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찰총회 설교. 너희는 곧 나의 친구라 (요 15장 13-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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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들의 조직 내에서는 60대 이상이 어떤 자리나 언권의 중심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아이들은 다 컷지만 목사님들과 대화 하다 보면, “아직 젊어, 참 좋을 때야” 이런 말씀을 자주 듣습니다. 40대 목사님들은 젋다는 표현 보다 어리다는 표현으로 말씀 들을 하십니다. 저는 노회나 시찰회에 올 때마다 상대적인 젊음을 누리면서 선배 목사님들의 말씀을 잘 경청하며 배워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가장 외롭고 힘들 때가 내 주변에서 관계를 맺고 대화를 나눌만한 사람이 하나 둘씩 사라져 갈 때라고 합니다. 하루 종일 있어도 연락 오는데도 하나도 없고, 광고 문자나 가끔 날라오고, 갈 데도 마땅치 않고, 사는게 사는 것이 아닌 것처럼 고립된 상황이라면 인생이 참 쓸쓸할 겁니다.
특히 남자들은 사회적 관계성이 여성들보다 현저하게 떨어지기 때문에, 직장이나, 어떤 조직에서 은퇴를 할 시점에서는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교제할 나만의 모임을 꼭 만들어 놓고 은퇴 하시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은퇴하기 전에 모임 세 가지 정도는 꼭 만들어라는 말도 있습니다.
나이들어가면서는 복잡한 관계는 스트레스만 쌓일 뿐이니, 정말 마음이 찰떡 같이 맞으면서 오래 갈 친구 몇 명만 있으면 됩니다. 그럼 누가 나와 함께 지속적으로 관계를 계속해 나갈 친구 사이가 될 수 있을까? 판단이 잘 안 서신다면 가장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가족 이외에 한 6개월 동안 어떤 연락도 먼저 하지 않고 기다려 봅니다. 6개월이면 대부분 다 정리가 됩니다. 내가 먼저 한 번도 먼저 연락 안했는데도 자꾸 안부를 묻고 연락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오래갈 친구입니다. 그런 분들을 모아 모아서 주기적으로 만나실 교제 모임을 만드십시오. 그러면 노후에 외로울 일은 없으실 겁니다.
친구라는 존재는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친구에 관한 동서양의 속담중에, “친구는 옛 친구가 좋고 옷은 새옷이 좋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다”, 진정한 친구는 자기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 친구한테 속는 것보다 친구를 못 믿는 것이 훨씬 수치스럽다.“이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이니, 그럼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짜 친구는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시는 동안 여러 가지 질문과 상황에 대하여 많은 비유를 들어서 설명 하시면서 “친구”라는 용어를 사용하신 것이 얼마나 되는지 찾아 보니 복음서에서만 13번정도 사용하셨습니다. 13번이면 적으면 적고 많으면 많은 숫자인데, 신약성경 전체로 보아도 “친구”라는 단어가 18번 정도 등장하기에, 13번의 숫자는 압도적으로 많은 분량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친구”라는 용어를 사용하시면서 특정한 사람, 어느 개인을 지칭하면서 사용하신 적이 딱 두 번 있습니다. 두 번에 해당 되어 지목된 사람이 누구인지 혹시 아십니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 11:11), 한 명은 베다니에 살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 였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인근에서 사역 하실 때 자주 나사로의 집에 기거하셨던 것으로 보아서, 나사로를 “친구”라고 부르시는 친근감을 나타내신 것은 어느 정도 예상이 됩니다. 예측 가능한 인물입니다.
그러면 남은 한명은 누구일까요?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 26:50) 이 사람은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병사들을 데리고 온 가룟 유다가 예수님에게 입 맞춤을 하자,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친구”라는 호칭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친구라는 호칭을 받기에는 예상치 못한 인물입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지나 무덤에 있었지만 다시 살려 주시기까지 한 친구 나사로,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버린 친구 가룟 유다, 너무나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친구”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이 과연 동일했을까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요한 복음 13장 1절에는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우리를 향하신, 세상을 향하신 우리 주님의 마음 중심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콕 집어서 지목하여 “친구”라고 불러주신 것은, 곧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하고 여전히 사랑의 관계가 유지 되고 있다. 나는 사랑의 마음을 결코 철회할 생각이 전혀 없으며 끝까지 그를 사랑할 것이라는 선포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말씀 하셨는데, 곧 이어지는 13장 2절의 말씀이 기가 막힙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열변을 토하셨는데, 곧바로 배반의 마음으로 화답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배반의 마음을 다 아시면서도, 가룟 유다가 배반의 마음을 갖지 전, 열심히 배우고 익힐 때에 친구로 사랑해 주셨던 마음을 조금도 바꾸시지 아니하고, 마귀가 그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집어 넣었을 때도 친구로 사랑해 주셨고, 실제로 예수님을 팔려고 행동으로 옮겼을 때 조차 끝까지 친구로 사랑해 주셨습니다.
가룟 유다까지 갈 것 없이 우리 자신들을 대입해 보면 됩니다. 우리들은 조석변개 하는 연약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실망시켜 드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럼에도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여 주시고 계시며, 우리와 끝까지 친구로 동행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사순절 기간에 시찰총회로 모인 모든 총대님들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며, 친구로 불러 주시는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 겸손함으로, 감사함으로 나아가시기고, 온전한 믿음이 회복되는 은혜의 시간을 보내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친구”라는 용어를 세 번이나 연속적으로 사용하시면서 믿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다름 아닌 예수님과 친구 사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줍니다.
12절과 17절에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라고 하신 것처럼, 친구사이가 성립 되는 가장 중요한 흐름은 앞서 설명 드린대로 역시나 “사랑”이 중심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우리를 향하여 말씀 하십니다. “이제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겠노라.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너희는 종이 아니고 나의 친구니라” 종의 신분, 친구의 신분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도 대화를 주고 받는 가벼운 친구 사이를 훨씬 뛰어넘어서, 예수님의 생각, 의지, 능력, 영광, 이 모든 것을 함께 이루어갈 동역자로 우리를 친구 삼아 주신다는 뜻이셨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전에 이미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라”(요 14:12) 라고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예수님처럼 권세 있게 선포하고,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행동하고,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는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의 친구니라”는 말씀만 던져 놓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우리 사이가 진짜 친구사이인지 상호 간에 서로 확증 하도록 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심을 앞서서 확증 해 주신 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이었습니다.
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심을 확증하시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완벽하고도 충분하게 우리의 친구가 되셨다는 것을 다 보여 주셨습니다.
친구 상호 간에 확증한다고 했으니,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내가, 예수님과 친구사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확증하여 보여 드릴 수 있겠습니까? 14절에,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내가 예수님의 친구라면 명령을 따라야 하는데 그 명령은 세 가지로 압축 됩니다.
첫째는, 열매가 항상 있게 하라.
둘째는, 내 이름(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이든지 구하고 받으라.
셋째는, 서로 사랑하라.
열매, 기도, 사랑, 이 세가지 명령을 순종하고 실천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음을 우리 스스로 확증해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우리는 열매와 기도와 사랑으로, 상호 간에 친구 사이가 되었음을 확증하고, 친구 사이로 영원토록 동행하는 것이 곧 믿음의 여정이요, 신앙생활 입니다.
찬송가 90장에는, 「주 예수 내가 알기전 날 먼저 사랑했네, 날 구원하신 예수는 참 좋은 나의 친구」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날 먼저 사랑하셨다는 가사처럼, 본문 16절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모든 시찰회 목사님들, 장로님들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날 먼저 사랑하시고, 날 먼저 택하여 세워 주신 우리 주님의 전적인 은혜 때문입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한 친구요, 동역자요, 동행자로 택하시고 세워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또한 우리 모두를 끝까지 사랑하여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북시찰회 목사님들, 장로님들이 서로 교제하는 친구 사이가 되도록 성령으로 연결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인 동시에 목사님, 장로님들과도 영원한 친구이자 동행자가 되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시찰총회에서 서로 인사 하실 때 “끝까지 사랑합니다! 끝까지 친구로 지냅시다!” 라고 교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시찰회 목사님들, 장로님들이, 우리 주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 서로 화목하고 연합하며, 예수님만을 친구로 삼아 동행 동사 하시면서, 강건하고 능력있게 맡겨진 일들을 감당해 나가시는 신실한 하나님나라의 일꾼 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찰총회에 참석하신 모든 총대님들과 섬기시는 교회와, 성도들 위에 “너희는 나의 친구라”말씀 하여 주시는 우리 주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과 평안이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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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사랑하는 독생자를 보내 주셔서 저희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내려 주시고, 주님과 친구가 되어 동행의 길을 걷게 하시니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우리의 친구가 되신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며,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소망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친구로 불러 주시고 끝까지 사랑하여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