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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궁 제 16 장.
第 16 章 구출작전(救出作戰).
2.
무삼수는 어젯밤부터 관아에 들어와 포졸복장으로 변장한체 어슬
렁 거리고 있었다. 소운영이 잡혀있는 곳은 이미 알아놓았다. 소운
영을 지키는 자들이 꽤 많긴 했지만 일이 뜻대로만 된다면 두려울
건 없다.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원강과 손삼여 쪽에 무슨일이 있는지 약속했던 시간보다 차 한잔
마실 정도 빨리 불길이 올랐다. 근처를 어슬렁 거리던 황삼산이 뛰
어왔다. 순찰하는 포졸들과 은밀히 매복해 있던 자들까지 불길에
놀라 당황하는 것 같았다. 무삼수는 할 수 없이 황삼산에게 눈짓하
여 시작하기로 했다. 둘은 순찰자가 있는 쪽으로 걸었다. 포졸복장
을 하고 있는지라 순찰자는 크게 경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에는 언제나 변수(變數)가 있고, 돌발적인 사태가 벌어
질 수 있는 법!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강남 백운산장의 운중학이
먼저 모습을 드러내고 일을 시작했다. 불길을 보고 기회를 잡았다
생각한 것이 틀림없다.
운중학 또한 어디에 매복이 있는지 잘 살펴둔 모양이다. 삽시간에
담벼락 밑 나무덤풀로 뛰어들어 두놈을 베어버렸다. 그리고는 곧장
소운영이 있는 건물 안으로 처들어 갔다. 그러나 어느새 나타난 세
명의 매복자가 앞을 막았다. 운중학은 멈추지 않았다. 먼추면 일은
틀어진다. 번개처럼 해치워야 한다. 하지만 앞을 막은 세명의 무공
이 만만치 않았다.
무삼수는 운중학을 향해 달려오며 크게 부르짖었다.
"강도야!"
황삼산도 무삼수의 생각을 알아채고 함께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갔
다. 저쪽에서 모윤까지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왔다.
운중학은 낭패감을 느꼈다. 세명도 만만치 않은데, 더 많은 무리
들이 달려오고 있다. 하지만 그냥 물러설 순 없다.
"비켜라!"
운중학은 세명을 향해 연거푸 여섯 번의 검을 후려갈겼다. 벼락치
듯 쇄도하는 여섯검의 위력에 세명은 연신 뒤로 밀렸다. 운중학은
그중 한명을 좇아 일곱 번째 검을 찔렀다. 검 끝은 정확하게 그자
의 목을 파고들었다. 두명은 운중학의 위력적인 검법에 겁을 집어
먹고 주춤거렸다. 운중학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나머지를 상대
하려면 마음부터 안정시켜야 한다. 그런데.
"어???"
운중학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세상에 이런일도 있을까 믿어지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던 세명의포졸들이 주춤거리는 두명
에게 다가서더니 사정없이 칼을 휘둘러 목을 처버렸다. 운중학을
상대하던 두명은 그야말로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목이 떨어져 죽
고 말았다.
무삼수가 멍청하게 서 있는 운중학을 향해 소리쳤다.
"운형, 서두르시오! 우린 장군부 사람들이외다."
무삼수는 말을 건네고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황삼산과 모윤이
함께 뛰었다. 운중학은 깜짝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그들을 좇았다.
집안에는 벌써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삼수등이 여섯명의 무
리를 만나 싸움을 시작하고 있는데 형세가 다소 불리해 보였다. 그
리고 대청 한 구석에는 꿈에도 그리던 소운영이 초췌한 몰골로 묶
여 있었다.
"영누이!"
운중학은 초췌한 소운영의 모습을 보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
다. 울화가 치밀고 답답하여 버럭 소리를 지르며 소운영을 향해 달
렸다. 소운영을 지키고 있던 두놈이 운중학을 막았다. 몽고복장을
한 자들이다. 운중학은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단숨에 두쪽으로
갈라줘도 마음이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짱!
한명이 검을 들어 막았다. 운중학은 힘에 밀려 휘청 중심을 잃었
다. 다른 자의검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운중학의 몸이 버들가지
처럼 휘어지며 칼을 피했다. 운중학은 재빨리 몸의 균형을 잡고 가
전의 절기인 연운18검법(連雲十八劍法) 매섭게 떨쳐나갔다.
본래 백운산장의 연운십팔검법은 강호무림계에 명성을 떨칠 정도
로 그 기세가 강하고 매서운 검법이다. 또한 운중학도 가전절기를
착실히 익혀왔다. 청년들 중에서는 고수축에 들어간다. 하지만 운
중학은 마음이 급하여 너무 서두르고 있었다.
상대의 검법은 해괴하고 괴상망측하여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기도
하고, 위를 치는 것 같은데 어느새 아래를 친다. 순서가 없는 듯
어지러우면서도 힘이 강하고, 초수마다 독하고 악랄한 살수가 숨어
있었다. 이러한 이상한 검법이 운중학의 정신을 더욱 산란하게 만
들었다. 오로지 소운영에게만 신경을 집중하다가 뒤에서 찔러오는
검에 그만 왼쪽어깨를 찔리고 말았다.
무삼수가 소리쳤다.
"운형, 흥분하지 마시오! 어이쿠, 이 새끼!"
무삼수도 딴데 정신을 팔다가 그만 허리깨를 베이고 말았다. 화가
치민 무삼수는 상처를 내고 물러서는 자를 향해 검을 던져버렸다.
무삼수가 배운 무공은 오행권법(五行拳法)이다. 스승없이 홀로 주
워 배운 권법이지만 본래가 총명한 위인이라 어느정도 성취를 보았
다. 더욱이 도일봉에게 패하고, 무림들에게 한바탕 추적을 당한 이
후 무삼수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오행권법을 한층 더 깊이 연마
했다. 검을 들었을 때보다 맨손일 때가 더 강하다.
무삼수는 연속해서 다섯초식을 시전해 내어 상대를 밀어붙였다.
여유가 생겨 다른 사람들도 살필 수 있었다. 황삼산과 모윤이 각각
한사람씩을 맡아 상대하고 있다. 황삼산이나 모윤은 도적질을 업으
로 삼느라 칼쓰는 법을 다소 알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스승
없이 홀로 익혀온 것이라 모자람이 많다. 두사람은 버럭버럭 소리
를 지르고 있지만 밀리고 있는 판이다. 무삼수는 시간을 끌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허리를 더듬었다.
"이 새끼들아. 이거나 처먹어라!"
건달 출신들이라 확실히 입이 거칠다. 무삼수의 손에서 번쩍 칠
보단장사가 날았다. 황삼산과 싸우던 자는 갑자기 날아든 암기에
깜짝 놀라 재빨리 몸을 피했다. 황삼산의 커다란 칼이 번쩍 그자의
목을 쳤다. 황삼산은 목에서 뿜어지는 피가 옷을 젖시는데도 오히
려 크게 웃으며 무삼수 쪽으로 달렸다.
"이새끼. 너 이리와!"
황삼산은 무삼수와 싸우고 있는 두명중 한명에게 벼락같이 달려들
었다. 무삼수가 노렸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의 상대에게 암
기를 던져봐야 뻔히 보고 있는지라 성공할 확률이 적다. 대신 멀리
있는 자는 암기에 대비하지 못한다. 한명이 떨어져 나가자 무삼수
는 더욱 여유가 잇었다.
운중학은 어깨를 찔리고, 무삼수의 주의를 들은후 마음을 가라앉
혔다. 자신이 너무 흥분하고 있었음을 느끼고 부끄러운 생각까지
들었다. 운중학은 뒤로 한걸음 물러나 숨을 깊게 빨아들였다. 상대
를 매섭게 살핀 운중학은 재차 검을 떨치며 덤벼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상대를 분명하게 보면서 연운실팔검을 펼쳐내자 위
력은 가중되었다. 두명은 앞 뒤로 나뉘어 공격을 시도했다. 운중학
은 앞쪽의 상대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뒤쪽의 상대가 재빨리 따라
붙으며 검을 찔렀다. 위를 찌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래를 찌르는
수법이다. 운중학은 이같은 검법을 이미 숙지했다. 재빨리 몸을 옆
으로 틀며 위를 향해 검을 찔렀다.
"캑!"
뒤쪽의 상대는 그만 목을 찔려 이상한 비명을 토하며 쓰러졌다.
나머지 한명이 불리함을 느끼고 재빨리 물러서 소운영의 목에 검을
들이댔다.
"궜라 궜라!"
놈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몽고어로 마구 지껄였다. 검을 들어 위협
하는 꼴이 여차하면 소운영의 목을 찌르겠다는 뜻 같았다. 황삼산
과 모윤의 상대도 그쪽으로 달려갔다.
"저런 쥐새끼가!"
무삼수는 한명을 마저 처치하고 달려왔다. 칠보단사를 던지고 싶
었으나 함부로 모험할 수 없는 일이다. 운중학도 놀라 손을 부르르
떨었다.
"검을 버려!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이 계집은 죽는다. 어서!"
황삼산의 상대가 한어로 소리쳤다.
무삼수의 눈짓에 따라 황삼산이 먼저 칼을 버렸다. 모윤의 검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무삼수는 운중학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운중
학은 무삼수의 뜻을 알아채고 늘어뜨렸던 손에 힘을 가했다. 검을
암기처럼 던져내려는 것이다. 그때였다.
슉!
창 밖에서 무엇인가 안으로 날아들었다. 굉장한 속도의 암기였다.
그것은 소운영을 위협하고 있는 자의 관자놀이를 그대로 관통해 버
렸다. 그런데도 속도가 줄지않아 맞은편 벽에 푹 박혀버렸다. 작은
화살. 바로 도일봉의 장군전이다.
남은 두놈이 놀라 눈을 크게 뜰 때 무삼수와 운중학이 동시에 손
을 뿌렸다. 칠보단장사와 검이 한꺼번에 날았다. 두놈이 깜짝 놀라
몸을 피했다. 무삼수의 손에서 또 한자루의 칠보단장사가 날았고,
운중학이 몸을 날려 소운영을 얼싸안고 뒹굴었다. 두놈은 사태가
불리함을 깨닫고 창문을 통해 도망쳤다.
운중학은 소운영을 몇번 두드려보고 그녀의 수혈이 짚여 있음을
알았다. 서둘러 몸을 문질러 막힌 혈을 풀었다.
"영누이. 영누이! 정신차려요, 정신을..."
멀둥멀둥.
소운영은 정신을 차리고도 돌아가는 상황을 몰라 잠시 눈만 껌뻑
거렸다.
"영누이, 나야. 운중학이야! 정신이 들어?"
소운영은 그때서야 운중학을 알아보았다. 서러움이 한꺼번에 몰려
들었다.
"중학오빠! 나는..."
소운영은 그만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다.
무삼수가 서둘렀다.
"운형, 시간이 없소이다. 뒤는 우리가 맡을테니 먼저 가시오. 북
문 쪽으로 나가면 별 일은 없으리다. 차후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
나겠지요."
"운중학이 신세를 졌소이다. 뉘신지요?"
"이름같은게 뭐 그리 중요하겠소? 우린 장군부 사람들이외다. 그
럼!"
무삼수는 말을 하면서도 촛불을 들어 마구 불을 붙였다. 운중학이
소운영을 부축했다.
"영누이. 걸을 수 있겠소?"
소운영은 억지로 걸어보려 했지만 이내 휘청 쓰러질뻔 했다. 운중
학은 고개를 저으며 소운영을 단숨에 들처업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검을 찾아들고 창문 밖으로 뛰었다.
무삼수등도 불타기 시작한 대청을 나와 보이는 곳곳마다 불을 지
르며 다녔다. 운중학이 담을 넘는 것을 본 무삼수는 다른쪽으로 달
리며 마구 외쳐댔다.
"반적들을 놓치지 마라!"
"불이야! 불이 났다. 수룡대(水龍隊)를 불러라!"
세사람은 소리를 지르면서도 틈만나면 불을 질렀다.
바얀의 명령이 떨어지자 도일봉은 불난곳을 가르키며 얼렁뚱땅 수
작을 부리다가 이내 도망치기 시작했다. 두명의 무사가 이내 좇아
오기 시작했고, 바얀과 나머지 둘을 따라오기 시작했다. 바얀의 졸
개들은 무공도 대단했다. 둘이 한꺼번에 덤비면 도일봉도 막기 힘
들었다. 도일봉은 죽봉을 마구 휘두르며 줄기차게 도망쳤다. 도망
치다 추월당하면 또 한바탕 싸움을 하고, 기회만 생기면 몸을 빼내
도망쳤다. 바얀은 도일봉을 좇는 것은 네명의 무사에게 맡기고 자
신은 군졸들을 불러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도일봉은 지붕을 타고 올라 도망쳤다. 네명의 무사들이 악착같이
좇아왔다. 얼마쯤 달리다가 도일봉은 자신이 그물에 걸려 들었음을
알아챘다. 군졸들이 떼거지로 나타나 멀찍이 포위하고 있었다. 도
일봉이 어디로 달리든 군졸들은 다가오지 않고 멀찍이서 포위만 했
다. 도일봉을 좇는건 네명의 무사들 몫이다. 군졸들은 도일봉이 관
아 밖으로 빠져 나가는 것만 막고 있다.
도일봉은 야단났다고 부르짖었다. 도망치다가 기회만 있으면 어디
건 간에 가리지 않고 불을 싸질렀다. 네명의 무사는 귀신처럼 따라
붙었다. 도일봉의 뺑소니치는 재주는 이미 어느 경지를 넘고 있는
데도 이들은 결코 도일봉을 놓치지 않았다. 간신히 떨치고 잠시 숨
을 돌릴라치면 어느새 나타나 검을 휘둘렀다. 몸을 숨겨도 개코를
지녔는지 어김없이 찾아내어 덤벼들었다. 도일봉은 그때마다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쳐야 했다.
도망치다가 우연히 잡혀있는 소운영을 보았다. 소운영이 위협당하
는 것을 보고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황룡궁을 꺼내 쏘았다. 백발
백중! 도일봉의 활은 결코 목표를 빗나가지 않는다.
잠깐 주춤하는 사이에 무사들이 어느새 따라붙어 검을 휘둘렀다.
도일봉은 도망치면서 생각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잡히고 말겠다. 생각을 바꿔야 겠어!'
도일봉은 관아의 중심부로 달렸다 여파하면 성주라도 잡아 인질로
삼을 생각이다. 그러나 성주등은 이미 피신한 상태였다. 아무도 보
이지 않았다. 바얀이 이런 상황까지도 예상하고 미리 피신시킨 것
이 분명하다.
"빌어먹을. 이놈은 나보다도 교활하군!"
도일봉은 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창문
을 통해 밖으로 나가려는데 저쪽 복도 끝 문이 슬그머니 열렸다.
"어?!"
삐쭉 고개를 내미는 것을 보니 한 번 만난적이 있는 홍의소녀다.
도일봉은 그녀에게 달려갔다. 인질로 삼아 이곳을 빠져나갈까 고민
하는데, 소녀가 이상야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때가 아직 이른데
도 그녀는 잠옷 차림이었다. 도일봉도 히죽 웃었다.
"그대와의 만남은 괴상한 곳에서만 이루어 지는군. 항상 잠자리에
서 만나니 I야. 오늘도 실례좀 해야겠어. 난 또 좇기고 있는데 저
번보다 더 지독하게 걸려들었어."
소녀은 말을 알아 듣었는지 어떤지 방문을 조금더 열어보였다. 들
어오라는 뜻이다. 도일봉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놈들이 벌써 이
층으로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럼 실례!"
도일봉은 소녀 방으로 뛰어들어 침대 밑으로 숨었다. 곧 네명의
무사들이 달려왔다. 소녀가 비명을 질러대며 마구 손짓발짓을 해댔
다. 물론 몽고어였다. 창문쪽을 가르키는걸 보면 도일봉이 그리로
달아났다고 가르쳐 주는 것 같았다. 무사들이 급히 창문을 향해 달
렸다. 소녀가 방문을 걸어잠그고 괴상하게 웃었다.
"도일봉. 나와...나와. 갔어."
한어를말하는데 말음이 신통치 않다. 도일봉은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왔다.
"이제 우리말도 할줄 아는군! 아뭏튼 신세졌어."
"신세? 아! 신세..."
"왜 날 숨겨줬어?"
"바얀 나빠. 여자 잡아. 도일봉 날 잡아...좀 전에?"
조금전 인질로 삼으려던 도일봉의 속마음을 느낀 모양이다. 도일
봉은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소녀는 잠시 시무룩한 표
정이더니 이내 웃어넘겼다. 도일봉은 창 밖을 살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군졸들이 사방에 깔려 있다. 도일봉은 창
으로 나가려다가 그만두었다. 나가봐야 좇기는 신세를 면치못할 것
이다. 어슬렁어슬렁 방안을 걷다보니 괜시리 배가 고파왔다. 다른
건 참아도 배고픈건 못참는 도일봉이다.
"이봐, 먹을거 없어? 냠냠 말이야?"
"먹을거? 냠냠?"
소녀는 젖가락질 하는 것을 보고야 알았다는 듯 깔깔 웃었다. 소
녀는 탁자에서 주전자와 빈잔을 가져왔다. 따라주는데 보니 차였
다. 도일봉은 쓴웃움이 나왔지만 성의를 생각해서 마셔주었다. 소
녀는 한잔을 차를 들고는 폴짝 침상위로 올라 쪼그리고 앉았다.
"도일봉...몽고 싫어?"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어떤 기대감이 어려있다.
"난 나쁜놈만 싫어해. 나쁜놈은 한인들 중에도 많아!"
"나빠? 바얀 나빠?"
"바얀 안나빠."
"쿠쿠...교영 좋아?"
"교영?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지."
"밍밍...좋아?"
괴상망측한 이름도 있다. 밍밍이란 이름도 있다니! 하긴 몽고놈들
이름치고 이상하지 않은 것은 없다. 자신의 코를 가르키는 것을 보
면 본인의 이름인 모양이다.
도일봉은 그 이상한 이름보다도 계집애가 이토록 대담한데 대해
놀랐다. 워낙 자유분망한 인간들이니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지
만, 두 번 만났을 뿐인데 대뜸 자신을 좋아하느냐고 묻다니 도일봉
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괴상한 이름이로군. 밍밍 안나빠!"
안나빠를 좋아한다는 말로 해섯했는지 그녀는 꺄르르 웃었다.
"도일봉 밍밍 좋아한다. 호랑이빨!"
소녀는 더욱 가관으로 나왔다. 옷깃을 헤쳐 목에 걸쏛힌 목걸이를
보여주었다. 도일봉이 준 호랑이 송곳니다. 금으로 세공한 줄이 달
려있었다. 도일봉은 그녀가 이처럼 정성스럽게 목걸이를 만들었다
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소녀가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려 도일봉의 옷을 당겼다. 도일봉의
목에도 호랑이 송곳니로 만든 목걸이가 걸려 있다. 줄은 노끈이었
다. 본래 교영에게 준 것인데, 지난번 만났을 때 그녀가 팽게친걸
주워 자신이 걸고 있었다. 소녀가 인상을 찡그리며 도일봉의 목걸
이를 풀었다.
"교영 나빠. 도일봉 싫어해!"
도일봉은 어이가 없어 말도 못했다. 소녀가 자신의 목걸이를 도일
봉에게 걸어주었다.
"이거 준다. 이건 나."
그녀는 노끈으로 만든 목걸이를 걸었다.
도일봉은 이 깜찍한 계집애가 혹 자신에게 반해버린건 아닐까 어
리벙벙 해졌다. 도일봉은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나가는 것이 좋겠
다고 생각했다. 바얀을 피하려다가 이 계집애에게 발목을 잡히면
더욱 큰 일이다. 도일봉이 몸을 일으키자 소녀가 놀라 팔을 붙잡았
다.
"비와. 군인 많아. 도일봉 잡아...여기 있어."
도일봉은 정말이지 난처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그동안 수도없
는 일들을 겪었지만 지금처럼 황당한 경우는 없었다. 교영이 자신
을 싫다고 바얀에게 달라 붙은 것만도 정신이 아찔한데, 이 계집애
가 자신에게 달라 붙는다면 정말이지 큰일이다. 갑자기 골이 지끈
거렸다.
"어이구, 머리야!"
도일봉이 털석 주저앉아 머리를 무릅 사이에 처박자 밍밍이 놀라
물었다.
"도일봉...아...아파? 머리 아파?"
도일봉은 어구니가 없어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밍밍의 눈
에 걱정이 가득한걸 보고는 그만 맥이 탁 풀렸다.
"가서 잠이나 자. 우리가 이러고 있는걸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
려고 그래? 그대의 식구들이 이 꼴을 본다면 난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신세가 될거야. 난 몰매 맞아 죽는다고!"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밍밍이 엉뚱한 소리를 해댔다.
"도일봉 안죽어. 밍밍 말 안해. 바얀 나빠."
"어이쿠, 그만두자, 그만둬!"
도일봉은 더 말해봐야 골만 아플 것 같아 머리를 무릅사이에 박고
입을 다물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밍밍이 옆에 쭈구리고 앉더
니 스르르 몸을 기대왔다. 도일봉은 밍밍이 이제 몸으로 부딪쳐 오
나보다고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밍밍은 어깨에 머리를
기댄체 잠들어 있었다. 도일봉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깜빡 잠이 들었을까? 도일봉은 창 밖이 뿌연 것을 보고는 깜짝 놀
라 몸을 일으켰다. 밍밍은 아직도 잠들어 있었다. 도일봉은 그녀를
안아 침상으로 옮겨주었다. 붉으레한 볼이 정말 예쁘게 생겼다. 도
일봉은 그녀의 볼따구를 가볍게 쥐어보았다.
"잘 있어. 깜찍한 아가씨야!"
번쩍!
밍밍의 눈이 갑자기 떠졌다. 눈이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밍밍이 깔깔 웃으며 도일봉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이쿠, 왜 이래? 읍!"
도일봉은 그만 정신이 아찔했다. 밍밍이 입을 맞출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열심히 입술을 빠는데 혼이 반쯤은 달아나
는 것 같았다.
'하이고, 이 계집애가 필시 여우의 환생인 모양이다!'
도일봉은 그렇게 부르짖었다.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밍밍
이 입술을 떼더니 깔깔 웃었다.
"도일봉 밍밍 좋아해. 밍밍 도일봉 좋아."
"어이쿠, 두야!"
다리가 다 휘청거렸다.
"그래 그래. 네 말이 옳다. 난...가야겠어. 가야해."
"가? 도일봉 어디가? 밍밍 언제 만나?"
"음. 나도 몰라...곧..."
"언제? 어디 있어? 밍밍도 함께 가?"
"큰일날 소리! 난 성 밖에 살아. 난 가야지. 잘 있어."
도일봉은 황급히 창문 밖으로 뛰었다.
"도일봉 밍밍 찾아와. 빨리...!"
도일봉은 못들은척 빗 속을 빠르게 달렸다.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정신이 없다. 그 계집애는 세상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아는건
그저 대담한 사랑놀이 뿐일 것이 분명하다. 도일봉은 절레절레 고
개를 흔들며 밤고양이처럼 움직였다.
막 관아의 담장을 넘으려 할 때였다. 저쪽에서 누군가 담장을 넘
어오는 것이 보였다. 무삼수 등이었다. 도일봉이 나오지 않자 걱정
이 되어 돌아온 모양이다. 도일봉은 담장을 넘다말고 그쪽을 향해
낮게 소리쳤다.
"이봐, 이봐. 나 여떢어!"
무삼수등이 도일봉을 발견하고 크게 기뻐했다. 도일봉은 그들에게
신호를 보내 함께 담장을 넘었다.
"무사했구려! 밤새 기다리다 걱정이 되어 달려 왔소이다."
도일봉이 고개를 내둘렀다.
"가세. 밤새 곤욕을 치루었어!"
"곤욕? 그놈에게 잡혔었소?"
"그놈이면 차라리 속이나 편했겠지! 확실히 여자는 요물이야."
"교영이라는 성주 딸에게 잡혔던 게요?"
"그녀 친구. 운중학과 우리 식구들은 무사한가?"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어요. 두명이 중상이고, 세명은 경상이외
다. 하지만 어쩐일인지 성주의 거처에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지 뭐
요? 그래서 우리는 손쉽게 싹쓸이를 했소이다."
도일봉이 껄껄 웃었다.
"핫핫핫. 그녀석. 내가 성주를 잡아 인질로라도 삼을까봐 미리부
터 겁을 집어먹고는 그들을 모조리 피신 시켰지 뭔가. 내 마음은
간파했지만 설마 보물들이 털릴줄은 몰랐겠지! 멍청한 녀석. 이번
일로 성주의 눈총좀 받을거야."
성 안은 온통 군졸과 포졸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원강과 손삼여가
벌써 골목골목에 손을 써 두었기 때문에 그들은 어렵지 않고 기찰
을 피해 성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비가 점차 굵어지고 있었다.
날은 이미 훤히 밝아 있었다.
소운영과 운중학은 안전한 곳에 피해 있었다. 더욱이 딸이 걱정된
소남천이 직접 와 있었고, 청운장에서도 목관영이 도착해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그렇구만."
소남천의 표정은 웬일인지 곱지가 않았다. 하긴 딸이 도일봉을 찾
으러 나갔다가 이런 봉변을 당했으니 기분이 좋을리 없을 것이다.
도일봉은 소남천의 그런 표정도 알아보지 못하고 운중학과 소운영
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소아가씨, 무사하니 다행입니다. 운형도 수고 하셨고요. 다시 보
니 반갑소이다."
"도와주신 덕분이오. 신세를 졌어요."
"별 말씀을. 목형도 왔구려. 문형부부께선 건강 하시지요? 운기도
잘 있는지 몰라?"
목관영이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모두 평안 하시다오. 도형이 말없이 귀운장을 떠난 것을 알고 걱
정을 하셨다오. 또 연부인께서도 잘 계신다오. 도형 생각을 많이
하더이다. 아기도 잘 큽니다."
"저런! 내가 걱정을 끼친 셈이로군. 우리 누이는 본래 수줍움이
많은데 잘 지내는지 몰라? 혹 병이 난 적은 없나요?"
"병은 없지만... 연부인께선 청운장이 편하지만은 않은 모양입디
다. 가끔 우울해 하곤 합니다."
"우울해 한다고요? 왜 그럴까? 하긴, 혼자 뿐이니... 내가 자주
가봤어야 하는건데..."
도일봉은 갑자기 죄책감이 들었다. 연부인 삼랑은 오로지 자기만
믿고 따라온 여인인데 이토록 소홀히 대했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또
미안했다. 당장 달려가 보고 싶었다.
소남천이 입을 열었다.
"우린 이만 가봐야 겠어. 이곳에 잇어봐야 시끄러운 일만 생길게
야. 자네가 이미 일가를 이루었으니 축하하는 바이네. 열심히 해보
도록 하게나."
도일봉이 빙그래 웃으며 소남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작은 소
리로 입을 열었다.
"장주님. 저 운형은 소아가씨에 대한 성의가 대단 하더군요. 혹
언제라도 결혼식을 하게되면 저도 불러 주십시오. 꼭 축하해 주고
싶어요."
소남천은 도일봉이 자신을 놀리는줄 알았다. 자기 딸은 건달같은
이녀석에게 푹 빠져서 부모도 몰라라 하고 집을 뛰쳐나온 셈인데,
이놈의 수작이 가관도 아니다. 소남천의 눈빛이 날카로워 졌다.
"자네가 어찌 중학을 아는가? 초면일텐데?"
"물론 말을 주고받은건 지금이 처음입니다. 사실, 그때 일부로 엿
보려 했던 것은 아닙니다만 운형이 귀운장엘 왔더군요. 소아가씨와
둘이서 이야기 하는 것을 보고는 잘 어울리는 한쌍이라고 생각 했
어요. 알고보니 당시 운형이 왔던 것은 역시 혼사문제 때문이었더
군요."
"그런일이 있었는가?"
소남천은 자신이 어처구니 없는 오해를 했음을 알고 쓴웃움을 지
었다. 그런 장면을 보았다면 도일봉만의 잘못은 아닌 셈이다.
도일봉이 운중학에게 다가가 한마디 했다.
"운형, 다음에 꼭 날 부르시오. 국수도 먹고, 축하도 해야지요."
"좋습니다. 꼭 와주시구려. 사실 이번일로 해서 영누이와 좀 더
가까워 질 수 있었지 뭐요. 도와준 것 고마웠어요."
소남천은 떠나기 전에 두권의 책자를 도일봉에게 주었다.
"이건 내가 창안한 유운칠십이검(遊雲七十二劍)과 가전의 낙영장
(落影掌)이라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구만."
"이런걸 주시다니! 정말 감사드리비니다. 편히 돌아 가십시오."
소남천등은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도일봉은 우두커니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잇었
다. 무엇인가 빠진 것 같았다.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한 듯 찜찜 했
다. 무삼수가 떠나자고 말했을 때에야 도일봉은 깜짝 놀라 깨달았
다.
"나도 가야겠다!"
"가요? 어딜 갑니까?"
"내 누이가 우울증에 걸렸다잖아! 난 누이를 보러 가야겠어. 얼른
가야지!"
"아니, 지그무 어딜 간다고 그러는게요? 산채가 이제 겨우 정리되
고 있는데, 대장이 자리를 비우면 어저란 말입니까? 나중에 가도
되지않소?"
"안돼, 안돼. 당장 가야해! 당장 가지 않으면 난 궁굼증을 참지
못하고 죽을것만 같단 말야. 누이는 이세상에 어린 딸하고 나 뿐인
데 얼마나 외로웠겠나? 다구나 낮선 곳에서 말야. 난 죽일 놈이야.
그런 누이를 홀로 놔두다니! 난 당장 가야겠어!"
"갑자기 왜 이래요? 이곳에도 대장이 없르면 안됩니다. 차라리 내
가 가서 동생분을 데려오지요."
"자네가? 누이를 알지도 못하면서?"
"가서 만나보면 알게 되는 것 아니오. 더구나 대장이 그토록 칭찬
하는 문선생도 한 번 만나 뵙고 싶어졌어요."
"먼 거리라 힘들텐데?"
"대장은 이곳에 있어야 해요! 내 바람처럼 다녀오리다."
무삼수는 훌쩍 말 등에 올라 앞서간 소남천 일행을 좇아 달렸다.
"이봐. 조심해서 갔다오라고!"
도일봉은 한참 동안이나 그렇게 서 있다가 수하들과 함께 산채를
향했다. 힘든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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