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국토 순례를 준비 하면서 우리 기획단들은 다양한 일
들을 준비했다. 국토 순례라는 명목 아래 무작정 하루를 걷
는 것만으로 채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양 자료
집도 준비했고 그외 다양한 볼거리 들을 준비하려고 했지만
우리의 준비 미흡과 주위 여건의 한계로 인해 많은 것들을
보여주지 못한게 참 아쉬웠다.
그래도 우리들은 그것을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생각한다.
즉 국토 순례기획단만이 국토 순례를 준비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소중한 시간을 느꼈기 때문이다.
바로 노래 배우기 시간이 그것이다.
조장 긴급 회의를 통해서 나온 그 의견은 이번 국토 순례완
주 라는 의미 못지 않게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본다.
첫째로 그 의견은 국토 순례단 전체를 대표하다 싶이 하는
각 조장들의 건의로 인해 실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를 두 번째로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다.
과연 우리가 노래를 배우지 않았더라면...?
그래도 사람들은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대중가요든 뭐든간
에 걷는 시간 동안 그 힘들고 지친 몸을 달래고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아무 노래나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을
하나로 묶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의 역활은 없었을 것이다.
노래를 배움으로서 뜨거운 아스팔트 열기가 가득한 그 길을
조금은 쉽게 걸을 수 있었고, 시원한 시골의 정겨운 길을
즐겁게 걸을 수 있었다.
난 기억한다.
대원들이 걸으면서 힘든 길이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그
전날 배운 노래를 힘차게 부르며 땅을 한발짝 한발짝 딛던
그 순간을... 아니면 노래 주체가 중심이 되어 도착하면 배
울 노래를 미리 불러 보던 그 아름다운 모습을...
그 만큼 노래 배우기 시간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소중한 순
간들이었다.
석성 중학교를 향해 걷던 국토 순례 10일째 날.
그날은 유난히 힘들었다. 똑같은 4차선 아스팔트의 연속,
새길이라서 더욱 심한 열기... 게다가 스텝인 우리로서는
답사 보고서의 미흡함으로 인해 단원들을 목적지 까지 인도
하는데 있어서 무진장 애를 먹었던 날이다.
목적지에 거의 다 와서 내린 소나기를 맞았어도 어쩌면
우리는 그 날 배울 그 한곡의 노래를 위해 묵묵히 걸었으리
라...
그 날 배운 노래는 그동안 우리들이 배운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곡이었다.
조용하고 슬프고 어찌보면 애절하기까지 하였던...
더 특이 했던 것은 성진이형의 솔로로 그 노래의 느낌을
전달받았다는 것이다. 수수하게 생긴, 인간미가 있는 그의
모습과 너무나도 비슷한 분위기의 곡이라 다들 성진형의 또
다른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
"파란 불도 없는 횡단 보도를 건너가는 사람들,
물샐틈 없는 인파로 가득 찬..."
으로 시작되는, 그렇다. 그날 우리는 청계천 8가를 배웠다.
땀냄새가 가득한 거리, 맹인 부부 가수의 노래뿐만 아니라
어느 리어카 장사꾼의 욕설 마저도 정겹게 들리우는 거리.
그러다가 밤이 가까워져 오면 노을에 의해 그 거리가 물들
고 뿌연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해 낮에 사람들에 의
해 가려졌던 가난의 풍경들이 하나 둘씩 보이는 거리...
칠흙 같은 밤에 그 쓸쓸한 거리이건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얼마나 위대한가를 말없이 몸으로 가르쳐 주는
거리. 그리고 그 속에서도 비록 가난하지만 사랑이 피어나
는 거리...
우리들은 이러한 모습을 상상하며 이 노래를 불렀을 것이
다. 청계천(淸開川) 그 곳은 어떤 곳이길래...
어디까지가 노랫말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의 청계천의 모습일
까?
"너는 청계천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
심지어는 아이도 버리고 주워오는(?) 곳, 청계천은 어떤 곳
이었을까. 청계천은 서울의 하수도였다. 조선 6백년간 도성
의 백성들은 버리고 싶은 것들은 모두 퍼담아 청계천에 버
렸다. 굳이 청계천에 버리지 않았어도 수채 구멍을 통한 물
은 모이고 모여 청계천으로 흘러들었다. 가뭄이 되면 쌓인
쓰레기와 배설물의 냄새가 도성을 진동시키고 홍수가 나면
범람하여 쓰레기를 돌려주던 곳.
청계천이라는 이름이 붙은 때는 1910년대. 그 전에는 그냥
개천(開川)이었을 따름이다. 태어나면서 저주받은 인생이
어디 있으랴. 근원부터 탁한 샘물은 어디 있으랴. 청계천
도 상류에는 분명이름만큼맑은 물이 흘렀을 것이다. 박태원
의소설 ‘천변풍경’이그려내는 빨래터도 분명 있었을 것이
다. 청계천변의 세상은 두 종류로나뉘었다. 석축위의 세상
과 아래의 세상. 석축위로는 가마를 탄 아씨가 지나가도 석
축 아래 빨래터에는내일 아씨가 입을 저고리를 빨아야 하
는 아낙네들이 모여들었다. 저고리가 깨끗해지는 만큼 물
은 탁해졌다. 석축 아래로는 쓰레기가 쌓였고 거지, 땅꾼들
이 모여들었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기보다 가리는 것이 더 쉬웠을까. 난
마(亂麻)같은 하수관 위에 첩첩이 쌓이는 건물들을 정비해
서 하수처리장을 만들고 청계천에 맑은 물을 흐르게 하기에
는 도시의 역량은 부족하기만 했으리라. 일제시대 때부터
시작된 복개공사는 1978년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빨래
터도 묻혔고 청계천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였다는 수표교
(水標橋)는 장충공원으로 옮겨졌다. 제일 넓던 다리, 광통
교(廣通橋)는 지금은 장난감 같은 모형으로 만들어져 조흥
은행 본점 모서리에 쪼그리고 있다. 덮인 청계천 위로는 고
가도로까지 마련되었다. 그 위로는 두 발로는 올라갈 수 없
고 네 바퀴로만 올라갈 수 있다.
청계고가도로는 3·1빌딩과 함께 이 땅의 근대화의 상징이
었다. 둘이 다정히 포즈를 잡고 찍은 사진은 외국에 나갈
홍보책자에 반드시 끼어 들었다. 3·1빌딩과 똑같이 생긴
건물을 미국에서 보았다고 수군거려도 못들은 체했다. 아
니 오히려 그래서 더 신나게 자랑을 했을지도 모른다. 미국
을 흉내냄은 이 땅에서 길이요, 진리가 아니었던가.
청계고가도로는 야심이었다. 우리도 미국처럼 자동차를 타
고 바람처럼 도시를 질주한다는 도시고속도로는 가슴 벅찬
계획이었다. 그러나 도심으로 자동차를 불러들이는 것이 마
약임은 깨닫지 못했다. 도시의 주위를 순환하는 고속도로
는 필요해도 관통하는 고속도로는 위험하기만 한 발상이
다. 과연, 흉내는 냈는데 효과는 달랐다. 폭은 좁았고 오르
내리는 경사는 급했다. 몽롱한 마약의 효과는 오래가지 않
았고 밀려드는 자동차가 도로를 메웠다. 장안 최고의 추물
이니 어서 허물어야 한다는 성토도 쉬지 않고 불거져 나왔
다. 해결이 아니고 문제가 되었다.
청계천에는 여전히 위 세상과 아래 세상이 있다.
자동차를 타고 명동의 백화점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고가도로 아래에서 1000원에 네개하는 칫솔을 고르
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것이 바르고 어느것이 그른 행위인
지를 이자리에서 가리고자 함은 아니다.
다만 이 세상 어디에나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음을 말하
고 싶다. 노랫말 속의 청계천 8가는 현실이다.
아니 작사가는 청계천 8가라는 곡을 짓고 나서 한숨을
쉬었을지도 모른다. 그 곳을 노랫말로서 다 표현하지 못함
을 아쉬워하여...
겹겹이 둘러싸인 공간 안에서 정글의 논리로 엮여지던 청
계천. 가진 자는 옳고 가지지 못한 자는 그르다. 그 역사
는 수많은 젊음을 제물로 삼는 번제(燔祭)를 요구했다. 청
년 전태일이 스물두 살 젊기만한 몸을 태워 밝히려던 바로
그 어두움의 현장이 이 곳이다.
우리는 그가 무었때문에 몸을 불살랐는지 모른다.
그도 우리가 왜 이조국을 그토록 힘을 들여가면서 밟았는지
를 모른다. 하지만 이제 우리 서로 화해하자.
서로가 서로를 알자.
그리고 조금씩 바꾸어 보자.
청계천을 조금씩 밝혀보자.
어느 도시에나 양지도 있고 음지도 있다. 그 밝음과 어두움
의 편차가 클수록 사회의 갈등은 커진다. 어두운 거리는 가
리는 것이 아니고 밝혀야 한다. 청계천은 우리 사회의 음지
가 얼마나 밝고 어두운지를 읽어주는 조도계(照度計)임을
우리 국토 순례단이 알았으면 하는 작은 바램을 가져본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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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 순례속에 담긴 작은 이야기들...(3)
靑 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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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2.27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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