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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파이잘 빌딩 22층 보성 증권까지 운전을 하면서 그가 던져온 독설 같은 메시지를 떠올려 보았다.
‘파편처럼 박혀온 심리적 상처는 망각이라는 진통제로 치유될수 없다.상처를 삶의 교훈으로 승화시켜야한다.진정한 삶의 자신감은 그런 체험을 통해 생겨난다
다시는 떠올리 싫다며 기억을 삭제하는한 반성도 회개도 안 이뤄지고 과거의 오류는 미래에도 재현된다.망각을 통한 고통 해방은 사고력을 마비시킨다’
아직도 반성할줄 모르고 자기 잘난 맛에 개똥 철학을 읊조리는 그의 지저귐에 대꾸도 할 가치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3번째로 들어온 문자가 자꾸만 맘에 걸렸다.
‘까칠한 언사가 상대방의 주먹을 부르고 이를 칼로 받고 다시 가문간의 전쟁으로 이어지고..분쟁의 덫을 피해가자면 지적 긴장감으로 살아야해’
뭔가를 예고하는 듯 경고하닌 협박 수준의 살기가 전해져 옴을 느끼면서 그녀는 증권사 지하에 차를 파킹시킨다. 유난히 보성 증권 빌딩에는 외제차가 많은 외빈용 주차장이 있었다.
엘리베이터에는 방금 담배를 피우고 올라가는 듯한 흰 와이셔츠 차림의 회사원 3명이 타고 있었다.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이 그렇게 화술에 대한 코칭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요즘은 예측력 보다 화술과 이미지 메이킹에 능한 애널리스트가 인기에요. 저들의 얼굴이 증권사를 먹여 살리지요”
못해도 대여섯은 젊어 뵈이는 보성 증권의 한운선 교육담당 과장은 주숙희 앞에서 짐짓 무게를 잡고 있었다.
얼마나 내부 직원들에게 치이고 힘들었으면 저럴까….
그래도 주숙희는 전혀 불편한 내색없이 그녀의 곤조를 받아주었다.
“보내주신 파워포인트 문서 샘플이 맘에 들어 연락을 드린거였어요. 하지만 빛 좋은 개살구가 돼봐야 무슨 소용이겠어요. 저희 회사의 발표 자료는 VIP 고객들의 자산관리 전략을 소개하는 전문적인 내용들이에요. 거기에 맞는 디자인의 옷을 입혀줄만큼 금융과 주식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다면 개살구에 화장을 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한 과장의 얼굴은 화장이 두텁게 돼 있었다. 문득 저 화장을 지우면 그 아래 얼마나 자글자글 주름들이 자리하고 있을지가 훤히 보인다.
한 과장은 숙희를 25층의 신설 객장으로 안내했다. 미술관을 연상케하는 고급 증권사 점포였다. 입구에는 유명 비디오아트 작품과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줄줄이 전시된 객장은 1개 층의 절반인 700여평을 통째로 사용할 정도로 넓었다.
“종전의 신촌, 종로 지점 등 인근 점포 6곳을 통합해 이곳으로 옮겼어요. 전문상담사만 50여 명이 근무하니 초특급 VIP 점포인 셈입니다. 거액 자산가들만 고객으로 상대하는 상품도 헤지펀드, 복합형 신탁, 사모펀드, 자문형 랩 등 주로 맞춤형이에요. 금융상품뿐만 아니라 국내외 유명 작가의 그림 조각 등 미술품 투자도 대행해 주는 곳이지요”
안내를 해주는 한 과장의 얇은 귓볼에 달린 금빛 귀고리, 다이아몬드 빛깔 브로치를 단 곤색 유니폼.어쩌면 이 프리미엄 마케팅을 구성하는 하나의 벽돌처럼 보였다. 주숙희는 연민의 감정으로 그녀의 무례함을 삭힌다.
"국내에서 금융자산을 12억원 이상 보유한 고액자산가들은 8만명에 이르고 이들 자산이 총 260조원에 달해요. 이번 프리미엄급 점포 신설로 우리 회사는 예탁자산을 6조원까지 늘려나갈 계획이에요. 그것을 달성해줄 전문 상담사들의 프리젠테이션 스킬은 그래서 절박한 겁니다”
그녀의 조바심과 과민함이 그제서야 좀 이해될 것 같았다. 그녀를 따라 들어간 곳은 점포 후면의 보성 증권의 투자 분석실이었다. 팀장으로 보이는 중년 신사는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연신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회사의 니즈를 정리해서 말씀해주실 황 팀장님이세요. 면담 잘하시고 파악되신 니즈에 대한 실시 계획과 견적안을 보내주세요.시간이 없습니다.”
새하얗게 다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바싹 동여멘 40대 후반의 분석실장은 담배 냄새를 몹시 풍기고 있었다.
“반갑습니다.너무 다급해서 저희가 인사팀에 마케팅 교육 의뢰를 요청했드렸습니다”
황팀장은 군더더기 인사치례를 할 틈도 없이 대뜸 본론으로 들어갔다.
“증권사들은 중국의 위안화 절상이 한국 수출 미칠 영향을 업종별로 차별화 시켜 분석하고 있어요.
그런데 정보기술(IT)과 자동차 업종에 대한 예측에서 우리는 경쟁사 S증권사에게 고객을 빼앗기는 참패를 지난주에 기록했어요.
S증권사는 모기업 S전자를 의식해서 전기,전자 자동차 업종의 수혜를 점치고 있어요.
중국의 낙후지역까지 도시화가 가속화되면서 가전 및 자동차 등 내구재의 보급 확대기 이어질 거라는 이유 때문이죠”
그는 경쟁사에게 진 것이 분한듯 말을 더 빨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 회사 애널리스트들의 분석은 틀려요. IT의 경우 일부 프리미엄 시장을 중심으로 시장 확대가 가능하지만 디스플레이는 중국 내 공장 건설과 자국 내 부품 조달로 긍정적 효과가 그다지 크지 않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어요. 특히 중국 가공무역의 수출 비중이 높아 대중국 수출 증가의 긍정적 효과가 상쇄될 수 있어요. 원화 동반 강세 부담도 무시할 수 없구요.
이렇게 우리측 분석이 더 다양한 논거로 발표됐는데도 경제 뉴스 방영의 결과는 우리의 참패였죠. 시청자들은 S증권사 에널리스트의 분석을 더 신뢰해 S전자의 매수 증가로 반영됐어요.
분석의 우월성 만이 아니라 그 내용의 전달 스킬이 더 많은 걸 좌우하는 상황이 되고 있어요”
미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숙희의 차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좀처럼 나아가질 못했다. 시위 인파가 보였다. 4대강 개발 반대의 구호가 물결친다.
예전에 여의도에 사무실로 출퇴근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IMF 전후로 그때도 정리해고 등 이슈가 많았었다. 특히 그녀의 사무실이 있던 H 정당 당사 앞 빌딩에서는 점심을 먹으러 나올 때면 머리띠에 구호 피켓의 물결이 가득했다. 세상은 그렇게 비리와 주장과 절규와 다툼의 소음이 가득한 파고의 범벅으로 주숙희의 의식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라의 고민거리를 신경쓸 겨를보다 당장 교육 계획을 마련해야 했다.
숙희는 함꼐 교육을 진행할 파트너 강사로 누구를 고를까 잠시 고민한다. 신지선이 머리에 떠올랐다. 하지만 깊이 면에서 마음을 놓을수 없다. 금융 실무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껍데기 핧기 교육이라는 오명을 피하기 어려울수도 있다.아무래도 어느 강사를 선임할지를 두고서 김미현과 또 한차례 충돌이 불가피할 것 같다.
아직도 그들 주류 강사들 눈에는 숙희 자신이 운좋게 어디서 갑자기 굴러들어온 이방인이었다.
사실 하이파이에 입사할 때 자신을 면접 본 사람이 인력 파견 담당 고미라였다.
전 남편이 허리 사고로 2달간 순향 병원에 입원할 무렵이었다.
병동에서 자리를 지키는 숙희를 향한 의사며 간호사들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다.차분하고 이지적인 표정으로 남편의 환부에 드래싱까지 능숙하게 해내는 숙희의 섬세함에 병동 의사들이 혀를 내둘렀다.
마땅히 경제적 수입이 없던 시절 병원비 충당을 위해 하는 수없이 급히 일자리를 물색하던 중 같은 병동의 노인 요양환자에게 어느날 말벗을 해주는 모습을 본 이사장의 시선에 들었다.
병원 경영진에 의해 숙희는 순향 병원에 간호 조무사와 용역 직원을 파견하던 하이파이 컨설팅으로 소속을 겸하면서 환자 접객 창구 업무를 보다가 소정의 심리 상담사 교육을 받은 후에는 치매 노인이나 장기 요양 환자를 위한 감정 조절 워크샵 진행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파견 직원으로서 고객 서비스 교육과 인생 비젼 교육을 받던 중 숙희가 보여준 담당 강사보다도 섬세하고 기발한 매너는 현장을 둘러보러 나온 조소장의 주목을 끌었다.결국 파견 직원 신분을 정리하고 숙희는 조소장의 특단에 의해 하이파이의 강사로 특채되면서 동료들이 수료해온 강사 자격 코스를 초고속으로 밣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프리젠테이션 스킬을 지도하는 교육사업부 활동이 그녀에겐 가장 어울렸다.
발표 문건에 대한 수정 작업을 학창시절부터 과외와 더불어 주요 아르바이트로 해왔기 때문이었다.
결혼 직후에도 집에서 워드 타이핑을 아르바이트로 하곤 했었다.
결혼을 서두른 남편의 성화에 신혼살림을 꾸렸으나 맘에 드는 직장이 없다며 남편은 차라리 시험 준비를 한다며 시간을 까먹고 있었다.
대학때 끊이지 않고 하던 입시생 과외를 했지만 그것 만으로는 생계가 힘들어 문서 작성 교육까지도 아르바이트로 하곤 했다.
대학때 다급한 친구나 복학생 선배들이 학점을 받기 위해 자주 매달려 해줘버릇 했었고 과외가 없을 때는 대체 아르바이트 거리였다
그러다가 컴퓨터가 많이 보급되면서 파워포인트 문서 대신 작성을 의뢰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정갈한 내용으로 핵심을 정리해내는 숙희의 문서 작성 맵시는 고객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하루는 문서 작성을 의뢰해왔던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직접 발표를 좀 해주시면 안될까요라는 부탁이었다.
또 그녀가 지도하는 마케팅 기획력과 실습 프로그램을 보고서는 사내 리더십 교육을 직
접 운영해주길 바랬다. 당연히 리더십 교육사업 본부장 미현은 월권이라며 반발하곤 했
다.
그때였다. 문자메시지가 들어오는 알람이 느껴졌다. 같은 사무실의 후배 강사 신지선이었다.
‘언니 저 영등포 쪽에 와 있어요.저 좀 태우고 회사로 가 주시면 안될까요?’
이상했다. 지선이는 어떻게 매번 자신이 있는 곳을 알고 차로 픽업해 달라는 연락을 보내는 것일까?
생각해 보니 지선의 그런 연락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출근하고 오전이면 지선이 주숙희의 자리 근처를 맴돌곤 한다. 아침 식사로 챙겨오는 주숙희의 사과 한쪽을 얻어 먹기도 하고 때론 자신이 준비해온 삶은 고구마도 나눠주기도 한다. 어느 고객사에 대한 영업에서 진척이 있는지 직접 물어보기도 하고 고객과 면담 일정을 잡는 전화 통화를 가만히 옆에서 듣기도 했다. 주숙희의 하루 동선을 파악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여의도 증권사에 오후 2시 미팅이 있다는 것을 지선은 그날도 파악하고 있었다.
음주 운전을 하다가 면허가 취소된 지선은 종종 주숙희의 차를 동승하곤 했다. 같은 대학 후배인데다 3살이나 어린 지선은 주숙희를 언니 언니 하며 따르며 자기 속내를 자주 털어놓기도 하지만 숙희의 어두운 표정이 보일때는 누구보다 눈치를 채고 달려오는데도 부지런하였다.
하지만 지선과의 잡담에서 듣게 되는 그녀의 크고 작은 근심과 회사에 대한 불평들을 귀기울여 들어주기가 점점 피곤스러워지고 그녀의 사적인 삶의 영역에서 크고 작은 도움의 손길이 되어줘야 하는 게 조금씩 부담으로 다가왔다.
지난달 강원도 정선으로 회사 직원들이 가족 동반 1박 2일 워크샵을 갈때도 그랬다. 지선은 외동딸 수현이를 데리고 와서는 내내 주숙희에게 맡겨두곤 했다.
‘수현아 이쁜 이모 좀 놀아주세요 하고 있어.. 엄마는 볼일 좀 보고 올께..’
덕분에 딸아이랑 놀아 주느라 일찍 자고 싶던 마음을 눌러야 했고 밤늦게까지 직원들과 노래하고 술 마시고 돌아온 지선이 야속하기만 했다. 이튿날 아침은 늦잠을 잤던 친구다.
‘언니 미안한데 수현이 아침 좀 먹여 주세요’라고 한마디 던지고 그녀는 다시 이불속으로 몸을 웅크렸었다.
또 어느날은 딸 수현이가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술래잡기 놀이를 하다가 책상 모서리에 얼굴을 다친 적이 있었다. 연락을 받고 다급해진 지선은 급히 현장으로 달려가야 했고 마침 10년이 넘은 지선의 차는 트랜스미션 장애로 수리 입고 중이어서 결국 숙희의 차를 빌려타고 갔다. 그날 숙희는 결국 차 없이 퇴근을 해야 했다.
불혹의 나이를 넘겨서일까? 숙희는 문득 자신이 싫어질때가 있다. 이제는 누구의 그런 크고 작은 부탁을 거절하거나 따돌리지 못하는 자신이 한살 두살 먹으면서 부담스러워지는 걸 느낀다.
지선이 말해준 처음 가보는 길 영등포 시장통 거리는 찾기 힘든 길이었다.
‘얘는 하라는 영업은 하고 있는거야? 시장통 거리에 기업 교육을 상담할 업체가 어디 있다고…’
그렇게 푸념하는 사이 주숙희는 지선이 말한 시장통 3번째 골목을 놓치고 지나친다. 청과물 가게를 찾다가 지친 나머지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어.. 언니 거기 연흥극장 맞은편 동방 은행 옆골목으로 들어와서 50미터쯤 들어오면 양념 치킨 집이 있는데 그 맞은편이에요”
주숙희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시며 전화를 끊었다.
채소를 파는 용달차며 오토바이며 리어카로 길은 인산인해였다.양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힘겹게 오가는 아주머니들이 보이자 문득 시집살이 시절이 떠오른다.
“너는 돈 무서운줄 모르고 쇼핑 봉지를 50원씩 사서 쓰니? 바구니 들고 다니면 될 것을!”
당시 시어머니의 매섭던 한마디가 귓전에 들려오는 듯 숙희는 순간 몸이 움추려진다.
한참을 길을 더듬어 가서야 양손에 뭘 잔뜩 들고 있는 지선이 시야에 들어 왔다.
“엄마가 이 시장에서 반찬가게를 하시거든요. 근처에 업체에 연수 상담 나왔다가 엄마한테 들렸더니 먹을걸 잔뜩 싸주셨네..언니 깻잎 짠지 좋아하지? 이거 집에 두고 드셔요”
숙희의 차에 들어서면서 지선이 뭔가를 내밀었다.작은 반찬통 하나에 깻잎이 얇게 깔려 있었다.짭짤한고 달큰한 간장냄새가 새어 나왔다.숙희는 살짝 창문을 열었다.하지만 고마웠다. 깻잎을 좋아하는 엄마가 생각났던 것이다.
그런데 차를 후진하려는 때였다.쿵 둔탁한 소리가 울리며 순간 차가 짧고 강한 충격으로 꿈틀거렸다.
지선이 자랑한다면 뚜껑을 열었던 반찬통은 발 아래 엎질러져 버렸다.
“지선아 너 안 다쳤니?”
“어.저는 괜찮아요.”
뒤를 돌아다 보았다. 채소 장사의 1톤 용달차가 짐을 잔뜩 실은채 코너 앞으로 오다가 후진하는 주숙희를 보지 못하고 후미를 받아 버린 것이었다.
내려 보니 뒷 트렁크가 움푹 꺼져 있었다.
용달차 기사는 운전석에서 내리더니 얼굴이 사색이 돼서는 연신 굽신거렸다.
“아이구 죄송해요. 선생님. 애미가 버리고 간 다섯쌀 딸애가 하도 보채는 통에 정신을 깜빡해버렸네요. 도망 나간 애미 때문에 아이를 혼자 키우며 하루 벌이하자니 정신이 없네요. 한번만 봐주세요.?”
그는 손이 발이 될정도로 빌기라도 하듯 한숨도 안 쉬고 애걸하는 말을 연신 이어가고 있었다.
며칠은 머리를 안감은 듯 꽤재재한 아저씨였다.
가까이서 보니 콧털이 삐죽삐죽 나와있는 마르고 왜소한 아저씨였다.
용달차에 그의 옆자리 조수석에는 빼빼로 통을 들고 있던 딸로 보이는 여자애가 큰 소리로 울고 있었다. 놀란듯 크게 떠진 눈을 하고 있는 대여섯살로 보이는 여자애는 먹던 빼빼로를 양손에 들고 있었고 초코렛이 녹아 손에 흐르고 있었다.
“아저씨 괜찮으니깐 그냥 가세요. 아이가 울고 있네요”
주숙희는 연신 인사를 하며 돌아서는 그 기사를 향해 한참동안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도대체 아이 엄마는 어딜 가고 저러는 것일까? 아이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오래 남았다.
“아이를 혼자 키우는게 무슨 큰 일이라고 저럴까? 염치도 없어.언니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저 정도면 견적이 한 50만원은 나올텐데..”
숙희도 한숨이 나온다. 이럴때 지선이 처럼 손해를 변상해 달라고 상대방을 윽박지르면서 살고 싶을 때도 있다. 자신이 손실을 보게 될 상황에서 좀처럼 양보하지 않고 실갱이를 마다하지 않는 지선이 차라리 부럽다.반면 늘 다툼과 실갱이 앞에서 양보하며 살아온 자신이 싫어진다.
기분이 가라앉은 주숙희를 지선이 눈치챈 듯 지선은 어깨를 들썩이며 호들갑스럽게 말한다.
“언니! 그래도 차로 퇴근 못할 형편이 되면 좋은게 그래도 하나는 있잖아요”
뭔가를 기대하라는 듯 지선이 웃는다.
“음주 운전 걱정 없이 한잔 할 수 있잖아요.저 때문에 욕보시게 돼서 죄송해요. 제가 한잔 쏠께요”
회사로 도착후 근처 카센타에 차를 맡기고 대충 업무를 마무리한 숙희는 앞장을 서는 지선을 따라 홍대입구 마포 숯불 갈비로 향했다. 시원한 맥주 대신 독한 소주가 당기는 저녁이다.
“그래 어머니는 영등포 시장에서 장사를 하신지 오래 된 거야?”
“네. 아버지 돌아가시고는 집에 계시면 서글프다시면서 식당 심부름을 하시다가 작년부터 반찬장사 하셔요”
지선이 연거푸 소주를 두잔 비우고 담뱃불을 붙인다. 숙희도 하나 달라고 청한다. 금연을 하기로 한 결심이 오늘 이렇게 또 무너진다.
“언니 뭔 생각에 그렇게 또 빠져 있어요?”
입에서 새어나온 담배 연기가 녹록한 밤공기를 머금으며 퍼져간다. 숯불구이 식당의 구조는 실내석과 실외석이 구분돼 있었다.
낮에 그 울던 아이의 울음소리, 난감해 하며 허둥거리던 가난한 그 아빠의 표정이 눈에 밟혀 담배를 또 한모금 빨았다.뜨거운 연기를 깊이 들이 마신다. 가슴을 한바퀴 휘저은 연기를 눅눅한 밤 허공에 길게 뿜었다.
그렇게 가슴에 찌든 동정과 연민과 아픈 영혼의 잔재들이 저 연기따라 뱉어 버리고 싶었다.몸이 약간 뽀송뽀송해져 오는 느낌이었다.
“언니 어서 좀 드세요. 고기 다 타요.”
주숙희는 불판에 고기만 가위로 썰로 뒤집어 주고 있었다.그제서야 주숙희는 자기 손에 젓가락이 없음을 알아 채렸다.
주숙희는 돼지 갈비를 상추쌈에다 마늘에다 파에다가 알뜰히도 싸서 먹는 지선을 물끄러미 보았다.
녀석을 처음 본 것은 20년전 대학 동아리룸에서였다.대학 1년생 신입생 지선은 가정형편이 어려웠다.반지하 그것도 방 한칸 월세를 얻어 오빠랑 동생 그리고 엄마 아빠 4명이 살고 있었다.
실속있는 시간을 보내겠다고 찾아온 영어회화반에서 지선은 늦게까지 귀가를 않던 적이 많았다. 선배들을 따라 저녁도 먹고 학점 후한 교수의 강의를 골라 듣는 요령도 듣다가 졸업반 선배들의 취업준비담을 주목하기도 했다. 그렇게 벼뤘지만 1학년 1학기때 끝내 장학금을 받지 못하자 어느 늦은밤까지 동아리 룸에서 엉엉 울던 아이였다.
등록금 납부기한때 마다 노심초사하던 지선을 여러 차례 맘 아프게 보아왔던 숙희였다. 가능하면 지선에게 식사를 해결해 주려 했고 동아리 사람들 여럿과 함께 밥을 먹으러 가면 주숙희는 지선의 것만이 아닌 전체의 밥값을 다 내곤했다. 지선의 것만 챙기면 그 아이의 자존심이 상처를 받을까봐 싶어서 함께 간 서너명의 몫까지 대신 밥값을 치르곤 했다.
한참 연락이 없이 지내던 지선이 3년전 주숙희를 찾아온 것은 대학 동문회에서 1년마다 발간해온 동문 주소록을 보고서였다.
그간의 세월이 녹녹치는 않은 듯 얼굴이 무거운 표정의 지선은 한참 동안 살아온 시간을 늘어놓았다. 남편과는 별거중이었고 1년후면 초등학교에 입학할 딸이 하나 있었다.
이런 저런 신변상황을 말하면서 지금 보험영업을 한다는 대목까지 말을 뱉은 지선은 본격적인 용건을 꺼낼 순간을 재고 있었다. 두 달째 계약실적이 없다는 중, 자기네 보험영업소 소장이 실적 따지는데 너무 깐깐하다는 둥…
그래도 지선은 ‘언니! 한번 도와 주세요’라며 보험계약을 들어달라고 말을 차마 하지는 못한채 주숙희의 직업을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언니는 마케팅 전문가니깐 이런 저런 회사 직원들의 해결사겠어요. 선생님 소릴 들으시겠어요..”
자세히는 물어보지 못했지만 주숙희는 지선의 형편이 많이 안좋은 것을 모른척할수 없었다.
이튿날 주숙희는 회사 조 대표에게 다소 무리한 약속을 하고서야 지선의 입사를 허락받을수 있었다. 경력도 없고 나이도 많은 지선을 입사시키는 대가로 주숙희는 조 대표가 벌려 놓은 중견 기업체 대표이사들 대상 리더십 코스를 활성화 시켜 달라는 과제를 성공시켜야 할 형편이었다.
“그런데 언니 오늘 낮에는 어느 회사를 방문한거야? “
2인분을 더 주문하면서 지선이 주숙희에게 자신의 주된 관심사를 물어오기 시작한다.
“어..증권사 다녀왔어..”
“역시 언니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데 달인이셔.사무실에 다른 컨설턴트들은 다들 기존 고객들 리스트 가운데 자기 것을 하나 더 챙길려고 다투며 혈안인데…역시 언니는 소장님 말씀처럼 고고한 학이야..”
숙희는 벌써부터 뭔가를 기대하려는 지선이 이젠 부담스럽다. 지선이 고객들 앞에서 당당히 서지 못하는 걸 눈치 챈 것은 언젠가 함꼐 고객 방문을 갔을 때였다. 그 날 이후로 지선은 영업을 한다고 출근 도장을 찍고 사무실을 나섰지만 별로 회사들을 방문하는 것 같지 않았다. 주숙희가 수주한 교육 물량에서 함께 파트너 강사를 하면서 그럭 저럭 월별 실적을 챙겨간다.
“언니 이번에 증권사 교육 하게 되면 딴 사람 말고 저부터 끼워 주셔야해요 !”
숙희는 선뜻 그러마 하고 대답을 할수 없었다. 경제 금융 계통의 상식이 그래도 상대적으로 배여 있는 보험 설계사 출신의 안민영을 생각하고 있었다. 숙희의 다음 행보를 짐작하고 선수를 치려는 듯 고기를 다 먹고 나오는 길에 지선은 고집스럽게도 끝내 자신이 계산을 치른다.
이번달에는 보톡스 주사를 꼭 맞어야겠다면서 예상 수입을 재고 있는 그녀가 심상치 않았다. 무엇을 이루지 못하거나 충족시키지 못할까봐, 기회를 얻지 못할까 염려하는 두려움의 반로같았다.
보톡스를 맞은 후에는 성형을 하겠다고 하겠지..그래서 외모를 뜯어 고쳐서라도 사람들 앞에서 좀더 좋게 보이려고 조바심 속에 길을 찾는 모습이 허둥대는 꼴로 보여진다. 주숙희는 지선의 두려움증을 일찍이 해소해 주지 못한걸 후회한다.
남편과 별거중인데다 회사내에서는 주숙희 외에는 별로 상대해 주는 사람이 없는 지선이었다. 그녀는 그런 두려움을 수반하는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했고 그래서 누군가 의지할 만한 강자와의 교유가 자신을 보호해 준다고 믿어 주숙희를 자꾸만 찾고 따랐다. 그런 지선에게 있어서 타인은 우정이라는 이름의 인질이 되기 마련이다. 그 인질이 자신을 외면하고 무언가를 요구하면 우리는 이내 충격을 받고 깊은 슬픔에 젖는다.
그렇게 두려움에는 죄의식이 내재한다. 다른 이는 건강한데 자신은 나약하고 가난하다는 생각, 어떤 사람은 풍요한데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
언젠가 사주팔자를 보고 와서는 자신의 올해 운세가 능력많은 남자를 알게 되는 해라며 그 남자가 이 사람일까 저 사람일까 골몰하던 후배였다. 그런 기대 또한 일종의 두려움이 아니고 무엇이랴.그런 두려움은 내면의 파괴적인 에너지다. 정신을 나약하게 만들고, 사고방식을 왜곡시키며, 심지어 술수와 온갖 이론과 터무니없는 미신, 도그마를 강요한다.숙희는 이렇게 우울한 생각을 씹으며 쓰디 쓴 소주잔을 비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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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읽느라 힘드러죽는줄 알았네요 ㅎ
설마 긴글을 정말 다 보셨는지요? 감사드립니다.
다보진못하구여...읽으며서 쓰신분 생각도좀 햇죠...힘드셧겟네요..쓰시느라고 ㅎ
남자분 맞으신가요??참 여자들의 속성을 속속들이 세밀하게도 표현하셨습니다..ㅎㅎ
에고...안 그래도 다른거 읽고 있는뎅...클났습니다~중간에 끊는거는 또 성격에 안맞고..
길고 지루한 글 관심주셔서 감사합니다. 네.저는 남자입니다. 여성심리 묘사에 무리가 있는 부분이 보이시면 가차없이 지적해 주세요.
잘보고 갑니다..^^*
좋은글 감사하구요.
늘 평안하시길요..^^*
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