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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13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제1독서 : 1열왕 5,1-15ㄷ
복 음 : 루카 4,24ㄴ-30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A와 B 두 사람이 있습니다.
차례로 동전을 던져서 두 사람 모두 앞면 또는 뒷면처럼 같은 면이 나오면
둘은 100만 원씩을 받습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면이 나오면 두 사람은 단 한 푼도 받지 못합니다.
이제 A가 먼저 동전을 던졌습니다. 앞면이 나왔습니다.
이제 B가 동전을 던질 차례입니다. 지금의 경우 앞면이면 100만 원을 받고,
뒷면이면 한 푼도 받지 못합니다. 드디어 B가 동전을 던졌습니다.
A, B 모두 “제발 앞면”을 외쳤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뒷면이 나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누가 죄책감을 더 느끼게 될까요?
거의 모두가 B가 잘못했다고 지적하고, 죄책감도 더 느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수치가 자그마치 92%입니다.
심지어 A로부터도 “앞면을 던졌어야지.”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A가 비난하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자신이 처음에 뒷면을 던졌더라면 100만 원을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도 50%의 잘못이 있음을 잊은 것입니다.
우리는 남 탓을 먼저 하곤 합니다.
그러나 남 탓하기 전에 자기 탓은 어떤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남을 판단하지 마라.’라고 강력하게 이야기하신 것이 아닐까요?
남 탓하면서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향해서도 그들은 탓을 외칩니다.
분명히 많은 기적을 행하셨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셨지만,
예수님 탓을 하고 있습니다. 고향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보여주셔도 의심하면서 또 다른 표징만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있었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향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지 못하는 자신만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에게 문제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탓을 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화가 잔뜩 나 있습니다.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면서 산 벼랑에서 떨어뜨리려고까지 합니다.
남 탓을 더 이상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의 잘못된 습관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고 하지요.
남 탓하는 것도 분명히 잘못된 습관입니다.
습관적으로 남을 먼저 탓하는 모습을 취하게 됩니다.
이런 잘못된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먼저 바라볼 수 있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영어로 ‘이해’는 ‘understand’입니다.
아래에 서 있으면 이해하기 쉽다는 뜻입니다.
아래에 서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기 마련입니다.
새로운 방법을 받아들이기 마련입니다.
근대의 문을 열었던 유럽의 르네상스는
문학, 예술, 과학, 의학에서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였습니다.
1000년 동안 이어오던 중세의 ‘규범과 틀’을 과감하게 벗어버렸습니다.
이슬람 문명이 번역한 고대의 학문과 철학을 받아들였습니다.
인간중심의 새로운 사상이 시작되었고,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는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밝혔습니다.
반면에 ‘오해’는 ‘misunderstand’입니다.
아래에 서 있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내가 왕년에 다 해 봐서 안다.’라는 말을 자주 하던 분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조선은 서양의 학문과 과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랑캐의 학문이라고 천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교인 서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교의 가르침이 유일한 통치 기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천주교를 박해하였고,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외면하였습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초지종(自初至終)’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고도 합니다.
영어는 주어 다음에 동사가 나오기 때문에, 처음 들어도 대충 이해할 수 있지만
한국어는 동사가 맨 나중에 나오기 때문에, 끝까지 들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도 끝까지 말을 듣지 않고 판단한 적이 많았습니다.
예전에,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노인대학 미사가 화요일에 있었습니다.
제대회에서는 소성당에 미사 준비를 해 놓았습니다.
저는 착각하고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제대회 자매님께 먼저 묻지도 않고 미사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짜증을 냈습니다.
자매님은 소성당에 모든 준비를 해 놓았는데 제가 짜증을 냈으니 무척 난감하였습니다.
그래도 저의 이야기를 다 들어 주었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제가 착각하였다는 것을 알았고, 자매님께 사과하였습니다.
자매님도 저의 사과를 받아 주었고, 제대회 봉사를 계속하였습니다.
삼국지의 적벽대전에서도 조조는
자초지종을 듣지 않고 충실한 부하를 전쟁터에서 죽였습니다.
적벽대전의 패배는 자초지종을 듣지 않았던 조조의 성급함에 있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에는 자초지종을 듣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왕은 아람 왕이 보낸 나아만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았습니다.
아람 왕이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 나아만을 보냈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사는 자초지종을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만을 보내 달라고 하였습니다.
나병 환자였던 나아만은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요르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담그라고 하였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았습니다.
시리아에도 요르단강 보다 좋은 강이 많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강의 수질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자초지종을 듣고 자신의 교만함을 내려놓았습니다.
엘리사의 말을 들었던 나아만은 요르단강에 몸을 일곱 번 담그었고,
그의 나병은 깨끗해졌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자초지종을 듣기보다는
자신들의 판단을 먼저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보기보다는
예수님의 가족과 친지를 먼저 보았습니다.
색안경을 쓰면 세상은 그 색안경의 색깔대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나병’이 치유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나아만은 그 길이 너무 쉽다는 이유로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은 결국 그 길로 갔기 때문에 나병이 치유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희생, 순명, 사랑, 헌신, 봉사’의 길입니다.
사람들은 편한 길을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길은 목적이 아닙니다. 길은 목적지를 가기 위한 도구입니다.
날아다닐 수 있는 사람에게는 ‘길’은 굳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아직 날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길이 필요합니다.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이정표, 지도, 내비게이션’이 필요합니다.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계명과 율법이 필요 없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계명과 율법을 초월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에게 굳이 땅 위의 길이 필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하느님께로 가는 계명, 율법, 규정이 필요 없으신가요?
아니면 사랑의 계명, 봉사의 율법이 아직은 필요하신가요?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예언자’로 자처하시면서,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척하고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루카 4,29)
이는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받으실 배척을 예고해줍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성문 밖으로 내몰리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이 사실은 이스라엘 밖, 이방인 지역들에게로
당신 구원이 퍼져나가게 될 것을 예시해줍니다.
곧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이게 될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미리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
이는 당신이 수난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직 오지 않은 까닭입니다.
때가 되면 당신께서는 수난을 스스로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실로 당신은 원하시면 붙잡히시고, 나무에 달리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덕 위 벼랑에까지 그분을 떨어뜨리려 내몰아갔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가시는 그분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수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완고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역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그러기에 우리는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고집할 때,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신의 피조물인 자신의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이야말로 불신의 씨요,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완고함과 고집으로 형제를 불신하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루카 4,24)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않는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함은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이제는 제 자신을 내려놓고 겸손함으로 존경하고, 응답으로 믿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은 당신이 자라나신 고향과도 같은 나자렛을 당신의 공생활 초기에 방문하신다.
나자렛을 위하여 방문하셨지만 나자렛 사람들의 태도는 달랐다.
그들을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24절) 하시면서
하느님 앞에 회개하라고 하신다.
나자렛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믿음으로 대하지도 않았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엘리야가 찾아간 사렙타 마을의 과부 이야기와
엘리사 시대에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을 고쳐주신 이야기(24-27절) 하시면서,
기적을 팔레스티나 밖에서 행하신 것은
바로 당신의 백성들이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사실 사렙타 마을의 그 과부(1열왕 17-18장)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2열왕 5장)이
얼마나 큰 신앙을 입증해 보여주었나를 알 수 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의 영역을 넓혀주고 확장한다.
예수님을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서만 잡아두려고 하는 것은,
즉 하느님을 나의 편의와 이익만을 위해서 이용하려고만 한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계획과는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더는 새로운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제시하시는 새로운 일들도
받아들일 마음의 문을 열 능력도 없게 된다. 그런 마음에는 하느님께서 들어가실 자리가 없다.
바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께서 선포하신 새로운 것들에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적개심을 갖게 되었고
그분을 배척하고 마침내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이 불편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선 영원한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는 어떤가?
그분은 어떤 면에서 ‘불편한’ 분이시다.
이 불편한 분의 말씀에 부응하여 우리 자신을 변모시켜 나가고자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더라도
그분에게 어떤 제약을 가하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결국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산벼랑으로 예수를 끌고 가 그곳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한다.
사람이 악하다는 것이 여기서도 드러나고 있다.
거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곧 박해로,
죽음에로까지 가게 하는 인간의 잔인성이 보이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 안에도 어떤 면에서 이러한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선지식으로, 혹은 선입견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하고 만다면,
그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산벼랑으로 밀어내어
죽이려고 하지나 않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항상 주님의 자녀로서 어떠한 판단을 갖지 않고,
이웃에게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참되고 멋진 믿음
-선입견, 편견이 없는, 겸손하고 순수한 믿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하나이다.”(시편42,2-3ㄱ)
끊임없는 기도가, 끊임없는 회개가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참된 믿음에 대한 궁극의 답입니다.
이와 더불어 참되고 멋진 믿음, 선입견과 편견이 없는, 겸손하고 순수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절대 혼자의 믿음이 아닙니다. 더불어의 믿음,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섬 같은 고립된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에 자리 잡은 활짝 열린 믿음이요
하느님 향한 순례 도상(途上)중의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의 도반들을 만나면 힘이 나고 기분이 좋습니다.
일기를 쓰듯 하루를 여는 강론입니다. 여러 일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1. “아무 걱정 마시고 지극한 인내의 믿음과 희망을 지니고 치료에 전념하시기 바랍니다.
최고의 명의(名醫)이신 주님께서 늘 함께하십니다.
저의 평생 절친(切親)이신 주님께 특별히 제가 당부해놨습니다.”
“신부님께서 특별히 주님께 당부해놨다는 말씀에 빵 터지는 웃음꽃이었습니다.
신나게 웃었습니다. 당부해주셨다는 말씀에 힘이 납니다.”
이 또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주님이 흡사 수십 년 동안
제 절친이란 생각에 아픈 자매님께 힘이 되고자 드린 덕담입니다.
2. 강론집이 지체되었다는 소식에 어느 순수한 믿음의 자매님이 답을 주었습니다.
“신부님, 혹시 제가 그 자매님 나으실 때까지 제본해 드릴까요?”
“너무 감사합니다. 자매님답습니다. 당분간 보류하고 쉴까 합니다.
하게 되면 그 자매님이 하게 될 때까지 자매님께 부탁하겠습니다.
청하는 마음이 너무 곱고 아름다워 감사합니다. 봄꽃 감사 선물로 드립니다.”
“와 꽃이 폈군요!!! 신비롭습니다.”
“매화꽃 수수하고 맑기가 자매님 영혼 같아요, 순수하고 겸손한 믿음의 영혼!”
3. “매화꽃이 아름답고 우아하네요. 우아한 자태가 울 신부님의 거룩함을 닮았습니다!”
“자매님도 파스카의 봄꽃을 닮았지요! 겸손한 사랑!”
4. “예고치 못했던 병마와 싸우려니 지칩니다. 체력이 고갈상태라 고통스럽습니다.
너무 힘들고 괴로워 다 내려놓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바로 참회와 회개했습니다.
신부님 아프지 마세요. 신부님 편찮으시면 저희 모두 무너집니다. 제사랑드립니다.”
정말 감동적인 믿음입니다.
‘신부님 아프면 저희 모두 무너진다’라는 말이 마음 깊이 새겨졌습니다.
참으로 혼자의 고립된 섬 같은 믿음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에 활짝 열려있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더불어의 믿음, 더불어의 여정, 더불어의 도반들입니다.
5. 어제 베네딕도 규칙을 공부하면서 “다함께(All together)”란 대목의 해설에 적극 공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에로 각자 개별적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 1등으로 목적지에 도착하려 노력하는 경주자가 아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말처럼 어느 사람이 다른 이의 월계관이 될 수 있도록 함께 달린다.
수도자는 다른 이들에 대한 배려 없이 더 이상 혼자 목표에 도달하려고 노력해선 안 된다.”
6. 조선시대 중기 대학자 화담 서경덕에 대한 소개도 잊지 못합니다.
정말 믿음의 삶에 “신독(愼獨)”이 얼마나 중요한지 공감했습니다.
‘서경덕은 제자들을 가르칠 때 가장 강조한 것이 여색(女色)을 멀리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모든 의리의 출발은 혼자 있을 때 행동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는데, 이를 신독(愼獨)이라했다.
여색을 탐하는 것은, 바로 신독을 못 한다는 것이고,
신독을 못 하는 사람은 다른 일도 옳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과 제1독서 열왕기 하권에서 참 멋진 믿음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다음 복음의 서두 예수님 말씀은 고향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실망을 반영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고향 사람들은 질투와 편견, 선입견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믿지도 못했습니다.
참으로 순수한 믿음의 사람들은 선입견과 편견에서, 많이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는 이런 편견과 선입견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엘리야를 시돈 지방 믿음 좋은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합니다.
또 하느님은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습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경계와 벽이 철폐됩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감동하시는 것은
인종도, 국적도, 성별도 아닌 순수하고 겸손한 믿음뿐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엘리사와 나아만의 만남이 멋집니다.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인 나아만은 그의 주군이 아끼는 큰 인물이었습니다.
나아만은 힘센 용사였으나 나병 환자였습니다. 전화위복입니다.
나병덕분에 겸손하고 순수한 믿음을 지닐 수 있었고
마침내 엘리사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 치유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 혜성처럼 등장한 이스라엘의 포로 소녀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어떻게 일하실지 모릅니다.
깨어있는 믿음의 사람에게 계시 되는 하느님의 작은 손길입니다.
소녀의 말에 귀를 기울여 응답한 여주인은 나아만에게 엘리사를 찾도록 합니다.
나아만의 등장에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 임금은 두려워 옷을 찢었지만,
믿음의 예언자, 엘리사의 대응이 참으로 신속하고 기민합니다.
엘리사에게는 편견도 선입견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참 순수하고 참된 믿음의 예언자 엘리사입니다.
엘리사의 처신이 얼마나 의연하고 당당한지요.
심부름꾼을 시켜 나아만에게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면 깨끗해질 거라 말씀하십니다.
나아만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요르단강물의 효험이 아니라 믿음의 효험, 하느님 힘의 효험이기 때문입니다.
열화같이 성을 내던 나아만은 부하들의 충고에 즉시 회개하여 교만을 내려놓고
겸손히 엘리사의 명령에 순종하여 요르단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나오니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습니다.
나아만의 겸손한 믿음에 하느님은 치유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엘리사도 믿음도 멋지고 회개한 나아만의 믿음도 멋집니다.
참으로 하느님 안에서 멋진 사람들의 만남입니다.
나아만의 하느님 믿음의 고백을 통해 그는 나병뿐만 아니라
영혼의 치유까지, 전인적 치유의 축복을 받았음을 봅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정말 탓할 것은 하느님도 아닌 내 믿음 부족뿐이요
유일하게 청할 것은 믿음 하나뿐임을 깨닫습니다.
순수하고 겸손한 믿음, 편견과 선입견이 없는 참된 믿음입니다.
나아만과 복음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의 믿음이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엘리사를 만나 회개와 더불어 치유 받은 겸손한 믿음의 나아만과는 달리
예수님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완고하기가 무지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회개는커녕 화가 잔뜩 난 이들은,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 몰은 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밀어뜨려 죽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유히, 홀연히, 미련 없이, 홀가분하게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시니 믿음의 승리, 믿음의 자유입니다.
새삼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게 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통한 순수하고 겸손한 믿음이, 편견과 선입견, 두려움이 사라진
눈 밝은 믿음이 얼마나 귀한지 깨닫습니다.
주님은 복된 사순시기,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겸손하고 순수한 믿음을 선사하십니다.
“주님, 당신의 빛과 진리를 보내시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
당신의 거룩한 산, 당신의 거처로 데려가게 하소서.”(시편43,3.). 아멘.
공생활의 시작 – 수난과 죽음의 전주곡
박상대 마르코 신부
루카 복음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예수께서는
40일간 광야 대피정을 마치신 후 갈릴래아 지역에서 첫 활동을 하셨다.
그런 다음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고향과도 같은 나자렛으로 가셨다.
오늘 복음은 이곳 회당에서의 활동(4,16-30) 그 후반부를 들려준다.
이곳 나자렛 회당에서의 설교가 사실상 루카 복음이 의도하는 예수님의 첫 활동이라 할 수 있다.
마침 안식일이었던 터라 회당 예배에 참석하신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서에 기록된 메시아 예언(이사 61,1-2)을 봉독하시고,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21절)라는
엄청난 비밀을 폭로하셨다. 이는 곧 예수께서 자기 사명을 계시하신 것이다.
고향사람들은 우선 예수의 가르침에 매료되어 칭찬과 탄복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곧 바로 “자j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23절) 하면서,
그저 그렇다는 냉랭한 태도를 취하였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유다인들은 매일 “쉐마, 이스라엘”(신명 6,4-5)을 기도하고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율법과 예언서를 봉독하고 이에 대한 설교를 들었다.
따라서 예수를 요셉의 아들로 생각하는 그들에게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비밀폭로(계시)는 잠시 놀라움의 대상은 되겠으나, 결코 새로운 것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예수께서 기원전 900년경 엘리야가 이방인 과부를 돌보고(1열왕 17,7-16),
그의 제자 엘리사가 이방인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준 일(2열왕 5,1-14)을 들먹거려
배척의 빌미를 제공 하신다.(25-27절)
이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오른 나자렛의 知人들이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내 벼랑으로 떠밀어 죽이려 들자,
예수님은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 ‘자신의 길’을 가셨다.
오늘은 그냥 피해 가지만, ‘또 다른 벼랑’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때까지는 아무도 예수님의 길을 앞당기거나 막을 수 없다.
오늘 복음은 사순 제3주간 월요일 뿐 아니라,
앞서간 16-23절을 합쳐서 연중 제22주간 월요일에 봉독 된다.
같은 복음이라 할지라도 시기에 따라 그 뉘앙스가 다르다.
예수님의 공생활을 두루 묵상하는 연중시기의 분위기와
수난과 죽음을 목전에 둔 사순시기의 분위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연중시기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개시와 사명의 선포 차원으로 이해될 수 있고,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24절)는 말씀도
그저 전통적인 속담의 인용으로 들릴 뿐, 막 개시된 공생활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순시기의 오늘 복음은 상당 부분, 공생활 시작부터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는 차원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죽임을 당할 때면 늘 동네 밖으로 끌려 나갔다.
그것은 ‘율법을 어긴 죄인들을 동네나 진지 밖으로 끌어내 돌로 쳐 죽여라.’는
율법규정(민수 15,36; 신명 17,5)에 의한 것이다.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처럼 회개의 설교를 선포하였다면,
예수 또한 요한과 비슷한 예언자로 취급받았을 것이다.
예수로 말미암아 메시아 예언(이사 61,1-2)과
‘하느님 은총의 해’의 선포가 성취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인정한다면,
예수는 자동적으로 하느님을 모독한 자로 처벌받을 것이다.
예수께서 예고된 메시아라면 유다백성을 위한 메시아여야 하는데,
이방인 과부와 나아만을 들먹거리는 태도는 마땅히 유다인들의 분노를 사고
그들의 배척을 초래하는 행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께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타협도 없으며, 아버지의 뜻을 이 따에 세우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이렇게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오늘 복음이
사순시기의 테두리 안에서는 수난과 죽음의 전주곡이 되고 마는 것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