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청탁을 받고 광화문으로 향한다. 어느 구석에 쳐박혀 있을지 모를 이 소설책들을 어떻게 다 찾아내나... 교양에 도움이 될 책들도 아니고, 읽고 싶은 책들도 아니고, 그저 원고를 쓰려고 그 넓은 서점을 다 뒤질 생각을 하니 막 짜증이 난다. 교보문고에 도착했다. 근데 다행이라 할까, 불행이라 할까, 정작 그 책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예 이런 책들만 모아놓은 코너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소설가 이인화가 몇 년 전에 "고꾸민쇼세쯔"(國民小說) 운운할 때만 해도, 나는 그걸 반짝유행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몇 년이 지
난 지금, 나는 이런 우익소설들이 아예 하나의 문학장르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하늘이여 땅이여>, <가즈오의 나라>, <한반도>, <동해물과 백두산이>, <핵 독립. 8.15>, <데프콘>, <동해>, <일본정복기>, <황금화살>... 이런 책들엔 하나 없이 선정적인, 아니 선동적인 광고문안이 붙어 있다. "더 이상 당할 수는 없다. 미국의 아킬레스 건을 노려라", "미국에 빼앗긴 핵주권을 되찾기 위해 시베리아 벌판에서, 적도의 밀림 속에서 초개와 같이 쓰러져간 사나이들의 이야기", "그는 죽어서 영혼이 되었다가 민족의 염원으로 부활하여 일본을 정벌한다", "아마겟돈, 그 최후의 전쟁의 흔적", "미국이 북한을 폭격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위기에 처한 한국금융시장에 교활하고 악랄한 수단으로 뛰어든 투기자본의 거대한 음모." 이런 류의 소설을 쓰는 어느 저자를 출판사에서는 이렇게 소개한다. "젊고 패기있는 문체와 민족주의로 전사적(戰士的) 글쓰기를 감행하는 차세대 역사소설가." 이 말 속에는 요즘 유행하는 각종 "고꾸민쇼세쯔"(國民小說)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가령 "패기 있는 문체"라는 이 소설가들의 설익은 문학적 역량을, "민족주의"는 이들의 어설픈 이념을, "전사적 글쓰기"는 이들의 글쓰기의 위험성을 각각 웅변적으로 실토한다. 한 마디로, 문학적 조야함에 값싼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를 담은 선동적 소설이라는 얘기다.
이 선동성을 과대평가할 필요없다. 조국과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는 이들의 과격한 민족주의, 전투적 애국주의의 바탕에 깔린 정신은 상업적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 이 우익 "고꾸민쇼세츠"의 고약한 전통은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일본에서는 이런 류의 문학이 하나의 장르로 자리를 잡았다. 만화나 위인전 혹은 가상소설의 형태로 나타나는 이 소설들은 그 몰지성과 몰취향과 비도덕성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수십만 부의 발매부수를 자랑할 정도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곤 한다. 그것이 지금 우리 나라에 상륙하여 그럴 듯한 한국적 버전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뿐이다. 이제까지 등장한 이 소설들을 내용적으로 분류하면 크게 ① 국가주의적 경향 ② 민족주의적 경향의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그 각각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국가주의 문학
첫째 국가주의적 경향의 문학은 보수우익의 정치적 입장을 옹호하기 위한 일종의 목적문학이다. 대개는 우익 수정주의의 관점에서 친일과 독재로 점철된 우익의 역사를 변명하고 미화하는 작업이라 종종 "역사왜곡" 시비에 휘말리곤 한다. 가령 이승만의 전기를 쓴 어느 신문기자에게 "이승만은 독재자가 아니었다." 객관성을 상실하고 일방적인 찬양조의 관제문학이라서 가끔 웃지 못할 해프닝도 벌어진다. 가령 반에서 꼴찌를 한 학창 시절의 박정희에 대해서 저자는 "결석을 47일이나 하고도 이 정도의 성적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머리가 좋다
는 증거"라고 말한다.
한국 우익은 한국사를 사대주의로 점철된 수치의 역사로 본다. 그 중에도 간간히 민족자주성을 세운 사람들이 있어 한국사의 명맥을 이어온 바, 그것이 바로 '김유신-이순신-정조-이승만-박정희'라는 것이다. 자기들이 한국사의 정통임을 주장하기 위해 급조해낸 이 우익 신통기에서 이순신은 김탁환("불멸"), 정조는 이인화("영원한 제국"), 이승만은 이한우("위대한 생애"), 그리고 박정희는 그가 차지하는 막강한 비중을 고려하여 이인화("인간의 길")와 조갑제("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두 사람에 의해 대하소설로 다루어지는 중이다. 그러니 이
제 김유신전만 남은 셈이다. 만약 김유신이 이들에 의해 문학적으로 형상화된다면, 무덤에서 살아난 그는 아마도 우리에게 남북문제의 해결하는 방안을 훈계할 게다. "무력통일."
이 소설들의 메시지는 우리가 지겹게 듣던 것의 재탕이다. 가령 이순신 전기 "불멸"의 저자 김탁환은 뜬금없이 이런 국방색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지금 기나긴 휴전을 하고 있다. 만에 하나 정유재란과 같은 전쟁이 일어난다면 대한민국 정부는 얼마만큼이나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것인가."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은 모든 권력을 강력한 전제군주에게 몰아주어 일류 국가를 건설하자는 메시지다. 그가 말하는 현대판 정조가 누구인지는 그의 다음 소설에서 분명해졌다. 이한우의 "위대한 생애"는 노욕으로 몰락해 간 독재자를 대한민국의 국
부로 추앙하는 내용,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박정희를 미국의 간섭과 싸운 자주국방의 아버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서민의 아버지, 한국 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켜세우는 내용이다.
이 작품들은 장르상으로는 대개 '위인전'의 성격을 띠며, 해석이 자의성이 지나쳐 어디까지 현실이고 어디까지 허구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다. 역사해석이 학자가 아닌 기자나 소설가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이 매우 특이한데, 그것은 이들이 하는 작업이 지극히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된 일종의 정치 프로파간다임을 보여 준다. 이런 류의 소설로 이들이 하고자 하는 얘기는 한 마디로 '우리 보수우익이 너희들을 지켜주고 살펴주고 다 먹여살렸다, 그러니 감사하라'는 것이다. 이들이 역사문제를 다루는 데에 문학의 형식을 선호하는 것은 '허구'라
는 문학의 특성이 사실의 왜곡을 용이하게 하고 나아가 대중의 감정에 직접 호소하는 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우익 민족주의 문학
국가주의적 경향의 문학이 보수우익이나 언론권력과 밀월관계를 누리며 강한 정치성을 띤다면, 민족주의 성향의 소설들은 정치성 대신에 강한 상업성을 띤다. 이 부류의 작가들은 현실정치보다는 민족감정과 애국심을 상업화하는 데에 관심이 있다. 이들은 정신적으로 기성세대에 속하지 않고 외려 발랄한 신세대적인 감성까지 갖고 있다. 가령 이 소설들 중 몇몇은 사이버 공간에 연재되던 것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소설가들 중의 몇몇은 '군사애호'라는 새로운 취미생활을 하다가 아예 소설가로 나섰다. 이들의 전쟁취향은 국가주의 소설들의 그것과는 분위기가 좀 다르다. 전자가 전쟁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에 집착한다면, 이들은 제법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전쟁의 기술적 측면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국가주의 문학이 우익의 역사적 정통성을 세우려는 동기에서 과거의 역사에 매달려 픽션도, 넌픽션도 아닌 애매모호한 역사소설을 만들어낸다면, 민족주의 문학은 그보다는 앞으로 벌어질 전쟁에 더 많은 관심이 많다. 그리하여 그것은 가상전쟁소설이라는 분명한 픽션의 형태를 띤다. 가령 공전의 히트를 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한국과 일본의 가상전쟁을 다룬 것으로, 남북한이 합작을 하여 일본의 무인도에 핵을 떨어뜨린다는 끔찍한 내용이다. 여기서 국가주의 문학과 민족주의 문학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광신적 반공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는 국가주의 문학에서라면 남북한의 합작이라는 모티브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념의 차이를 뛰어넘어 민족대단결로 전쟁을 한다는 모티브. 이는 한국의 민족주의가 점차 역기능을 발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민족주의'라는 말은 서구와 제3세계에서 그 의미가 다르다. 서구에서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적 팽창야욕의 상징이기에, 양식 있는 서구인들은 '민족'이란 말에 강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과거에 식민지였던 나라에서는 이 말에 긍정적 뉘앙스가 부여한다. 여기서 '민족주의'는 '민족해방'과 동의어다. '해방적 민족주의'가 긍정적일 수 있는 것은, 민족자결권의 주장이 타민족에 대한 배타심으로 흐르지 않는 한에서이다. 하지만 최근에 등장한 민족주의 문학은 이웃나라에 대한 공공연한 적대심과 심지어 무력행사의 시나리오까지 담고 있다. 이는 우리의 민족주의가 진보적인 '해방적 민족주의'에서 점차 반동적인 '배타적 민족주의', 심지어 아제국주의적 '팽창적 민족주의'로 변질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장 큰 문제는 공공연히 핵을 찬양하는 분위기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읽은 어느 일본 기자는 "핵전쟁을 찬양하는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된 나라는 대한민국 뿐"일 거라고 말했다. 어쨌든 이는 우리 국민들이 핵에 대해 얼마나 무비판적인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가령 <핵독립 8.15>라는 책은 "미국에 빼앗긴 핵주권을 되찾기 위해 시베리아 벌판에서, 적도의 밀림 속에서 초개와 같이 쓰러져가 사나이들"의 가슴 벌렁벌렁한 이야기이다. 저자는 말한다. "핵무기는 힘없고 군사력이 약한 국가를 강대국의 위협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다." 강대국이 경제봉쇄만 해도 우리는 핵을 끌어안고 절로 무너질 것이나, 저자는 이런 골치 아픈 얘기는 생략해 버리고 우리의 결단을 촉구한다. "강대국의 핵우산에 의존해 많은 것을 잃어가면서까지 우리의 생존을 지키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힘들더라도 스스로 힘을 키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핵보유를 위한 첫발을 내딛는 것이 나은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들의 쇼비니즘은 끊임없이 '가상적'을 만들어낸다. 동작도 기민하다. 가령 독도문제가 불거지자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김진명)을 써서 일본영토에 핵을 투하하더니, 한일어업협정이 한국측의 패배로 끝나자 장보고의 얼을 이어받아 일본과 한국이 해전을 벌인다는 내용의 <동해>가 나오고, IMF가 터지자 금융위기의 배후에 교활한 국재투기 자본의 음모가 숨어 있다는 내용의 <하늘이여 땅이여>(김진명)가 나온다. 작가는 이 소설로 우리의 국민경제를 살리려 했다. "우리가 한 뿌리를 가진 형제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에만 비로소 과거 불꽃처럼 타오르던 우리 경제는 살아날 것이다." 비슷한 내용의 <황금화살>(이성수)은 국제적으로 망신당한 우리의 자존심까지 살려준다.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일깨워주는 놀랍도록 힘찬 소설..."
"민족의 염원"으로 이순신을 부활시켜 <일본정복>(안병도)에 나서더니, 이제는 눈을 중국대륙으로까지 돌린다. <동해물과 백두산이>(김형균)의 장쾌한 상상력에 따르면 "고구려와 백제, 신라, 그리고 고려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영토가 한반도를 포함하여 중국대륙의 거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음모, 즉 식민사관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본에 의하여 날조된 역사에서 벗어나 우리 한민족의 영광된 역사를 하루 빨리 드러내"기 위해 쓴 이 소설에 따르면, 원래 중국대륙의 절반은 한민족의 식민지였다. 그 증거로 태조 왕건의 무덤은 중국 대륙 한복판에서 발견된다.
한국 근본주의의 대두
우익 문학의 이 두 갈래는 바탕에 강한 한국 근본주의적 경향을 깔고 있다. 그것은 대개 소위 아무 역사학적 근거도 없고 다분히 신비적인 이데올로기적 가공물, 즉 '민족의 원류'라는 것을 찾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 '원류'란 자기들이 만든 '민족고유의 사상'일 수도 있고, 아득한 신화시대의 민족의 뿌리일 수도 있다. 이들은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는 "민족 고유의 혼과 정체성"을 잃은 데서 온다고 보고, 모든 사회질병의 치유책으로 '민족의 원류'를 찾을 것을 주장한다. 가령 <하늘이여 땅이여>에서 작가는 소설을 통해 "고유한 민족정신을 순수하게 대변할 수 있는 신비로운 상징적 존재"를 만들어내면서, 이를 통해 "작금의 경제위기를 포함한 우리 사회의 제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작가 이인화의 작품 <초원의 향기>는 원래 국가주의적 버전의 한국 근본주의를 다룰 예정이었다. 이 작품을 위해 그는 우리 민족의 원류인 북방기마민족의 흔적을 찾아 터어키까지 여행을 했으나, 결국 중앙 아시아의 스텝에서 아무 흔적도 발견하지 못해 그 원대한 기획은 아쉽게도 싸구려 연애소설이 되어야 했다. 유감스런 일이다. 만약 이 소설이 원래의 의도대로 완성되었다면 한국 "고꾸민쇼세츠"의 아버지는 동시에 한국 근본주의의 아버지가 될 뻔했다. 참고로, 독일에서는 나찌 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들 역시 '북방기마민족'(=아리아족)의 흔적을 찾아 티벳에까지 인류학자들로 구성된 탐사대를 보냈었다.
황소처럼 커지고 싶은 개구리의 허황된 팽창욕, 일본에 본때를 보여주고 싶은 복수욕, 경제적, 외교적 실패의 보상욕을 허구적으로 충족시켜주는 이 공허한 자위(自慰). 문제는 이런 소설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장사가 통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자율적 시민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증거다. 합리적 판단능력, 성숙한 에토스, 개성적 미감을 가진 시민이라면 전쟁을 부추기며 대중의 원초적 감정에 호소하는 이 유치찬란한 상상력에 눈쌀을 찌푸리는 법이다. 이런 만화같은 책이 대중적 성공을 거든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아직 '나=민족, 국가'라는 전체주의적 선전의 잔재가 광범위하게 남아 있다는 증거다. 자의식 없는 사람들은 국가나 민족과 같은 집단과의 동일시 속에서만 제 정체성을 찾기에, 기껏 조국과 민족이 군사적 성공을 거두는 허구의 소설을 읽으며 허구적으로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엔 애국자도 많고, 민족대표도 많다. 너무 많다. 그래서 난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