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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삼국사기/고구려본기>`동천왕`조의 일부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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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년(서기 238 년)
위나라 태부 사마선왕이 무리를 거느리고 공손 연을 토별하니, 왕은 주부.대가를 보내어 장병 1000 명으로써 돕게 하였다.
16 년
장수를 보내어 요동 서안평을 습격하여 깨트렸다.
20 년 가을 8 월
위는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어 군사 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나와 침범하니, 왕은 보기병 2 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 위에서 역전하여 깨뜨리고 3000 여 명의 목을 베었다. 또 군사를 이끌고 다시 싸워 양맥의 골짜기에서 패배시키니 베어 죽이거나 사로잡은 수가 3000 여 명이었다. 왕은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위의 대군이 도리어 우리의 소군만 못하다. 관구검이란 자는 위나라의 명장인데 오늘에 그의 목숨이 나의 손에 달렸다.`하고 철기병 5000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진격하였는데 검이 방진을 만들고 결사적으로 싸워 우리 군사가 크게 무너지고 죽은 자가 1 만 8000 여 명이었다. 왕은 1000 여 명의 기병과 압록원으로 달아났다.
20 년 겨울 10 월
검이 환도성을 쳐 함락시키고 장군 왕기를 보내어 왕을 추격하였다.
산상왕이 신축.천도하여 동천왕까지 도읍하였던 환도산 아래 있었다는 환도성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 환도성 서쪽 파저강 변에 있었던 장수왕이 세웠다는 광개토왕릉비가 있는 곳이 지금의 압록강 변이였을까요?
한국사학계 통설은 지금의 요동반도의 압록강 변에 고구려의 환도성이 있다고 하나 봅니다.
과연 옳은 비정일까요?
천만에요.
번지수가 잘못되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삼국사기><삼국유사>나 <고려사><동국여지승람><문헌비고> 등으로 대표되는 선조의 기록들을 한반도의 남쪽 구석에 앉아 읽고 있는데, 이것을 꼬집어 비유해 말하자면 `우물 안 개구리`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국사기> 등에서 설명되는 지명들은 한반도를 훨씬 벗어나는 곳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벗어나기 때문에 중국의 25 개 정사와 정사급 사찬사서들의 기록에 아주 흔하게 단군조선과 부여.고구려.백제.진.고려.후조선 등의 지명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명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우물안 개구리 식으로 <삼국사기> 등을 읽는다면 우리의 고대사를 영영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청사고/지리지> 봉천성 흥경부 집안현 기록입니다.
府東南四百二十裡 明建州衛之鴨綠江部 光緖二十八年 分通化懷仁二縣地設治通溝口 置縣隸興京同知 宣統元年改隸府 東北老嶺岡
北丸都山 鴨綠江在南...
부 동남쪽 420 리 지점에 집안현이 있다. 명나라 건주위 압록강부 지역이고 1902 년 통화.회인 2 개 현을 쪼개어 톨구구에 치소를 두어 집안현을 설치하고 흥경동지에 속하게 하였으며 1909 년에는 흥경부에 속하게 하였다. 동북쪽에는 노령강이 있고 북쪽에는 환도산이 있으며 압록강은 남쪽에 있다...
또한 흥경부 기록에는 흥경 동쪽에 납로와집 과이민주돈 즉 모두 합쳐 분수령산맥이라 하고 위로는 고열눌와집, 아래로는 용강으로 이어지고 산 서쪽의 물길은 모두 요하로 흘러들고 산 동쪽의 물길은 모두 송화강으로 흘러들어 요하와 송화강을 나누는 분수령인데 한 시기의 요산이라 합니다. <한서/지리지> 현토군 고구려현에 기록된 소요수가 발원하는 그 요산입니다.
집안현 서북쪽에 있는 통화현과 회인현의 지형지세 기록은 아주 재미있는 기록으로 꽉 차여 있습니다.
통화현은 흥경부 동남쪽 270 리 지점에 있다고 하니 집안현과는 대략 150 리 떨어져 있다는데, 북쪽에 용강산맥이 있는데 흥경부와 해룡부 사이에 있는 납로와집에서 동쪽으로 뻗어 임강현을 지나 곧바로 장백산으로 연결되고 약 200 여리라고 하며 이 산 남쪽의 물길은 모두 압록강으로, 산 북쪽의 물길은 모두 송화강으로 흘러들기 때문에 압록강.송화강 분수령 또는 영릉간맥 또는 용강이라고 한답니다.
또한 이 분수령 남쪽에 혼강渾江이 임강현에서부터 흘러와 서쪽으로 흐르다 휘어 동쪽으로 다시 휘어 서남쪽으로 흘러 흥경부에서 남쪽으로 180 리 떨어져 있는 회인현으로 흘러가는데 왼쪽에서 大羅圈溝河.소라권구하가, 오른쪽에서는 합니하哈泥河.가이도고하가 흘러온다고 하며 고려묘가 있다고 합니다.
회인현의 지형지세는 통화현 기록보다 더 극적입니다.
즉 서남쪽에 있는 노령이 태자하의 남쪽 발원지라고 하며 서북쪽에 있는 본계현으로 흘러가고 노령산맥은 용강으로부터 갈라져 뻗었는데 서쪽으로 이어져 마천령과 접하는데 그 남쪽 물길은 모두 압록강으로 흘러들고 북쪽 물길은 모두 요하로 흘러들기 때문에 요하.압록강 분수령이라고 하며 저들 말로 살선산이라고 한답니다.
결국 회인현의 영역은 요하.압록강 분수령의 남과 북에 걸쳐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본계.회인현과 통화.집안현을 통령하는 흥경부는 후금 천총 8 년인 1634 년 후금이 처음 일어난 혁도아랍을 후금인들의 태조가 선택한 빈기의 땅이라 여겨 흥경이라
하였다고 하며 성경 심양에서 동남쪽 방향으로 70 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습니다.이는 <만주원류고/강역1/흥경> 기록입니다.
<청사고/지리지> 기록을 읽어가다 보면 아주 쉽게 지금의 압록강을 연상하게 될 것입니다.
즉 지금의 압록강 북쪽에 봉천성 치소인 성경 심양,흥경부, 본계현, 회인현, 집안현,통화현과 요하.송화강 분수령, 요하.압록강 분수령 등이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나마 아주 당연히 인식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저렇게 생각하게끔, 서쪽 멀리 있던 지명들을 비슷한 지형지세를 찾아 동쪽으로 옮긴 왜놈들. 일본 참모본부 편찬과 놈들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국사도 이제는 독립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추정지도 - 고구려 환도성과 노령강
주) 1. 백산 서쪽에 있는 산 표시는 다산 정약용의 <아방강역고/백산보>에 기록된 장백산임
2. <청사고/지리지> 흥경부 집안현에 기록된 노령강은 장백산과 백산을 잇는 산맥을 말함
동천왕 20 년 (서기 238 년) 조조의 아들 조비가 세운 위나라의 유주자사였던 관구검은 현토군을 나와 고구려의 비류수.양맥 계곡으로 들어와 수레를 묶고 험한 고개를 올라 환도성을 공격했다고 하는데, 이 비류수.양맥계곡 지역은 소요수로 합쳐지는 대량수 곧 태자하가 흐르는 지역이며 청 시기 흥경이 있던 큰 계곡으로 북쪽의 백산대맥과 동남쪽의 후한 시기 개마대산 곧 후조선 시기의 분수령 사이에 끼어있는 큰 계곡이며 현토군 동쪽, 요동군의 동북쪽에 있는 지역입니다.
<청사고/지리지>봉천 흥경부 기록에 보이는 북쪽의 요산 즉 납로와집과,
납록와집 동남쪽에 있는 장백산 즉 노령강.흥경산맥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회인현으로 뻗어나가는 노령산맥 즉 후한 시기의 개마대산 사이에 낀 지역이 바로 졸본.비류수.양맥계곡이며,
이 큰 계곡의 물길들은 모두 대량수로 합쳐지고 이어 <수경주>의 소요수인 청 시기의 혼하로 흘러들어 다시 요하로 합쳐집니다.
소요수가 발원하는 요산은 고구려현이며 현토군에 속하는데,
이 현토군은 낙양으로부터 동북쪽으로 4000 리 떨어져 있으며,
임유관 즉 명청 시기 산해관이 있는 요서군으로부터는 700 리 떨어져 있고,
요동군으로부터는 400 리 떨어져 있으며 1250 리 길이의 대요수 서쪽에 있는 2100 리 길이의 염난수가 지나는 부근과 대요수 동쪽에 있는 소요수의 발원지인 요산 지역 남쪽이 현토군 지역이 바로 흥경과 인접한 서쪽 지역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한서/지리지>에는 소요수의 동쪽에는 대량수가 서남쪽으로 흐르며 요동군 요양현에서 소요수로 합쳐지고 요수현에서 대요수로 합쳐집니다. 2100 리 염난수는 요동군 서안평현으로, 1250 리 대요수는 요동군 망평.안평.요수.방을 지나 안시현으로 흘러와 바다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청사고/지리지> 봉천성 기록에는 1250 리 대요수 즉 요하의 발원지를 혼하의 발원지인 한 시기 요산인 납로와집 북쪽에 있는 고열눌와집 전심호라고 말하며 나머지 두 개의 상원수인 서요하.신요하도 봉천성 영역 내에서 발원하여 오로지 남쪽으로만 흘러 동요하와 합쳐진다고 합니다. 즉 지금의 요하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자, 이러한 조건을 모두 갖춘 곳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지금의 압록강 부근 집안을 산해관에서 700 여리 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나요?
지금의 요하 길이가 1250 리에 불과할까요?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 동쪽 지역입니다.
승덕 남쪽의 반가구수고 그리고 동북쪽의 평천 사이 지역이 바로 요동군이며 그 북쪽이 현토군입니다.
현토군 북쪽에 동서 1000 여리 뻗은 백산대맥의 남쪽 기슭에서 대요수가 발원하기 때문에 반고는 새외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며 길이는 1250 리라 한 것입니다.
즉 2100 리 길이의 염난수는 지금의 란하를 말하는 것이며 1250 리 대요수는 란하 동쪽 지류인 폭하 사이에 있을 것입니다. 두 하수가 남쪽으로 흘러와 모이는 곳이 지금의 반가구수고 부근인데 이 부근에 서안평현과 안시현이 있었을 것이며 바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곳이 물이 빠지면 진흙땅이고 물이 차면 배가 다닌다는 요택입니다.
대요수가 승덕 동쪽에 흐른다는 더 확실한 증거로는 대요수의 서남쪽 지류인 백랑수가 우북평군에서 발원하여 동북류하여 요서군 북쪽으로 지나고 요동군 방현에 이르러 대요수와 만난다고 하는데, 이렇게 염난수.백랑수.대요수가 합쳐지는 지형지세는 북경 동쪽에서 한반도 평양 이북지역에서 승덕 남쪽 반가구수고 뿐입니다. <한서/지리지>와 <수경주/대요수>의 기록대로입니다.
한편 백랑수가 지금의 란하를 만나지만 기록은 대요수와 만나는 곳이 요동군 방현이라 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설명이 미흡하기는 하나 방현과 서안평현.안시현은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중국 하북성 동북쪽에 있는 2100 리 길이라는 란하를 건너뛰고, 무시하고,
지금의 요하 부근에서 동남류하는 2100 리 길이의 염난수를 찾아야 할까요?
또 찾을 수나 있을까요?
지금의 란하를 건너뛰고 찾아서도 안되고 찾을 수도 없습니다.
요서.요동.현토군은 300 여리 차이로 나란히 이어져 설치되었고,
지금의 란하 하류가 요서군이기 때문이고,
이 요서군에서 300 리 떨어진 곳에 2100 리 염난수와 1250 리 대요수가 바다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조선,삼국시기,고려,후조선 시기 전 기간에 걸쳐 요하를 지금의 요하로 비정하는 한국사학계의 통설은 틀린 주장입니다.
한편 1250 리 대요수인 요하는 1911 년 청이 멸망하는 해까지도 중국 정사 <청사고/지리지> 기록 상 지금의 란하와 동쪽 지류인 폭하 사이에 있었으며 1917~1935 년 사이에 지금의 요하로 일본이 옮겼습니다.
그렇게 지명을 이동시켰기 때문에 당연히 이 시기에,
광개토왕비와 백두산정계비,북관대첩비,황초령비,마운령비 등 몽땅 뽑아 일본 본토로 가져가거나 한국 고대사를 왜곡하는데 이용하려고 적절한 곳에 옮겨 두어야 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