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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18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제1독서 : 호세 6,1-6
복 음 : 루카 18,9-14
그때에
9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부모님께서 친한 친구로부터 자녀에 대한
조기 교육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인 7살 때 스케이팅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1년이 지나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겨우 스케이트 날로 서 있을 뿐입니다.
결국 다른 운동을 시켰습니다. 이번에는 축구입니다.
그런데 공만 보면 피하기만 할 뿐, 신나게 달리기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린이를 본다면 어떤 아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마 대부분 운동신경이 부족한 아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성장해서 크로스컨트리 국가대표가 되었습니다.
단지 스케이트와 축구만 못할 뿐이었습니다. 사실 운동 종목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운동 중에서 두 종류의 운동을
잘하지 못한다고 운동신경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판단은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몇 가지의 모습만 보고서 ‘그가 틀렸다, 맞았다’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단 하나의 모습만 보고서 ‘그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단정 지어서도 안 됩니다.
사람들은 저를 보고서 외향적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남들 앞에 서는 것을 좋아하고, 또 대화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면서 단정 짓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외향적인 성격만 있지 않습니다.
혼자 있는 것도 좋아하고, 침묵 속에서 묵상하는 것을 너무나 즐깁니다.
이 모습을 보면 제게는 내향적인 성격도 분명히 있습니다.
함부로 판단하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몇 개의 모습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은 세리를 향해 ‘죄인’이라면서 손가락질했습니다.
동족에게서 세금을 징수해서 당시에 점령국이었던 로마에 전해주던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이 세리입니다.
당시 로마는 이 세리를 도급제로 권한을 부여했기 때문에
일정액의 세금만 바치면 자기 멋대로 금액을 정해서 많은 세금을 거두어도 묵인했습니다.
그래서 더 뭇 백성의 원성을 샀었지요.
그러나 그들이 모두 구원에서 제외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음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스스로 죄가 없다면서 이상한 감사 기도를 바치는 바리사이보다
자신을 낮추면서 죄인임을 고백하는 세리가 더 의롭다고 말씀하십니다.
함부로 판단하고 단정 짓는 사람이 바로 겸손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신 모습은 자신을 낮추어 모두를 받아들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국에 있을 때는 건강검진을 2년에 한번 받았습니다.
교구에서 사제들의 건 강을 위해서 배려해 주었습니다.
혈액검사, 위내시경, 안압 검사, 치과 검사, 청력검사, 체지방검사,
심전도검사, 소변검사, 장내시경 검사가 있었습니다.
검사 결과는 1달 정도 있으면 나옵니다.
검사 결과를 아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병원에 내방 하여서 의사 선생님과 상담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편으로 결과를 받는 것입니다.
귀찮다는 핑계로 우편으로 결과를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의사 선생님을 만나서 상담하는 것도 좋지만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처럼
제 몸에도 그다지 좋지 않은 곳들이 있기 때문에 상담하러 가지 않곤 합니다.
‘지방간, 콜레스트롤, 요산, 혈압’은 약방의 감초처럼 위험의 경계에 있습니다.
뉴욕에 와서도 몇 번 혈액검사를 하였습니다. 다행히 크게 더 나빠지지는 않았습니다.
‘털어서 먼지 나오지 않는 사람이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100점짜리 건강검진 성적표를 받는 것은 ‘희망 사항’인 것 같습니다.
건강한 몸을 위해서 건강검진을 받는 것도 필요하지만
건강한 정신을 위해서 건강검진을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겉으로는 건강한 정신을 가졌다고 자부했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정신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겉은 화려한 옷으로 단장했지만, 머리에 기름을 발라서 윤기가 나지만
그들의 마음은 교만으로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남을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고 떠들었지만,
자신들은 손끝 하나 움직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은 따라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마라.”
그들은 단식을 하면서 단식의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안식일의 계명을 지키면서 안식일의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제물을 봉헌하면서 제물 봉헌의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정신을 가졌던 사람들을 칭찬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서 굳이 찾아오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의 갈망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나을 것이라는, 그 갈망을 칭찬하셨습니다.
과부의 헌금도 칭찬하셨습니다.
헌금의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헌금을 하는 정성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자캐오의 나눔도 칭찬하셨습니다.
자캐오는 가진 재물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눈다고 하였습니다.
빚진 것이 있다면 4배로 되갚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와 그 가족은 구원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 자비를 청했던 죄인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였습니다.
세리는 겸손되게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였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1년에 2번 판공성사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탄생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서 대림판공성사를 마련합니다.
동방박사들이 ‘황금, 유향, 몰약’을 가지고 예수님을 방문했던 것처럼
나눔, 희생, 자선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드리기를 권면합니다.
성모님이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했던 것처럼
하느님의 거룩함이 나의 삶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도록 권면합니다.
주님의 수난과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서 사순 판공성사를 마련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음을 감사드립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갈 수 있도록 결심합니다.
베로니카처럼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리도록 결심합니다.
1년에 두 번 대림과 사순의 판공성사를 잘 준비하는 사람은 건강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차이점
박재천 안셀모 신부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세리는 진심으로 통회 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낮추어,
죄인임을 인정하고 주님의 자비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는 주님의 율법을 지키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갔지만, 의롭게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스스로 의롭다고 칭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마치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 없는 듯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한다고 생각하는 교만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며,
이 미사를 온 정성을 다해 봉헌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 앞에 드러난 바리사이의 교만함을 묵상하면서
어쩌면 우리 현대인들도 이렇게 하느님 앞에 교만함에 빠져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어떤 교만들이 있을까요?
먼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종교를 부인하는 교만입니다.
많은 현대의 젊은이들은 하느님이 계신다면 세상에 왜 고통이 있고,
질병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가느냐고 말하며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자기 도피처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고통에 의미가 있고, 질병은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교만인 것입니다.
이와 관련되어 두 번째 교만은 지적인 교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의탁하는 것은 과거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시기에 생겨난
인간의 무지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하느님의 초월성에 대한 무지이며,
눈에 보이는 것만을 생각하는, 자연주의나 인간 이성을 그 중심에 두는 교만입니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우리의 생각이 하느님의 생각보다 클 수 있을까요!
하느님을 경외하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교만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권력과 재물에 대한 교만입니다.
높은 자리에 있거나 재물이 많으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교만은
현대인들을 병들게 하고 있으며, 자리 때문에, 돈 때문에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무서운 세상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잊어버린 교만입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교만도 포함됩니다.
자신이 받은 달란트 역시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며 공동체를 위한 것인데,
마치 자신의 것인양 여기며 교만에 빠지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네 번째는 자신이 계명을 잘 지키며 살고 있다는 윤리적인 교만입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 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당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은, 올바르다고 여기며
누구보다도 규율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윤리적인 교만은
가장 무서운 영적 성장의 장애물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매우 교묘해서 마치 교만이 아닌 것 같이 느껴집니다.
어떤 것이냐 하면 겸손을 가장한 교만입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이며, 죄인이고, 아픈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자기 연민과 자기 비하에 빠진 이들도 있습니다.
겸손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하느님께 드러내고 자신을 봉헌하는 것인데,
지나친 열등의식과 부족한 자존감은 자기애라는 숨겨진 교만인 것입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오늘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에 관한 복음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둘의 기도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의롭다’의 주제의 차이입니다.
바리사이는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겼지만,
세리는 스스로를 의롭지 못한 ‘죄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의롭게 된 이는 바로 세리였습니다.
줄 다 기도를 바쳤습니다. 게다가 바리사이는 율법을 너무도 잘 지켰습니다.
너무도 충실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의롭지 못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렇죠! ‘교만’입니다.
꼿꼿이 서서 기도하던 그의 모든 의로운 말과 행동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만족이었죠. 윤리적으로 완전하다고 믿었으며, 종교적으로 스스로 충실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적으로도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으며, 종교 지도자로서 그에 맞는 삶을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세리는 자신의 직업으로부터 오는 불의함을 받아들였으며,
하느님 앞에 죄인임을 인정하고 주님의 자비를 청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지탄받는 직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성전에 왔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믿었기에
그의 기도는 자기 연민이나 자기애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며 주님을 향한 온전한 의탁이었습니다.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는 그의 모습은
가식적인 것이 아니라 진심에서 나오는 겸손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의롭게 살 수 있다고 여긴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며 주님의 은총을 간구했습니다.
그는 진짜 용서를 받고 싶었습니다.
그는 하느님 중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의로움의 은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사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교만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봉헌하며 겸손하게 살고 싶지만,
문득문득 교만의 벌레는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 곁에 찰싹 붙어 있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때로는 스스로를 비하하며 자신이 만들어 놓은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겸손을 가장하며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거머리처럼 우리에게 들러붙는 교만의 무서운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순종과 가난’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느님을 경외하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분 앞에 매 순간 “왜”라고 고백하며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빈손, 빈 마음의 가난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것들로부터 초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자신을 의탁하며 마음을 비우고 사랑으로 살아갈 때,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 우리를 통해 겸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이 안에 있는 겸손을 발견할 때 우리는 자신의 교만을 보게 되며,
그 안에서 새로운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겸손은 자신보다 겸손한 자들을 만날 때에만 발견되는 하느님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성전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 위에 있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을 내려두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과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쳐 놓은 자기애의 장막을 걷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통해 주님의 겸손이 발견되고,
있는 그대로의 너를 통해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며,
참된 영적 자유로움 안에서 주님의 자비를 입고,
이 성전에서 속죄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빕니다. 아멘.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상히 여겨주십시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대조를 이루는 두 인물, 곧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여기는
죄인인 바리사이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기는 의인인 세리가 있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차이는 ‘보는 눈’에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의롭다고 보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보는 눈입니다.
곧 바리사이에게는 자신을 높이는 눈이 있고, 세리에게는 자신을 낮추는 눈이 있습니다.
둘째는, 그들은 ‘타인을 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타인을 업신여기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타인을 중히 여기는 눈입니다.
곧 바리사이에게는 꼿꼿이 서서 하늘을 향하는 눈이 있고,
세리에게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눈이 있습니다.
곧 타인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고, 자신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습니다.
셋째는, 그들은 눈이 ‘바라보는 곳’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향하여 있고, 세리의 눈은 하느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 자신하고 “혼자말로 기도했습니다.”(루카 18,11)
이 말의 원어를 직역하면, “자신을 향해 기도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8,11)라고 말하지만,
실은 긴 독백으로 하느님께 설교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곧 하느님이 자신의 가치 확인과 자화자찬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우러르기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을 앞세웁니다.
반면에 세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있으며, 자신과 하느님의 거리를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루가 18,13),
그리고 그분 앞에서 자신이 진실로 누구인지를, 곧 죄인임을 깨닫고서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상히 여겨주십시오.'”(루카 18,13)
그렇게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자신을 맡깁니다.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느님 앞에 있기에, 자기를 비하하거나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자비가 필요함을 알고 그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되 결코 자신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중히 여기고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도 귀중하게 여기고 중시합니다.
그러기에 겸손은 자신을 낮추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우러르며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주님 앞에 서 있고, 주님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의 자비를 입고서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자비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필요한 것은 당신의 자비, 그 외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가슴을 치며 하느님을 향해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루카 18,13)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주님!
낮추는 이가 되게 하소서.
타인의 평가나 꾸짖음을 물리치지 않게 하시고, 인정할 줄을 알고 굽힐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을 차별하지도, 업신여기지도 않게 하시고, 존중하고 존경하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 앞에 서 있는 자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을 내세우지도, 숨기지도 않게 하시고, 용서를 청하고 자비를 구하게 하소서.
오, 주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아멘.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깎아내리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이다.
내가 먼저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신학을 공부하여 교사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교만에 빠진 사람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말씀이다.
바리사이는 하느님께 기도하러 간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가 하느님을 향하여 감사기도를 바친다고는 하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기도한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찬사를 하느님 앞에 올리러 간 사람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한다는 핑계로 허영에 빠져
교만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면 단식이 그에게 무슨 득이 되며,
십일조를 바치면서 자랑하고 그것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남을 비난하고 단죄한다면
그 십일조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바리사이는 계속 ‘나는 다른 인간들과 다르다.’라고 칭찬하기에 바쁘다.
바리사이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 자신의 교만을 늘어놓고 있다.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며 찬양의 제물을 하느님께 바치는 사람은
자신 안에 숨어있는 사악한 자를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감사 찬양을 드리는 바로 그때 우리를 덮치려고 사탄이 몸을 숨기고 있다.
바리사이에게 한 것처럼 행실로 우쭐거리게 하지 않고 다른 교만으로 우리를 취하게 할 것이다.
아마 아직도 자신의 행위로 우쭐거리게 하는 것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세리는 감히 눈도 들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기죽은 태도가 보이는 것 같다.
하느님의 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방종한 삶을 살아온
자신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이 두려웠다.
우리는 그의 몸짓에서 자신의 악행을 책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리석은 바리사이는 뻔뻔스럽게 눈을 치켜뜨고 꼿꼿이 서서 제 자랑을 했지만,
세리는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게 여긴다.
자기 죄를 고백하고 의사에게 자신의 병을 알리며 자비를 간청한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주님께서는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14절)
바리사이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교만하게 자기 자랑을 했고 세리는 겸손하게 자기 죄를 고백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바리사이의 자선보다 세리의 고백을 더 기꺼워하신 것이다.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돌아간 것은 그가 겸손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의 교만한 기도는 하느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켰고,
세리의 겸손한 기도는 더 큰 힘을 발휘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이웃과 비교하여서는 안 된다.
우리가 보고 또 비교하며 따라야 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내가 남들만큼 선한가?"가 아니라, "내가 하느님 앞에 선한가?"이다.
즉 우리들의 선행이나 신앙생활이나 그 기준, 척도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마 우리가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생과 비교할 때는
우리도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할 것이다.
이 사순절이 우리에게 큰 은총의 기간이 될 수 있도록 이런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세리의 기도 – 처절한 자기 인식과 통한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이 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 비유’는
루카 복음에만 기록된 특수사료이다.
그런데 比喩, 또는 例話라고 보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 직설적이고 노골적이다.
예수께서 가르침을 비유로 말씀하실 때, 그것이 사람과 관련될 경우,
통상 ‘어떤 사람, 어떤 부자, 어떤 재판관, 어떤 과부, 어떤 여인, 한 아버지’ 등의
不特定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선택하신다.
그러나 오늘 비유의 주인공은 당시 유다 사회의 특정 인물,
즉 예수님의 말씀을 그 자리에서 듣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라는 점이 특이하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하는 세리의 기도하는 태도와
스스로 옳다고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하는 태도를 비교함으로써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을 노골적으로 질책하고 있다.
세상에는 의인으로 자처하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죄인으로 자처하는 의인도 있다.
그러나 누가 죄인이고 누가 의인인지 그 판단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신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그 판단을 하느님께 맡겼다.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14a절)
아울러 스스로도 자신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14b절)
하느님의 판단 기준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마치 창세기의 카인과 아벨의 제사를 보는 듯하다.(창세 4,3-5)
농부인 카인이 땅에서 난 곡식을, 목자였던 아벨이 양 떼 가운데 맏배의 기름기를
각각 예물로 드렸건만, 왜 야훼 하느님의 처사는 불공평한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이 대목의 성서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야훼께서는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셨다.”(창세 4,5)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이라는 성서 구절이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야훼께서는 사람이 바치는 예물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바치는 사람도 함께 받으신다는 점이다.
어제 오늘 복음에서 오히려 세리를 의인으로 인정한 하느님의 처사를 이해할 수있을 것이다.
기도는 오늘 비유 속의 바리사이파 사람이 했던 것처럼,
머리를 빳빳이 들고 장황하게 늘어놓는 자기소개나 자기과시도 아니며,
타인을 貶下하는 고발은 더더욱 아니다.
기도는 비유 속의 세리처럼 멀찍이 서서 고개를 숙이고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는 自己認識이며,
그래서 처절한 痛恨이며, 그래서 자비를 구함이다.
기도를 들어주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인간 삶의 결과만을 보시지 않으신다.
비록 그 삶의 결과가 부패와 부정 속에 허덕이고 있다 하더라도 그 마음과 생각을 꿰뜷어 보신다.
세리는 자신이 하는 일 때문에, 이미 의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로부터 갖은 업신여김을 받았다.
스스로 겸손하다고 말하기는 쉬워도 업신여김을 참아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