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덮인 기러기 죽지로/ 그믐밤을 떠돌던 방황도/ 오십령 고개부터는 추사체(秋史體)로 뻗친 길이다/ 천명(天命)이 일러주는 세한행(歲寒行) 그 길이다/ 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 길을/ 닳고 터진 알발로/ 뜨겁게 녹여 가라신다/ 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 흘려서/ 자욱자욱 붉게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 올해로 68세인 원로시인 유안진 전 서울대 교수가 2000년에 발표한 ‘세한도 가는 길’ 전문이다. 국보 제180호인 추사 김정희의 수묵화 ‘세한도’를 소재로 읊은 시임은 물론이다.
추사가 58세의 나이인 1844년에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면서 그린 ‘세한도’만큼 많은 시인의 작품 주제나 소재가 돼온 한국 회화는 달리 더 찾기 어려울 것이다. 유안진 외에도 이근배·김지하·정희성·정호승·황지우·곽재구·도종환 등 일일이 다 거명하기 어려울 정도다.
갈필(渴筆)로 거칠게 붓질한 소박한 집 한 채를 중심으로 소나무와 잣나무가 두 그루씩 서 있을 뿐이어서 쓸쓸한 겨울 정취를 자아내는 작품의 절제미와 간결미 등 높은 예술적 완성도 때문만이 아니리라. 시대의 차이를 뛰어넘어 길이길이 기리고 본받아야 할 ‘정신’을 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추사는 그림의 발문을 통해 선비의 지조와 의리를 지킨 제자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준다고 밝히면서 공자의 ‘논어’ 한 대목을 인용했다. 추위가 닥친 뒤라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안다는 의미인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가 그것이다. 송백은 사철 시들지 않아 추위 전에도 추위 속에서도 한결같다고 추사는 덧붙여 선비 정신을 더 강조했다.
추사는 1856년 타계하기까지 4년 동안 경기 과천시 청계산 자락의 돌무께마을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웠다고 한다. 과천문화원은 그래서 ‘세한도’를 소재로 삼은 시인 53명의 시 63편을 엮은 책 ‘시로 그린 세한도’를 과천시 지원금과 시민 성금 등을 모아 최근 펴냈다. ‘세한도’ 등에 담긴 추사의 예술혼과 삶의 궤적을 주제나 배경으로 삼은 걸작이 시뿐만 아니라 소설·오페라·뮤지컬·영화·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장르에서 많이 나오고, 선비 정신 또한 확산돼 직분과 행동이 서로 다른 두 얼굴의 ‘스승’들이 교단 안팎을 어지럽히는 일이 더 반복되지 않을 계기도 제공하기를….
출처:문화일보 글 김종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