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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모린을 처음 보았을 때 내가 받은 인상은,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에 덮인 높고 넓은 이마에 어깨가 넓은 키 작은 노동자의 모습이었다. 얼굴은 햇볕에 그을렸고, 잿빛 두 눈은 따뜻했으며, 입은 넓은 게 쾌활해 보였다. 옷깃은 더러웠지만, 입은 채로 자고 나온 듯 보이는(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신사복에 넥타이로 성장을 하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한 품새였다.
그에게서 맨 처음 놀란 것은 그가 상대를 귀머거리, 벙어리, 봉사로 만드는 말솜씨의 소유자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상대를 볼 때마다 전에 이야기하다 만 바로 그 대목에서 대화를 시작해서는 상대가 제발 좀 쉬자고 애원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으며, 쉬더라도 잠깐이었다. 그는 도저히 말릴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피터를 만난 날 밤, 나는 <공동선common-wealth>에서 부탁 받은 일을 마치고 돌아와 있었다. 실업자들이 워싱턴까지 진출한 ‘기아행진’을 취재하는 일이었다.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성당에서 나는 그저 상황을 보도할 뿐만 아니라 사회 질서를 바꾸는 데 일조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었다. 나는 상황을 보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상황을 바꾸고자 하였으나, 혁명에 대한 신념은 이미 내게서 떠나고 없었다. 나는 자본주의자든 공산주의자든, 나의 적을 사랑하길 원했다.
처음에는 내가 피터 모린에게서 해답을 발견한 사실을 분명히 깨닫지 못했다. 나는 당시 서른다섯이었는데, 그 시대의 많은 급진주의자들을 만났으며 기인들도 많이 만났다. 사회질서를 바꿀 청사진을 가진 사람들 - 뉴욕의 유니언 광장 주변에는 쌔고 쌘 게 그런 사람들이었다. 당시 피터 모린은 서른일곱 살로 미혼이었으며, 청년시절에 “교회에서 멀어져서”, 파리에서 상니에가 지도하는 사회연구 그룹에서 일하며 기관지 <르 시옹>(밭고랑)을 팔았다. 그는 도시와 시골의 민중들에게 가면 길이 있다고 믿었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민중이기 때문이었다.
거리의 사람을 가르치려거든 거리로 나서라
피터 모린은 바르셀로나에서 200마일 떨어진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를 포함해 아이들이 모두 24명이나 되는 집안이었다. 생모는 다섯 째 아이를 낳고 죽었고, 그의 계모가 또 19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의 말로는 계모가 생존해 계신다고 했다.
“나는 혁명 사상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언젠가 내게 말했다. “프랑스 혁명도, 영국 혁명도 좋아하지 않았어요. 조합에도 가입한 적이 한 번도 없었지요. 여기 미국 땅에서 밑바닥 일은 안 해 본 것이 없으면서도 말입니다. 나는 늘 땅과 그 땅에서 사는 인간의 삶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캐나다에 가서도 자영 농지를 불하 받아 살았던 것인데, 2년 후 동료가 사냥 갔다가 사고로 죽고 나서는 노동자 패들과 어울려 캐나다를 떠돌다가 1911년에 미국에 들어와서 이 날까지 살았습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당시, 나는 조사 업무로 무척 바빠서 오후 세 시까지 도서관에 붙들려 있기 일쑤였다. 내가 이스트 15번 가의 내 작은 아파트로 돌아오면, 그는 거기서 교화시킬 준비를 마치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가톨릭의 관점에서 역사 교육을 실시했다. 그는 당시 ‘공동선>의 편집장으로 나중에 헌터 대학의 총장이 된 조지 슈스터가 보내서 왔다고 했다. 조지는 우리 두 사람의 관점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둘 다 사회질서를 바꾸고 가톨릭 사회교리로 대중을 변화시키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가톨릭 신자가 된 지 겨우 4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피터는 거리의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신문을 내자고 제안하고서는 곧장 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타고난 교사였기에 공원, 벤치, 다방, 버스, 하숙집 등 가르치는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그는 교실이나 사무실이나 회의실을 얻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즉시 교육 과정을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거리의 사람을 가르치려거든 거리로 나서라 - 피터는 그 점에 관한 한 고지식했다.
1933년 노동절 유니언 광장에 선보인
<가톨릭일꾼>(catholic worker) 창간호
내가 피터를 만난 것은 1932년 12월이었으며, <가톨릭일꾼> 창간호는 유니언 광장 노동절 기념행사에 맞춰 나왔다. 피터 모린은 그의 에세이들을 발표하는데 관심이 있었고, 나는 내 자신의 기자다운 감각에 힘입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는 데, 그러니까 가난과 궁핍, 무주택과 실업문제를 실감나게 그려내는 데 치중했다. 결과적으로는 내가 사실 보도로 독자들의 양심을 자극하여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 놓음으로써, 피터가 나서서 상황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당위적인 이야기들을 해도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그의 말을 기꺼이 귀담아 듣게 되었다.
피터는 계급투쟁을 대단히 염려하고 있었으며. 그의 첫 에세이집이 나온 후 그는 내가 인종간의 불공평, 어려운 노동조건, 불충분한 주택공급에 대해 왜 그렇게 많이 말하려고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그는 세상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쓰기를 훨씬 더 좋아했다. 궁핍한 사람들을 위한 ‘환대의 집’, 모든 가정에서 실천되는 애덕, 자발적 가난과 자선 행위, 농경 공동체와 다른 사람의 땀이 아닌 자기 자신의 땀으로 생활하는 법을 가르치는 농경대학 등에 대해 쓰는 것이었다.
<가톨릭일꾼>은 여느 급진적 ‘분파’의 간행물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재정을 충당했다. 우리한테 등사기가 있었다면 그 신문은 등사판 인쇄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나의 타자기밖에 없었고, 따라서 우리는 우리 글을 인쇄소에 가져갔는데, <네이션 nation>지 크기의 8페이지짜리 인쇄물 2,500부를 찍는 인쇄비가 57달러 든다고 했다.
우리는 대담하게 인쇄 준비에 착수했다. 우리에게는 사무실도, 직원도, 우편 수취인 명부도 없었다. 그때 막 끝난 <공동선>지의 조사 업무에 대한 대가로 내가 받은 소액의 급료지불 수표뿐이었다. 내가 쓴 기사에 대한 대가로 수표 두 장을 더 받게 되어 있었으나, 그 돈은 기한이 넘은 집세와 전기료를 내야했다. 성 바오로수도회의 조셉 맥솔리 신부는 내가 해 드린 간단한 서지 작업에 대한 대가를 후하게 치러주셨고, 작고하신 뉴워크 흑인 교회의 주임사제 애헌 신부는 내게 10달러를 주셨으며, 피터 클래버 수녀는 이제 막 누구에게서 받은 1달러를 주셨다. 그것이 우리의 자금이었다. 우리는 그해 노동절에 신문 창간호를 유니언 광장으로 가져가 공산주의자들과 노동조합원들에게 한 부에 1페니씩 받고 팔았다.
세상에는 돈이 많다,
필요한 것은 기도 뿐
피터는 <가톨릭일꾼> 사무실 뒷방에서 잤다. 곧 아르메니아인 무정부주의자 시인과 독일인 불가지론자를 데리고 들어와 그의 방을 함께 쓰면서 그들을 자신이 조직한 원탁토론의 토론자로 삼았다. 그는 신문 제작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매달 여섯 건의 ‘쉬운 글'(Easy Essay)를 내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그는 그 중 많은 것들을 우리가 몇 번이고 되풀이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반복학습과 근본원리의 끊임없는 되새김질이 중요하다고 믿는 교사였다.
한편 그는 방문자들 만나기를 좋아했고, 사무실에 아무도 오지 않으면 자기가 큰길이든 골목길이든 나가서 사람들을 만났다. 맨해튼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걸어다니며 월 스트리트의 브로커들과 할렘 길모퉁이의 흑인들을 만났다.
피터는 좀체 흥분하는 일이 없었지만 자기 견해에 동조하고 찬성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다. 두 눈을 빛내며 목청을 돋우다가 미칠 듯이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그는 늘 결과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서 나는 종종 그의 기를 꺾어놓고 싶은, 그의 낙관주의적 열의에 찬물을 끼얹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실망스런 일들이나 실패한 계획 때문에 기가 꺾이거나 실의에 빠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달아야 했다.
첫 번째 원탁 토론이 실패했을 때와 같은 경우가 좋은 예이다. 피터는 자신이 계획한 일요일 오후의 토론회에 대해 큰 기대를 걸었다. 낙관주의자답게, 그는 먼저, 무도회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의 집회도 열리는 맨해튼 문화회관의 무도실을 빌렸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단 스무 명 뿐이었으며, 그들은 사회자 테이블에 둘러앉아 ‘정치운동이냐 가톨릭운동이냐’를 놓고 시끌벅적한 토론을 벌였다. 그 뒤부터 피터는 작은 회의실을 빌렸다.
그에게는 힘들게 모은 돈의 낭비마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세상에는 돈이 많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사상에 동화된 사람들이었다. 사람들만 있으면, 돈은 따라올 것이었다. 필요한 일은 기도뿐이었다. 청구서가 쌓이고 빚쟁이들이 찾아오면 우리는 모두 교회에 가서 번갈아 가며 기도했는데, 우리는 이를 “성 요셉 피켓 시위”라고 불렀다. 한번은 실직한 가정부 한 사람에게 ‘보혈’ 교회에서 30분 동안 ‘성 요셉 피켓 시위’를 대신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피켓을 가져가야 하는지 물었다. 또 한 번은 인쇄소에서 청구서가 날아왔는데,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염불도 좋지만 지불도!”
가톨릭 급진주의, 각 사람에게 합당한 몫을 주라는 요구
나는 피터에게 거리의 사람을 교화하는데 성공하지 못하면 낙담하지 않느냐고 몇 차례 물어보았다. 그러면서 우리와 함께 지냈지만 상태가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진 사람들의 사례를 여럿 들어 보였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은 이제 막 악마가 얼마나 깊이 자리 잡고 있는지 깨닫기 시작했어요. 바로 그래서 우리는 가톨릭 급진주의자가 되어야 하고, 우리는 뿌리까지 파고들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급진주의의 본령이지요. 그 말의 원래 뜻이 ‘뿌리까지 파고든다’는 것 아닙니까.”
피터는 성격이 실제적임에도 불구하고, 문제들을 다룰 때는 ‘이스라엘 예언자들과 교부들’의 방식에 의존하려 했다. 그는 산업혁명이 사람들 사이에 불러일으킨 참상을 보았지만 노조와 조직들,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파업으로 문제가 해결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우리와 함께 인쇄물을 가져다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인쇄물은 인간의 존엄성을 일깨우고, 노동조합 등의 조직을 통해 노동자들이 동료들과 단결할 필요와 권리를 다룬 소책자였다.
그는 훨씬 더 근본적인 해결 방식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급진주의자”라는 이름을 좋아했으며 우리 신문도 ‘가톨릭급진주의’라고 이름 짓기를 원했다. ‘일꾼/노동자’(worker)라는 말에서는 어딘지 계급투쟁의 냄새가 풍겼던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노동자든 학자든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가난의 철학과 노동의 철학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그는 늘 평신도였다. 내 말은, 그가 설교하지 않고 가르쳤다는 뜻이다. 세속주의, 곧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분리시키려는 태도를 비난하면서도, 평신도로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물질적 요구, 노동과 의식주의 요구였다. 피터는 매주 고해를 하러 가고, 매일 성찬식에 참석하며, 매일 한 시간 동안 성체조배를 했지만, 관심은 늘 자기 주변의 물질적 질서에 쏠려 있었다. 도시에 살면서도, 그는 농촌 경제로의 회귀, 수공업과 농경에 대한 연구를 촉구했다. 그는 정의가 살아있는 새 하늘 새 땅을 위해 일하도록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이 세상을 설파하고 있었다. 피터의 정의관은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견해, 곧 각 사람에게 합당한 몫을 주라는 것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저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자선을 행하도록 촉구했으며, 주교들에게 ‘환대의 집’을 설치하라고 촉구했다. 그럭저럭 우리들 계획의 이 두 가지 항목이 결합되었다. 나는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잘 기억하고 있다. 그는 주교들 앞으로 일련의 에세이를 써서, 교회법이 모든 교구에 호스피스(환대의 집)를 세우도록 요구하고 있음을 일깨웠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노숙 생활을 하던 한 독자가 <가톨릭일꾼> 사무실에 와서 그녀의 요구를 밝혔을 때(아파트와 사무실은 이미 만원이었다), 우리는 “그대의 형제에게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이 필요하거든 먹여주고, 살 곳이 필요하거든 내어주어라.”는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피터 모린의 주장에 따라 한 블록 너머에 큰 아파트를 세내야 했다. 그것은 최초의 여성 전용 ‘환대의 집’이 되었다. 이 아파트는 아파트 셋과 사무실 하나로 불어났고, 다시 가옥으로, 마지막으로는 모트 가 115번지의 방이 스무 개 딸린 공간으로 넓혀졌다. 여기에 아파트 넷과 사무실 둘이 추가되고, 뉴욕시 크리스티 가 223번지의 2세대 연립주택이 되었다.
지금 우리는 스프링 가의 한 모퉁이에 있으면서 이웃에 아파트 8개를 거느리고 있다. 여기서는 자발적 가난 속에서 봉급 없이 생활하는 ‘가톨릭일꾼’ 회원들에 의해 지금도 자선이 베풀어지고 있다. 이런 활동들은 “당신의 형제를 먹이라.”는 슬로건에 따라서 가난한 몇 사람을 먹이는 데서 시작된 것이었다. 노숙자들을 위해 먹을 것을 나눠주던 행렬은 1936년에는 실업자들을 위한 일일 무료 급식 행렬이 되었고, 지금도 그곳 문밖에서 이 줄을 볼 수 있다.
가진 것은 무엇이나 주었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원탁 토론과 환대의 집, 농경 공산체. 이것들은 피터모린이 제시한 계획의 세 가지 조목이었다. 전쟁과 재취업이 우리의 노동자들을 많이 데려갔지만, 환대의 집들은 지금도 있다. 이곳에선 모두가 자율적으로 생활하지만 피터에게서 정신적 지도를 받으며, 피터가 내세운 원칙들을 따르려고 노력한다. 농장들도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다르지만 예외 없이 에마뉘엘 무니에가 말한 인격주의, 공동체주의 혁명사상에서 출발했다. 피터는 필생의 사업을 하면서 낙담한 적이 없었다. 그는 자기가 가진 것은 무엇이나 주었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더구나 성공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을 전부 주었으며, 종래에 하느님께선 그에게서 사고력까지 가져가셨다.
그는 순순히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였다. 눈빛에서는 고통과 몸부림을 읽을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토록 많은 말을 한 그가 이제 단 한 마디 말도 없었다. 지난 5년 동안 그는 아이처럼 보살핌을 받아야했다. 언제 잠자리에 들지, 언제 일어날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어야 할지 일러주어야 했다. 그는 이제 지도 받는 사람이지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심장이 몹시 좋지 않아 펜실베이니아 주 이스턴에서 종부성사를 받고, 그 몇 년 뒤인 1949년 5월 15일에 뉴욕주 뉴버러의 메리팜에서 죽었다. 그를 위한 진혼가가 불려질 때, 참석한 모든 사람이 그 미사곡을 영광되이, 씩씩하게, 그리고 유쾌하게 불렀다. 기증 받은 한 벌의 신사복을 입은 채, 그는 브루클린의 성 요한 공동묘지의 기증 받은 묘지에 묻혔다.
그의 사망 소식은 시카고 I.W.W(아나키즘을 주장하는 국제 산업 노동자회)의 기관지 <산업 노동자>지 뿐만 아니라 바티칸의 <옵세바토르 로마노>에도 1면 기사로 실렸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낙원으로 데려가셔서, 역시 가난했던 나자로 곁에 두셨다. 우리에게도 휴식과 빛과 평화의 땅을 허락하시기를!
[출처] <푸른 혁명(The Green Revolution)>, 피터 모린, 공동선,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