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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13 내면의 처절한 영적 갈등 그 탄식과 감사(로마서 7:1–25)
서론 :
왜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괴로운가?
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왜 나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는데도 아직도 죄와 싸우는가?”
“새해마다, 부흥회 때마다 결심했는데 왜 또 넘어지는가?”
“은혜를 받았는데도 왜 내 안에 악한 생각과 미움이 계속 올라오는가?”
어떤 사람은 이 영적 갈등 때문에 깊은 낙심에 빠집니다.
‘나는 진짜 구원받지 못한 것은 아닐까?’, ‘내 믿음은 다 가짜였나?’라며 스스로를 정죄합니다.
바로 그런 자들에게 로마서 7장은 답을 줍니다.
/로마서 6장이 “죄의 권세에서 법적으로 해방된 성도”의 신분을 선언한다면,
/로마서 7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죄와의 치열한 전투”를 보여줍니다.
바울은 이 처절한 영적 싸움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내 힘으로는 안 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답이다!”
1.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1–6절)
롬7: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우리나라 법에도 범죄를 저지른 당사자(피의자가 사망한 경우)가 재판을 받기 전이나 도중에 사망하면 처벌할 대상이 없어지므로 검사는 법적으로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리고 수사를 종결합니다. 법은 사람이 살아있을 동안에만 적용됩니다.
피의자가 사망할 경우 검찰사건사무규칙 제69조에 따라 ‘공소권 없음’으로 불기소 처분이 된다.
그런데 어째서 법은 죽은 사람을 처벌하지 않을까? 죽은 사람에게 죽음 이상의 응보를 할 수도, 이미 죽은 자를 교화할 수도 없어 처벌도 수사도 하지 않는다는 원칙입니다.예) 박00 서울시장. 그가 자신에 대한 고소가 들어온 상황에서 스스로 삶을 마쳤다.
■ 바울은 당시 성도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결혼법’을 예를들어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설명합니다.
롬7:2“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법적인 끈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죽음’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그분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음으로써, 우리를 끊임없이 정죄하던 ‘율법의 법’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되었습니다.
4절에서 바울은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 .
■ 즉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여기 ‘죽임을 당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에타나토테테(ἐθανατώθητε)입니다. 이 단어는 ‘죽이다’라는 뜻의 타나토오(θανατόω)의 과거 수동태입니다.
즉 내가 스스로 노력해서 율법을 죽이거나 벗어난 것이 아니고 누군가에 의해서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찢기실 때, 그분의 주도적인 은혜에 의해 우리가 ‘수동적으로’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율법은 우리를 정죄할 법적 권리가 없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율법이 아니라, 그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는 우리의 타락한 ‘죄성’입니다. 그래서 5절에 타락한 인간이 율법을 마주했을 때 겪는 내면의 모순과 그 비참한 결과를 설명합니다.
5절“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결과적으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아니라, 결국 영적인 죽음과 파멸(사망)에 이르는 악한 결과물들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구원받기 전 '육신의 상태'에서는 아무리 율법을 지키려 애써도 오히려 죄의 본성만 더 자극되어
결국 죄의 종노릇하며 파멸에 이를 뿐이라는 인간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우리는 이제 새 방식(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합니다.
롬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여기 ‘율법조문의 묵은 것’에서 ‘묵은(계명/문자)’은 헬라어로 그람마(γράμμα)이며, ‘영’은 프뉴마(πνεῦμα)입니다.
▶ 과거 율법주의 신앙은 글자로 기록된 문자(그람마)에 얽매여 ‘두려움, 형식, 행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을까 봐 무서워서 하는 서비스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복음 안의 삶은 영(프뉴마)의 새로운 것 안에서 ‘사랑과 은혜와 자원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형태도 율법주의적이냐(바리새인) 아니면 은혜안에서냐에 따라서 다릅니다. 율법주의 신앙은 우리를 지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은혜안에서의 신앙은 사랑과 자원하는 마음이기에 happy합니다.
2. 율법은 죄를 드러냅니다. (7–13절)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이 나쁜 것입니까?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롬7:7“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은 죄가 아니라, 내 얼굴에 묻은 더러운 오물을 보여주는 깨끗한 ‘거울’과 같다는 것입니다.
7절하.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여기서 ‘탐심’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에피투미아(ἐπιθυμία)입니다.
이는 단순한 소유욕을 넘어 ‘금지된 것에 대한 통제 불가능한 강렬한 갈망’을 뜻합니다.
인간은 인간의 그 타락한 죄성이 묘해서, “하지 말라”고 규제하면 속에 숨어있던 반발 심리가 작동해 에피투미아(탐심)가 불일듯 일어납니다.
▶만약 누군가가 ‘절대 열어보지 마시오’라는 상자가 있으면 기어코 열어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죄성입니다.
동산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절대 먹지 말라.-` 따먹습니다.
공사장 휀스에 그 멍이 나있는데 들어다보지 마시오 하면 보고 싶어지는 것처럼
율법은 내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거역의 본성을 수면 위로 끌어올립니다.
그래서 죄의 파괴적인 역동성에 대하여
롬7:8-11“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인간의 죄성은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율법)을 틈타 우리 안의 금지된 것에 대한 욕구(탐심)를 자극하고 증폭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여기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여기“죄가 기회를 타서”의 의미를 알아야 하는데
여기 “기회”라는 단어는 헬라어 아포르메(ἀφορμή)입니다. 이 말은 원래 군사용어로 “군대가 공격하기 위해 세우는 전진기지, 교두보”를 뜻합니다.
즉 죄는 하나님의 계명을 자기 공격기지처럼 이용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탐내지 말라” 말씀하시면,
죄성은 오히려 “왜 못해?” “한번 해보고 싶다” 하는 반발심을 일으킵니다.
앞서 말한것처럼 평소에는 관심 없던 문도 “절대 열지 마시오” 붙어 있으면 더 열어보고 싶은 것과 같습니다.
죄는 계명을 틈타 인간 안의 반역심을 자극합니다.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죄는 항상 속입니다. 처음에는 달콤하게 말합니다.
“이 정도는 괜찮아.” “한 번쯤은 문제없어.” “다들 그렇게 살아.”“너만 손해 본다.” 그러나 죄는 결코 본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죄는 자유를 약속하지만 결국 중독을 줍니다. 쾌락을 약속하지만 결국 공허를 남깁니다. 행복을 약속하지만 결국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가 나를 속였다”고 고백합니다.
사탄의 첫 전략도 속임이었습니다.
창세기에서 뱀은 하와에게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했습니다. 죄는 언제나 거짓말쟁이입니다.
“나를 죽였도다”의 의미도 죄의 마지막 결과는 결국 죽음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음은 단순한 육체의 죽음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영적 생명의 쇠퇴, 양심의 마비, 평안의 상실, 죄책감과 어둠 결국 영원한 심판 을 포함합니다.
죄는 처음에는 즐거워 보이지만 마지막에는 반드시 사람을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바울은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이 도리어 나를 죽게 했다” 고 탄식합니다.
죄는 단순한 실수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성도를 실족하게 하며, 영혼을 사망으로 끌고 가려는 강력하고 파괴적인 ‘영적 세력’입니다.
우리는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죄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떼어놓으려는 영적 세력입니다.
죄는 늘 합리화하며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를 농담처럼 다루면 안 됩니다.
인간의 결심만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율법은 죄를 보여줄 뿐, 죄를 이길 능력은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결국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외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율법의 진정한 목적과 기능을 설명합니다.
롬7:12~13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즉, 율법 자체는 죄가 아니며 선하지만, 그 율법이 인간의 내면에 있는 '죄'의 실체를 폭로하고 결국 심판(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3. 성도 안에는 치열한 영적 전쟁이 있습니다. (14–23절)
이 부분은 로마서 7장의 핵심이자, 신앙인들이 가장 깊이 공감하는 본문입니다.
14-15절에서 인간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죄의 본성을 완전히 이길 수 없는 영적 딜레마를 묘사합니다.
14–15절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율법은 신령하다'는 것은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담은 거룩하고 선한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는 것은, 인간이 죄의 지배 아래 태어나 본질적으로 연약한 존재임을 나타냅니다.
즉, 머리로는 무엇이 선하고 옳은지 알지만(율법의 지식), 행동으로는 그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는 말씀으로 마음의 선한 의지와 육신의 죄성 사이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갈등을 묘사합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 싶어 하지만(원하는 것), 실제 삶에서는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죄악을 반복해서 짓는 인간의 모순된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소 16절에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내가 마음으로는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도덕과 선을 요구하는 '율법'이 옳고 선하다는 것을 반증(시인)하는 것입니다.
▶내 양심이 죄를 인식하고 괴로워한다는 것은 율법의 기준이 선하다는 것에 동의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7절에서 내 마음의 본심(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를 원하지만, 내 육신에 뿌리박힌 '죄의 본성'이 나를 지배하여 원치 않는 악을 저지르게 한다고 하지요.
그리고 17절에서
내 의도와 다르게 죄에 끌려가는 비참한 상태를 묘사하며 죄책감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강력한 세력에 대한 영적인 탄식을 표현한 것입니다.
17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 그래서 18-19절에서 바울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도 내면에 '죄의 본성(육신)'이 남아있어 영적 갈등을 겪는다는 사실을 언급하지요.
롬 7:18-19바울의 처절한 탄식이 나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여기 보면 거듭난 성도의 내면에는 두 가지 법이 치열하게 충돌합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새사람’
여전히 육신에 남아 밀고 들어오는 ‘죄성’
그래서 롬7:15“원하는 그것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말씀하지요.
여기서 ‘원하다’의 헬라어는 델로(θέλω)입니다. 이 단어는 현재시제로 쓰여서 ‘지속적이고 간절한 의지적 소원’을 뜻합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참된 특징이 여기 있습니다.
성도는 선을 행하기를 ‘지속적으로 원합니다(델로)’.
그래서 악을 행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자가 아니라, 내 뜻대로 거룩하게 살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가슴을 치며 아파합니다.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아무 감각이 없고 평안하다면 가짜신자입니다.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탄식하고 있다면, 당신 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가장 확실한 영적 생명의 증거입니다.
죽은 시체는 아무리 더러운 오물이 묻어도 반응하지 않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작은 먼지만 눈에 들어가도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입니다.
롬7:19~23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도 마음(영)의 선한 의지와 육신의 죄성 사이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치열한 영적 내면 갈등을 의미합니다.
19“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본심은 선을 원하지만, 연약한 육신에 남아있는 죄의 본성이 나를 지배하여 악을 행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20“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인간의 내면에 공존하는 선과 악의 모순적인 이중성을 강력하게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수많은 실패 끝에 인간 영혼에 작동하는 하나의 거대한 '법칙(원리)'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게 살려고 결단하는 바로 그 순간, 내 안의 죄성과 악한 욕망도 동시에 고개를 들고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22절“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성령으로 거듭난 나의 내면은 하나님의 말씀과 선을 사랑하고 기뻐합니다.
23절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내 마음은 선을 따르고 싶지만, 죄의 세력이 마치 '법'칙처럼 강하게 작용하여 결국 나를 악의 길로 끌고 가는 비참한 현실을 깨닫고 탄식하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싸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티스트라테우오메논(ἀντιστρατευόμενον)은 ‘적대적으로 전면전을 벌이다’라는 뜻의 군사 작전 용어입니다.
또한 ‘사로잡는’의 헬라어 아이크말 로티존타(αἰχμαλωτίζοντά)는 ‘전쟁 포로로 끌고 가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의 영적 갈등은 가벼운 말다툼이 아닙니다.
목숨을 건 전면전(안티스트라테우오메논)입니다.
육신은 우리를 세상의 종으로, 죄의 포로(아이크말 로티존타)로 끌고 가려하고,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십니다.
기도하려 하면 분주해지고, 예배하려 하면 잡념이 생기고, 거룩하려 하면 유혹이 찾아오는 이유가 바로 이 치열한 교전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자기 절망 끝에서 그리스도를 붙들게 됩니다. (24–25절)
이 전쟁터 같은 비참함 속에서 바울은 마침내 피를 토하듯 절규합니다.
롬7: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여기서 ‘곤고한’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탈라이포로스(ταλαίπωρος)입니다. 이 단어는 원래 ‘돌에 치여 온몸이 으스러진 상태’ 혹은 ‘전쟁에서 상처를 입어 고통에 신음하는 군인’을 뜻합니다.
즉 바울은 자기 의, 자기 결심, 자기 노력의 돌판에 부딪혀 온몸이 으스러지는 절망(탈라이포로스)을 경험했습니다. “내 힘으로는 이 죄를 절대로 이길 수 없구나!”를 뼈저리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 절규는 패배자의 절망이 아닙니다. 영적 파산 선언을 한 자만이 십자가를 붙들 수 있기에, 이 절규는 오히려 ‘위대한 은혜의 시작’입니다.
바울은 탄식하자마자 곧바로 반전의 찬양을 선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롬 7:25)
24절의 “누가 나를 건져내랴”에서 ‘건져내다’의 헬라어 뤼세타이(ῥύσεται)는 미래 시제입니다.
그러나 25절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를 통해 바울은 확신합니다.
비록 내 지체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끊임없이 싸우겠지만,
승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확정된 미래’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절망으로 몰고 가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 절망에서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죄의 법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훨씬 더 강합니다!
25절 하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거듭난 성도라 할지라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 하지만, 연약한 육신 때문에 죄의 본성에 이끌리는 영적 갈등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탄식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하게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어진 로마서 8장 1-2절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으며,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다"고 선언하며 승리의 소망을 제시합니다.
■ 결론
성도 안에는 필연적으로 영적 갈등이 있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즉시 천사처럼 완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죄와의 치열한 싸움과 애통함이 있느냐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지 못하고 ‘절망’으로 인도합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어 절망하게 하십니까?
우리 힘으로는 결코 의로워질 수 없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율법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초등교사)입니다.
‘자기 절망’은 복음이 시작되는 문입니다.
“나는 안 됩니다. 내 결심은 또 무너집니다.” 이 완전한 영적 파산 선언이 떨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내 의를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악착같이 붙들게 됩니다.
■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삶의 적용
1) 죄와 싸우다가 넘어지는 자신 때문에 낙심하거나 신앙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 처절한 갈등과 슬픔 자체가 당신 안에 영적 생명이 가동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죽은 시체는 싸우지 않습니다. 살아있기에 아픈 것입니다.
2) 완벽주의라는 ‘자기 의’를 내려놓으십시오.
“나는 잘해야 해”, “나는 목사니까, 장로니까, 집사니까 완벽해야 해.” 이 율법적 생각은 결국 여러분을 영적으로 탈진하게 만듭니다. 복음은 내가 완벽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완벽하신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너를 붙들고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3) 내 결심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십시오.
성도의 최종 승리는 내 ‘결심의 크기’에 있지 않고, 나를 붙드시는 주님의 ‘은혜의 능력’에 있습니다.
매일 아침 “주님, 오늘도 나는 나를 신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보혈과 성령의 능력으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고백하며 나아가십시오.
그래요. 로마서 7장은 얼핏 보면 율법 아래서 처절하게 실패한 인간의 탄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은혜의 필연성을 역설하는 장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시선을 비참한 ‘자기 자신’에게서 돌려, 영원한 승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고정시킵니다.
우리 안의 연약함과 죄성보다, 우리를 덮고 있는 주님의 은혜가 훨씬 더 큽니다. 그 주님을 바라보며 날마다 승리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로마서 7장의 말씀을 통해 우리 내면의 거울을 비추어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구원받은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선은 행하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악의 법에 사로잡혀 탄식할 때가 참 많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외쳤던 바울의 고백이 바로 나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주님, 이 절망의 자리에서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십자가의 은혜로 붙들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율법적인 두려움과 정죄감 속에 종노릇 하지 않게 하시고, 나를 위해 죽임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옵소서.
비록 넘어질지라도 낙심하여 주저앉지 않게 하시고,
그 자리에서 다시 나를 건지시는 주님의 손을 잡고 일어서게 하옵소서.
날마다 성령 안에서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마침내 승리 주실 예수님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