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과 식민주의 : 외래문화가 음식민속에 끼친 영향
주영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 문제의 출발
19세기말부터 현재에 이르는 100여 년의 시간 속에서 한국의 전통문화는 갖은 역사적 고비를 넘기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즉 대한제국 시기에 자주적 근대성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실현시키지 못한 채, 결국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주지하듯이 일제는 전통문화에 대한 말살정책을 펼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전통문화를 더욱 강화시키는 왜곡정책을 펼쳤다. 특히 1920~30년대를 전후하여 한반도에서는 일본을 관통한 서양의 근대적 삶이 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자연스럽게 이식되어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형성하는 데 하나의 조류가 되었다. 이것은 결국 해방 이후 미국문화의 절대적 영향하에 놓이면서도 우리가 이해한 서양이 서양 그 자체가 아니라, 일본적 시각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많은 시간을 요구하게 만들었다. 1960년대부터 한국의 많은 지식인이 미국적 사고방식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한국사회 내에는 미국적 근대화 논리와 이에 대응하는 전통주의-여기에는 조선후기에 확립된 성리학적 이념도 존재한다-, 그리고 식민지 시대와 1960년대에 다시 형성된 일본적인 생활방식이 혼합되어 나타난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의 전통문화와 외래문화를 논의할 때 가져야 할 기본적인 역사인식이다. 따라서 현재적 시점에서 한국인의 삶 속에서 전개되는 전통문화와 외래문화의 양상을 이해할 때 우리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개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식민주의(colonialism)와 제국주의(imperialism)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즉 어떤 집단들이 다른 어떤 집단들에 의해 영토상으로나 행위상으로 통치를 받는 지배의 형태를 식민주의 혹은 제국주의라 할 수 있다(Horvath 1972:46-47). 그 중 식민주의는 식민권력으로부터 식민지로 상당수의 정주자가 이동한 집단간의 지배형태이며, 제국주의는 제국 본토로부터 식민지로 정주자가 거의 이동하지 않은 집단간의 지배형태를 가리킨다. 한국의 20세기는 구미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복사한 일제에 의해 근대화되는 기형적인 사건에서 출발한다. 일본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는 한반도에서 스스로 유지하고 있던 기존의 사회․경제 체계를 해체하고 일본에 종속시키기 위해 자행된 정치적․군사적 무력행위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반도에서 일어난 신식문화(新式文化)는 겉으로는 마치 일본이 달성한 근대화의 열매를 함께 나누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일본인의 근대성과 한국의 근대화라는 서로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즉 “구식=전통=후진적”이라는 인식과 “신식=근대=선진적”이라는 인식이 묘한 대비를 이루며 식민지 국민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패배주의를 조장했다. 이러한 경향은 해방이후 미국문화와 경제개발 논리 속에서도 여전히 지속되었다. 그래서 한국적인 음식은 서구적인 음식에 비해 낙후되고, 비위생적이며, 건강에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적어도 1970년대 말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1970년대 경제발전의 결과, 1980년대부터 먹을거리를 포식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적인 음식에 대한 인식은 점차 변화를 가져온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전통=좋음”, “우리 것=민족”이라는 인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른바 음식을 통한 민족주의의 실현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특히 ‘김치와 기무치의 싸움’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는 마치 한일 양국의 심리적인 갈등으로까지 이해되어지는 듯하다. 문민정부가 강조한 “세계화” 구호 역시 전통음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음식에 대한 전통주의와 무공해, 그리고 원래의 맛을 김치․된장․식혜와 같은 전통음식에서 찾으려 노력했다. 곧 “우리 것이 좋은 것이야”라는 말이 한국인의 음식생활에도 결정적인 가치기준으로 작용을 했다. 이로 인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이른바 전통음식에 대한 민족주의는 경제적 이익과 함께 온전한 건강을 가져올 수 있는 ‘신기루’로 비춰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1999년 11월 1일자 《조선일보》 14면에는 〈김치의 ‘힘’〉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난 정말로 시금치를 먹은 뒤의 뽀빠이 같았다”로 시작되는 이 기사는 1000여 년 동안 한국인의 밥상을 지켜온 김치가 고부가가치를 낳는 성장산업으로 돌변하여 세계로 뻗어가고 있다는 점을 경제부 기자의 시각으로 강조하고 있다(鮮于鉦 1999). 김치의 수출 증대, 김치냉장고의 돌풍, 그리고 김치햄버거의 발명에 이르기까지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인이 김치에 공을 들인 결과는 이제 ‘한국인의 김치’를 ‘세계인의 김치’로 부각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자랑스러움’은 다른 한편에서 또 다른 반작용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본 젊은이들의 김치열풍 이면에는 “김치=일본의 것”이라는 인식을 넓히고 있다는 생각이나, 일본인들이 ‘김치’를 ‘기무치’로 만들어 빼앗아 갈지도 모른다는 긴장감까지 조장한다. 한 마디로 20세기 한국인의 전통음식에 대한 관념은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문은 사람들의 일상적인 소비행위의 대상인 음식과 식민지 사회에서 문화적으로 나타나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상호 결부시켜 민속문화의 전통과 외래문화와의 관계를 살피려는 의도에서 마련되었다. 따라서 본문은 가능한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전통음식과 외래문화와의 접촉과정을 살펴보고, 그 속에서 한국인이 음식소비에 대해 지녀온 인식의 변화과정을 조망하려 한다. 하지만 짧은 글에서 한국음식 속에 담긴 식민주의의 속성을 모두 드러내는 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왜간장․희석식 소주․화학조미료․패스트푸드․퓨전푸드 등의 예를 통해서 논의를 전개하려 한다.
2. 왜간장과 식민주의
비록 1898년 인천에 인천정미소가 설립되어 4 마력의 증기기관을 설치한 것이 우리 나라 식품공장의 효시를 이룬다(金鄕 1982)고는 하지만, 한반도에서 본격적인 소비재 가공식품을 생산하기 시작한 역사는 일본인에 의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식민주의적 양상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 일본식 간장공장이다. 1904년을 전후한 시기에 서울에는 5,000명 정도의 일본인이 거주했는데 그들을 위한 간장과 된장 제조업체가 각각 5곳과 4곳이 있었다(李漢昌 1999:83). 서울 이외의 지역에도 일본인의 간장공장은 인천(3곳)․부산(4곳)․진남포(2곳) 등에도 존재했다. 일제시대에 들어와서 일본식 간장공장은 전국 각지에 들어서는데, 그 목적은 대체로 한반도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대체로 부산․마산․인천 등지의 일본인 집중 거주지에 간장공장이 들어섰다. 1924년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의하면 전국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간장공장은 102곳이나 되었다. 그러나 한국인이 경영하는 간장공장은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것의 소비대상이 거의 일본인이라는 점에 있었다. 사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明治) 유신 이전까지 간장과 된장의 생산이 가정 내에서 이루어졌다. 메이지유신 때 나온 “서양을 배우자!”라는 슬로건으로 인해 일본식 간장과 된장은 개혁의 대상이었다. 즉 오래된 것이기 때문에 분명히 몸에 해로울 것이라고 믿음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1878년 내무성 위생국에서는 일본된장인 ‘미소’가 단백질을 많이 함유하고 있는 우수한 식품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 이러한 생각은 사라지기 시작했다(石川寬子 等 1989:129). 특히 1873년 ‘이에다(野田)’라는 사람이 빈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일본간장을 출품하면서 간장제조는 새로운 식품산업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1882년 이후 간장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활발해져서 미생물실에서 온도조절을 통해 황국(黃麴) 미생물을 배양하게 되었고, 석탄으로 불을 때서 온도를 높여 발효시간을 단축하는 방법도 동시에 고안되었다. 이러한 간장공장이 1900년대 초반에 일본인을 위해 한반도의 각 곳에 문을 열었던 것이다. 초창기 일본인이 경영했던 간장공장에는 임금이 싸다는 이유로 주로 한국인이 노동자로 일을 했다. 그러나 일본식 간장은 한국인의 주된 소비물품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당기간동안 한국인이 경영하는 간장공장은 출현하지 않다가, 1929년에 비로소 최초의 한국인 경영의 간장공장이 출현했다(李漢昌 1999:99). 그러나 종업원이 3명뿐인 영세한 규모의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울러 구체적으로 그 공장이 향후 어떤 변화를 거쳤는지에 대한 자료가 아직 발견되지 않아 그것이 한국인을 위한 간장공장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러한 영세한 공장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간장공장은 일본인이 여전히 운영했으며, 그것의 소비 역시 일본인 중심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한국인에 의한 간장공장의 운영과 공장제 간장의 소비는 해방이후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장은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것을 한국인이 인수하여 운영한 것이었다. 가령 오늘날 샘표식품공업주식회사의 전신은 1916년 일본인 우에야마(植山仲次郞)가 설립한 미쓰야(三矢)초양조주식회사(酢釀造株式會社)였다. 해방이후 한국인 종업원 대표 이기동에 의해 경영되다가, 1946년에 샘표간장의 설립자인 박규회가 인수했다. 마산의 몽고식품 역시 원래 야마다(山田) 장유양조장(醬油釀造場)을 해방 후 김홍구가 인수하여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해방이후 일본식 간장공장은 여전히 성업을 누리지 못했다. 당시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집에서 직접 담가서 먹는 ‘조선간장’ 혹은 ‘재래식 간장’에 더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른바 공장에서 생산되는 ‘왜간장’은 군대의 부식용으로 군납이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일반인들의 소비도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공장제 간장을 ‘왜간장’이라 부르고 재래식 집간장을 ‘조선간장’이란 부르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 도시인구의 급증은 왜간장의 소비를 더욱 부추겼다. 특히 1969년에는 정부에서 “장독대를 없애야 문화시민이 된다”는 문화영화를 만들어 서울과 부산의 극장에서 상영하기도 하여 왜간장 소비를 더욱 부채질했다. 결국 집집마다 특색 있는 간장 맛 때문에 집집마다 음식 맛이 조금씩 달랐던 한국의 맛이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단일화되어 가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국 음식에서 간장은 국․찌개․탕은 물론이고 나물․조림․구이에 두루 쓰이는 한국적 맛을 내는 조미료이다. 그런데 이것을 공장에서 일률적으로 생산하여 똑같은 맛을 내는 아미노산 간장을 생산해 내면서 한국적인 맛의 기본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특히 왜간장이란 불리는 아미노산 간장은 한국의 짜고 담백한 간장 맛을 무너트렸다. 이른바 ‘왜간장’은 단맛이 강하기 때문에 국이나 탕의 간을 맞추는 데는 절대 쓰이지 않았다. 오로지 음식을 간장에 찍어 먹을 때 맛을 더 내기 위해 쓰일 뿐이었다. 그러나 왜간장은 그 사용범위를 서서히 넓혀갔고 오늘날 조선간장보다 왜간장의 사용이 더 많아졌다. 일본이 히로시마 원자폭탄에 무릎을 꿇으면서 왜간장 공자의 사장이었던 일본인들은 모두 한반도를 떠났다. 그러나 그 공장들을 인수받은 한국인들은 계속해서 일본인들이 만들어놓은 아미노산 간장 생산라인을 이용해서 제품을 만들었다. 이것이 후진적인 조선간장을 없애고 식품산업의 근대화로 가는 유일한 길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1967년 12월 정부에 의해 공포된 ‘식품공전’에는 조선간장 제법이 오르지 못하고 왜간장 제조법만이 올랐다. 1993년 이 법이 개정되어 현재 조선간장이 왜간장과 함께 포함되어 있지만, 이 법이 개정되기 전까지 우리는 공식적으로 조선간장을 공장에서 생산할 수 없었다. 만약 당시 재래식 방법으로 조선간장을 생산하여 그것을 포장까지 해서 사람들에게 팔았다면 십중팔구는 식품위생법에 저촉되었을 것이다.
3. 희석식 소주와 제국주의
왜간장이 일본의 식민주의와 관련이 있다면, 희석식 소주를 비롯한 술의 공장제 생산은 일본의 제국주의와 관련을 맺는다. 일제는 조선왕조가 간간이 시행했던 금주령과 같은 술 통제 정책을 뛰어넘어 세금을 걷기 위한 방법으로 술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원래 주세법은 1909년 대한제국에 의해 처음으로 제정되었다. 이 때 제정된 주세법은 실제로 엄격하게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우리 나라 최초로 술의 생산에 대한 국가적인 통제였다. 본격적인 주세법의 발효는 1916년 총독부 당국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기존의 주세법을 고쳐서 ‘주세령(酒稅令)’으로 발효된 당시의 시행령은 집안에서 개인적으로 이루어졌던 술 제조까지 면허를 얻도록 했다. 그후 주세령은 1919, 1920, 1922, 1927, 1934년의 5차에 걸쳐 개정되었고, 주세에 의한 착취가 점점 엄밀해져서 개인적인 용도로 만드는 술의 면허마저 극도로 제한을 받게 되었다. 결국 1932년 개인적인 용도로 술을 만들겠다고 면허를 신청하여 허가를 받은 사람이 단 1명밖에 없었고, 그것마저 1934년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일제 경찰이 군화를 신은 채 집집을 뒤져 제사에 올리려 담가둔 술을 마구 짓밟았다는 이야기가 이때부터 등장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주세법의 시행은 상업적인 술의 생산과 판매를 활성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했고 이것이 결국 총독부의 수입을 증가시키는 원천이 되었다. 그러나 상업적인 목적이 개입되면서 술의 질을 떨어트렸다. 제조원가가 많이 들고 판매가격도 당연히 비싼 재래식 소주는 점차 사라지고 재래식 소주에 에틸 알코올을 섞어 만드는 개량식 소주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19세기말 일본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던 이 알코올 소주는 이미 1897년에 인천과 원산을 중심으로 수입되고 있었다. 주정 형태로 일본에서 수입된 알코올 소주는 당시 재래식 소주에 섞어서 술의 양을 늘리고 판매가격을 내리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실제로 조선시대부터 서울에서 재래식 소주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유명했던 공덕동 소주공장에서 생산한 소주에는 막대한 양의 쌀이 들어갔다. 즉 소주의 밑술을 만드는 데 들어간 재료의 양이 쌀 9말(162리터에 상당)과 물 144리터였는데 최종 생산되어 나온 소주의 양은 129.6리터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1897년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주정의 양이 천 석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1905년에 소주 1.8리터 한 병에 6원 이상이었던 것이 1908년에는 4원 50전으로 내렸다(李盛雨 1984:262). 주정 덕택에 소주의 값이 내리고 소주는 예전에 비해 더욱 대중화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소주는 여전히 쌀을 주원료로 하여 주정을 첨가한 것이었다. 당밀에서 수분이 없는 주정을 추출해낸 후 여기에 물을 넣고 희석시킨 후 설탕․포도당․구연산 등을 첨가한 본격적인 ‘희석식 소주’가 이 땅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일제가 물러가고서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1965년 박정희 정권은 보릿고개를 해결하기 위해 한편에서는 벼 품종개량을 시도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혼식장려와 같은 쌀 소비 억제책을 시행했다. 그 때 소주뿐만 아니라 막걸리와 약주를 포함한 모든 술도 쌀로 빚지 못하도록 하는 ‘양곡관리법’이 시행되었다. 이로써 미곡으로 술을 제조할 수 없게 되었고 막걸리는 밀로, 소주는 고구마를 원료로 하여 만들게 되었다. 사실 고구마나 감자를 이용하여 알코올을 추출하는 방법은 이미 19세기말에 일본에서 개발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당밀로 럼을 만드는 기술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탕무가 일본이나 한반도에서 쉽게 재배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구마와 감자를 이용하는 방법이 일제시대부터 연구되기 시작했다. 결국 1935년 부산의 대선발효(大鮮醱酵)라는 공장에서 제주도에 알코올 원료용 고구마를 재배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이때는 일제가 군국주의 체제로 편성된 때였고 쌀을 대체할 식량으로 고구마와 감자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미 주목을 받고 있었던 시절이었다(山本紀夫․吉田集而 1995:313-321). 수분이 함유되지 않은 에틸 알코올은 전시에 연료로도 쓰일 수 있었기 때문에 일제는 더욱 그것의 대량생산화에 연구를 매진했다. 결국 1938년 조선총독부의 주선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제주도에 고구마를 원료로 하는 무수(無水) 알코올 공장을 설립했다. 그러나 이 무수알코올을 주정으로 하여 만든 희석식 소주는 적어도 1965년 양곡관리법이 발효되기 전까지는 일반 소비자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국가적인 통제가 본격화되면서 1965년 이후 한국에는 미곡을 발효시킨 후 이를 증류하여 만든 재래식 소주가 일단은 사라졌고 희석식 소주가 그 자리를 대신하여 소주의 대명사로 남았다. 그런데 일본의 제국주의와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탄생한 희석식 소주가 최근에 일본에서 큰 인기를 누린다. 이것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울러 1999년에는 유럽에서 수입하는 양주의 주세와 희석식 소주의 주세가 너무 차이를 보여 그것을 조정해보려는 정부의 노력으로 인해 이른바 시중에서 ‘소주논쟁’까지 야기했다. 즉 희석식 소주의 세율을 올리려는 정부의 입장에 대해 소주업체와 일부 국민들은 “국민의 술인 소주의 값을 어떻게 그렇게 비싸게 할 수 있는가”라며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그다지 좋은 술이 아닌 희석식 소주를 ‘국민의 술’이라고 운운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1999년 여름 ‘미(米)소주’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희석식 소주가 시장에 나와 마치 이 소주가 쌀로 빚은 증류식 소주인 것처럼 선전을 하기도 했다. 즉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탈이 만들어낸 희석식 소주는 경제발전의 논리 속에서 새롭게 등장하여 탁주와 청주를 아우르고 국민의 술로 탈바꿈했다. 여기에다 1980년대 이후 양곡관리법에 의한 미곡주 제조금지법이 해제되면서 민속주를 중심으로 쌀로 빚은 소주가 다시 등장하면서 이른바 전통주의를 빙자한 미소주까지 등장하는데 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음식의 생산과 소비에서 여전히 청산되지 못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잔재라 할 수 있다.
4. 화학조미료와 근대화
왜간장과 희석식 소주가 각기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라는 틀 속에 놓여 있다면, 화학조미료는 근대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한국의 현대사를 풍미했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 천연양념과 ‘손 맛’에만 오로지 기대어 한국음식의 맛을 내던 한국인에게 ‘화학조미료’의 출현은 일종의 근대적 충격이었다. 화학조미료는 원래 1908년 일본에서 개발된 것이다. 일본인들의 전통적인 양념은 다시마․멸치․가다랭이 등을 우려낸 국물인 ‘다시’라는 것이었다. ‘다시’의 감칠맛 성분이 ‘글루타민산’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것을 화학적으로 제조할 수 있는 방법이 연구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08년 이케다 키쿠나에(池田菊苗)가 화학적인 방법으로 ‘글루타민산’을 발명하였고, 그것은 곧장 ‘아지노모토(味の素)’라는 이름으로 상품화되었다. 화학조미료의 첫 상품이 ‘맛의 바탕’이라는 뜻을 지닌 ‘아지노모토(味の素)’라는 이름으로 지어진 것은 그만큼 ‘글루타민산’이 음식을 만들 때 온갖 고생을 하여 양념을 만들지 않아도 강력하게 맛을 낸다는 뜻을 담고 있다. 1940년대에 들어와서 이 ‘아지노모토(味の素)’는 일본인의 부엌에서도 맹위를 떨쳤다. 특히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일본정부는 부족한 식품재료 때문에 가능한 싼값으로 기본 맛을 내는 화학조미료의 제조에 큰 관심을 두었고, 이 때 개량된 싼값의 ‘아지노모토(味の素)’는 일반 서민들의 식탁에서 신(神)과 같은 존재로 천연양념들을 몰아냈다. 이것이 한국에 도입된 때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식품재료 부족에 허덕이던 1958년이었다. 오늘날 대상그룹으로 이름을 바꾼 옛 미원그룹의 모체인 ‘미왕산업사’에서는 일본의 ‘아지노모토(味の素)’ 주식회사에서 기술을 배워와 ‘아지노모토(味の素)’의 한국식 이름인 ‘미원(味元)’이란 상표를 붙어 화학조미료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화학조미료 ‘미원’이 처음 보급된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사람들은 이것이 맛을 내는 조미료라고 여기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특수계층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사치품’으로 여겼다. 심지어 ‘미원’이 뱀을 말려 그것을 가루 내어 만든 ‘뱀가루’라는 소문도 퍼졌다. 또한 사용을 해 본 몇 안 되는 사람들도 그 효능이 막강함을 알고 ‘100g’을 아끼고 아껴서 일년이 넘게 썼다. ‘미원’은 당시 사람들에게 값이 비싼 귀한 것이었다. 또 ‘미원’이 당시에는 귀했던 캔이나 병에 담겨 판매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매우 비싼 조미료였다. 이 땅에 ‘미원’이라는 화학조미료가 등장한지 10년이 지난 후 ‘미원’은 서서히 한국의 부엌에 자신의 자리를 확실하게 확보해 갔다. ‘고가전략’을 펼쳤던 ‘서울미원’은 그것이 시장 상황에 맞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 ‘저가전략’으로 마케팅 방침을 바꾸었다. 즉 서울미원에서는 소비자들이 ‘미원’을 생활 필수품으로 여기게끔 광고전략을 수립했다. 예를 들어 “미원은 사치품이 아니요, 기호품도 아닙니다, 생활필수품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값싼 것이 미원입니다. 달걀 한 줄 값으로 온 가족이 한 달 동안 맛있는 식사를 즐길 수 있습니다”, “미원은 멸치 국물을 내는 수고를 덜어 줍니다”와 같은 광고를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소비자의 시선을 받기 시작했다. 또 광고 전단에 ‘미원’ 3g을 함께 포장하여 소비자들에게 돌렸다. 한 번이라도 ‘미원’을 먹어 보면 그 맛에 소비자들이 감동할 것이라는 판촉전략이 그 속에 담겨 있었다. 이것은 매우 효과적인 광고․판촉 전략이었다. 사람들은 ‘서울미원’ 측의 주장대로 ‘미원’을 된장찌개에 넣었더니 그 맛이 보통이 아니었다. 김치를 담글 때도 갖은 양념을 하지 않고 단지 고춧가루와 마늘 즙에 미원을 넣어서 양념을 만들었다. 그런데 온갖 양념을 넣었을 때보다 그 맛은 더 좋았다. 양념을 제대로 쓴다는 것은 그만큼 양념 구입에 돈을 많이 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미원’ 몇 그램이면 그 돈과 수고로움을 들어주니 미원이 너무나 고마웠다. 오늘날도 향토음식을 조사한다고 농촌에 가서 할머니들을 붙잡고 그 댁의 음식 만드는 법을 물으면 언제나 ‘미원’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미원은 한동안 사람들에게 마치 가장 최고의 맛을 내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같은 것이었다. 제일제당에서 ‘미원’에 대응하기 위해 ‘미풍(味豊)’이라는 화학조미료를 상품으로 낸 적이 있었다. 그들은 막강한 삼성그룹의 후원에 힘입어 판매점포들에게 각종 특혜를 주면서 ‘미원’의 아성을 무너뜨리려 노력했다. 어느 정도 성과를 낸 것은 사실이었지만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하게 박혀 있던 ‘화학조미료는 미원이다’라는 생각까지는 이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미풍을 사러 가서도 미원 달라고 했고, 가게 주인은 미풍을 팔면서도 미원이라 불렀다. 적어도 1960년대부터 25년 동안 한국음식에서 맛을 내는 요리의 기술은 ‘미원’이라는 화학조미료에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대는 바로 ‘미원의 시대, 화학조미료의 시대’였다. 사실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적인 양념과 손맛이라는 것은 후진적이며 비위생적인 것이고, 화학조미료가 위생적인 근대화의 표징으로 여겨졌다. 편리성과 신속성이라는 근대화의 상징은 화학조미료에서 그대로 실현되었다. 하지만 경제형편이 좋아진 1980년대에 들어와서 ‘화학’이란 근대화의 상징은 인공적이며 건강에 해롭다는 자연주의의 도전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실제 입맛은 여전히 화학조미료의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5. 패스트푸드, 퓨전푸드, 그리고 세계화
한국인에게 1980~90년대는 사회적으로는 억압과 해방이 동시에 존재했던 시대였듯이, 관념적으로는 전통주의․민족주의․세계화로 점철되는 파장 속에서 살아온 시대였다. 다른 한편에서 이 시대는 한국인의 음식행위에서 패스트푸드라는 미국적 식사형태가 자리잡는 때이기도 하다. ‘세트’라는 형식으로 패스트한 미국의 음식점이 한국에 진출한 것은 생각보다 늦다. KFC는 1984년에야 처음으로 서울 종로에 제1호 점을 개점했고, 맥도날드는 두산그룹과 손을 잡고 1988년에 서울 압구정동에 제1호 점을 개점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들 대표적인 미국의 패스트푸드 점포는 전국 어디에서나 쉽게 찾을 수 있는 식당으로 변모했다. 어린이에서 젊은이까지 그 고객층은 날로 증폭되어간다. 패스트푸드는 말 그대로 빠른 음식이다. 20세기의 인류가 살아온 역사는 자동차․비행기․전화․컴퓨터․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속도의 시대라 할 수 있다.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대중 자본주의는 모든 사람들을 속도 속에 빨려 들어가게 한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일을 멈추었던 시대는 이미 구시대로 치부되어진다. 패스트푸드는 이러한 속도 시대에 걸맞은 음식으로 순식간에 전세계를 점령해 버렸다. 시간이 곧 돈이라는 논리는 패스트푸드에 의지할 수밖에 없도록 사람들의 입맛을 조장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단맛을 주로 한 이들 패스트푸드는 ‘외제’ 혹은 ‘미국제’라는 의미까지 담고 있기 때문에 더욱 강력하게 제3세계를 점령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서양의 패스트푸드인 햄버거․피자․스파게티 등을 우리의 식사 구조 속에 아무런 저항 없이 수용했을까?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 중에서도 이들 패스트푸드에 흠뻑 빠져 있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과연 한국의 전통음식은 이들 패스트푸드에 비해 한없이 낙후된 것일까? 사실 이러한 현상에는 음식 자체가 지닌 맛만큼 음식을 만들어낸 나라들에 대한 우리의 선호가 숨어 있다. 이른바 선진국의 음식을 먹는다는 사실은 그만큼 그들에게 익숙함을 뜻한다. 내가 이들 음식을 먹는다는 사실은 적어도 구미 선진국의 문화나 사람들과 어떤 형태로든 인연을 맺은 경험을 드러낸다. 특히 1980년대 초반까지 우리 나라에서 해외여행의 경험을 한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곧장 개인의 사회적 지위로 연결되었다. 음식을 통한 사회적 지위는 다른 한편에서 경제적 입지와도 관련이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생일잔치에서 백설기와 함께 케이크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케이크가 지닌 희소가치가 경제적 가치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매우 깨끗한 시설과 위생적인 외견, 그리고 언제나 친절한 서비스로 무장한 미국의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먹는다는 것은 곧장 안락함을 제공해 주었다. 세트화된 햄버거의 맛도 일품이지만, 그 분위기가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든다. 그러한 분위기에 익숙한 세대들이 핵심적인 구매층으로 바뀐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미국의 패스트푸드점이 성황을 이루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한편 20세기 마지막 해인 1999년 한국사회에서는 ‘퓨전푸드(fusion food)’라는 말이 일대 유행을 하기 시작했다. 이어령 교수는 이러한 풍조에 편성하여 “김치가 퓨전푸드의 원조”라고까지 주장한 적도 있다. 사실 ‘퓨전(fusion)'이란 말은 몰가치적인 개념이며, 동시에 그 속에 담겨 있는 강력한 주체를 숨기고 있는 용어이다. ‘융합(融合)’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이 말을, 가치 기준이 있는 용어로 옮기면 ‘동화(同化;assimilation)'이다. ‘동화’에는 숨겨진 주체세력이 존재한다. 중국의 한족은 스스로 “주변민족의 문화를 ‘융합’하여 오늘날의 중국 문화가 성립되었다”고 강조하지만, 주변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동화’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요사이 유행처럼 번지는 퓨전푸드의 배경에는 미국의 자신감과 미국 중심적인 사고 방식이 자리잡고 있다. 문화적 중심을 유럽에 두었던 미국이 1980년대 이후 스스로에게 두면서 흑인․남미인의 것은 물론이고 이민세대로 형성된 유럽남부인과 아시아인의 것까지 자기화 하려는 의지에서 ‘퓨전푸드’가 등장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이 펼치는 마케팅 전략도 숨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즉 1980년대부터 미국사회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T.G.I. FRIDAY나 베니건스, 시즐러 같은 레스토랑에서는 기왕의 패스트푸드를 새로운 개념으로 변형시키거나 멕시코의 타코나 이탈리아의 피자를 전통적인 방법이 아닌 새로운 방법으로 변형시킨 요리를 내놓았다. 당연히 이민세대 혹은 지구촌적인 삶을 살아가려는 미국의 젊은 세대에게 이러한 음식은 새로운 상품으로 이해되어 인기를 누렸다. 즉 가장 미국적인 것의 전형을 찾기 못했던 미국인에게 이러한 ‘퓨전푸드’는 그 전형으로 떠올랐다. 이것이 1990년대 한국에도 상륙하여 패스트푸드 세대의 입맛을 새로운 체험에 들게 했다. 예를 들어 케첩에만 찍어 먹는 것으로 알았던 감자 튀김을 새콤달콤한 일본식 간장 소스에 먹도록 했고, 서양식 소스에만 어울릴 줄 알았던 스파게티에 간장이 어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퓨전푸드는 보여주었다. 심지어 피자에 시금치․감자․콩 등이 주원료로 쓰이고, 메밀국수도 청경채․양배추, 그리고 와인을 곁들여 베트남 식으로 즐길 수 있고, 삼겹살도 와인에 재어 달콤하고 부드럽게 먹는 등, 퓨전푸드는 세계 각국의 요리가 지닌 특성을 한데 합쳐서 새로운 요리로 만들어낸 것을 모두 일컫는 새로운 조류로 등장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외국여행 경험을 많이 가지게 된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퓨전푸드는 세계화 전략과 함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다. 음식의 퓨전화 혹은 패션의 퓨전화는 이제 더 이상 전통 혹은 문화민족주의를 내세우는 구세대들의 이념형에 기울지 않겠다는 의지와도 같았다. 한국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주방장은 이제 더 이상 한국의 전통적인 음식으로 승부를 걸 수 없다고 여긴다. 그들은 프랑스나 이탈리아 혹은 중국으로의 요리 유학을 떠나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 속에서 다시 한국음식을 재창조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있는 주방장도 많다. 이제 퓨전푸드는 이념보다 외형으로, 투박함보다 세련됨으로 21세기의 초입을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사회가 온통 패스트푸드와 퓨전푸드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조리하는 슬로푸드(slow-food)는 그들에게도 고급스러운 음식의 으뜸으로 여겨진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점은 한국의 전통음식을 패스트푸드화 해야 서양인들에게 인기를 끌 수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우리 음식은 원래 슬로푸드였다. 이것이 어떻게 갑자기 서양의 패스트푸드로 바뀔 수 있겠는가? 또 있다. 우리의 아이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서양 음식은 대부분 끼니가 되는 음식이라는 점이다. 밥만을 음식으로 여기는 토종 한국인에게는 결코 이러한 사실이 거북스럽겠지만, 이미 서양적인 삶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는 너무나 쉽게 수용된다. 사실 김치의 일본화는 우리 스스로 이룩한 것이 아니다. 남들에게 주목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나물․떡․불고기를 김치처럼 세계화시켜 보려 노력한다. 그런데 그것만 먹고서는 끼니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비빔밥․냉면․국밥과 같은 음식은 패스트푸드가 되기에 알맞은 우리의 전통음식이다. 주막에서 쉽게 말아내던 국밥은 한국식 패스트푸드의 으뜸이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우리 속에 이미 존재하는 ‘빠른’ 음식은 충분히 패스트푸드로 변할 수 있다. 그리고 원래 ‘느려야’ 제대로 된 맛과 품격을 지니고 있는 음식들은 여전히 느린 음식으로 두어도 괜찮다. 모든 한국음식의 패스트푸드화 혹은 세계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신념보다, 우리가 더 관심을 두고 바꾸어야 할 대상은 패스트푸드와 퓨전푸드는 선진적이고 슬로푸드는 후진적이라는 우리의 생각이다.
6. 맺음말
오늘날 한국음식은 내면적으로도 외양적으로도 위기에 놓여 있는 듯하다. 대한제국 이후 스스로에 의해 근대성을 확보하지 못한 이래, 한국의 전통문화가 그러했듯이 전통음식 역시 심한 왜곡과 굴절의 역사를 거쳐왔다. 식품공장에서 생산되는 많은 한국음식은 표면적으로는 한국적이지만, 실제 그 기술과 맛에서는 이미 더 이상 한국적이 아니기도 하다. 사실 필자가 앞에서 다루었듯이 식민주의․제국주의․근대화․세계화라는 과정 속에서 투영된 한국음식은 문제투성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삶 자체를 반영한 결과로 보는 것이 좋다. 민속이란 결코 과거의 모습 혹은 전형적인 모습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재적 의미 속에서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행위하는 습관과 풍속을 민속이라 해야 한다. 그래야 오늘날 한국인의 삶을 관통하는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적어도 오늘날 한국인은 줄기차게 밥과 반찬이라는 구조로 짜여진 전통적이고 오래된 식단구조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주영하 2001). 특히 해외에 이주하여 집단촌을 이루고 있는 한국인들이 가장 먼저 마련하는 점포가 한국음식점을 비롯한 떡집․쌀집 등이라는 점은 한국인의 문화적 보수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예에 해당된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구성된 세상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한국음식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시급하게 정리해야 할 개념적인 틀이다. 동시에 이것은 민속문화와 외래문화의 관계를 설정하는 작업과도 통한다. 조선적 가치와 서양적 가치, 그리고 일본적 투영이 점철된 시대와는 아주 다른 패러다임이 오늘날 움직이고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증표는 전체적인 양상과는 달리 빙산의 일각처럼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일부를 제대로 보아야 다가올 세상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한국의 전통문화 속에 있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인정하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 마음속에 상존 하는 식민근성까지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것과 남의 것이 제대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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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이할배요 이글 다 읽어내려가자면 흰머리칼 새까맣게 변하겠심더 덮어놓코 우리 손잡고 시원한 태평양 저어 바다로 향해 세계일주 여행이나 한번 해보입시더 솔솔 불어오는 봄바람에 이맘도 살랑살랑 어디론가 훨훨날아가고 싶어 ㅎㅎ 아고 보고져라^*^*^
하이고 향기님 여기는 아직도 추버예. 봄바람 솔솔 불때까지 기다리이소.ㅎㅎ
두번째 올리는 논문입니다. 이번에도 비교적 긴 글입니다만 우리 화랑의 자산으로 모아둘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가지 주제를 비교적 읽기가 그렇게 난이하지 않은것으로(제가 읽고 이해할만한 것 ㅋㅋ) 올릴려고 합니다. 한번에 읽기가 너무 길면 두고두고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음식 식민주의가 제일 심각한 곳이 교포사회 입니다. 빵이나 터키 굽는 레시피는 통달 했으면서도 귀하게 자라서(손에 물 안 묻치고 커서) 된장찌개, 매운탕 어찌 끓이는지, 김치 어찌 담그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 합니다. 자랄때 빵 굽는법 배운것도 아니면서.. 이 이야기는 '절대로' 우리 집 이야기는 아님ㅋㅋㅋ
편의를 위해 패스트 푸드를 선호하다보니 그것에 길들여지고 외국 음식에 입맛이 길들여져 우리의 음식이 나아갈 길을 잃고 있습니다. 입맛도 어릴 때 먹어 본 회귀성 같은데...어머니들의 자성이 필요할 때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