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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에너지와 의식
생물은 세포막으로 자신과 세상을 분리함으로써 시작된다고 여러번 말했다. 세포막으로 분리된다고 해서 이것이 영원한 고정적 분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생물은 계속 세상으로부터 에너지와 영양분을 공급받고, 찌꺼기를 세상으로 내보내야 하기 때문에 역동적 유동적 관계속에서 분리이다. 그러니 이 분리막은 유동하고, 선택하는 분리인 것이다.
세상과 분리막으로 분리된 생물은 세상과 만나고, 자기 내부의 생존적 요구에 대응해야 한다. 이런 요구에 대응한다는 말은 행동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행동하기 위해서 뇌가 필요해졌다.
그런데 이 뇌는 뼈속에 싸여서 대상을 직접 만나지 못한다. 단지 신경세포 사이에 오가는 전기신호만으로 대상을 짐작할 뿐이다. 전기신호를 대상(사물과 사태)로 바꾸는 사전이 필요하다. 당연히 이 사전은 내용이 고정된 것이 아니고 진화하는 사전이며, 추론하는 사전이다. 여기서 추론이 바로 그 베이지언 추론이라는 것이다.
잠시 베이지언 추론을 말하면, 한 사건(=결론)이 일어나면 이 결론을 가지고 그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니 어떤 진리나 발견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럴 것이다는 믿음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바로 뇌가 깜깜한 곳에서 하는 일이 우연히 생긴 한 믿음(=추론)을 수없이 여러번 수정해 가는 일이다.
결국 뇌가 하는 일은 세상에서 일어난 일과, 몸의 요구를 이럴 것이다고 추론하는 일이다. 이때 뇌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사전을 이용한다. 만약 사전이 없다면 뇌는 우주만큼의 자유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사전이 있기 때문에 쓸데없는 에너지를 많이 줄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눈에서 들어오는 이런 전기신호는 빨강색이고, 저런 신호는 파란색이다. 또는 귀에서 들어오는 이런 전기신호는 아버지이고, 저런 신호는 어머니이다. 아버지는 이런 사물(=경험)이고, 어머니는 저런 사물(=경험)이다. 배속에서 오는 이런 신호는 배고픔이고, 저런 신호는 배부름이다는 번역과정을 지나면서 사물과 사태를 파악(추론 또는 예측)하는 것이다.
위 문단에서 사용한 자유에너지란 말은 물리학에서 핵심 개념인 라그랑지언을 칼 프리스톤이라는 영국 학자가 생물학에 빌려온 개념이다. 라그랑지언은 운동에너지와 위치에너지의 차이이고, 이 라그랑지언을 우주라는 4차원에서 적분하면 작용(S)이라는 현상이 나온다(이런 개념의 배경을 잘 몰라서 설명이 서툴다). 우주는 이 작용의 미분값이 최소가 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생물의 세계에서도 자유에너지를 최소로 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굳이 설명하자면 들어오는 감각정보의 사태가 뇌속에서 만든 예측모형과 맞아떨어지면 자유에너지가 최소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이 예측오류를 최소가 되도록 생물은 작동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자주 뇌는 행동하기 전에 예측을 흩뿌리고 다닌다는 말을 듣는다. 그렇다. 예측을 한다는 말은 바로 자유에너지를 최소로 줄인다는 말이다. 예측을 하지 않으면 뇌는 우주만큼의 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 예측이란 그 많은 자유도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자유도를 한없이 줄이는 과정이다. 인간이 한 순간 하나의 행동밖에 하지 못한다는 말은 인간은 언제나 예측하여 무언가를 미리 선택한다는 말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뇌가 진행하는 이런 과정을 뇌가 그냥 스스로 알아서 수행하면 되지 왜 이런 과정을 "나"에게 알려서, 즉 의식이라는 절차를 거치고, 더 나아가서 자기의식을 만들어내는가 하는 질문이다.
사실 뇌는 이런 과정을 나(=마음)에게 알리지 않고 하는 일이 더 많다. 호흡하고, 온도와 혈당을 조절하고, 대사하는 일은 알리지 않고 그냥한다. 이런 일은 일어나는 일(=사태)와 뇌의 작용이 거의 자동(=고정)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뇌가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지 않고도 처리할 수 있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옷입고 세수하고, 밥먹고, 출근하는 일도 별로 뇌가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고 처리한다. 이것 역시 번역 과정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뇌가 번역과정이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뇌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오는 에너지 손실을 줄이려면 뭔가 나타나서 많은 가능성 중에 하나를 선택해주어야 한다. 미리 예측해서 수없이 많은 가능성을 줄여주어야 한 행동을 수행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작업. 즉 수없이 많은 가능성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일을 하는 놈이 바로 의식, 나아가서 자아의식이다. 이런 의식을 만들어냄으로써 수많은 자유도를 낮추어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의식이 하는 이런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많은 정신병들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렇게 생긴 의식은 필요한 일을 하고 사라져 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 의식이 바로 사라지지 않고, 뭔가를 더 해보려고 애쓴다는 점이다. "자아"라는 놈을 영원한 것, 또는 신이 준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지금 여기의 차원이 아닌 다른 무슨 이상한 차원에서 찾아온 놈으로 여기기도 한다. 일상적으로는 자아를 만족시키기 위해 아집에 빠지고, 욕심을 내고, 자만하고, 편견에 빠지고, 꼴통이 된다. 불교에서는 바로 이것이 고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비록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도 여전히 태양은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진다. 즉 지구 위에 사는 우리는 지구는 고정되어 있고, 움직이는 것은 태양이다는 착각 속에서 산다. 우리는 착각 속에서 살고, 이런 착각을 다수가 동의하면 그것이 현실이 된다. 그런 현실에서 살아간다.
*이상의 내용은 김주환 교수의 글과 강의, 그리고 아닐 세스의 책 <내가 된다는 것>에서 많은 개념을 빌려왔습니다. 혹시 잘못이 있다면 모두 필자의 무식함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