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이 장로가 되고 하인인 마부가 담임목사가 된 김제금산ㄱ자교회,
박해 100여 년 동안 수 천 명이 순교한 해미생매장순교지, 유관순 등 독립운동의 모판이 되었던 매봉교회,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여주인공인 채영신의 실제 인물인 최용신 선생이 섬겼던 천곡교회,
한국인에 의해 번역된 성경을 통해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로 세워진 한국최초의 교회 솔래교회.......
오래전부터 여러분들과 함께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지만 여러 가지 여건상 어려웠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 시간이 가능한 사람들을 모아 다녀오려고 합니다.
시대의 큰 물결 속에서 힘겹게 부데끼며 살다가신 믿음의 선배들을 만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분들의 고민, 고통, 열정, 용기, 소망,....눈물과 땀 그리고 그 확신이 도도한 강물되어 우리들에게 흐르기를 기대합니다.
청년부 전체가 다 같이 가면 더욱 좋겠지만 직장에 다니는 형제자매들은 어려울 것 같고...... 데이트하느라 바쁜 사람도 어려울 것 같고......그래서 부득이하게 일부만 다녀올 것 같습니다.
함께 가지 못하는 형제자매들에게는 너무나 미안하고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차량이나 숙소 관계 때문에 신청을 미리 해주셨으면 합니다.
신청방법 : 핸폰(010-2776-6419), 이멜(inhis01@empal.com), 혹은 아래 리플로도 가능
일 시 : 12월 19일(월요일) 오전 9시 출발, 21일(수요일) 오후 6시 도착예정
회 비 : 개인당 10만원(차량렌트비, 숙박비, 입장료 등)
준 비 물 : 세면도구, 성경, 필기구, 기타(성도의 교제에 도움이 되는 각종 도구)
▶ 인천내리교회
미국 북감리회 외국 전도부의 매클레이는 1884년 고종황제를 알현해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의 윤허를 받고 미국에서 5천 달러를 모금하였습니다. 의료선교를 위해 스크랜톤과 교육선교를 위해 아펜절러 목사 부부를 파송하되었습니다. 부활절 아침 두 선교사는 한국땅 제물포항에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내리교회 4층 본당 뒷편에는 1백년이 넘는 교회역사를 사진으로 찍어 전시하고 있습니다.
▶ 강화읍교회
강화선교는 1893년 7월 왕란도 (Warner)신부가 강화 외성 출입문인 진 해루 밖 나루터에 한옥 한 채를 마련함으로서 시작 하게 되었습니다. 성공회 선교단장 조마가 신부가 1896년 강화읍 동문 안에 성베드로 회당을 마련하고 선교를 시작함으로써 강화읍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700평의 대지위에 배 형태의 터를 닦아지어진 교회는, 뱃머리인 서쪽에는 외삼문과 종각이, 복판에는 성당이, 고몰에는 교회를 관리하는 주교관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내부는 로마네스크 바실리카 성당 양식을 응용해 지어졌습니다.
▶ 천곡교회
천곡교회(현 샘골교회)의 시작은 1907년 일제시대입니다. 감리교회내 역사적인 의의를 가진 무지내교회와 한 구역에 있습니다. 천곡교회가 사회적으로 아려 지기 시작한 것은 1931년 최용신선생이 부임하면서부터입니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여주인공인 채영신의 실제 인물인 바로 이 최용신 선생입니다.
최용신이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농촌 사람들을 위해 천곡교회를 빌어 농촌계몽운둥을 시작한 것은 10월 2일이었습니다. 지원생은 많고 장소는 협소하여 오전, 오후, 저녁 3부제로 밤늦도록 가르쳤습니다. 최용신은 유학중에 얻은 병과 과로가 겹쳐 1935년 1월 23일 26세의 나이로 소천하였습니다. 현재는 아파트 단지로 둘려 쌓여 당시의 모습은 찾아볼 수는 없지만 천곡교회 (현 샘골교회)와 시립루씨어린이집에 최용신선생의 유품 및 관련 자료들이 있으며, 최용신 선생의 묘가 있습니다.
▶ 발안 제암리교회
3·1운동 당시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던 독립만세운동 때, 일본헌병은 제암리 마을 남자들을 교회당에 모이게 한 후, 교회당을 불 질러 21명을 학살하고, 마을사람들에게 총을 난사하여 살해하며 초가 32채를 불태워 마을 전체를 폐허로 만든 비인간적인 일제의 포악의 바람이 할퀴고 간 현장입니다.
▶ 매봉교회
지령리교회라는 이름으로 1907년에 설립된 매봉교회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나왔습니다. 그들의 독립만세 소리에 철로경비대가 몰려와 무차별 사격을 가해 조인원 전도사와 유관순의 부모와 교우등19명이 피살되었고 부모 잃은 유관순은 앞장서서 더 큰 소리로 만세를 불렀습니다. 왜경은 어린 소녀를 낚아채 가두고 무서운 고문을 가했으나 굴하지 아니하고 아침저녁으로 옥중기도와 만세를 부르다가 다음해 10월 살해되었다.
▶ 해미 생매장 순교지
해미 성지는 당시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카톨릭에 대한 100년의 박해기간 동안 단 한 차례도 그 서슬이 끊이지 않았던 이곳은 수천 명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웅덩이와 구덩이에 생매장 당한 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쓰러져간 순교자들은 그 수가 수천 명이나 되는 걸로 추산하고 있으나 그들 중 약 70여명만이 이름과 출신지를 남기고 있고 나머지 대부분은 이름 석자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어간 무명 순교자들입니다. 이들이 숨져간 유적지는 현재 깨끗하게 단장되어있고 “예수마리아”를 부르는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라 알아들었던 주민들의 입을 통해 “여숫골”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던 해미읍성에는 감옥 터가 있고 그 옆에는 고문대로 쓰이던 호야나무가 남아있으며, 서문 밖 순교지에는 자리개 돌다리가 1986년에 원위치를 찾아 복원 돼 있고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들이 발굴돼 순교 터인 생매장 순교탑 앞으로 이장되어 전시돼 있습니다.
▶ 김제 금산 'ㄱ'자교회
구한말 나라의 운명이 다 기울어져 가고 있던 1904년 무렵 미국의 젊은 선교사 테이트 (L.B.Tate) 목사는 사교가 우글거리는 이 금산리에 꼭 교회를 세워야겠다고 결심하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테이트 목사는 전도를 위해 전주-정읍 간을 말을 타고 왕래하며 그 중간지점인 금산리에 머물곤 했는데 어느날 그는 이 고장 마방의 주인인 조덕삼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이 일대에서는 가장 큰 부자였고 집안은 대대로 유교를 믿었던 보수 가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조덕삼이 먼저 마방의 손님인 테이트 선교사에 접근하였고 둘은 서로 많은 교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으며 드디어 그는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테이트에게 말했습니다. “선교사님, 앞으로는 저희 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리도록 하십시다." 이래서 오래도록 기도하였던 테이트의 기도 응답이 이루어졌으며 금산리에 기독교의 씨앗이 뿌려지는 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금산교회가 시작되는 데는 또 한명의 빼 놓을 수 없는 주역이 있었습니다. 이자익 목사입니다. 그는 일제시대에도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을 세 번이나 지낸 유명한 목사입니다(지난 12월 4일 주일예배 설교시 김태복 목사님께서 언급하셨던 분입니다).
이 무렵 이자익 청년은 조덕삼 씨의 집에서 일하던 마부였습니다. 그는 소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한 무학자였지만 매우 총명하여 마부로 일하면서 틈틈이 독학 하였고 또 주인을 따라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는 이 두사람과 박희서가 세례를 받고 성찬예식을 거행하고 금산교회가 공식으로 출발하는 시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금산교회는 신앙적으로도 놀라운 일이 또 있었습니다. 교인이 100명 가까이로 불어나자 장로 한분을 선출하게 되었는데 조덕삼 웅은 떨어지고 머슴인 이자익 청년이 장로로 선출되었습니다. 반상을 엄하게 따지던 봉건적인 시대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조덕삼 웅은 의연히 교회앞에 나가 말하였습니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나는 이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그 후 집에 돌아오면 주인과 마부요, 교회에서는 장로와 평신도로 두사람이 열심히 자기 직분을 다하였습니다. 그 뒤 조덕삼 웅도 장로가 되었지만 그는 선배 장로인 이자익 장로를 평양신학교에 유학시키고 목사가 되기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고 목사가 된 후에는 금산교회에 초빙하여 담임목사로 시무하게 하여 교회가 더욱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자익 목사는 세 번씩이나 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며 한국교회에 많은 업적을 남기에 되었습니다.
금산교회는 왜 교회당을 “ㄱ”형으로 지었는는데 이는 한쪽 날개는 남자석, 다른 한쪽 날개는 여자석. 남녀칠세부동석이라 남녀가 서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 구조입니다. 모서리에 강대상이 있고 그 강대상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님만 남녀석을 번갈아 볼 수 있고, 틈새가 나는 중간에는 흰 포장을 치기도 하였답니다.
당시의 금산교회의 학습과 세례문답이 얼마나 엄격했는가 하면, 우선 한글을 알아야 하고,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하면 학습과 세례문답에서 합격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 양조장을 운영하는 사람이 교인이 되고자 할 때는 그 양조장을 정리하지 전까지는 학습과 세례를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 영광 염산교회
1939년에 세워진 염산교회는 6·25동란 때인 9월 29일 국군이 영광에 진군해 들어왔을 때 미처 퇴각하지 못한 공산주의자들이 10월 7일 교회당을 불 지르고 교인을 바닷가 수문통에서 새끼줄로 묶고 돌멩이를 달아서 수장시키는 참상이 벌어졌다. 이때 전교인의 3분의 2인 77명이 순교했다.
▶ 영광 야월교회
배유지(유진벨)선교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전주, 군산, 나주로 하여 목포에 선교센터를 만들고 전라지방에 복음을 전하던 중 당시 육상도로가 열악하여 선박을 이용하여 서해안으로 북상하며 복음을 전하다가 법성포 인줄 알고 들어온 것이 야월리 포구에 정박하게 되었습니다. 야월리 포구에 정박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1908년에 염산리 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후에 이 교회를 야월교회로 개칭하게 됩니다.
1950년 6.25 동란이 지나가고 9.28 수복이 될 대 기독교인들이 태극기를 들고 국군과 UN군을 환영했다 하여 공산군 잔당인 공비들이 마지막 철수 직전 교인들을 잡아 대대적이 처형을 벌이게 되고 전 교인이 한 명도 남김없이 순교하는 비극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 목포 양동 교회
1987년 봄 목포시 양동에서 목포(당시 양동교회)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양동교회. 1910년 교인의 헌금으로 한국 최초의 석조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1942년 일제의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제직20여명과 박연세 목사는 검거되었고 대구로 이송되었던 박목사는 감옥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이 곳 양동교회는 당시 목포의 모든 교단이 성령 안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었던 구심점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 홍천 한서교회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강산 위해/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강산에 일하러 가세” 찬송가 371장의 가사를 쓴 사람이 독립운동가 한서 남궁억 선생입니다. 한서 남궁억(1863~1939년)선생은 고종황제 영어통역관, 황성신문 주필, 독립협회 활동 등 일제시대에 많은 정치, 교육활동을 했습니다. 1918년 3·1운동의 여파로 일제의 압제가 심해지자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나 미국으로 옮겨갔으나 남궁억 전도사는 홍천군 서면 모곡리에 낙향하여 한서교회(당시 모곡교회)를 세우고 나라꽃 무궁화 보급과 구국운동에 전념했습니다. 그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눌 수 없어 무궁화를 심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지금도 이곳에는 무궁화 꽃이 활짝 피었다고합니다. 남궁억은 무궁화만이 아니라 국어와 국사교육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하였습니다. 그가 쓴 역사책으로 ‘동사략’이 있고 ‘조선이야기’라는 동화도 국사책이었으며 국사교육이 더욱 어려워지자 ‘조선어 보충’이라는 한글책에 국사 이야기를 담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첫댓글 좋겠다...부럽다...나도 갈 수 있을려나?
음.... 저는 수요일 오전에 수업이 있어서 힘들겠네요. 아쉽다.
헛....방학시작하는주네ㅠ 가고는 싶으나... 이렇게 자꾸 집을 비우다가는 소박맞을지도 몰라서 ㅋㅋ
정말 기대되고 소망됩니다. 함께 하겠습니다. ㄱㅎ도 함께..^^
앗, 여수의 손양원 목사님 교회는 안가시나요? 애양원도 좋은데...
ㅠ., 이잉.... 저도 가고싶은데.ㅇㅇㅇㅇ
나도.....ㅜㅜ....
2박3일 이면 회사에서 책상 뺄것 같고.. 1박 2일(19,20일)이면 잘하면 갈수도 있을것 같네요.
저도 함께갈께요~~~ 후~~~ 근데 그전에 미친듯이 일을 마쳐야한다는...^^;;;
저도 갈래용*^^* 히히~
저도 갑니다~~~
아~ 나도 가고파라!!! 기냥 짐쌀까요! 혼나겠죠 잘다녀오세요 가고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못가는게 너무 아시워요 아~ 가고 시퍼라
흑~! 전 못가게되었네요.....ㅜㅜ;;
아영이! 아!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