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나들이 1- 내려가는 길에서
Fremd bin ich eingezogen, Fremd zieh‘ ich wieder aus.
나그네 되어 이 마을 들은 나는, 나그네 되어 이 마을 떠난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즐겨 듣는 분이라면 첫 노래인 ‘밤 인사 안녕(Gute Nacht)’의 첫 구절을 잘 아실 겁니다. 연인의 집 문에 ‘안녕’이라고 적어 두고 눈 덮인 밤길을 달그림자를 벗하여 떠나는 서글픈 노래죠.
10월 26일 토요일 전주에서 열린 ‘세계 서예 전북비엔날레’ 명사초대 부분에 출품한 굴방의 임철순 주필의 글을 보려, 아니 본다는 핑계로, 전주 나들이를 했습니다. 전주라면 1980년대 학생들 수학여행이나 와인협회를 따라 몇 차례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인을 남겨두고 마을을 떠나는 방랑객의 마음 같이 뭔지 미련이 남아 계속 찾고 싶은 곳입니다.
다행히 글방 식구들 중 전주 출신들이 많아 제가 앞장 서 선동했더니 방장을 비롯하여 세 분이 호응하셔서 4명이 당일치기로 떠나기로 했습니다. 모두 전주에 연고가 있는 분들입니다. 두 분은 전주고 출신이고 방장도 ‘그 잘난’ 전주북중만 나왔지만 전주고 혁대 버클을 차고 전주고 교가를 즐겨 부를 정도로 전주고 준동창이라 할 수 있지요. 전주고와 전주북중은 운동장이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부산고와 부산중과 비슷하군요. 이번 여행은 세분에게는 60년이 훨씬 지나 또 한 번의 추억여행(sentimental journey)인 동시에 전주가 낮선 나그네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줄 기회가 되었고 나에겐 또 한 번 미련을 남기며 스쳐가는 마을이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버스로 전주로 내려가는 길이 나에겐 새로웠습니다. 나의 오래 된 지식으로는 대전에서 호남선으로 갈라져 전주로 가는 건지 그 뒤 만든 새 길로 가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탄현과 황산, 익산 등 표지판들이 보이더군요. 생각지도 않은 대면이고 이때부터 나의 생각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십 수 년 전 파리에서 버스로 남쪽을 향해 보르도로 가는 길이 연상 되군요. 프랑스 역대 왕들이 거쳐하고 특히 나폴레옹과 조세핀이 즐겨 찾았다는 궁전이 있는 퐁텐블로(Fontainebleau)부터 눈에 들어왔습니다. 중세 유럽에는 수도가 있고 왕이 거쳐하는 궁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지요. 왕이 있는 곳이 수도였습니다. 왕이 몇 달 동안 사냥을 다니면 외교사절들은 왕을 따라 다녔지요. 그렇다면 퐁텐블로도 수도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곤 잔 다크의 도시 오를레앙(Orleans)이 보이고, 이슬람군의 북진을 막아 기독교 유럽을 구제한 격전지 투르(Tours), 그리고 프랑스혁명 때 자코뱅 당에 대항한 부르주아지 부자들의 당파였던 지롱드파의 본거지인 지롱드 강 등을 지나면서 이와 관련된 역사들을 떠올리며 감흥을 받았던 일이 새삼 생각나더군요. 익산, 황산, 탄현 등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서울에서 고향인 호남 땅을 찾아 매년 몇 번씩 다니는 분들을 느끼지 못하겠지요.
여담이지만 전투가 있었던 고대의 전장(戰場)을 실제로 밟아 보기는 힘듭니다. 아니 밟고도 그냥 지나쳤다는 게 맞는 말인지 모르지요. 강원도에는 6.25 전쟁의 흔적이 없는 곳이 있겠습니까? ‘비목(碑木)’의 현장이 곳곳에 남아 있겠지요. 한니발이 2차 전투에서 로마군을 트라시메노(Trasimeno) 호수에 쓸어 넣어 호수물이 핏빛으로 물들었다는 호반에서는 여기가 백병전이 일어난 곳인가라고 떠올렸지요. 1645년 영국 내전에서 크롬웰이 찰스 1세의 왕당파 군대를 무찌른 영국 중부 네이즈비(Naseby)의 현장은 밭으로 잘 보존되어 있어 직접 밟아 보기는 했군요. 그러나 워터루나 한니발의 칸나이, 세당 등 1차, 2차 대전의 치열한 현장들을 실제로 밟아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땅들을 ‘발목이 시도록 밟으면서 좋은 땀조차 흘리고’ ‘비목’이나 ‘삼팔선의 봄’ 아니면 ‘바람찬 흥남부두’와 같은 노래를 조용히 읊조려 보고픈 충동을 간혹 느낍니다.
지금 나는 소중한 기억을 일깨우는 길을 지나고 있는 겁니다. 특히 제 옆자리에 앉은 방장이 논산훈련소 하교대 총검술 조교를 하면서 상등병 계급장을 달고도 다른 연대에서 피교육생으로 전입된 중-상사 등 고참병들을 기압주거나, 한 겨울의 꽁꽁 언 방죽 속에 진입토록 명령하고, 아버지뻘 되는 피교육생 중-상사들이 얼음을 깨며 물속을 통과토록 혼내 주던 곳을 가리키면서 당시를 회상할 때 ‘나도 절로’ 흥겨웠습니다.
이제 옛 생각들을 두서없이 되새겨 봅니다. 익산은 옛 금마인데 백젝멸망 후 여기서 피가 엄청나게 솟아 흐르고 한 절간의 우물물이 피가 되더니 김춘추 무열왕이 죽었다고 합니다. 역사적 근거는 없지만 나는 백제 멸망 다음해인 661년 백제 부흥군의 공격을 받아 김춘추가 죽은 게 아닌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백제는 소정방이 덕물도(지금의 덕적도, 영정도 공항의 서남)에 오고(660.6.21), 금강하구에 도착(7.10), 김유신 군이 계백 군 격파(7.11), 의자왕이 웅진성(공주)으로 피신했으나(7.13), 항복 (7.18)하니 전투가 시작된 지 1주일 만에 백제는 망한 겁니다. 백제인들이 정신을 차려보니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요. 이에 부흥운동이 요원의 불꽃같이 일어납니다. 오래 동안 수-당의 공격으로 시름시름 약해진 고구려와는 다르죠. 661년이라면 부흥군이 마치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 같이 한창 기세를 올리던 시기에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나선 김춘추가 부흥군의 게릴라식 공격에 당한 게 아닌가라는 좀 과장된 억지스러운 추측(wild imagination)을 해본 겁니다.
탄현(炭峴)은 말 그대로 ‘숯 고개’입니다. 산속에서 화전을 일구고 숯을 구어 살던 사람들이 동네와 가까운 곳에서 모여 살며 숯을 팔던 고개는 곳곳에 있습니다. 평택/송탄, 파주의 ‘숯 고개’가 대표적이지만 나무가 많은 곳이라면 숯쟁이들이 모여 살았겠지요. 이게 모두 ‘숯 고개’인데 한자로 탄현이고 또 일제시대 ‘탄현’으로 바뀌어 졌지요. 그러면 황산벌로 향한 신라군이 넘은 탄현은 도로 표지판에 나온 지금의 탄현과 같은 지역일까요?
무열왕은 백제원정을 위해 660년 5월 26일 김유신 등을 거느리고 ‘수도를 떠나(出京)’ 6월 18일 남천정(南川停)에 도착합니다. 남천정은 이천입니다. 그리고 태자 법민(후일 문무왕)을 보내 덕물도에서 소정방을 맞습니다. 김춘추가 소정방을 마중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을까요? 그는 법민을 보내고 자신은 직접 가지 않습니다. 그 뒤 소정방은 남으로 방향을 잡아 금강으로, 신라군은 육로로 백제의 도성인 부여로 진군합니다. 그 길 어느 곳, 탄현을 넘어 황산이라고 부르는 평야에서 계백의 백제군을 만납니다. 지도를 보면 빙빙 둘러 가는 형상입니다. 왜 구미, 상주, 김천에서 서진하는 최단 코스로 부여로 가지 않고 이천을 갔다가 다시 남으로 안성-천안-논산-부여로 가는 길을 택했을까요? 물론 소정방과의 간접적인 만남은 이해가 됩니다. 또 당시는 도로 사정이나 보급 지원에 편리한 산성 등 거점이 중요했지요. 그리고 공주와 같은 백제 방어성을 피할 필요도 있었을 겁니다.
나는 무열왕이 신라군 5만을 거느리고 경주를 떠나 이천으로 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갔다고 믿지 않습니다. 김춘추는 소수 부대를 이끌고 이천으로 와서 일단 진을 정비하면서 아들을 보내 소정방과 작전논의를 마칩니다. ‘아마도’ 더 중요한 것은 한강유역과 당과의 교류에 필수적인 항구인 당항(경기도 화성군 남양면)을 지키는 신라군을 소집하기 위해 이천으로 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한강유역에 주둔하던 신라군은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는 신라의 최정예 군대이며 이들을 이끌고 남으로 다시 돌아갔겠지요. 이들이 계백의 백제군을 격파한 주력부대일 겁니다.
군사지도란 시대를 초월하여 유사성을 가집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북진로와 명군의 진격로, 그리고 6.25 전쟁 때 연합군과 중공군의 진격로 등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이천은 후삼국 통일 1년 전인 935년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하러 가는 길에 이 고을 장자 서목(徐穆)이 홍수가 난 큰 개울을 고려군이 무사히 지나게 인도하여 승리를 안겨주었다고 하여 왕건이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주었다고 합니다. 후삼국 통일전쟁의 막바지에 왕건의 고려군은 일선군 일리천(구미 선산) 전투에서 후백제 신검의 군대를 격파하자 신검군은 탄현을 넘어 황산으로 퇴각합니다. 신검은 수도 전주 방향으로 퇴각하다가 더 이상 버티기 힘들 것으로 판단하고 마성(아마도 논산-익산 부근)에서 항복합니다. 이게 936년입니다. 견훤이 등창이 도져 죽은 곳도 황산입니다. 전주고 앞 네거리에 ‘견훤의 묘’라는 표지판이 보이군요. 660년에서 270여년이 지난 10세기 중반 한반도 내의 큰 전쟁에서도 이천과 탄현, 황산이 모두 등장하는 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신라가 나제동맹을 파기하고 한강유역을 차지하여 중국과 직접 교류한지(550년) 정확히 110년 백제는 망합니다. 또 백제와 후백제의 최후를 결정지은 곳이 모두 황산이군요. 당시 백제는 76만호로 영토가 줄어든 고구려 69만호에 비해 인구에서는 큰 나라였습니다.
논산인 황산벌로 신라군이 넘은 탄현은 오늘날 어디일까요? 기존의 견해는 ①대전과 충북 옥천 경계에 있는 마도령(馬道嶺), ②완주군 운주면 삼거리에 있는 쑥고개, ③충남 금산군 진산면 일대 2곳 등이 거론됩니다. 행상상의 지도보다는 군사지리를 머리에 그리면서 군대의 진격로를 생각해 봅시다. 백제로서는 적군(신라와 고구려)을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1차로 막아야 하며 또 적군의 남진하거나 서진할 방향을 고려하면 대전과 금산 두 곳이 모두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후백제의 신검이 일리천 전투 후 분명히 전주 방향으로 후퇴했다면 금산부근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요?(2019.10.29.)
글에 맞는 사진이 없네요. 이날 찍은 사진 중에서 하나 고릅니다.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임주필
임철순 주필의 서예 <안사람 의병가> 앞에서, 글 내용은 다음회에 다룰 것입니다.

첫댓글 1814년 나폴레옹의 패배 후 맺은 퐁텐블로 조약은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 귀양 가지만 그 섬의 ‘황제’라는 지위를 갖게 해 주었지요.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 섬을 탈출하여 ‘100일 천하’를 누리다가 워털루에서 패전하여 대서양의 외딴섬 센트 헬레나를 가서 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