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024.4.11.목요일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1030-1079) 기념일
사도5,27-33 요한3,31-36
어떻게 살 것인가? -예닮의 여정-
“주님을 믿어라, 주님을 사랑하라”
“내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그 찬미가 항상 있으리라.”(시편34,1)
어떻게 살 것인가? 참 강론때 자주 인용했던 물음입니다. 답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입니다. 사람은 절대 혼자서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예수님은 답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따라 닮아갈 때 비로소 참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고백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물음만 있고 답이 없어 도저히 사람이 될 길이 난망합니다.
파스카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유일한 통로입니다. 파스카 예수님이야말로 우리 삶의 목표와 방향,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36년동안 성 요셉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가장 많이 바라봤던 게 아마 수도원 배경의 하늘과 불암산일 것입니다. ‘하늘과 산’은 제가 참 많이 인용했던 자작 애송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하늘과 산은 파스카 예수님과 우리 각자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날로 예수님과 깊어지는 우정 관계를 상징합니다. 죽을때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중의 우리들입니다. 과연 날로 계속 예수님과 깊어지는 우정관계인지 자문하게 됩니다. 오늘 요한복음 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에 관한 묵상내용이 우리의 신원 이해에 큰 도움이 됩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바로 위에서 오시는 분이, 하늘에서 오시는 분이, 모든 것 위에 계시는 분이 우리의 평생 주님이자 스승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반면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한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 이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과 깊어가는 우정의 일치의 여정이 날로 위에서 오시는 하늘이신 예수님을 닮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날마다 참여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사람이라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평생을 살아도 욕망따라 살다보면 자기를 잃고 괴물도 야수도 악마도 될 수 있고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폐인도 될 수 있습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잘못 미치면 폐인이다” 제 지론이기도 합니다. 역시 오늘 다산 어른의 말씀입니다.
“삶에서 무엇을 추구했느냐에 따라 죽음의 무게도 달라진다. 태산과 같은 죽음이 있고, 깃털과 같은 죽음도 있다.”
하느님을 추구했느냐 세상 것들을 추구했느냐의 차이일 것입니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재물을 위해 죽고 열사(烈士)는 명예를 위해 죽는다”
어제 읽는 어느 초대 교부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거룩한 몸은 영적이며 빛이라, 당연히 위로 향합니다. 세상의 몸은 무겁고, 언제나 아래로 처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영적인 것들을 붙든다면, 그것들은 여러분을 위로 데려갈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 것들을 붙든다면, 그것들은 여러 분을 아래로 데려갈 것입니다.”
그래서 자나깨나 위에서 오시는, 하늘에서 오시는 파스카 예수님과의 우정을 깊이하자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오늘 복음 말씀도 고무적이요 힘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위에서 오시는, 하늘에서 오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파스카의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사랑하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선물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땅위에 살지만 예수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우정관계로 이미 땅위에서 하늘나라의 삶을 사는 이들이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사도들이요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입니다.
보십시오. 예루살렘 최고회의에서 대사제가 신문할 때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주님을 증언하는 사도들은 땅에서 살지만 천상에 사는 신원임을 드러냅니다. 땅위에서 이미 천상의 하늘나라를 체험하며 살기에 사도들의 샘솟는 용기에 확신에 찬 힘찬 증언입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이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사도들의 핵심 선포내용이요 짧은 요약의 설교입니다. 예수님과 얼마나 깊은 일치의 친교관계에 있는지 깨닫습니다. 이런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에서 가능한 자발적 사랑의 순교입니다. 사랑의 순교는 사랑의 성체와의 결합입니다. 바로 오늘 기념하는 폴란드의 수호성인인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가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성인은 1030년에 태어나 1079년에 순교하셨으니 49년 생애를 사셨습니다. 저는 성인들을 기리는 미사를 봉헌할 때 마다 반드시 성인들의 생몰연대를 들여다 보며 제 나이와 비교해 보며 분발의 계기로 삼곤합니다. 스타니슬라오는 ‘국가와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후에 주교가 된 스타니슬라오는 잘못됨이 있으면 아무리 권세가 높아도 두려움없이 책망하고, 신자들이 종교적 생활에 열심토록 했으며, 먼저 솔선수범해 좋은 모범을 보여줬습니다.
성인은 열심히 기도하며 재를 지키고 엄한 고행을 행하고 자선사업에 힘쓰며 성스러운 생활을 보냈으므로 사람들은 진심으로 그의 덕에 감복해 감히 그의 말에 거역하는 이가 없었다 합니다. 주교는 뛰어난 언변으로 왕과 농민들의 죄악, 특히 역사상 폭군으로 유명한 블레슬라우 2세 왕의 부도덕한 행동과 불의한 전쟁을 꾸짖었고, 왕은 스스로 사과하고 참회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다시 과거와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합니다.
스타니슬라오 주교는 반역죄로 사형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공개적인 반대를 계속했고 마침내 왕을 파문합니다. 이에 1079년 5월8일 스타니슬라오 주교가 성 미카엘 소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을 때 왕은 부하 병사들과 잠입하여 창검을 휘두르며 주교를 직접 살해 합니다. 백성들은 주교의 용감한 순교의 태도를 보고 성인으로 공경하고 왕을 부당한 자로 낙인찍어 폐위시키고 국외로 추방합니다.
헝가리로 도망갔던 블레슬라우 2세는 아마도 헝가리에 있는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참회하며 남은 일생을 보냈던 듯 합니다. 1253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로부터 시성된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는 폴란드 국민의 상징이자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순교하기 까지 예언직에 충실했던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역시 예수님의 훌륭한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과의 깊은 친교로 땅에서 살았지만 예수님처럼 하늘에 속한 하늘나라를 사셨던 분임이 분명합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닮의 여정중, 날로 깊어가는 예수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지상천국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 하시고,
넋이 꺾인 이들을 구원하신다.”(시편34,19). 아멘.
첫댓글 🙏
감사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