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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15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신명 4,1.5-9
복 음 : 마태 5,17-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역사 안에서 우리는 대단해 보이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예술, 과학, 정치, 문화 등, 역사 안에서 한 획을 그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뛰어난 능력을 지닌 천재일까요?
타고난 능력이 그들을 거장으로 만든 것일까요?
저는 이들이 대단한 천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저같이 평범한 사람은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미켈란젤로의 이야기를 듣고는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시스티나(Sistina Chapel) 성당 천장에 그린 ‘천지창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그림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안다면 나를 천재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뛰어난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물도 만들 수 없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본인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면 충분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 노력했고, 비로소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 속의 위인은 자기가 원하는 결과에 도달할 때까지 이렇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본인의 능력 없음을 생각하기보다 조금 더 노력하지 않았음을 반성해야 합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도 우리의 노력 없이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는 사람이
과연 주님의 현존을 지금 삶에서 체험할 수 있을까요?
지금 어렵고 힘들어도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또 그 뜻을 실천해나가는 사람만이 주님의 현존을 느끼며 지금을 잘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주시고,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완성하러 오셨다고 합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사랑을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철저하게 사랑을 주십니다.
심지어 당신의 목숨까지도 내어놓으시는 사랑을 주시면서,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역시 가장 작은 사랑이라도 철저하게 실천할 때,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라고 불리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안일한 마음이 아니라,
어떻게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만이 큰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늘나라에서 큰사람 대접을 받을 사랑 실천에 계속해서 노력하고 계십니까?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번 LA 신문홍보를 하면서 마음이 따뜻한 교우 분들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제가 사제이기 때문에 기꺼이 머물 곳을 마련해 주셨고,
음식을 주셨고, 차량 봉사를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우분들은 불편했음에도 기쁜 마음으로 저를 받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분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시고, 진실한 신앙을 보시고 축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밭에 숨겨져 있는 보물과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교우분들의 가정에서 하느님께서 숨겨 놓으신 ‘보물’을 찾았습니다.
그 보물은 책 속에 있었습니다.
첫 번째 보물은 정의채 몬시뇰과 차동엽 신부님의 대담을 엮은 ‘모든 것은 은혜였습니다.’입니다.
저는 그 책 속에서 정의채 몬시뇰의 깊은 지성과 미래에 대한 통찰을 보았습니다.
두 번째 보물은 류시화가 옮긴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 책 속에서 ‘세계는 원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사순시기는 은혜로운 회개의 때입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교구장님들은 ‘담화’를 발표하였습니다.
서울대교구 정순택 베드로 주교님은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페 5,8)”라는 성서 말씀으로 담화를 시작하였습니다.
주교님은 특별히 사순 시기에 미사참례를 열심히 하기를 당부하였습니다.
미사는 말씀과 성체라는 보물이 묻혀있는 밭이기 때문입니다.
춘천교구 김주영 시몬 주교님은 사순 시기를 시작하면서
“성령으로 굳건해진 신앙 감각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개인과 공동체로서
주님께 충실하면서 살고 행동하고 말하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식별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신앙 감각은 모든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와 함께 생각하며’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목표를 나누도록 해 주는 본능이다.
( 「교회 생활에서의 신앙 감각」, 128항).”라는 신앙 감각을 강조하였습니다.
주교님은 특별히 사순 시기에 말씀을 통하여 신앙 감각을 키워가기를 당부하였습니다.
인천교구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님은
“숨겨진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해 주소서.(시편 19,13)”라는 성서 말씀으로 담화를 시작하였습니다.
사순 시기를 보내면서 ‘숨겨진 잘못에서’
우리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께 다가서도록 당부하였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에 묻혀있는 보물은 ‘하느님의 계명과 율법’입니다.
오늘 독서는 율법과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으로 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지 않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은 축복의 땅으로 갈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살인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남의 재물을 탐하지 않고,
남의 아내를 탐하지 않는 사람은 축복의 땅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보물을 찾으려고 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입니다.
앞서가는 사람은 끌어내리고, 뒤에 오는 사람은 밀쳐내면서 성공이라는 바벨탑에 오르려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이라는 바벨탑에 오르려 합니다.
위선과 가식으로 치장된 명예라는 바벨탑에 오르려 합니다.
그런 보물은 우리를 축복의 땅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그런 보물은 우리를 무한경쟁의 싸움터로 내몰기 마련입니다.
그런 보물 때문에 아름다운 자연은 훼손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푸른 지구는 병들고 있습니다.
사순 시기를 지내면서 오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가르치는 자는 먼저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기원전 1250년경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의 종살이로부터 탈출시켰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대장정의 길에 올랐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석 달째 되는 초하룻날 그들은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다.
이곳 시나이산에서 모세는 야훼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내려받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의 백성으로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다.
이 계약과 율법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출애급기 19장-24장이 담고 있다.
舊約에 의한 모든 율법은 예수님 당대에 이르러
248개의 행령(하라는 법)과 365개의 금령(말라는 법)으로 발전되었다.
이제 새로운 계약을 앞두고 구약과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이 밝혀진다.
예수께서는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글자 그대로 꼭 지켜야 할’ 율법을 내려받던 입장과는 달리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 立法者의 입장에서 율법의; 정신과 참뜻을 밝히려 하신다.
이것이 바로 마태오복음에 나타나는 예수 가르침의 진수인 산상설교(5장-7장)이다.
산상설교의 권두에서 참된 행복의 길을 가르치시고(5,3-12),
제자들더러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건실히 유지하고 밝히는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신(5,13-16) 예수께서는 이제부터 진정한 율법 완성의 길을 보여주실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분명히 말해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17-18절)
이로써 예수의 구약 율법에 대한 태도는 명확하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율법을 통하여 이미 준비되고, 시작된
하느님의 원초적인, 동시에 결코 곡해 되지 말아야 할 의지를 성취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율법 속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본질적인 정신과 의지가 무엇인지는
차후 6개의 대당 명제와 이를 결론 짓는 황금률(7,12)로 선포된다.
산상설교의 가르침은 결국 예수께서 주시는 새로운 계명과도 같다.
그분은 새로운 계명을 통하여 구약의 율법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정신과 그 참뜻을 밝혀 주신다.
이것이 바로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하나도 없애지 않고 완성하는 길이다.
율법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예수께서는 율법의 일점일획에 집착하지 않고 이를 심화시키시고,
때로는 과감하게 이를 폐기시키기도 하실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가르쳐주시는 새로운 계명과 율법의 정신을
먼저 지키고 행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행하도록 가르치는 일이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두 구절(19-20절)은 마태오복음이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기본노선을 산상설교 첫 부분에 언급하고 있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마태오복음서의 독자가 대부분 유다교 출신의 그리스도인이거나
유다교로부터 개종한 신자라는 사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바이다.
동시에 이 사실은 마태오복음 공동체 안에
구약의 율법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이 있었다는 사실도 말해준다.
예를 들면,
① 구약의 율법이 종말에 이르기까지 유효하다는 입아,
② 유다교 율법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 또는
③ 예수께서 주시는 새로운 계명만이 오직 유효하다는 입장 등이 그런 것이다.
물론 마태오 복음이 견지하는 입장은 세 번째의 지론이다.
그렇다고 다른 입장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약의 계명을 지키면서 스스로 구약의 율법을 어기고,
또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 들기는 하되,
가장 작은 사람대접을 받게 된다는 결론이다.
사순 시기를 보내는 우리들의 자세를 돌아보면
오늘 복음의 마지막 두 구절이 참으로 마음에 와닿는다.
사순 시기는 분명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음식과 언행을 삼가며
부정을 멀리하고 자선과 기도와 단식하는 일로서
다가올 부활축제를 준비하는 齋戒의 시기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禁肉이 규정된 금요일에 ‘몰랐다’, ‘外食이라 어쩔 수 없었다’,
‘다른 것으로 대체하면 된다’, ‘더러는 괜찮다’, ‘재계의 뜻과 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등등의
핑계를 운운하며 금육을 쉽게 파기하는 우리들이 아닌가?
나부터가 그렇다. 진정한 재계는 정신이나 마음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재계는 필히 육신의 수행이 따라야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쳐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은 율법을 없애러 오지 아니하고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식사의 신비를 당신의 수난으로 완성하셨을 때 율법을 완성하셨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사람들이 건네준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하심으로써 당신에 관해 쓰인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이
모두 이루어졌다고 분명히 보여주셨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1코린 5,7)라고 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계명들은 어느 것 하나도 폐지해서도 고쳐서도 안 된다.
모든 것을 그대로 보존하며 잘 가르쳐
하늘나라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인간적으로 작고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하찮은 것이 아니라, 필요하게 여기신다.
주님께서는 그 계명들을 모두 가르치셨고 또 지키셨기 때문이다.
작은 것들도 하늘나라라는 위대한 미래를 가리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17절)
율법과 예언서는 둘 다 유효하다.
이 책들을 보면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들과 살아가는 일에 관한 법이 담겨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둘 다 완성하셨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그 율법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말씀을 실천하며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완성해 갈 것이다.
우리에게는 주 하느님께서 만드실 새 하늘과 새 땅이 약속되어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면, 그에 따라 옛것은 사라질 것이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18절) 라는 말씀은
율법에서 가장 작다고 여겨지는 것조차도 영적 상징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 모든 것이 복음서에 요약되어 있음을 알려 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19절)는 곧바로 지옥과 벌을 떠 올려야 한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가장 작은 자, 내쳐진 자요, 말째가 되어 벌을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제쳐 놓는 이는
누구나 당신과 맞서는 자로 여겨 옆으로 제쳐 놓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업신여김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지금 중요한 사순 시기를 지내고 있다. 부활을 향한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이것이 단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행사로만 끝난다면,
우리가 맞는 부활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부활은 우리 자신의 새로운 탄생을 촉구하고 있으며,
또한 영광스러운 나 자신의 하느님 안의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가 부활을 축하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제 하느님 사랑의 계명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올바로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박재찬 안셀모 신부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럼, 사랑의 완성은 무엇일까요?
“나는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율법의 완성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된다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기희생적 사랑으로 완성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그분께 순종하여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 모두는 구원받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완성될 수 있도록
우리 역시 나를 내어주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하며
이 미사를 온 정성을 다해 봉헌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오늘은 톨스토이의 동화 “황제와 청소부”이야기를 들려 드리며 강론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왕국의 황제가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잔치를 시작하면서 황제는 이날 참석자 중 가장 아름다운 손을 가진 사람에게
황제와 황후 사이에 앉게 하고 금과 보석 등 푸짐한 상을 내린다고 공포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잔치 참석자들은 손을 다듬고 향수도 뿌리고
손에 좋은 것을, 덕지덕지 바르며 자신이 뽑히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손님들의 손을 다 본 다음, 드디어 황제는 그 영광의 주인공을 뽑았습니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궁전을 청소하는 할머니였습니다.
하지만 평생 일만 해온 청소부 할머니의 손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거칠고 주름졌습니다.
그 손을 본 사람들은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했고, 황제는 그들에게 대답했습니다.
“이 손은 땀과 수고, 그리고 성실로 장식된 가장 아름다운 손이다.”
저는 제 손이 짧고 못생겨서 손이 왜 이리 퉁퉁하고 작으냐고 물으면
“원래 길었는데 하도 열심히 일을 해서 닳아서 그렇다.”며 농담을 하곤 합니다.
사실 늘 손이 길고 예쁜 사람들을 보면 더 호감이 가고 부러운 마음이 들곤 합니다.
그런데 지난 명절에 고향의 부모님을 뵈러 갔다가
어머니 손을 보고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참으로 고왔던 그 손이 이제 거칠고 주름지고 갈라져
할머니의 손이 되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도시에 살고 있는 어머니 연세의 다른 분들의 손과는 너무도 비교가 되었습니다.
농촌에서 흙 만지며 살아오신 그 어머니의 손은 어루만져 드리며
“어머니 참으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중풍이 든 시어머니와 엄하기로 소문난 시아버지를 모시고,
그리고 아들 넷을 키우면서 온갖 고생을 다 하셨던 어머니의 그 손은
세상의 그 어느 손보다 아름다운 사랑의 손이라고 생각됩니다.
날마다 두 손 모아 기도하는 그 손은 가족을 위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랑을 나누는 손이 되었고,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의 손이 되었습니다.
저의 어머니 손뿐만 아니라, 강론대를 두드리시는 요셉 신부님의 손,
농장에서 채소를 가꾸시는 루도비꼬 수사님의 손,
날마다 부지런히 청소하시는 도밍고 수사님의 손,
면상의 집의 많은 일을 도맡아서 하는 바르나바 수사님의 손,
매일 전례를 준비하는 윤일 요한 신부님의 손,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신 사랑을 나누는 여러분 모두의 손이
아름답고 귀하고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들의 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난주에는 수도원 소성전 창문을 닦고 있었습니다.
제가 도와달라 하지 않았지만, 사무실 직원이 와서 함께 창문을 닦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은 그 어떤 손 보다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참 많은 일을 합니다.
노동자의 손뿐만 아니라, 기술자의 손, 프로그램을 만드는 손, 음식을 만드는 손,
사무를 보는 손, 분필은 만지는 손, 악기를 연주하는 손 등등 참 많습니다.
그런데 같은 일을 하는 그 손이 “어떤 마음으로 임하느냐”에 따라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사랑하기도 하고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억지로 그 일을 하기도 하고, 사랑으로 그 일을 하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그 손을 사용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나아가 하느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그 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음식을 잘 만드는 손이지만 한 번에 오르간을 연주하는 손이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농사를 잘 짓는 손이 하루아침에 반도체를 만드는 손이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일을 하던 손이든 그 손으로 무엇을 하던 간에,
그것이 자신을 넘어 다른 이를 위한 희생이 될 때,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세상을 밝게 만들 때, 그 손은 거룩한 손이 되는 것 같습니다.
가족을 위해 도둑질하던 손이 마음을 고쳐먹고 허드렛일이라도 자신의 손으로 노동을 하며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할 때, 그 손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의 손이 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의 핵심인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완성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완선되었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삶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사랑의 삶을 통해
하늘나라를 지금 여기에서 살 수 있도록 우리 모두를 더 큰 사랑으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신만을 위해 자신의 손을 사용하는 사람, 게으름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손,
율법학자들처럼 다른 이들의 손에 짐을 지우고 자신은 손가락 까딱하지 않는 손은
율법의 완성인 사랑에 가까이 있지 못할 것입니다.
머리로는 다 아는데 손으로 그 아는 것을 실천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비판만 하고 있다면,
그 또한 율법을 완성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율법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손은 어떠하셨습니까?
손바닥에 못이 뚫려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사랑으로 견디어 내신 손,
아픈 이를 어루만져 낫게 하는 손, 죄인들을 용서하며 안수하는 손,
어린이를 감싸 안아 주시는 손, 제자들에게 음식을 차려 주던 손,
그리고 밤새 기도하며 하느님을 찬양하던 그 예수님의 손을 바라보며
우리의 사랑이 어떻게 완성되어야 할지 묵상하게 됩니다.
오늘 하루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우리의 이 손으로 어떤 사랑을 나눌지 생각하며,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아픈 이들을 위해, 그리고 주님을 위해
우리의 손과 발을 사용하는 날 되시길 빕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손이 되어 드리는 날 되시길 빕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대구 :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오늘의 말씀은 언뜻 보면, 우리가 율법에 얽매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늘과 땅이 사라지지 않는 한 율법의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한 획 한자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이 말이 가끔은 무섭게 느껴지기도.
성경에서 보이는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의 모습에서
어쩐지 율법은 죄인과 죄인이 아닌 사람을 나누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쓰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율법이 왜 생겼는지, 무엇을 위해 율법을 지키는지에 대한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성당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어릴 때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성당에 안 다녔다면 죄를 덜 지었을 텐데.
사회에서는 이건 죄도 아닌데 성당에서는 죄니까 고해성사 봐야 하고' 등.
율법과 계명을 우리는 죄와 연관시켜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시고자 하는 율법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하느님께로 더 다가가기 위한
사랑의 율법이라는 것을 우리는 가끔 잊어버리곤 한다.
애초에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내려주신 십계명이
당신의 사랑으로부터 온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타인을 비난하고 죄인으로 몰고 가는 잣대로 사용하고 있을 때가 많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당신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이 사순 시기에 우리는 각자의 십자가를 지며
내가 걸어가는 이 길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저 예수님의 수난과 고난이 힘들고 아픈 길로만 그쳐 버린다면
우리는 진정한 십자가의 그 길을 걸어가지 못할 것이다.
[출처] 마태 5,17-19 사순 제3주간 수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