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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희망 전도사
글: 전 마오 나는 경기도 하남시(河南市)에 있는 검단산을 즐겨 찾곤 한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도 자주 찾는 한 이유지만, 또 한 가지 이유는 이 산에는 등산하기에 아주 적당한 코스와 등산하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거리와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우선 산의 초입(初入)에는 민가가 몇 채 있으며, 그 주위에는 그 유명한 부추 재배 단지가 있고, 또 우리 콩으로 만든 두부에 막걸리를 내놓는 음식점이 있다. 등산이 끝나면 부담 없이 전래(傳來)의 분위기에서 우리 입에 맞는 음식을 맛볼 수 있어 등산 후의 피로를 풀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을 보면 역시 분위기를 아는 것은 거의 같은가 보다. 친구와 함께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막 오르기 시작하는데 가까이 길가에 무덤 하나가 시선을 끈다. 모든 것을 조심하고 근신(勤愼)하며 살아 죽어서 욕을 먹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또 산에 오르면서 그동안 세상살이를 하면서 저지르거나 가졌던 좋지 않은 행동이나 생각을 떨쳐버리라는 의미가 있다고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물론 무덤을 보고도 그냥 지나쳐 버리면 그것으로 끝나는 일이다. 사람에 따라 어떤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세나 방법 그리고 관심의 정도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산을 오를 때마다 무덤이 있는 바로 이곳을 꼭 지나간다. 뭔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이름 모르는 사람의 이 무덤에 대하여 감사(感謝)를 표하고 비로소 산길을 따라 올라가곤 한다.
낙엽송(落葉松)이 짙게 우거져 있는 자갈을 깔아 놓은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가 숨이 차 옴을 느끼면서 누군가가 준비해 둔 두 개의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준비해 온 참외를 계곡의 물에 담갔다. 시원한 물에 바로 씻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잠시 후 몇몇 아주머니들이 하산 길에 잠시 쉬기 위해 우리가 참외를 씻고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자기들이 참외를 씻어 주겠노라고 했다. 나는 그 순간, “안됩니다. 안돼요. 여기 이 참외 속에 폭탄이라도 들어 있으면 큰 일 날 테니까요.” 라고 농담 섞인 말을 하였다. 그러자 곁에 다가와 손을 씻고 있던 한 아주머니가 “아이고, 아저씨들, 욕심도 많군요. 저희가 빼앗아 먹지 않을 테니 염려 말아요!” 라고 말하고는 덥석 참외를 낚아채다가 순간 하나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래도 미안한 생각 없이 다른 하나를 집어 들고 씻기 시작하였다. 우리들은 물론이거니와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박장대소(拍掌大笑)하였다. 평상시 같으면 이런 하찮은 일에 여유를 가지고 웃을 수가 있겠는가? 순수한 자연의 숨결을 느끼며 산에 있으면 이렇게 자기도 모르게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가 보다. 우리 둘은 작은 바위들이 길바닥에 듬성듬성 솟아 있는 약간은 경사진 곳을 한참동안 걸은 후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약수터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바가지에 물을 가득 떠서 꿀꺽 꿀꺽 마시고 있었다. 물이 얼마나 맛이 있겠는가. 물맛은 목마른 사람만이 알고 밥맛은 굶어 본 사람만이 안다. 땀은 흘린 자만이 인생의 깊이를 알고 노동의 가치를 알며 다른 사람을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어찌 인생의 참 맛을 알 수 있겠는가?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서로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질서 정연하게 물을 마시고 자기가 마신 바가지는 깨끗이 헹구어 제 자리에 놓고, 혹시 버린 쓰레기라도 있으면 주워 챙기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아름다운 자연의 한 귀퉁이에 와서 어찌 인간의 추한 모습을 보일 수 있겠는가. 저 멀리 회색 도시의 보기에 민망한 모습이 눈을 피곤하게 하지만, 한 순간이라도 그곳을 피해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좋으면서도 슬프고 슬프면서도 좋은 것이 이 순간의 기분이리라. 나는 이렇게 기분 좋게 아름다운 순수한 숨결이 살아 숨 쉬는 자연의 한 모퉁이에 서 있는데, 저 멀리 도회지에 있는 사람들이 탁 막힌 무더운 공기 속에 깔려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참 숨도 고르고 친구와 또는 다른 등산객과 대화를 나눈 후 다시 정상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약간 질퍽한 경사진 곳을 지나 구릉지(丘陵地)를 거쳐 다시 아주 경사가 심한 곳을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가장 힘든 지점이다. 마치 지금까지의 이 검단산 등반이 꼭 마라톤 코스 같았고, 또 그것이 우리 인생이 지나가는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 항상 평탄한 것만도 아니고 또 역(逆)으로 항상 질곡(桎梏)의 시간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마지막 힘을 다하여 정상 가까이 놓여 있는 이 어려운 길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마라톤(총 42.195km)에 있어서 마지막 7 km의 거리가 가장 어려운 길이라고 하지 않는가. 바로 이 심하게 경사진 곳이 여기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제 지칠 대로 지쳐 있어서 온 힘을 다해 넘어야 하는 길인 것이다. 마지막 힘을 다했다. 드디어 정상이다.
정상(頂上)에 이르니 나도 모르게 가슴속에서 뭔가에 대한 승리감이 솟아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그동안의 무력(無力)한 부분에 대한 오늘의 승리감(勝利感)이리라. 평소에 얼마나 소심하게 작은 일에 집착하며 살아 왔던가. 이 세상의 작은 것 하나 성취(成就)하기 위하여 얼마나 남을 괴롭히고 자신의 가슴과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는가. 산에 오르면 이렇게 마음이 넓어지고 모든 사람이 피를 나눈 내 가족 같은데… 산 아래에서도 지금의 이 마음이 그대로 있다면… 작심 3일(作心三日)을 없애려면 3일 마다 작심 삼일하면 되듯이, 소심하고 여유가 없게 되기 전에 바로 산에 올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에서 내려다 본 주변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우선 팔당호를 감싸고 있는 우거진 숲을 가진 산들의 모습이 마치 우리의 허파를 책임이라도 질듯이 그 푸르름을 과시(誇示)하고 있었으며, 호수 위로 펼쳐진 흰 구름 덮개는 호수와 하늘 사이의 경계선에서 이리 저리 왔다 갔다 춤을 추고 있었다. 사람이 이런 아름다음을 창조하겠는가. 자연의 신비(神秘), 자연의 조화(調和), 자연의 인간에 대한 시혜(施惠) 등 이 모든 것들을 우리는 알고 가슴에 새겨두어야 하리라.
이제 다시 정상에서 내려가야 할 때가 되었다. 모처럼 등산한 것도 아니련만 다리가 뻐근하였다. 다른 등산 전문가들의 눈에는 우리의 이런 모습이 꽤 지친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처음 얼마간의 내려가는 길은 비교적 순탄(順坦)하였다. 사람이 성공해서 정상에 이르면 얼마간은 별 힘 안들이고 살더라도 거의 아무 탈이 없듯이 이 산의 모습도 그러하다. 한참 동안 힘 안 들이고 내려갔다. 가는 길 중간쯤에 약간 솟아오른 바위가 있어서 거기로 올라갔다. 팔당의 모습을 더 가까이 에서 조망(眺望)할 수 있었다. 역시 기분이 상쾌하였다. 둘이서 얼마동안 대화를 나누며 쉬고 있었는데, 어떤 전문 등반객(登攀客)으로 보이는 사람이 우리 곁으로 다가오다가 거리를 두고 멈추어 섰다. 정신없이 순탄한 길을 내려오면서 주위를 살펴보지 않았지만, 나는 얼마 전부터 그 사람이 우리 뒤를 따라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과 어울려 등산과 검단산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검단산에 대하여 소상히 알고 있었으며, 밝은 표정을 지으며 대화에 임하고 있었다. 정말 밝고 힘 있는 표정이었다.
다시 하산(下山)을 시작하였다. 이상하게도, 분명히 그 사람은 우리 뒤를 따라오는데 보조를 못 맞추고 뒤떨어진다. 내가 뒤돌아 그 사람을 쳐다보면 그 사람은 다시 그 자리에 서서 딴 곳을 본다. 그렇게 하기를 몇 번인가. 나는 그 사람과 같이 내려가기 위해 잠시 멈추어 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사람은 힘겨워 하는 우리와 보조(步調)를 맞추려고 하는 듯 자신도 천천히 걸으면서 곁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같이 걸었다. 거의 산 아래까지 내려와서야 비로소 나는 그 사람의 다리가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산에서 만난 친구는 악인이 없다고 한다. 우리는 그 사람과 함께 산 초입(初入)에 있는 두부와 막걸리를 파는 음식점에 들어갔다. 순두부와 부추전 그리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를 나누던 중 그 사람은 우리들에게, “친구 분들, 사실 저는 다리 하나가 없는 사람이오. 지금 의족(義足)을 하고 있습니다. 월남전(越南戰)에서 다리 하나를 잃었다오. 그 뒤로 다리 없다는 핑계로 낙담도 많이 하고 또 운동을 하지 않았더니 건강이 말이 아니었답니다. 게다가 건강이 안 좋고 주위사람들의 시선이 뜨겁게 느껴져 세상을 하직(下直)할까 하고 마음먹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하여 월남전에 참전하여 갖은 고생을 하고 살아온 사람이 이렇게 무너지면 되겠는가 싶어 다시 마음을 고쳐먹기 시작하고 여기 검단산을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제가 친구 분들 뒤에서 줄 곳 내려온 것은 당신들에게 희망(希望)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등산하면서 힘들어하는 여러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제가 여러분을 앞질러 내려 왔다면 여러분의 힘이 더 떨어졌을 것입니다. 저는 저를 위해 기도해 주고 항상 희망을 심어주었던 다리 하나 없이 살아가는 제 친구로부터 이러한 마음을 배웠답니다.”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큰 가르침이었다. 이 친구의 그러한 마음이 더 멀리 넓게 퍼져 나갔으면 하고 기원해본다. -- "KBS TV동화 행복한 세상" 제작 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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