌어지는 상황은 사문도가 걱정할 시
간조차 없게 만든다.
“네놈이 정말 고독랑 사문도냐?”
여진인들의 뒤를 따라 객점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사문도는 네 쌍의 눈이 바로 곁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걸 알아챈다. 그리고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는 언젠가 한번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다.
“... 아아, 누군가 했더니...”
“쌍웅쌍화의 조충이다.”
쌍웅쌍화의 조충... 그가 차가운 어투로 말을 뱉고는 사문도를 노려본다. 그 뒤엔 나
머지 세 사람이 반신반의한 얼굴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 그렇다면 어쩌실 거요?”
“생포해야지. 무림의 평화를 위해서.”
조충의 ‘무림의 평화’란 말에, 사문도가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차가운 얼굴로 대꾸
한다.
“무림의 평화라... 큭, 당신네들의 돈줄을 위해서겠지. 안 그렇소, 여러분들?”
“... 우릴 네놈과 같은 사파로 보지 마라! 감히 제갈 공자를 사칭하고, 우리가 여기
서 네놈을 눈이 빠져라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타나?”
하지만 사문도는 악표가 하는 말을 듣고 있지 않다. 고개를 흘낏 돌려 여진인들이 사
라져가는 곳을 보고 있다.
“깔보지 마라, 사문도!! 네놈이 아무리 조무환을 이겼다고 한들, 우리 넷이 펼치는
합공을 당해낼 수 있을...”
“같잖은 합공으로 누굴 어떻게 하시려고? 도리어 당하지 말고, 지금 바쁘니까 물러나
시지.”
완전히 무시하는 말이기에, 삽시간에 악표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든다.
“이놈, 감히 누굴 깔보는 것이냐!!”
악표가 검을 뽑는다. 그리고 벼락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드려는 찰나, 조충이 얼른
이를 저지하고 나선다.
“참으시오, 악 형. 그래봐야 사문도가 원하는 일밖에 더 생기겠소?”
“조 형은 저놈이 우릴 깔보는데, 참겠단 말이오?!”
한편, 양혜월과 조령은 약간 복잡한 얼굴이다.
“당신이 정말 고독랑인가요?”
조령이 묻는다. 그러자 사문도는 여전히 싸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한다.
“그렇소, 양 소저. 당신들이 그리도 찾고 있던 고독랑 사문도가 바로 나요.”
양혜월과 조령의 얼굴이 약간 흐린 빛을 띤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그들도 검을 빼어
들고 차가운 눈초리로 사문도를 노려본다.
동서남북, 네 방위를 쌍웅쌍화가 점령하고 있다. 하지만 사문도는 검을 뽑을 생각도
않은 채로 처음과 같은 자세로 그들을 대하고 있다.
“사문도, 끝까지 우리를 깔볼 생각이냐?”
악표, 그도 어느새 검을 쥐고 사문도의 목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문도는 여
전히 괘념치 않겠다는 얼굴로 간단히 말을 맺는다.
“이 나라를 위해서라도, 난 너희들과 노닥거릴 시간 따윈 없다. 괜히 피 볼 생각 말
고, 조용히 사라져.”
그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조령의 검이 사문도의 목젖 바로 끝에서 멈춘다.
“누가 당신을 보내준다고 했죠? 미안하지만, 당신은 여기서 조용히 중원무성으로 압
송돼 줘야겠어요.”
“...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이군.”
말을 마친 사문도가 눈을 내려감더니 네 사람의 호흡을 읽는다.
‘호흡은 잘 맞는군. 조충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 세 사람의 실력은 듣던 것과는 좀
다른걸...’
하지만 자신의 상대가 아니란 건 너무도 쉽게 알 수 있던 터라, 사문도는 넷의 호흡이
교차되는 순간을 노린다.
‘이때다!’
그때를 시작으로, 사문도는 번개같이 몸을 뒤튼다. 그러자 번개같이 네 개의 검이 사
문도의 미간, 후두부, 양쪽 관자놀이를 노리고 날아온다.
달빛에 네 개의 검이 번쩍인다. 하지만 사문도는 어느새 이들 사이에서 사라진 뒤다.
“쫓아라! 봉려산 쪽으로 사라졌다!”
이 넷이 전속력으로 봉려산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조충은 달려가면서도 영 께름칙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여전히 무공을 익힌 사람 같지가 않다. 반박귀진(返博歸眞)의 경지를... 초월한 건
가?’
무공을 익힌 흔적이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 보이지도 않는 경지가 반박귀진이다. 만일
그 정도라면, 이 네 사람이 합공한다손 치더라도 사문도를 이길 수 없는 것이다.
‘모를 일이다. 나라를 위한 일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기에...’
자신들이 합공해도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르는 자, 게다가 이미 정사(正邪) 가릴 것 없
이 명성이 드높은 자이기에 이들 넷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문도는 분명 조심조심 방향을 돌리면서 여진인을 쫓고 있다. 하지만 쌍웅쌍화 네 명
은 그런 사문도를 집요하게 쫓아온다.
‘추격술 하나만큼은 일류로군. 이러다가 놓치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사문도의 얼굴에서 근심이 떠오른다. 하지만 입술을 질끈 깨물고 봉려산으로 도약하고
있다.
한편, 쌍웅쌍화 중에서 조충은 이를 꽉 물고 무서운 눈빛으로 사문도의 뒤를 맹렬히
추격한다.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래도 난 무림공적인 마도 천승호를 제거한 사람이다. 분명 제대로 맞췄다고 생각
했는데... 정확하게 빗나가다니!!’
조충은 이런 마음으로 쫓고 있지만, 조령은 쫓아가면서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이상해... 저 정도 실력이라면 분명 우리 추적을 따돌릴 수 있을 텐데, 왜 하필이면
잡힐 듯 말 듯 하는 거지?’
조령은 얼마 못 가서 조충까지 사문도를 놓칠 거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지금 조충은
아직 사문도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실력을 잘 알 수 있는 조령이기에, 사문도에게 모
르게 무슨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조 대협, 잠깐 멈춰요!!”
“무슨 일이오, 조 소저?”
“수상해요. 아니, 분명히 뭔가 있어요.”
“뭐가 말이오?”
조충은 퉁명스런 목소리로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로 그대로 맹렬히 질주한다.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이상하오?”
“우리의 합격을 완벽하리라 느껴질 정도로 피해낸 사람이... 왜 우리의 추격에서 못
빠져나가는 거죠?”
“...?”
“무슨 수를 써놓고 봉려산으로 우리를 유인하는 건 아닐까요?”
“힘만 쓰는 놈이 무슨 머리를 쓰겠소.”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조충이 조령의 말을 일축해 버린다. 그리고 속도를 조금 더 끌
어올려 밤하늘을 비상(飛上)한다.
“... 틀렸소, 조 소저. 조 형 말대로 실제로 사문도가 책략을 쓸 거라고는 생각지 않
소. 분명 그는 조 형보다 실력이 몇 수는 위라오. 그렇다면 그때 조 형을 처치했을 터
인데, 왜 이렇게까지 유인하려 한다는 말이오.”
“...”
악표의 말에 조령이 말을 잃고 입을 다문다. 그러자 악표는 이를 달래본다.
“조 형을 믿어 봅시다. 조 형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거기에 우리까지 있다면... 해볼
만 할지도 모를 일 아니오.”
“... 알겠어요.”
결국 조령도 완전히 조충의 뜻에 승낙하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결정한 이상, 조령에
게 후회란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잡을 수밖에 없겠지. 최선을 다하겠어!’
달라고 달린다. 계속 달린다. 사문도를 잡을 때까지, 그들은 언제까지고 달릴 것이다.
그런 그들이 지나간 길에는 먼지만 달빛을 받으며 휘날리고 있을 뿐이다.
추적하고 있는 여진인들 주위를 돌며, 사문도는 생각에 빠진다.
‘쌍웅쌍화는... 좀 처졌나?’
쫓아오는 듯한 기색이 많이 줄었다는 걸 느낀 사문도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여진인
들이 보일락 말락 하는 곳에서 딱 멈춰 선다.
“흐흐, 산 분위기 탓일까. 술이 확 깨.”
“그렇잖아도 술은 깨야지. 제독께 죽고 싶지 않다면 말야.”
사문도와 이들의 거리는 5장 정도로, 길지도 짧지도 않은 거리다.
‘좋아, 이 정도 거리 유지하며 뒤따르면 아무 문제도 없겠지.’
적이 만족한 듯, 사문도는 한걸음씩 내디디며 이들의 얘기를 엿듣는다.
“그러고 보니, 부제독을 꺾은 자가 여기 있을 거라더군.”
“몇 개월 전에 군웅대회에서 우승했다는?”
“그래. 고독랑인가 뭔가 하는 무림인한테 당했지.”
“그 애송이가 여기 있단 말인가?”
“그래. 고독랑이 둘일 수는 없으니까.”
사문도가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용히 한숨을 내쉰다.
‘군웅대회 때의 여진족을 말하는 거로군. 하긴, 내가 피떡으로 만들어 놨었지.’
이제 조충은 사문도를 완전히 놓친 듯하다. 덕택에 사문돈느 마음을 푹 놓고 두 여진
인을 한껏 노려본다.
‘계속 움직여라. 네놈들 제독이 있는 곳으로 말이다. 모두 깨끗하게, 완벽하게 저승
이란 곳으로 보내줄 테니까!’
사문도의 전신에서 비릿한 살기가 피어오른다. 그러다가 여진인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들에게 다시 조금씩 발길을 돌린다.
봉려산 중턱의 넓은 공터. 그곳엔 현재 250여 마리의 군마(軍馬)가 나무에 묶인 채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군마와 같은 수의 사람들이다
.
“제독, 250 모두 모였습니다.”
“그런가.”
제독이라 불린 자가 잘기에서 벌떡 일어선다. 넓게 딱 벌어진 어깨, 그리고 등에 메고
있는 긴 흑도(黑刀)가 상당히 어울리는 사내다.
“마지막에 온 자, 손을 들어 봐라.”
팔기군(八旗軍)의 제독, 홍무극. 그가 차가운 어조로 말을 내뱉는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한 곳이기에, 이런 홍무극의 목소리는 모두에게 뚜렷이 전
달된다.
그리고 곧 두 사람이 손을 같이 든다. 사문도가 따라온 둘이다.
“... 어디서 여기까지 올라왔느냐?”
“장주의 무림객잔이란 곳에섭니다, 제독!”
대답하는 목소리 또한 낮다. 서로의 밀약(密約)인 것이다. 타인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장주라... 골이 아파오는군.”
홍무극에 잔디에 침을 탁 뱉는다. 그리고 번개같이 그 둘에게 흑도를 날린다.
“.. 허헉...”
“... 제, 제독...?”
그 둘의 오른쪽과 왼쪽 귓불에서 핏줄기가 흐른다. 흑도는 바닥에 꽂힌 채로다.
“제, 제독... 갑자기 왜 저희를...”
“네놈들이 그러고도 팔기군의 군대라고 할 수 있느냐?!”
홍무극이 말을 마치고 곁에 있던 회의인(灰衣人)에게 눈짓을 한다. 그러자 그 회의인
은 신속한 속도로 흑도를 뽑아와 홍무극에게 무릎 꿇고 공손히 흑도를 든 양손을 내민
다.
홍무극은 흑도를 집어넣으며 노한 듯이 일갈을 터트린다.
“쥐새끼가 따라붙은 줄도 모르고, 여기까지 올라왔단 말이더냐!”
홍무극의 살기가 사방으로 뻗쳐 나간다. 그리고 흑도를 앞으로 쭉 뻗자, 모든 이들의
형형한 눈빛이 그리로 쏠린다.
20장 이상 떨어진 곳의 우거진 숲 속에, 한 소년이 서 있다. 전신엔 멋진 흑의(黑衣)
를 입었고, 자신이 지목을 당했음에도 불과하고 무표정을 하고 있는 소년이 말이다.
“애송이, 정체를 밝혀라. 갈기갈기 찌어 죽여 버리기 전에!”
홍무극의 말이 들려설까. 흑의소년, 즉 사문도의 입가에서 비릿한 미소가 핀다.
“눈치 한 번 빠르시군. 여기 자리 잡은 지는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말야.”
술병의 술을 들이키며, 사문도가 천천히 숲 밖으로 걸어 나온다. 그리고 마치 유령처
럼 발을 놀리더니, 어느새 사문도는 팔기군의 겨우 2장 앞에 서있다.
“포, 포위한다!”
그 말을 시작으로, 팔기군 모두들이 말의 고삐를 풀고 사문도를 둥글게 에워싼다. 신
속한 동작이다.
“... 호오, 86초. 2백이 넘는 인원인데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군.”
“칭찬으로 듣겠다, 애송이.”
홍무극이 말을 마치고 흑도를 움켜쥐며 싸늘한 눈초리로 사문도를 노려본다. 사문도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손가락을 꺾으며 다소 여유를 즐긴다.
“애송이가 아니다. 난 사문도. 중원 무림인들은 날 고독랑이라 부르지.”
그제야 홍무극의 얼굴에서 흠칫하는 기색이 엿보인다. 그리고 약간이긴 하지만 팔기군
도 술렁인다.
“고, 고독랑이 바로 저 사람...?!”
“고독랑이 갑자기 왜 우리 제독을...”
부하들이 술렁이는 기색이 역력하자, 홍무극은 흑도를 이리저리 내저으며 분위기를 무
마시키고 사문도에게 묻는다.
“호오... 이거, 거물이 납셨군. 그래, 여긴 무슨 일로 왔지? 이 내게 무슨 이유로 내
수하 뒤를 밟아 따라온 것이냐?”
“네 어깨 위에 있는 보잘 것 없는 물건이 필요하다. 이 정도라면 이유로 괜찮겠나?”
흥미를 보이던 홍무극의 눈동자가, 별안간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그리고 우두둑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어금니를 꽉 깨물더니, 몸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에 찬 목소리를 내
뱉는다.
“애송이놈, 네놈이 미친 모양이로구나!!”
“네놈과 팔기군은 이 나라 사람들을 학살했다. 그리고 여인들은 겁탈하고.
그것만으로도 죽을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사파 주제에 이래라 저래라냐?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릴 놈이로군!”
비웃는 듯한 홍무극의 답변에, 사문도의 무표정이던 얼굴이 약간이나마 변하게 된다.
짙은 눈썹이 꿈틀하더니, 곧바로 싸늘한 미소와 함께 분위기를 찢어버리는 듯한 살기
가 방출된다.
“뜨거운 맛을 보게 될 것은 너다, 빌어먹을 자식아!”
사문도의 말을 들은 홍무극은,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는 얼굴을 한다. 그리고 무슨
신호인 듯이 오른손을 휙 내젓는다.
“척살령이다!”
“척살하자!”
삽시간에 250명의 인원이 사문도 하나를 노리고 달려든다. 기마군단(騎馬軍團)이기에,
그들은 절대 느릴 수가 없다. 하지만 그보다 사문도의 움직임이 몇 수는 더 빠르다.
“혈영검강(血影劍强)!!”
피보다도 짙은 색을 한 초승달 모양의 검강이 사문도의 출두한 검에서 뿜어져 나간다.
그러자 검강이 지나간 자리는 피보라가 뿜어져 나온다.
“크아악!”
“으악!”
삽시간에 10여 명이 팔이 끊어진 채 낙마해서 뒹군다. 하지만 사문도의 무자비한 살육
전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만 있다.
“주춤할 것 없다! 우리는 정예군이다!! 애송이 하나쯤은, 얼마 안 가 잡을 수 있을
테니까 마음껏 덤벼라!
우리에게 패배란 없다. 최선을 다 해서 상대를 상대하란 말이다!!!”
홍무극의 격려에 분기탱천한 이들은 한층 기세를 곤두세우고 적극적으로 몸을 부딪쳐
온다. 그러자 사문도 역시 보다 신중한 표정으로 이들을 각개격파(各個擊破)해간다.
‘한꺼번에 많은 수를 상대하는 건 무리다. 이들은 분명, 귀혼당 군대들보다 실력이
한 수는 위니까!’
이들이 내뿜는 투지와 살기, 그리고 몸놀림 등등이 모두 한수 위였던 것이다. 정신없
이 검을 휘두르면서도, 잠시나마 사문도의 얼굴은 불안함으로 물든다.
‘여진의 누르하치는 무림인들보다 강한 군대를 갖고 있다. 이 얼마나 걱정스러운 일
인가!’
여진 통일이 아직 끝나지 않아 누르하치가 명(明)을 건드릴 리는 없겠지만 사문도는
불안하기만 하다.
‘우리 백성들의 피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이들을 여기서 깡그리 멸해야만 한다!’
“빙백검강(氷白劍强)!!”
이번에는 그저 평범한 검기(劍氣) 모양의 기류가 사문도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다. 하
지만 그 검식(劍式)이 결코 만만한 검식이 아니란 걸 사문도에게 달려드는 여기 중에
서 누가 알 수 있으리오.
“으... 모, 몸이...”
“이, 이건... 대... 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들은 한 덩어리의 얼음이 되어 말 위에서 뚝뚝 떨어진다. 그렇게
한 번의 빙백검강을 맞고 죽은 인물은 여섯 명이다.
‘쳇, 겨우 여섯인가. 이제 쓰러진 녀석은 겨우 스무 명도 안 된다. 이래서는 힘들겠
는...’
쪼르륵. 문득 사문도는 코에서 흘러내리는 뭔가를 손등으로 문지른다. 그리고 검을 쓰
는 가운데서도 슬쩍 바라보니, 놀랍게도 코피다.
‘... 이건 대체 무슨 징조지?’
그러고 보니 머리도 조금 어지러운 듯하다. 하지만 사문도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검을 놀린다.
‘안 죽이면 내가 죽는다. 이까짓 두통 정도야, 참아내야겠지!’
흘러내리는 코피를 닦아내며, 사문도는 계속해서 팔기군을 쓰러트린다. 덕택에 홍무극
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것도 싸늘한 미소를 지은 채로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사문도는 알지 못한다.
1대 250. 누가 이기겠냐고 내기를 제안한다면, 분명 그 자는 미친놈이란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러나 때론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세상엔 일어나고 한다.
“태극검법(太極劍法)!!”
사문도가 일갈을 터트리기가 무섭게 말 위에 있던 여진인 하나가 피를 쏟으며 낙마한
다. 그런 그를 수기의 군마가 짓누르고 지나간다.
“쿨럭, 쿨럭. 크으, 젠장.”
벌써 백여 명을 도륙한 사문도는 힘들 텐데도 신형을 날리는 속도가 신속하다. 기마군
대인 팔기군은 이런 사문도를 사냥감 쫓는 개처럼 따라온다.
“피 닦을 시간은 좀 달란 말이다, 자식들아!”
이젠 코에서뿐만 아니라 입에서도 가는 핏줄기가 흐른다. 사문도가 피로 엉망이 된 얼
굴을 닦으며 팔기군에게 도약하려는 찰나, 단전 부근에서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통증
을 느끼게 된다.
“욱!!”
왼손으로 통증이 느껴지는 단전을 누르자, 사문도의 입에서 검붉은 핏줄기가 쏟아진다
. 사문도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검을 다시 고쳐 쥐려는 순간 팔기군이 덮친다.
“죽여라!”
“동료들의 원수닷!”
창과 칼이 사문도의 급소를 노리고 각각 뻗어온다. 사문도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누르
며 힘겹게 공죽으로 도약한다.
“빙백검강!”
1장 높이에서 검을 휙 긋자, 검에서 피어난 얼음꽃이 10여 명의 팔기군을 토막을 내려
고 날아간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여덟은 검강을 맞고 동상이 되어 부스러진다.
사문도가 착지하자 팔기군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굳어버린다. 헉헉대며 고인 피를 탁
뱉어낸 사문도의 모습이 마치 귀신(鬼神)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빌어먹을, 한 방 맞았구만 이거.”
다 피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현재 사문도의 왼쪽 팔뚝엔 검흔(劍痕)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거기서 흘러내린 핏방울은 달빛에 반사돼 섬뜩한 느낌마저 불러일으키고
있다.
팔기군이 주춤하는 틈을 타서, 사문도는 홍무극을 흘낏 바라본다. 여전히 흑도를 낀
채로 팔짱을 끼고 있다. 두 눈은 여전히 형형하기 그지없다.
“후우... 네놈은 언제 나올 생각이냐, 홍무극.”
홍무극이 조소 가득한 눈빛으로 말 한마디를 사문도에게 내던진다.
“나갈 필요도 없다고 느껴진다. 앞으로 한 시진 안으로, 네놈은 내 수하들에게 살해
당할 거니까.”
자신만만한 어투다. 하지만 사문도는 그 자신만만을 밟아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눈을 하
고 씩 웃는다.
“네 신세를 끝까지 모르겠단 말이냐, 어리석은 놈. 나중에 땅을 치고 통곡할 수도 없
게 될 거다. 죽는 건 네가 될 테니까.”
홍무극은 사문도의 망를 곰씹다가 이를 빠드득 갈고 다시 손을 휙 내젓는다.
팔기군이 다시 사문도를 공격하는 것을 보고 홍무극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내상을 입은 데다 어깨까지 베인 네놈이 이 팔기군을 몰살시키고 나까지 처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얼마나 더 버티느냐가 관건이겠지.’
홍무극은 흥미로운 얼굴이다. 압도적이다가 차차 균형이 이루어져가는 전투를 보고 있
자니, 재밌어지는 것을 견딜 수가 없는 모양이다.
반 시진 정도 흘렀다. 어느덧 남아있는 팔기군은 70여명.
쓰러질 듯 말 듯 하면서 사문도는 계속해서 팔기군을 쓸어넘겼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
히 쓰러트리고 있다.
홍무극은 아주 약이 오른 듯, 소리를 고래고래 내지르고 있다. 자신의 목적, 즉 천진
에서 흑령과 합류하기로 한 일은 이미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버리기라도 한 듯이.
“혈영... 검강!!”
초승달 형태의 검강, 그것이 군마를 베어버린다.
“이히히힝!”
사문도가 교묘하게 말의 목을 노려 검강을 날린 탓에, 말을 죽이고 또한 말에 타고 있
던 팔기군마저 죽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번 공격에서도 팔기군 여섯이 허리가 잘린 채로 피보라를 내뿜으며 핏덩이로
화한다. 그런 시신을 말들이 걷어차고 밟아버리는 탓에 주변 공터는 완전 아수라지옥
도(阿修羅地獄圖)를 그려놓은 듯하다.
‘피를 너무 많이 쏟았나... 빈혈(貧血)이 오는군.’
검강을 날릴 때마다 사문도의 입에서는 핏줄기가 흐른다. 덕택에 사문도는 신물이 날
지경이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지라 사문도의 얼굴은 납덩이처럼 무겁게 굳어간
다.
“헉... 헉... 헉...”
거친 심호흡을 내뱉는, 피범벅이 된 사문도를 바라보는 홍무극의 차가운 눈에서 불길
이 솟아오른다.
“전체 정지!!”
홍무극의 명이 떨어지자 팔기군을 군마를 멈추고 신속히 전열을 가다듬는다.
“... 정말 대단하구나, 고독랑. 네놈 덕택에 정예병 팔기군을 2백여 명이나 잃었다.
”
“헉... 헉... 그게 왜?”
고인 침을 탁 뱉으며 사문도는 고개를 들어 홍무극을 노려본다.
“아쉽지만 우리의 유희는 여기까지다. 네놈에게 발이 묶여 있을 수는 없거든. 뭐, 이
미 내 수하들이 일을 끝내고 왔겠지만 말이다. 큭큭.”
홍무극이 한걸음 앞으로 나온다. 그리고 덤벼들 듯 하다가 다시 손을 휙 내젓는다.
“거기는 이미 일이 시작됐겠군. 흑령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큭큭...”
“네놈들 뜻대로 되진 않을 것이다. 금의위를 얕보지 마라!”
잠시 휴식을 취한 탓일까. 팔기군에게 공격을 가하는 사문도에겐 아까 볼 수 없었던
팔팔함이 엿보인다.
“빙백...”
사건은 그때 벌어진다. 빙백검강을 쓰려던 사문도의 검이 부러진 것이다.
“앗?!”
이미 검은 한계를 뛰어넘었던 것이다. 부러진 검신이 떨어지자, 곧바로 몇 동강으로
다시 나눠진다.
‘낭패다.... 안 그래도 몸 상태가 희한한데, 검을 잃었으니. 거기에 홍무극까지 가세
한다면...!!’
사문도는 손에 식은땀을 쥔다. 시간을 낭비하기 싫은 듯, 사문도는 맨손으로 싸우기로
결심하고 돌격해오는 팔기군에게 빙백신장을 날리려고 옷을 걷어 올린다. 그런데 그
때, 사문도 역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
“크하학!!”
“크허헉!”
사문도 곁에서 날아온 검 한 자루가 회전해서 사문도에게 다가오던 팔기군을 쓰러트린
다. 덕택에 전진하던 팔기군은 무슨 일인가 싶어 급히 군마를 세운다.
“누구냐!!”
홍무극도 멈춰서 검이 날아온 곳으로 소리친다. 그러자 한 사내가 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낸다.
“많이도 다쳤구려, 사 소협. 지원해도 괜찮겠소?”
“그, 금 대협!!”
흰 색의 마의(麻衣)가 미파람에 펄럭이고 있다. 철혈쌍검이라 불리는 사내, 금문택...
그가 나타난 것이다.
“자신 있는 얼굴로 따라오지 말라더니, 왜 이런 꼴이오? 분명 적은 숫자는 아니리라
짐작했건만...”
“...”
사문도는 아무 말도 않고 곁에 박힌 풍운검으로 다가간다.
“소협은 좀 쉬시오. 이들은 내가 청소하리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의 형형한 눈길이 금문택에게로 쏠린다. 특히 홍무극은
다 도니 밥에 재 들어갔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
“끼어들지 마라, 놈. 이건 나와 저 애송이 사이의 싸움이다.”
“네가 뭐라고 내 행동에 참견이지?”
금문택이 남은 검을 뽑아 오른손에 쥐고 사문도에게 소리친다.
“소협은 여기로 와서 좀 쉬시오. 이 희한하게 생긴 여진족 놈은 내가 처리할 테니.”
한동안 풍운검을 바라보던 사문도는 금문택의 말을 듣고 고개를 내젓는다.
“괜한 고집 부리지 마시오. 여기서 좀 쉬는 게 신상에 좋소. 까딱 잘못했다간 내공을
모두 잃어버릴 수도 있단 말이오.”
하지만 사문도는 상관없다는 얼굴이다.
“저 자식 말대로, 이건 나와 저 자식의 싸움이오. 검만 잠깐 빌려 주시구려.”
부드러운 흙에 박혀있는 풍운검을, 사문도가 간단히 뽑는다. 사문도의 안색을 본 금문
택은 말리기 힘들 것이란 걸 짐작한다.
결국, 금문택은 못 미덥다는 얼굴로 혼잣말을 뱉으며 사문도에게 걸어간다.
“여기 청소가 끝나면 같이 할아버지께 가 봅시다, 사 소협. 상태가 보통이 아닌 것
같소.”
사문도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풍운검을 꼭 움켜쥔다. 얼마 안 가서 검신이 영롱한
청색으로 물든다.
“죽을 각오는 됐겠지, 홍무극.”
“죽는 건 네놈이 되는데, 굳이 내가 죽을 준비를 할 필요는 없다.”
“... 깨닫게 해줄게. 왜 내가 고독랑이라 불리는지.”
사문도와 홍무극은 동시에 신형(身形)을 날린다. 흑도와 풍운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좌중(座中)에 울리자, 금문태근 거기에 끼어드려는 팔기군을 보고 말을 건넨다.
“어이, 너희들의 상대는 나다. 1대 1 싸움엔, 사내자식이라면 끼어들어서는 안 되지.
대장부의 꿈을 꺾지 마라, 쓰레기들아.”
반응은 금세 나타난다. 눈에서 불꽃을 뿜으며, 팔기군 전원이 금문택을 향해 달려온다
.
‘쳇, 일검류는 그리 자신 있는 편은 아닌데. 해 봐야겠지!’
그리고 군마를 몰기 시작하는 팔기군의 앞으로 신형을 날린다.
“맹호은림세(猛虎隱林勢)!!”
갑자기 시작된 금문택의 공격이 몰아친다. 삽시간에 다섯 명이, 잘린 목에서 피분수를
뿜으며 고꾸라진다.
“철혈쌍검 금문택의 힘을... 절실히 깨닫게 해 주지!”
금문택이 다시 움직인다. 그리고 셋의 목이 더 떨어져서야 팔기군은 금문택을 포위하
고 공격을 다시 시작한다.
“쳐, 쳐라!!”
하지만 사문도를 상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일당백 정예병이란 명성을 얻고 있는 팔기
군은 오합지졸(烏合之卒)처럼 무너져간다.
[귀거래혜] 21.250분지 1의 애정(愛情)
사문도는 금문택의 등장으로 한결 수월한 싸움을 하고 있다. 덕택에 긴장이 살짝 풀려
휘두르는 검을 떨어트릴 뻔까지 하게 된다.
“태극검법!”
무당파의 태극검법이 쏟아지자 홍무극은 입술을 짓이기며 흑도를 이리저리 내두른다.
‘젠장,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분명 내상을 입은 것 같았고, 게다가 검상(劍傷)까지
몇 군데 입었는데...!’
사문도의 손놀림 하나하나엔 홍무극이 상상도 못할 내력이 담겨 있다. 홍무극은 현재
수비하기 바쁠 뿐, 공격할 틈은 나타나지도 않고 있다. 그만치 사문도의 검술이 완벽
에 가까운 것이다.
‘이렇게까지 당하고도 날 밀어붙이고 있는 거란 말인가? 내 실력은...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이었나?!’
홍무극은 울화가 치밀어 오르자 미친 듯이 흑도를 휘두른다. 빈틈이 금방 나타난다.
그 틈새를 놓칠 사문도가 아니기에, 재빨리 풍운검을 홍무극의 가슴팍으로 밀어 넣는
다.
1다경 정도 지속되던 균형은 결국 깨진다. 홍무극의 상처는 곧이어 사문도의 우세로
바뀌어 버린다. 사문도는 홍무극의 가슴팍에 새겨진 상처를 보고, 안면에 노골적으로
미소를 띠운다.
‘전세는 완전히 내게로 기울었다!’
홍무극이 뒤로 밀리는 게 확연히 드러난다. 풍운검과 흑도가 서로 부딪혀 불똥을 뿜어
내는 가운데, 사문도는 토할 것만 같은 핏물을 애써 눌러 참으며 검을 휘둘러본다.
‘이걸로 마지막!’
풍운검이 웅웅거리기 시작한다. 홍무극을 완력으로 밀어낸 사문도가, 홍무극이 반격할
기회는커녕 자세도 다 잡기 전에 검강을 날린다.
“빙백검강!!”
허공을 가르며, 경쾌한 소리를 내뿜으며 날아간 빙백검강은 금방이라도 홍무극을 동강
낼 듯하다.
“크흑!”
사문도가 피를 쏟아내며 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흥건하게 바닥을 적신 피를 보고 있자
니, 사문도는 저절로 정신이 드는 듯이 다시 일어선다.
‘이젠... 끝났...’
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을 보고 사문도는 자신의 눈을 의심한다. 처음에 비해 안색이
많이 창백해지긴 했지만, 분명 홍무극이 자신에게 비틀거리며 다가오고 있다.
“후... 불행 중 다행이로군.”
홍무극이 서있던 곳엔 막 당해버린 듯, 동상이 되어있는 팔기군 하나가 있다. 그를 보
고 사문도가 한숨을 내쉬며 핏물을 닦아내고 묻는다.
“... 대단한 충성심이로군. 대체 교육을 어떻게 했길래 널 위해 이렇게까지 희생하는
것이냐?”
그러자 이번엔 홍무극이 의아한 얼굴을 하며 묻는다.
“무슨 개소리냐? 목숨은 하난데, 내가 제아무리 제독이라 해도 이놈이 나 대신 죽으
려 달려들 리가 없잖아?”
“...?”
홍무극의 말을 이해치 못한 사문도가 아미를 찌푸리고 묻는다.
“네놈이 네 한목숨 챙기려고 설마 부하를 죽이거나 하지는 않았을 텐데? 네놈 뒤에
있는 얼어붙은 시체는 그럼 대체 뭐란 말이지?”
“내가 죽였다. 네놈이 말한 대로, 난 살아야 하니까.”
“... 뭐야?”
사문도는 말을 듣고는 얼이 빠진 얼굴이다. 금문택 역시 이를 부드득 갈면서 검을 쥔
두 손에 힘을 더한다.
‘제 한목숨 살려고 하를 죽여? 빌어먹을 자식!’
홍무극에게 달려들까 생각해 보지만, 및니 듯이 달려드는 팔기군 전원을 전멸시키는
것으로 결론을 낸다.
“진전격적세!!”
또 하나의 팔기군이 황천행 마차를 타고 만다 그리고 동시에 금문택의 등에서도 끈적
한 뭔가가 흘러내린다.
‘크으, 젠장. 더럽게 따끔거리는군, 이거.’
땣마침 몸을 숙였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등판을 날릴 뻔했던 걸 알아챈 금문택이기
에 손에 식은땀을 쥐고 신경을 곤두세운다.
금문택은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공격을 개시한다. 그리고 한 서너 명이나 더 죽였을
때, 문득 뒤에서 들리는 공허한 웃음소리에 잠시 몸을 피하고 뒤돌아본다.
“큭... 큭큭큭큭...”
실로 낮은 웃음소리다. 하지만 사문도가 터트리고 있는 정체불명의 괴소(怪笑)는, 듣
고 있는 모든 이들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어 버린다.
길게 흘러내리고 있는 사문도의 머리카락이 두 눈을 가리고 있다. 하지만 홍무극은 사
문도의 눈을 못 봤어도 이미 살기를 느끼고 있는 터라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못한다
.
“!!”
그때, 홍무극과 사문도의 눈이 마주친다. 홍무극은 그 순간 전신이 찢어지는 듯한 살
기를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선다.
금문택 역시 전해지고 있는 살기 탓에 몸을 굳힌 채로 움직이기도 못하고 있다. 보고
있지도 않은 자신의 몸이 굳고 있는데, 그런 사문도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홍무극의
상태는 어떠하겠는가?
‘지독한... 아니, 참혹한 살기다. 살기 수준이 흑령과도 맞먹어...!’
붉게 충혈된 사문도의 눈에서 괴소가 걸린다. 홍무극은 그 미소를 보자 심장까지 얼어
붙는 듯한 전율을 느끼고 몸을 떤다.
‘피, 피해야 한다. 무조건, 무조건 피해야 해...
흑령보다 강하다... 흑령보다... 살기가 더 강해!!’
하지만 몸을 말을 듣지 않고 있다. 마음으로만 부르짖고 있을 뿐이다.
흑령보다 살기가 강한 자는 ㅂ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흑령이 사람 하나를 죽일 때
마다 보여줬던 눈은, 그 어떤 살심을 품은 자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호랑이에게 질린 노루처럼, 사냥감이 된 홍무극은 그 기분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를
절실히 깨닫게 된다. 그리고 미처 정신을 차리기 전에 사문도의 오른팔이 부드럽게 움
직인다.
“파천검강(破天劍强)!!”
사문도가 그저 검을 가볍게 휘두른 것으로 보였을 뿐이다. 하지만 홍무극이 입은 피해
는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끄, 끄악!! 파, 팔이... 내 팔이...!?”
왼팔이 어깨 째로 조각나 떨어진 것이다. 곧이어 절단된 어깨에서 쏟아지는 선혈 덕택
에 홍무극은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살기 속에서 벗어난다.
“뇌전검법(雷電劍法)!”
평소 사문도의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이 걸걸한 목소리다. 다시 한번 사
문도가 검을 휘두르자, 홍무극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뺀다.
자신이 서있던 자리에, 깊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구덩이가 파여져 있다. 모두들
에겐 그저 눈앞에서 한줄기 빛이 번쩍였을 뿐인데 말이다.
“혈영검강!!”
놀랄 틈도 없이 사문도의 맹공(猛攻)이 이어진다. 이번엔 오른쪽 귀다.
“으, 으아아악!!”
숨 막힐 듯한 고통, 그리고 그보다 더한 공포에 홍무극은 비명을 내지른다. 또다시 사
문도의 살기에 홍무극은 정신이 반쯤 나가버린 듯한 얼굴을 하고 뒷걸음질친다.
공포에 질린 얼굴로 홍무극이 눈을 한번 깜빡인다. 그러자 3장 밖에 있던 사문도가 눈
앞에서 깨끗하게 사라진다.
“!?”
동시에 뒤에서 들려오는 검명(劍鳴). 홍무극은 차라리 고개를 돌리면 안 되는 상황이
다. 바로 코앞에서 사문도가 풍운검을 내리치려 준비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번에도 빛이 번쩍인다. 어느새 자신의 병기, 흑도가 산산조각이 난 채 바닥에 놓여
있다.
“제, 제발 그냥 죽여 줘... 이런 숨 막히는 공포는 싫다!! 그냥 편히 죽여 다오!!”
홍무극이 내지르는 것은 고함이 아니라 울부짖음에 더 가깝다. 그때, 전의(戰意)를 상
실한 홍무극의 면전에 사문도의 주먹이 작열한다.
홍무극은 공중에서 균형도 못 잡고 날아가 바닥에 철푸덕 떨어진다. 입속에선 비릿한
피와 함께 딱딱한 조각 몇 개가 느껴진다. 이가 몇 개 부러져버린 것이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수하를 그렇게 쉽게, 그것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죽이는 새끼는
내 손으로 재워주겠다.”
다시 사문도의 오른손이 움직인다.
“우욱!”
정확히 턱뼈에 명중한다. 주먹이 얼마나 무거웠으면, 바닥에 엎드려 있던 홍무극의 몸
이 공중으로 붕 떠오른다.
“혈사장(血死掌)!!”
홍무극의 복부로 혈사장을 날린다. 홍무극의 복부에 시뻘건 장인(掌印)이 새겨짐과 동
시에 혈사장의 압력으로 인해 옷이 갈기갈기 찢어진다.
“크허어억!”
홍무극이 부러진 턱뼈 턱에 위에서 토하는 것을 뱉지도 못한 채로 죽을 표정을 하고
있다. 사문도는 그런 홍무극에게 서서히 다가간다.
“제, 제독!!”
“제독을 살려라!”
팔기군 하나가 사문도에게 달려든다. 그러자 엉겁결에 30여 명의 팔기군이 사문도에게
따라붙는다.
“윽, 이 자식들이! 감히 날 제쳐두고...”
금문택이 달려드려는 순간, 사문도가 금문택을 만류하고 나선다.
“지원은 필요 없소, 금 대협. 내가 모조리 죽이겠소!!”
홍무극은 이미 전투불능 상태다. 바닥에 꽂아둔 풍운검을 뽑고, 사문도는 달려오는 기
마군단 팔기군을 향해 검을 조준하고 나지막한 한마디를 흘린다.
“혈영검강!”
핏빛 초승달이 밤하늘을 가르고 지나간다. 곧이어 열 개의 피보라가 혈무(血霧)가 장
내에 소용돌이친다.
“빙백검강!”
백색(白色) 기류가 팔기군을 관통하고 지나간다. 이번에 역시 10여명이 동상이 된 채
로 툭툭 떨어진다.
“파천검강!!”
사문도의 현재 최강의 기술, 파천검강이 피보라와 동상을 가르며 섬전처럼 뻗어나간다
. 마지막 생존자 열 명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상반신이 절단된 채 즉사한다.
250여 명이나 되던 팔기군은, 금문택과 사문도에게 격파당해 남은 인원은 겨우 14명이
다. 정말로, 당한 당사자가 생각하면 기가 찰 일이다. 하지만 이건 꿈이 아닌 엄연한
현실이다.
“쿨럭, 쿨럭... 크윽...”
사문도가 다시 비틀거리더니 입에서 피를 쏟아낸다. 많이 어지러운 듯, 이마를 짚고
몸을 떨고 있다.
“사 소협, 괜찮소?”
금문택이 걱정스런 얼굴로 묻는다. 금문택 역시 몸이 만신창인데, 사문도를 먼저 걱정
하고 있는 것이다.
“큭... 걱정 마시오. 금 대협은, 남은 녀석들을 좀 정리해 주시겠소? 나머지는... 마
무리는, 소생이 확실히... 처리할 테니 말이오.”
기필코 자신의 손으로 끝장을 보겠다는 사문도의 결심을, 금문택은 꺾지 못한다. 아니
,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입에서는 피를 쏟아내고 있고, 몸에는 여
러 군데서 피가 흐르고 있는 사문도의 입에 걸린 웃음 탓이다.
‘... 정말 희한한 사람이로군. 그럼, 일단 마무리부터 짓고 볼까...?’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는 팔기군에게, 금문택이 전력으로 날아든다.
“발초심사세(撥艸尋蛇勢)!”
이번 공격으로 일곱 명의 목이 바닥으로 떼구르르 떨어진다. 새파랗게 질린 일곱 명의
생존자는 비명을 내지른다.
“으, 으악!!”
“도망쳐라!!”
하지만 금문택이 가만히 둘 리가 없잖은가? 곧이어 유령처럼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
내며, 다시 한번 초식을 전개한다.
“표두압정세(豹頭壓頂勢)!!”
혈무(血霧)가 다시 한번 아수라장이 된 이곳에 몰아친다. 이로써 팔기군 250명, 전원
은 깨끗하게 전멸당하고 만다. 단 두 사람에 의해서 말이다.
금문택이 검을 탁탁 털고 검집으로 넣는다. 그리고 마지막 마무리를 장식하려 사문도
를 바라본다.
“네놈의 허황된 꿈도 여기서 끝이다, 홍무극.”
사문도가 풍운검을 들어올리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홍
무극의 두 눈을 바라본다.
“미... 미을 스가... 미을 스가...”
분명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이리라. 턱뼈가 산산조각이 났는지,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홍무극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사문도는 왼손으로 그런 홍무극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린다.
“이... 이러 고에서... 주어야...”
“그래, 넌 여기서 죽는다. 애초에 넌 내 상대가 아니었어.”
자신보다 훨씬 큰 홍무극을 들어올리고 있는 사문도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희한하게
느껴진다. 금문택은 사문도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행동 하나하나를 살핀다.
“마지막... 저승행을 밟은 네놈에게 충고라도 하나 해 주마.”
사문도는 여전히 홍무극을 들어올린 채로, 봉려산이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친다.
“역지사지(易地思之)!! 보호막으로 삼은 팔기군이 네겐 부하 250명 중 한 녀석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녀석에겐 네놈이 하나뿐인 주인이다!”
사문도의 이 말은, 금문택의 뇌리에 글자 하나 안 빠지고 정확하게 박힌다. 금문택이
안색을 고치며 사문도를 바라보더니,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마음속으로 수천 번은 더 소
리친다.
‘이 사람이다... 내가 이 한 목숨 바쳐 싸울만한 사람은 바로... 내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다...’
사문도는 허공으로 홍무극을 던진다. 홍무극이 포물선을 그리며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그 찰나, 풍운검이 다시 사문도에 의해 춤을 춘다.
무 베어지듯, 홍무극의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된다. 비명이고 뭐고 없다. 비명을 내
지르기도 전에, 이미 사문도의 풍운검을 자신의 모든 것을 끝내고 있었으니까.
“... 잘 가라, 한때나마 달콤한 꿈을 꿨던 자여.”
홍무극의 시신을 바라보는 사문도의 얼굴엔 찹찹함이 가득 들어있다. 아무리 범죄자라
고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이런 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키 힘든 모양이다.
홍무극의 가랑ㄴㅈ은 눈은 아직도 불신으로 가득하다. 죽어서도 자신의 죽음을 인정치
않겠다는 듯이...
주변 장내는 다시 고요와 적막에 잠긴다.올빼미 소리도 없는, 그런 조용한 장내에서는
묘한 분위기가 감돈다.
“받으시오, 금 대협.”
먼저 적막감을 깬 사문도가 금문택에 있는 곳으로 풍운검을 던진다. 풍운검이 부드럽
게 날아가 금문택의 오른손 앞으로 떨어져 박힌다.
“사 소협...”
금문택이 뭐라 말을 해 보려고 하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다. 결국 금
문택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로, ‘따르겠다’는 말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때, 금문택은 기둥 무너지듯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지는 사문도를 보게 된다.
“사, 사 소협!!”
금문택이 얼른 달려가 쓰러진 사문도를 부축한다.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쉼 없이 입
에서 피를 쏟아내는 사문도의 모습에 금문택은 겁을 덜컥 집어먹는다.
‘설마, 죽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가는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명색이 의원 밑에서 검을 배운 사람인지라, 서둘러 지혈을 하고 혼수상태에 빠
진 사문도를 들쳐 업는다.
“으윽... 제, 젠장...”
사문도가 업히자 여태까지 느끼지 못했던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이깟 통증도 못 참아서야... 참자. 참는 거다, 금문택!!’
현재 금문택이 입은 상처는 결코 가벼운 상처가 아니다. 등 한복판이 찢어져 옷을 흠
뻑 적신지 오래다. 게다가 그 상처를 입고도 한참이나 더 싸웠으니, 상처가 벌어질 수
있는 데까지는 벌어져 있는 셈이다.
하지만 지금 금문택의 두 눈에는 고통의 빛보다 확고한 의지의 빛이 월등하게 강하게
나타난다. 사문도를 보낼 수 없다는 의지!! 그것이 현재 금문택이 고통을 누르고 사문
도를 업을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참으시오, 소협... 할아버지께 가면, 아마 사흘도 안 돼서 깨끗하게 나을 거요.
그 다음은... 같이 떠납시다. 소협이 가자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겠소. 그러니까...
제발 죽지만 말아 주시오.’
금문택은 천상신의에게 서둘러 가기로 하고, 지치고 쓰라린 몸을 이끌어 경공술을 쓴
다.
금문택이 장내에서 사라지지가 무섭게, 그 장내에서는 네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쌍
웅쌍화... 바로 그들이다.
“악 형...?”
조충이 악표에게 의문형 어조로 말한다. 추격할 의사가 있느냐는 뜻이다.
“... 추격하지 마십시다.”
악표가 고개를 내저으며 금문택이 사라진 반대방향으로 물러선다. 그러자 양혜월이 악
표의 옷깃을 잡으며 당돌하게 묻는다.
“왜 그러는 거죠? 지금 철혈쌍검을 추격한다면, 분명 사문도를 잡을 수 있어요. 왜
두 번 다시는 없을 기회를, 이렇게 간단히 날려 보내는 거죠?”
“... 내가 잘못 판단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어쩌면 사문도, 그자는...”
하지만 악표는 말을 다 하지 않고 조용히 입을 다문다. 그리고 먼저 천천히 금문택이
사라진 곳의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 정말 답답해 죽겠네. 조 대협, 조 대협도 같은 생각인가요?”
이번엔 조령이 조충을 잡고 묻는다. 그러자 조충도 묵묵히 고개를 내저으며 같은 생각
이란 얼굴을 한다.
“철수합시다, 조 소저. 그리고 양 소저. 따지고 보면...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없는
것 같소.”
“대체 뭐가요?”
“사실, 사문도 말대로 고독랑에게 걸린 현상금이 탐났소. 그래서 내가 여기서 모이자
고 했던 것이오.”
“그딴 감상적이지도 않은 말 덕택에, 명성을 지금 다섯 배는 날릴 수 있는 기회를 놓
치겠다는 거예요?”
조령은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다는 어조지만, 조충은 결심을 굳힌 어조로 설득에 나
선다.
“물러섭시다. 동료를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현상금이라니... 어쩌고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게다가 정파인을 자처하는 우리가,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을 잡아 봐야... 별 감흥도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하오. 우리가 진정 무림의 정의를 잡기 위해 나섰다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오.”
조충이 악표의 뒤를 따르자, 양혜월과 조령은 서로를 바라본다. 그리고 여전히 억울한
표정으로 한동안 금문택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가, 동시에 고개를 돌리고 두 사람을
향해 소리친다.
“같이 가요! 조 대협, 악 대협!!”
천상신의가 석식을 먹은 뒤 한가로이 책을 읽고 있던 때다. 별안간 소란스러워진 분위
기 탓에 책을 덮고 방문을 열어젖히더니 바깥을 향해 소리친다.
“무슨 일들로 그렇게들 수군거리는 것이냐?”
곧이어 하인의 목소리가 내원에 울려 퍼진다.
“어른, 나와 보십시오! 금 대협께서 오셨습니다!!”
“문택이가?”
혼잣말을 하며 일어서는 천상신의의 얼굴에 한줄기 의혹이 뜬다. 석식 후에는 언제나
조용하던 금문택이었기에, 석식 후에는 금문택이 자신을 찾은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
다.
‘녀석이 무슨 일로 내게...?’
천상신의가 벽에 걸어뒀던 백삼(白衫)을 걸치고 밖으로 나간다. 하지만 방문을 나서자
마자 천상신의는 자신의 눈을 의심한다.
“무, 문택아... 대체 왜 이런 꼴이...?”
“할아버지, 사 소협의 치료를 부탁드립니다!!”
금문택이 평상 위에 사문도를 눕히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등의 상처에서는 아직
피가 흐르고 있지만, 금문택은 그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금문택의 당황하고
있는 얼굴에는 고통의 빛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네 상처는 어쩌고...”
“사 소협이 훨씬 급합니다! 전 염려 안 하셔도 되니까, 사 소협부터 먼저 어떻게 좀
해 주십시오!”
그제야 사문도가 혼수상태란 것을 알게 된 천상신의는 금문택의 상처를 보다가 사문도
에게 시선을 돌린다.
“여기, 이 소협을 부축해서 내원으로 옮기도록 하게. 어서!”
“옛!!”
덩치 좋은 하인 하나가 사문도의 허리를 둘러메고 내원으로 달려 들어간다. 금문택은
그를 보고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기둥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이제야 안심이다. 젠장, 긴장이 풀리니 상처가 또 아파오는군.’
금문택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마루에 주저앉으려 몸을 움직인다. 그때 천상신의의
허탈한 목소리가 금문택의 눈을 뜨이게 만든다.
“눈 감지 말거라. 까딱했다가는 의식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휴... 알겠습니다.”
“너도 따라 들어오너라. 너도 치료해야 할 테고, 자초지종도 알아야 하니까 말이다.
”
천상신의가 백삼을 펄럭이며 내원으로 사라진다. 그러자 금문택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는 물먹은 솜만치 무겁게만 느껴지는 몸을 일으켜 천상신의가 걸은 길을 따라
천상신의를 찾아간다.
촛불 여섯 개가 켜져 있는 내원에 금문택이 누워 있다. 피에 찌들대로 찌든 마의와 내
의는 벗은 채로 누워 있다. 물론, 등은 천장을 향하고 있다. 이불을 피로 적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한편, 천상신의는 금문택 곁에서 사문도의 상처를 살피고 있다. 그때, 상처에 전부 붕
대를 감고 맥박을 재던 천상신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맥박이 거의 떨어져 있다. 맥박이 이렇게까지 약한데도 숨이 붙어있을 수 있단 말인
가?’
매우 미약하긴 하지만, 분명 맥박은 느껴지고 있다. 천상신의는 숨을 고르고 자신의
의학지식을 머릿속에서 정리해 사문도에게 대입시켜 본다.
얼마 시간이 흘러, 천상신의는 얼굴을 고치고 침통(針筒)을 꺼내 바닥에 침을 좍 펼쳐
놓는다. 거기서 제일 길고 굵은 침을 덜더니, 사정없이 사문도의 단전(丹田)에 꽂는다
.
“윽.”
사문도의 입에서 가는 신음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천상신의는 괘념치 않고 본격적으로
사문도의 전신에 침을 꽂기 시작한다.
“... 정말, 침을 왜 그렇게까지 많이 쓰시는 겁니까...”
금문택이 사문도의 신음을 듣고 고개를 돌린 것이다. 하지만 얼마 안 지나 얼굴을 찌
그러트린다. 하긴, 침이 촘촘히 박혀있는 사문도가 촛불에 일렁이는 모습은, 과히 보
기 좋은 모습이라 하기는 힘들다.
천상신의가 금문택 말에는 대꾸도 않고 이마에서 땀을 뻘뻘 쏟으며 침을 계속해서 꽂
는다. 대강대강 꽂는 것 같지만, 천상신의는 심혈을 기울이며 침을 꽂고 있는 것이다.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 봐.’
사문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금문택의 심정은 안쓰럽기만 하다. 그때, 천상신의가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후우... 정말 끈적거리는군. 문택아, 네 차례다.”
“사 소협 상태는 어떻습니까?”
“지금은 뭐라고 단정하기 어렵구나.”
천상신의가 금문택의 곁에 앉으며 상처를 훑어본다.
“... 소협은 얼마나 지나야 정신이 들겠습니까?”
“글쎄다. 한 시진 정도는 기다려야 될 듯싶구나.”
천상신의는 준비된 물수건으로 금문택의 피범벅이 된 등을 조심조심 닦는다. 상처 부
위에 물수건이 가자 따끔거리는 듯, 금문택 역시 사문도와 같은 신음을 흘린다.
“근육에 탄력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평생 허리가 고장이 날 뻔 했구나.”
“휴, 다행입니다.”
핏자국을 모두 닦아내자, 쫙 갈라져 처참하리라 생각될 정도로 심하게 찢어진 금문택
의 등이 천상신의의 두 눈에 똑똑히 들어온다.
“사 소협의 어깨에 있던 상처와 같은 병기로구나. 설마 관군과 싸운 건 아니겠지?”
“... 예.”
“자초지종은 내일 설명해 다오. 지금은 치료가 급하니까 말이다.”
“알겠습니다.”
금문택의 눈썹이 지독한 통증으로 이리 갔다 저리 갔다를 반복한다. 천상신의는 안 봐
도 뻔하다는 듯, 금문택에게 탕약 한 사발을 건넨다.
“이게... 뭡니까?”
금문택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탕약을 보고 묻는다.
“마취약(痲醉藥)이다. 살을 꿰매야 하니까, 마시고 푹 자거라.”
“... 마취 지속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하루. 정확히 내일 해시(亥時) 쯤 되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천상신의의 말을 듣고 금문택이 마취약을 밀어낸다. 그리고 마취약을 밀어내기 전과
같은 자세로 눕는다.
“마취하지 마시고, 그냥 꿰매 주십시오.”
“마취 안 하고, 그냥 꿰매라고?”
천상신의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묻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금문택을 보니 제대
로 들은 듯하다. 품에서 바늘과 실을 꺼내 실을 매며 재차 묻는다.
“정말 후회하지 않겠다고 맹세 하거라.”
“맹세하겠습니다.”
간단명료한 대답이다. 천상신의는 실을 다 맸는지 심호흡을 크게 한다. 그리고 바늘을
꽂을 만한 곳을 찾더니, 바늘을 주저 없이 맨살에 밀어 넣는다.
“... 끄윽.”
상처를 지지는 듯한 통증 탓에, 금문택의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린다. 하지만 비명
한번 지르지 않고 잘 버틴다.
‘참을성 하나는 정말 대단한 녀석이로다. 찢어진 상처를 마취도 안 하고 꿰매는데 비
명을 단 한번도 안 지르다니.’
“몇 바늘이나 남았습니까...?”
“일곱 바늘 정도. 꾹 참거라.”
다시 바늘이 살점을 꿴다.
“으... 윽...”
목구멍 끝까지 올라오는 고통을 참아내는 금문택의 얼굴은 그야말로 가관이다. 배지장
보다 희게 물들었다가, 새파랗게 질렸다가를 벌써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정말 아프군... 크으, 아무리 할 말 덕택에 참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문도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다. 이런 고통까지 감수하며 버티고 있는 이유가
말이다.
사문도는 그런 금문택은 마음은 꿈에도 모른 채로 여전히 혼수상태에 빠진다. 지금 깨
봐야 전신에 박힌 침 덕택에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들겠지만, 금문택은 마음으로 절실
하게 빌고 또 빈다.
사문도가 조금이라도 빨리 일어날 수 있도록 해 주십사 하고 말이다.
결국, 사문도의 몸에 박아뒀던 침을 모두 뽑아낸 다음에 상처를 다 꿰맨 천상신의는
장장 한 시진동안 금문택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묻는다. 금문택은 차근차근 대답하
며, 이런 천상신의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준다.
이야기가 막 끝나고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지고 있을 무렵, 사문도의 입에서 걸걸한 신
음이 새어 나온다.
“으... 으음...”
동시에 천상신의와 금문택의 시선이 사문도에게로 쏠린다.
눈꺼풀을 파르르 떨고, 사문도는 미세하게나마 눈을 뜬다.
‘여긴... 대체 어디지...?’
흐릿하게 아무것도 안 보이는 덕택에, 사문도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뜬다. 처음보다는
많이 선명한지라, 탁해진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려 어딘지 부터 알아내려고 애쓴다.
“아, 어르신... 금 대협...”
사문도는 촛불 덕택에, 방이 그리 밝지는 않지만 그 두 사람을 알아본다.
몸은 좀 어떻소, 소협?“
“괘... 괜찮습니다, 어르신...”
하지만 천상신의는 사문도가 자신의 질문에 간신히 대답한 것을 보고 혀를 찬다.
“지금... 시간이 얼마나 됐습니까...?”
“해시(亥時)를 넘겼소. 반 시진 후면 자시(子時)요.”
“가 봐야 합니다... 가야만 합니다...!!”
사문도가 몸을 일으키려고 몸부림치자, 천상신의가 얼른 달려와 사문도의 머리를 꽉
누른다.
“무리하지 마시오. 지금 소협은 푹 쉬어야만 하오.”
“수하가.. 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할 수는...
”
일어서려고 발버둥을 치는 사문도의 태도에, 천상신의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하며
사문도에게 속삭인다.
“무슨 일로 그리 가려고 용을 쓰는지 모르겠으나, 지금 사 소협은 내공을 쓸 수 없는
상태요.”
“... 예?!”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알게 된 사문도가 동작을 뚝 멈춘다. 동시에 금문택도 눈을
부릅뜨며 천상신의를 바라본다.
“지금으로써는 내공을 쓸 수가 없소. 하지만 끝까지 말을 잘 들으시오.”
천상신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기다리는 사문도에게 차근차근 설명한다.
“본래 소협은 주화입마(走火入魔)를 일으키고 내공이 페지될 정도까지 몸이 상해 있
었소.”
조용히 경청하는 사문도를 보고 금문택은 서서히 천상신의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허나 정체불명의 무언가로 인해, 소협은 주화입마에 빠지지 않았소. 그리고 내공도
모두 단전에 모여 있소.”
“그 내공을... 영영 사용할 수 없는 겁니까?”
사문도가 조마조마한 얼굴을 하고 희소식을 기다리지만, 곧 전혀 뜻밖의 대답을 듣게
된다.
“사용할 수 있소. 하지만 그건 1년 후의 이야기고, 지금은 경공술 외에는 그 어느 무
공도 쓸 수 없게 됐소.”
“하, 할아버지.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전...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금문택이 묻는다. 천상신의는 그런 금문택을 힐끗 보고 천천히 입을 연다.
“잘 들으시오, 소협. 이건 소협에게 대단히 중요한 얘기니 말이오.
지금 소협의 내공은 단전 윗부분으로는 전혀 올릴 수가 없소. 그 이유를 지금 말하겠
소이다.”
사문도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 어마어마한 양의 내공을 지니고 있을 거요. 얼마나 되오?”
“7갑자(甲子)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문도의 대답에 금문택의 입이 쩍 벌어진다. 천상신의도 놀라는 기색이 역력하다.
“7갑자라... 험험, 그랬구려.
지금 소협의 나이에 필요 이상의 내공이 단전에 모여 있소. 정확히 말하자면, 몸이 보
유할 수 있는 내공 수치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쳐 있다는 것이오.”
“그 내공이... 제 몸에서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잉여(剩餘)된 내공에 의해 현재 단전 상부의 단전로(丹田路)라는 단전로는
모조리 막혀있는 셈이오.”
“그리고 막힌 내공이 모두 뚫리는 데... 1년이란 세월이 날아간다는 말씀이겠지요.”
사문도의 허탈한 목소리에 천상신의는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나마 이만한 걸 다행으로 생각하시오. 까딱 늦었더라면 아마 내공 전부를 잃었을
것이오.”
“... 정말 감사합니다, 어르신.”
사문도의 감사하다는 말에 천상신의는 고개를 내저으며 사문도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고맙다는 말만 하지 말고, 여기서 사흘은 쉬었다 가 주시오. 그게 노부에겐 고맙다
는 말보다 몇 배는 더 위안이 되니 말이오.”
일순간 사문도의 안색이 어두워진다. 그리고 한참이나 생각하더니, 묵묵하게 자신의
견해를 털어놓는다.
“이틀만 머무르다 가게 해 주십시오.”
“사흘은 쉬어야지 상처가 안 벌어질 거요. 만일 무리하다가는, 회복기간이 갑절은 더
걸릴 텐데...”
“상관없습니다. 저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볼 바엔, 차라리 제
몸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이 낫습니다.”
사문도의 진심어린 호소에 천상신의는 아패란 얼굴을 하고 혀를 찬다.
‘부하가 자기 몸보다 소중하다니, 천하에 이런 인물이 몇이나 되겠는가.’
자신이 아무리 막아서도 사문도는 떠날 것이다. 그걸 너무도 쉽게 짐작한 천상신의였
기에, 결국 사문도에게 항복하고 만다.
“딱 이틀이오. 그 전에 떠날 생각일랑은 꿈에도 마시오!!”
천상신의는 그 말만 남기고 뭐가 그리 바쁜지 내원을 빠져나간다. 사문도는 천상신의
가 나가자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다행이다... 천비 네 모습을 하루라도 빨리 볼 수 있게 됐으니, 정말 다행이야...”
현재 사문도의 뇌리에서 이세혁과 주은비, 그리고 강천비와 모용화운의 모습이 차례차
례로 지나간다. 한창 사람들 얼굴을 떠올리던 사문도에게 금문택이 묻는다.
“할아버지만 고맙고, 마지막에 도와준 사람은 고맙지도 않은 거요?”
“아참, 참!!”
사문도가 황급히 상상의 나래를 접고 미안한 얼굴로 금문택에게 사과한다.
“미안하게 됐구려, 금 대협. 그리고... 정말 고맙소. 결정적인 순간에 지원해 주셔서
...”
“됐소이다. 사과하지 마시오... 어차피 며칠 뒤면, 주공(主公)으로 모시게 될 것 같
으니 말이오.”
“!?”
금문택의 말을 들은 사문도의 안색이 급변한다. 그런 사문도를 보고 금문택이 슬며시
미소지으며 자신이 생각한 바를 읊는다.
“이제야... 이제야 결심이 섰소. 사 소협이 특별한 사람이란 건 이미 확실히 깨달았
소.
소협. 이 양심 없는 놈은 말이오... 이 보잘 것 없는 놈을 받아주겠다는 사 소협을 무
시할 수가 없소.”
“... 금 대협...”
감격에 겨운 사문도의 얼굴을 보고, 금문택은 씩 웃더니 사문도의 오른손을 꼭 쥔다.
“조선으로 돌아가는 건 후일로 미루겠소. 10년이 걸리든 천년이 걸리든... 소협이 목
표로 한 바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이루어질 때까지는 이 한목숨 바쳐 싸울 생각
이오.”
사문도는, 엄숙한 얼굴로 자신에게 무릎 꿇어 충성을 맹세하는 금문택을 보게 된다.
그런 사문도의 얼굴에서 잔잔하면서도 부드러운 미소가 일어난다.
침묵의 시간이 이어진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그 침묵이 깨지기 바라는 사람은 없다.
사내들끼리의 정(情)은 국경을 초월한다는 걸, 때로는 침묵이 대화보다 낫다는 걸...
이들은 알기 때문이리라.
아침해가 밝았다. 유난히도 밤잠이 없는 천상신의는, 언제처럼 묘시에 기상해 화원을
둘러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허허, 이젠 늦여름이로고. 해가 조금씩 늦게 뜨는 게 느껴지니...”
“일어나셨습니까?”
금문택의 목소리가 별안간 뒷전에서 흘러나오자 천상신의는 엷게 미소(美笑)짓는다.
“신기한 일이로구나. 네가 이렇게 일찍 일어나다니 말이다. 어제 일로 피곤한데다 몸
도 안 좋을 텐데, 편히 시지 그러느냐.”
“..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일찍 일어났습니다.”
첫 번 들러오던 목소리에 이번 목소리가 약간 가라앉은 탓일까? 천상신의의 얼굴에 걸
려있던 엷은 미소가 서서히 지워지기 시작한다.
“저... 사 소협을 따를 생각입니다. 어제 함께 싸우면서부터 생각했습니다.
어제 보셔서 알고 계시겠지만... 부하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 할아버지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했느냐. 허허...”
천상신의가 뒷짐을 진 채로 태양을 바라보다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려 부복(俯
伏)하고 있는 금문택을 바라본다.
“중원 어딘가에는 네가 있을 터이니, 짬이 나는 대로 찾아올 수 있겠구나.”
“...”
“네가... 내게 검술을 배운 게 어느덧 9년이다. 그간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지...”
금문택의 어깨를 짚은 천상신의가 아련한 추억을 회상하는 듯, 그의 노안(老顔)에 한
가닥의 애소(哀笑)가 피어난다. 금문택은 고개를 수그린 채로 꼼짝도 않고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할 거다만... 어딜 가더라도, 몸조심해야 한다.”
“... 예.”
천상신의의 손이 금문택의 어깨에서 스르르 떨어진다. 그리고 그 손으로 금문택의 머
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다.
천상신의가 화원에서 모습을 감추자, 금문택이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애달픈
눈초리로 자리에 서서 수없이 중얼거린다. ‘할아버지’란, 뒤죽박죽이 돼버린 감정이
섞인 이름을...
또다시 하루가 흘러서, 어느덧 약속한 이틀이다.
정오 전부터 부산을 떨던 사문도였기에, 이제 출발만 남기고 있을 뿐이다.
“허허, 부디 무리하지 마시오, 소협. 1년 뒤엔... 부디 몸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길
빌겠소.”
“예. 감사합니다, 어르신.”
사문도가 포권지례를 하고 돌아선다. 그때 천상신의가 생각난 게 있다는 얼굴을 하고
사문도의 어깨를 붙잡고 말을 잇는다.
“참, 깜빡한 게 있소. 문택이를 데리고 갈 수 있게 된다면 가르쳐 준다고 한 게 있었
잖소?”
“아... 그렇군요. 후후, 저도 깜빡하고 있었습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금문택을 데리가 간다는 기쁨과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사
람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말이다.
“잘 들으시오, 사 소협.
종남산(終南山)의 서쪽 중턱을 샅샅이 뒤져보면, 한 나병촌(癩病村)이 있을 거요. 그
곳에서 사람들에게 ‘화군백(華君伯)이라는 의원이 어디 계십니까’ 하고 물으면 아마
모두가 성의껏 가르쳐 줄 거요.”
“종남산 서쪽 나병촌이라... 알겠습니다.”
천상신의는 약간이나마 희열의 기색을 띤 사문도를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한
다.
‘사랑이란 좋은 거란 말이 떠오르는군. 하긴, 사 소협 나이 정도라면... 사랑하기에
도 손색이 없지.’
바로 그때 사문도가 희열의 기색을 지우며 다시 정중히 묻는다.
“화군백이란 분은... 천음절맥을 치유할 수 있는 방안을 알고 계십니까?”
그러자 천상신의가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한다.
“자세히는 모르겠소. 허나 그 사람이 모른다면, 중원에서 천음절맥의 치유법을 아는
이는 없다고 보면 되오.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높은 의술을 지닌 사람이니...
아마 알고 있으리라 믿소.”
천상신의의 불분명한 답변에 사문도는 일말의 불안감을 느낀다. 하지만 불안감을 얘ㅆ
떨쳐버리려 애쓰며, 되도록 좋은 생각만 하려고 애쓴다.
“감사합니다. 만일 알게 된다면, 그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 그저 문택이가 무사히 조선으로 돌아갈 수나 있도록 해 주시오. 녀석은 현재 소
협을 노부 이상으로 신뢰하고 있소. 부디, 문택이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 주시구려!
”
친손자를 걱정하는 듯한 천상신의의 굳은 눈빛은, 사문도에게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킨
다.
“믿어 주십시오. 기대를 저버리게 된다면, 그땐 이미 저는 제가 아니게 될 테니 말입
니다.”
상문도가 싱긋 웃으며 포권을 하고 돌아선다. 금문택을 부르려고 하는 것이다.
“금 대협, 얘기 끝났소. 마지막으로 회포라도 좀 풀어야 할 것 아니오?”
“...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인사 끝내는데 이제 한 명 남았소!”
얼마 뒤에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금문택이 나타난다. 꾸러미를 묶으며, 잘 다듬어
진 마의를 팔에 걸친 채로 나온 금문택의 모습은 두 사람의 얼굴에 웃음을 자아낸다.
“소협, 이것 좀 받아 주시오.”
“그러리다.”
사문도가 금문택이 건네준 꾸러미를 받고 얼마 후, 금문택은 말없이 천상신의 앞에 선
다.
“...”
잔잔한 침묵으로 서로의 감정을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을, 사문도가 실낱같은 미소를 지
은 채로 주시한다.
“절 받으십시오!”
별안간 금문택이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한다. 천상신의는 말리지도 않으며 그
런 금문택을 고개 숙여 바라본다.
“짬을 내서, 다음에 꼭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지난 9년간 먹여 주시고 재워 주시고..
. 가르쳐 주신 것들...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금문택이 절을 한 이유는 감사의 표시 뿐만은 아니었나 보다. 어쩌고 보면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자신이 눈물을 뚝뚝 떨구는 것을 눈앞의 노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였을지도 모른다.
“... 변변찮은 녀석.”
천상신의 역시 금문택과 마찬가지로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다. 감정이 치소는 건
끝내 막을 수 없었던 모양인지, 천상신의는 절한 채로 소리죽여 오열하는 금문택을 꾹
안아준다.
“인간은 만나면 헤어질 때가 있는 법이다. 사 소협을 섬기면서, 네가 걷고 싶어 하는
길을 걸어 다오. 그리고 가능할지 모르겠다만, 휘경이는 이제 그만 잊거라. 죽은 아
이 그리워해 봐야, 네 가슴만 찢어질 뿐이니까. 다른 사람 만나서, 조선으로 갈 때 적
어도 웃으며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할애비가 바라는 건 그게 다다. 이젠... 그만 가 보거라.”
천상신의가 솟아오르는 눈물을 애써 눌러 참으며 일어선다. 그리고 따라 일어난 금문
택의 눈가를 손수건으로 닦아준다.
천상신의는 찢어져라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는 금문택의 어깨를 툭 쳐 준다. 그리고
이젠 떠나란 듯, 사문도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 갑시다, 금 대협. 이별의 슬픔은 길어봐야 좋을 게 없소.”
사문도의 오른손이 금문택의 오른팔을 잡아끈다. 그제야 금문택은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로 사문도의 뒤를 따라나선다. 그렇게 돌아서는 금문택의 뒷모습은, 유난히도 무
겁고 애처로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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