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는 인물화를 그리고 싶어했다.
"성당보다는 사람의 눈을 그리는 게 더 좋다.
거지든 매춘부든 사람의 영혼이 더 흥미롭다. (편지일부)"
(또다른 편지에서)
"상상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내가 돈을 받을 때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무엇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비록 그동안 밥을 못 먹고 있었지만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그림을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돈이 손에 들어오는 즉시 모델을 구하러 나가서는 돈이 떨어질때까지 계속 작업한다. "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볼때 그 마음이 되어보고 싶어진다.
그 시대 졸라, 도데. 콩쿠르형제, 발자크 같은 문학의 거장들이 묘사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느낄때면 그렇게 그리는 법을 알고 싶어했고 렘브란트가 그린 매춘부의 초상에서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 그는 매춘부는 매춘부 답게 그리고 싶다고 하고
동일 모델로 2점의 그림을 그렸다.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 1885 빨간 리본을 한 여인의 초상 1885
항상 가난했던 그는 모델료 때문에 인물화를 포기하고 유화 채색 연습을 위해 꽃병과 정물을 그렸다.
그는 양홍색과 코발트 색에 푹 빠져있다. 코발트는 아주 신비로운 색으로 사물 주변에 분위기를 만들때 이보다 더 적합한 색은 없다고 하고 에메랄드 그린, 카드뮴색(노란색계열)을 좋아했다.
양귀비, 수레국화, 작약, 국화가 있는 꽃병 1886
이 시기 여동생 윌에게 쓴 편지에서
" 테오가 없었더라면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없었을 것이다. 친구같은 테오가 있었기에 내그림의 수준이 높아지고 모든게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은 좋은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다."
또한 테오가 여동생 윌에게 쓴 편지는
" 형의 지식과 세상에 대한 명석한 시각은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란다. 형이 더 나이 들기 전에 유명해 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형은 새로운 생각의 챔피언이다. 형은 항상 남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란다."
이 형제들이 주고 받았던 수없이 많은 편지글 속에서 항상 신뢰와 따뜻함이 있어서 진지한 글이 되었고 읽는 내내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1882년 2월 남프랑스 아를에 도착한 그는 꽃이 핀 과일나무 연작을 그렸고 3월에는 처음으로 파리 엥데팡당사롱전(관선의 사롱에 대항하여 신파 화가들이 창립한 전랍회)에 다른 인상파 화가의 작품과 함께 전시했다.
아래 꽃이 핀 자두 나무를 그리게 된 동기를 쓴 편지글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움을 느끼고 볼 줄 아는 예쁜 마음이 느껴져서 더 감동적이었다.
"오늘 아침. 꽃이 핀 자두나무가 있는 과수원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갑자기 멋진 바람이 불어오더니 다른 곳에서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광경을 보았다. 그럴 때면 작고 하얀 꽃잎들이 햇빛을 받아 불꽃처럼 반짝이곤 한다.
그 장면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순간순간 땅이 진동하는 걸 바라볼 각오를 하고 그리고 그렸다.
이 하얀색 화면에는 파란색과 라일락색 , 노란색이 많이 있다.
하늘은 하얗고 파랗다. 그러나 이렇게 야외에서 그린 작품에 대해 사람들은 뭐라 할까? 기다려볼 일이다."
꽃이핀 자두 나무 1888
아를에 와서도 테오를 통해 파리에 있는 젊은 화가들과 편지를 주고받던 고흐는 노란집을 아트리에로 꾸며서 화가 공동체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그 시대엔 가난한 화가들이 화상에게 물감값으로 그림을 헐값에 넘기게 되니까 그림을 그려서 공동으로 판매해서 그 수익금으로 공동작업을 하는 것을 구상하는 식) 그래서 그는 고갱을 초대했고 10월 23일 도착한 고갱과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아를의 고흐 집(노란집) 1888
이 노란집은 고흐가 고갱과 함께 생활하기 위해 집을 얻고 노란색으로 칠한 집이다.
그리고 고갱을 기다리며 그가 거쳐할 방에 걸기 위해 해바라기 연작을 그리게 되었다.
고흐는 해바라기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고 그가 남긴 해바라기는 그의 또 다른 자화상이 되었다.
연작은 모두 7점으로 3점은 15송이, 2점이 12송이이다. 붓의 터치도 강하게 느껴지고 해바라기가 주는 강한 느낌과 노란색이 실제 해바라기 보다 더 강한 느낌이 들게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고흐의 해바라기를 불멸이라는 의미를 주기도 한다.
(윗 첫번째 14송이의 해바라기는 1988년 영국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3++++만 2500달러에 경매되었다니 37년을 극심한 삶을 산 고흐에게 너무 늦은 ..그리고 이 시기부터 그림에 서명을 넣었다가 다시 멈춰버렸다고 쓰고 있다.)
고갱도 이 해바라기 그림에 아주 감탄하게되고 후에 헤어지고 나서도 동생을 통해 해바라기 그림을 요청하기도 했다.
아를의 포럼 광장에 있는 밤의 카페 테라스 1888
" 이 그림에서는 검은색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그림을 그렸단다. 아름다운 푸른색과 보라색 초록색만 사용했단다.
이렇게 밤을 배경으로 빛나는 광장은 셀퍼엘로와 라이미그린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렸단다. 밤에 별을 찍어넣을때는 정말 즐거웠단다." 그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고흐는 편지와 함께 동생에게 그림을 보내며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과 색채, 기법등에 대한 설명을 많이 하고 있다.
때론 동생 테오가 자신의 그림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아서 자신의 그림이 팔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발작을 일으키고 더 어려운 환경이 되었을 때 동생에게 그런 뜻을 비치기도 했다)
고갱과의 만남은 기대하고 생각했던 만큼 순탄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길어지고 있음은 내용 정리를 단순명쾌하게 하고 있지 못함도 있고 너무 욕심을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고흐의 그림은 지금부터 점점 더 깊이를 더해가고 있었다.
설날 잘보내 친구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