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아... 이건...?"
소녀의 눈에는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진 경비병들과 건물 주위에 깊게 패인 자국들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잠시 소녀의 몸이 부
르르 떨리는 듯 하더니 이내 자신의 두 팔을 꽉 잡아보고는 다시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쿠우우우..."
예담청 밑 지하실. 이 곳의 존재는 태겸과 그의 직속부하만이 알고 있을 뿐, 그 누구도 평범한 대장간 밑에 이렇게 커다란 공간
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지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결코 허술하게 지어지지 않았고 벽에 정교하게 새겨
진 무늬들은 뛰어난 장인의 솜씨를 느끼게 할 정도로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허나 지금은 여느 때와는 달리 왠지 음산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고 그와 맞춰 사방에 흙먼지가 자욱하게 끼여있었다. 무언가
가 위에서 떨어져내린듯, 돌조각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지하실 안은 그야말로 초긴장상태였다. 태겸은 아무 표정의 변화없
이 그것을 지켜보고 있더니 근처 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어느 한 부분을 꾹 눌렀다. 그러자 벽 사이사이가 약간씩 갈라지며 주
변의 흙먼지들이 그 사이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혼탁했던 그전과 달리 점점 맑아지는 공기속에서 누군가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자 그것을 보던 태겸은 잠시 한숨을 내
쉬더니 수염을 한번 쓰다듬으며 말했다.
"결국... 오신겁니까?"
"아무래도 한 번 일을 저지르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라... 이대로 물러가긴 좀 그렇구려."
태겸의 눈이 아까보다 가늘어졌다.
"죽더라도... 말입니까...?"
단이황의 입가에 약간의 미소가 지어지며 그 사이로 말이 새어나왔다.
"그런 생각은 해본적이 없는데."
"용기가 너무 지나치면 만용이요, 전장에서의 만용은 죽음을 뜻합니다."
"그건 그대에게 해당하는 말이지 않소?"
태겸의 입가가 이상하게 비틀리며 미간의 주름이 아까보다 더 깊게 패였다. 단이황은 계속 미소짓고 있었으며 둘 사이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윽고 태겸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역시 대단하시군요. 젊은이를 말로써 이기려고 하다니, 이 늙은이가 노망이라도 났나봅니다."
"말뿐이겠는가? 하하하..."
단이황의 말이 끝나자 태겸의 가늘었던 눈이 갑자기 크게 부릅떠지며 하얀 머리칼들이 공중으로 몇가닥 솟아올랐다. 그와 동
시에 태겸의 발 주위의 땅이 쾅 하고 패여지며 돌조각들이 사방으로 마구 튀었다. 태겸은 몹시 분노한 듯 알아들을 수 없는 말
들을 중얼거리며 쉴새없이 외쳤다.
"해치지 않으려고 했거늘...! 어찌 이렇게 무모하단 말인가! 내 인생의 반도 살지못한 젖먹이 따위에게 이런 소리를 듣다니, 내
더이상 참지 않으리라!!"
그리고는 잠시 분노가 가라앉는 듯 숨을 크게 푸욱 하고 쉬자 솟아올랐던 머리칼들이 다시 축 늘어지며 원래의 태겸과 같이 변
했다. 단이황은 가만히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이미 그의 손에 들려있던 칼자루에는 푸른빛의 검신이 두 자 정도 뻗쳐나와
있었다. 태겸은 그것을 보고는 원래의 조용하고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칼... 이제 꽤 능숙하게 다루시는군요."
"꽤 고생했소. 예전보단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아직은 이 상태를 유지하는게 고작이오."
"허허... 그러십니까. 그 분이라면 그 칼 정도는 쉽게 다루셨을텐데, 안 그렇습니까?"
처음으로 단이황의 눈이 약간 가늘어지자 태겸은 만족스러운 듯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아까 그 기술... 아직 왕, 아니 당신은 완벽하게 다룰 수 없나봅니다? 제가 보기엔 아마 두어발 정도가 한계일 것 같은
데 지금이라도 포기하신다면 더이상 붙잡지 않겠습니다."
"정확히는 두 번이지. 하지만 당신도 대응할 수단이 몇 없어보이는군?"
그러자 태겸이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허허허... 그렇습니다. 허나 이거라면 어떻겠습니까?"
말을 끝마치고 태겸은 잠시 수인(手印)을 맺어보였다. 그것을 본 단이황의 안색이 눈에 띄게 변하자 태겸은 만족스러운 듯 씩
웃으며 말했다.
"역시 고등교육을 받으신 분이라 다르군요."
"성장소환(星將召還)인가...?"
그러자 태겸이 나머지 수인을 빠르게 맺고는 오른손을 땅바닥에 짚으며 기합을 넣자 태겸의 주위로 둥글게 원이 그려지며 알
수 없는 도형들과 함께 빛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했다. 단이황의 눈에는 빛 속에서 성인남자의 두 배 정도되는 크기의 형체가 일
렁이며 나타나는 것이 보였고 또다시 강렬한 빛이 뿜어져나오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지하실 안에 엄청난 폭풍이 휘몰아쳤다.
"크윽..."
서서히 단이황이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은빛갑옷을 온 몸에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체구의 모습이었다. 손에는
각각 몸에 맞게 커다란 크기와 칼과 방패가 들려져 있었고 엄청난 크기에 질려버릴 정도였다. 그 뒤에는 태겸이 자신의 오른팔
을 움켜쥐고 신음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꽤 고통스러운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는데 입가에는 피까지 묻어있었지만 그
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태겸은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로 징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 하... 하하... 드디어... 나왔군...!"
"... ..."
"뭐라고 말 좀 해보시지요. 아니면 너무 떨려서 목소리조차 나오시지 않으십니까? 하하하..."
잠시 아무런 표정이 없던 단이황이 눈이 약간 커지더니 이윽고 홍소가 터져나왔다. 태겸은 의아한 듯 눈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
보며 말했다.
"...뭐, 뭡니까?"
"아하하... 난 또. 겨우 3성장군인가? 그 정도 소환으로 힘들어하다니... 자네도 한 물 갔구만?"
그러자 태겸의 눈이 번쩍 뜨이며 욕설을 퍼부으며 불편한 오른팔을 억지로 움직여 다시 수인을 맺자 3성장군이 무시무시한 기
세로 단이황에게 달려들었다.
"쿠아아아!!"
달려들던 3성장군의 모습을 보던 단이황이 입가에 만연한 미소를 띠며 잠시 칼을 뒤로 넘겼다가 빠르게 앞으로 휘두르자 또다
시 번쩍 하고 빛이 뿜어져나오며 푸른빛의 섬광이 일직선으로 기사를 덮쳤다.
"콰아아앙!"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3성장군이 충격으로 벽에 꽝 하고 부딪치자 벽이 우르르 무너져내리며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었고 태
겸은 망연자실한 듯 입을 벌리고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