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이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한 것은 50년 전인 1963년 12월 17일이다. 1961년 5·16쿠데타를 일으키고 2년 7개월 만이다. 당시 박정희와 윤보선이 격돌한 대통령선거 쟁점은 사상 논쟁이었다. 여당 후보가 야당 후보를 상대로 색깔 공세를 취하는 요즘의 선거 양상과 달리 당시 대선은 야당 후보 윤보선이 적극적으로 이념 공세를 취하고 여당 후보 박정희가 방어하느라 혼쭐난 선거로 기록되었다.
박정희, 15만 표 차로 윤보선 따돌리고 대통령에 당선
1961년 5·16쿠데타 후 모든 정당·사회단체의 정치 활동을 금지해온‘군사혁명위 포고령 제4호’가 1963년 1월 1일을 기해 폐기되었다. 이로써 동면에 들어갔던 정치가 1년 7개월 만에 기지개를 폈다. 기성 정치인들은 곧 군정(軍政)이 끝나고 민정(民政)이 시작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여기에 1963년 2월 18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나는 민정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며 정치활동정화법(1962.3)으로 활동이 금지된 정치인들을 풀어주겠다”고 발표한 시국 수습방안도 기성 정치인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1961년 5.16 쿠데타 후 4개월이 지난 11월 27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청와대를 찾아가 윤보선 대통령을 예방하고 있다.
수습방안에는 ‘정치 보복 금지’, ‘혁명정신 계승’ 등 9개항을 수락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긴 했지만 박정희 의장이 민정에 불참한다는 데 기성 정치인들로서는 이런저런 조건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재야 정치 지도자, 정당 대표, 군 지도자 등 46명은 2월 27일 ‘정국 수습 공동선언’을 발표하는 것으로 박 의장의 시국 수습방안에 화답했다. 그들은 박 의장의 시국 수습방안을 수락하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다짐하는 선서식을 열었다. 같은 날 2,322명의 정치인들까지 해금되자 야당은 “사실상 군사정권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라며 낙관적인 논평을 냈다.
그러나 야당은 박정희가 군복을 벗지 않는 한 여전히 모든 실권이 박정희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2·18 민정 불참 선언’이 전략적 선택이었음은 3월 들어 하나 둘 드러났다. 3월 7일 원주 1군사령부에서 “국민에게 해독을 끼치고 질서를 혼란하게 만든 기성 정치인은 일선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한 경고는 그 신호탄이었다.
3월 11일엔 중앙정보부가 이른바 ‘군부 쿠데타 음모사건’을 발표해 정국을 다시 급속도로 냉각시켰다. 사실 여부를 떠나 쿠데타 음모 사건 발표는 박정희가 당시 상황을 혼란 속으로 몰고 가 다시 정국의 주도권을 잡는 계기로 활용되었다. 3월 15일엔 80여 명의 수도경비사령부 장교와 하사관이 “군정을 연장하라”, “계엄령을 선포하라”며 건군 이래 첫 군인 데모를 벌였다.
박정희 의장, 정치권 쥐락펴락하며 출마 시기 저울질
분위기가 성숙했다고 판단한 박정희가 마침내 비장의 무기를 꺼내든 것은 3월 16일이었다. “군정 4년 연장안을 국민투표에 붙이겠다”고 발표하고, 최고회의가 비상사태 수습을 위한 비상조치법을 통과시켜 언론 검열과 정치활동 금지를 선언한 것이다. 김성은 국방장관을 비롯 160여 명의 지휘관은 3월 22일 전군지휘관회의에서 “군은 박정희 의장의 3·16 군정 연장안을 지지한다”는 요지의 결의문을 채택해 박정희의 속내를 대변했다.
박정희는 이렇게 정가에 엄청난 소용돌이를 일으키고나서 4월 8일 “군정 연장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9월 말까지 보류하고 정치활동의 재개를 허용한다”며 군정 연장에서 발을 빼는 모양새를 취했다. 이로써 군정 연장은 뒤로 미뤄졌지만 박정희의 치고 빠지는 전략으로 박정희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2·18 민정 불참 선언’은 어느새 휴지가 되어버렸고 박정희의 민정 참여는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 되었다.
야권이 단일대오를 형성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던 8월 14일 군사정부가 “대통령 선거는 10월 15일, 국회의원 선거는 11월 26일에 치르겠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국민의 관심은 3년 7개월 만에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로 급속히 이동했다. 박정희는 8월 30일 대장 전역식과 공화당 입당을 동시에 해치운 뒤 8월 31일 공화당 총재 겸 대통령 후보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다.
윤보선 후보가 서울 교동국민학교에서 열린 군정연장반대 대강연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1963.5.5)
이렇듯 박정희가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이는 동안 야당 정치인들은 잠시 하나로 결집하는가 싶더니 이내 분열하기 시작했다. 구 민주당 구파는 무소속과 구 자유당계를 일부 참여시켜 민정당을 구성했고, 구 민주당 신파는 허정과 연합해 신정당을 창당했다. 야권 통합의 무산으로 9월 15일 마감 때까지 박정희(공화당), 윤보선(민정당), 허정(국민의당), 송요찬(자민당) 등 7명이 대통령 후보로 등록했다.
선거 양상은 박정희, 윤보선, 허정의 3파전이었다. 강력한 여당 후보 1명에 야당 후보 2명이 맞서는 건 누가 보아도 야당에 불리한 싸움이었다. 게다가 박정희 측은 풍부한 선거자금, 공화당의 조직력, 각종 친여 사회단체까지 손에 쥐고 있었다. 결국 야권 통합을 바라는 정치권과 국민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허정(10.2), 송요찬(10.7) 두 후보가 윤보선 전 대통령을 지지한다며 선거 10여일 전에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함으로써 선거는 박정희와 윤보선의 각축전으로 전개되었다.
박정희-윤보선 선거 유세 중 터져 나온 사상 논쟁, 대선 정국 뜨겁게 달궈
새 권력자와 구 대통령과의 대결도 볼만했지만 무엇보다 대선 정국을 뜨겁게 달군 건 유세 중 터져나온 사상 논쟁이었다. 사상 논쟁 앞에서 다른 공약은 그저 곁다리 구호에 불과했다.
사상 논쟁의 발화점은 1963년 9월 23일 서울중앙방송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박정희의 정견 발표였다. 박정희가 기성의 정치인들을 사대주의적 근성을 지닌 ‘천박한 자유민주주의자’로 몰아붙인 게 발단이었다. 윤보선은 다음날 기자회견을 통해 “여순반란사건의 관계자가 지금 정부에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며 박정희의 여순반란사건 연루 사실을 환기시키는 것으로 맞불 작전을 펼쳤다.
실제로 박정희는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이 진압된 뒤 시작된 숙군(肅軍) 수사 때 남로당 가입 사실이 드러나 체포됐었다. 다만 대구 폭동 때 경찰의 총을 맞고 절명한 공산주의자 형 박상희의 죽음과 자신의 반골 기질이 작용한 입당이다 보니 공산주의에 중독된 골수분자는 아니었다. 당시 국방부 정보국장 백선엽의 도움으로 1949년 1월 말 풀려나긴 했으나 고등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과 파면을 선고받았다. 1949년 4월 중순에는 징역 10년으로 감형됨과 동시에 형 집행을 면죄받는 파격적인 특례를 받아 자유의 몸이 되었다.
사상 논쟁을 보도한 조선일보 1963년 9월 26일자 1면
윤보선의 기자회견은 박정희 측은 물론 국민에게도 충격이었다. 9월 25일 서울 교동초등학교에서 열린 야당의 시국강연회에선 “북한에서 밀파한 황태성 사건의 진상을 밝혀라”, “공화당 내에 6·25 당시 부역자 및 그의 가족이 월북한 자가 있다”는 구국청년동지회 명의의 전단까지 뿌려지면서 사상 논쟁은 더욱 가열되었다.
황태성은 박정희의 셋째형 박상희의 중매를 설 정도로 박상희와는 절친한 친구이자 공산운동을 같이한 동지였다. 박정희가 어릴 때 자신의 장래를 상의할 만큼 박정희와도 친분이 있었다. 1946년 10월 대구폭동 후 월북했다가 박정희를 만나러 1961년 8월 남하했으나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어 대법원의 사형 확정 판결로 1963년 12월 14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온 나라가 사상 논쟁에 휘말렸는데도 박정희 자신을 비롯해 최고회의나 공화당으로부터 사실 무근이라는 주장이나 반론이 제기되지 않아 의혹이 확산되었다. 윤보선 측의 분위기는 “대통령 선거 해봤자…”라는 체념에서 “한번 해볼 만하다”라는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국민들의 의혹이 이처럼 갈수록 커지자 9월 28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나서 “황태성이 박정희 의장과 친분이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일축했다. 그러나 10월 들어 허정과 송요찬의 후보직 사퇴로 판세가 요동을 치자 선거를 일주일 앞둔 10월 8일 박정희가 직접 나서 “여순반란사건은 나와 무관하다”며 연루 사실을 부정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10월 9일에는 황태성 사건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밝혔다. 박정희로서는 차마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더 이상 야당에 끌려갈 수 없다는 절박함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한 것이다.
윤보선 선거 후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 나는 정신적 대통령" 소감 피력
선거를 이틀 앞둔 10월 13일 윤보선 측은 확실한 승기를 잡기 위해 1949년 2월 17일자 경향신문과 2월 18일자 서울신문에 실린 ‘박정희 소령 무기징역 선고’ 관련 기사를 공개했다. 박정희 소령이 72명의 다른 장교와 함께 여순반란사건 이후에 있었던 군부 내 남로당 조직 수사에 걸려 군법 재판에서 유죄선고를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조선일보 앞에 설치된 개표 현황 속보판
비상이 걸린 박정희 측은 “박정희 후보가 여순반란사건과 관련해 재판을 받은 일이 없다”고 애써 부인하면서 “윤보선 가족 중에도 공산당원이 있다”며 물타기를 시도했다. 기사에 거명된 당시 재판장도 “나는 박정희 장군에 대해 재판을 한 사실이 없다”며 부인했다.
운명의 10월 15일. 투표를 마친 윤보선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미국 정보기관원의 집으로 피신했다. 박정희는 경주 불국사 근처에서 국민의 심판을 기다렸다. 10월 17일 오후 3시에 발표된 중앙선관위 집계에 따르면 박정희는 470만 2640표(46.65%)를 얻어 454만 6614표(45.10%)를 획득한 윤보선을 15만6026표 차로 따돌리고 박빙의 승자가 되었다.
윤보선은 선거 후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 나는 정신적 대통령"이라는 소감을 피력하고 4년 후의 리턴 매치를 기약했다. 박정희는 5·16쿠데타 후 2년 7개월만인 12월 17일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같은날 5·16으로 중단되었던 헌정도 부활하고 제3공화국도 첫 발을 내디뎠다.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사상 논쟁 때문인지는 몰라도 윤보선은 휴전선과 가까운 경인·중부지역에서 많은 표를 얻었고 박정희는 주로 1956년의 대통령 선거 때 진보당의 조봉암이 다수를 차지한 지역에서 윤보선을 앞섰다. 표의 남북 분할 현상과 여촌 야도 현상도 중첩되어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큰 무리 없이 치러진 선거였다는 게 당시 언론과 미국의 중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