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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驪)의 천도(遷都)와 평양(平壤)
○ <당회요(唐會要) 고구려(高句驪)>편을 보면 이런 기록이 글 첫머리에 있다. 〔高句麗 : 高句麗者.出自扶餘氏.其後有朱蒙孫莫來.因滅扶餘.都平壤.即元菟之故地. : 고구려(高句驪) : 고구려(高句驪)는, 부여(夫餘)씨에서 나왔는데, 그 후 주몽(朱蒙)의 자손 막래(莫來)가, 부여(夫餘)를 멸하고, 평양(平壤)에 도읍했다. 곧 전에 살던 땅 현토(玄菟)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본시(本是), 『평양(平壤)은 낙랑군(樂浪郡)에 속해 있었다.』 이것은 대부분(大部分)의 대륙사서(大陸史書)에서 말하기를, 『평양(平壤)은 곧 낙랑군(樂浪郡)이다.』라 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도 똑같이 기록(記錄)하고 있다.
○ 그런데, 위의 당회요(唐會要)에서는, 『주몽(朱蒙)의 자손(子孫)인 “막래(莫來)”가 부여(夫餘)를 멸(滅)하고는, 평양(平壤)에 도읍(都邑)했는데, 이곳은 현토(玄菟)에 있으며, 이곳은 예전에 살던 곳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기타(其他)의 대륙사서(大陸史書)와 사뭇 다른 이야기다.
○ 『고구려(高句驪) 초기(初期) 도읍지(都邑地)는 현토군(玄菟郡)에 있는 평양(平壤)이었으며, 그 다음 평양(平壤)은 장안(長安)이고, 장안(長安)은 낙랑군(樂浪郡)에 속해 있었다.』는 이야기로 이해(理解)될 수 있다. 고구려(高句驪)는 천도(遷都)를 하면서, “평양(平壤)”이란 이름을 가지고 다녔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초기(初期) “평양(平壤)이 있었다는 현토군(玄菟郡)은 어디에 있었을까?”를 알아보기로 하자.
전한서(前漢書)에서 말하기를 :〔❶ 낙랑군(樂浪郡)은 전성(全盛)시기(時期)에 25개 현(縣)이 있었으며, 호수(戶數) 62,812, 인구(人口)는 406,748 명(名)이라 하였으며, ❷ 현토군(玄菟郡)은 3개 현(縣)에, 호수(戶數) 45,000, 인구(人口)가 220,000 명이었으며, ❸ 인접(隣接)한 요동군(遼東郡)은 18개 현(縣)에, 호수(戶數) 56,000, 인구(人口) 270,000 명이었다.〕고 말한다.
○ 이러한 문제(問題)는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에서 아주 중요(重要)한 사안(事案)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은 『“평양(平壤)”이란 오직 “반도(半島) 평안도(平安道)에만 존재(存在)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반도조선(半島朝鮮)의 지리지(地理志)라고 말하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記錄)된 “평양【平壤 : 장안(長安)이며, 호경(鎬京)이며, 유경(柳京)이며, 낙랑군(樂浪郡)이다.】” 이야기와는 전혀 다르게 말하는데, 외계(外界)에서 잠시 방문(訪問)한 외계인(外界人)같은 말을 하니, 누가 그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 현토군(玄菟郡)과 고구려(高句驪), 그리고 주요(主要)지명(地名)인 “영주(營州)”등을 함께 찾아보면서, 옛 고구려(高句驪)의 땅으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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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토군(玄菟郡)
<진서(晉書) 101 載記 第 一> :〔 然 則 燕 築 造 陽 之 郊 ,秦 塹 臨 洮 之 險 ,登 天 山 ,絕 地 脈 ,苞 玄 菟 ,款 黃 河 ,所 以 防 夷 狄 之 亂 中 華 ,其 備 豫 如 此. : 연(燕)에서 조양(造陽)의 근교(近郊)에 성(城)을 쌓은 것이나, 진(秦)나라가 호(壕)를 파 림조(臨洮)의 험(險)함을 이용하고, 천산(天山)에 올라 지맥(支脈)을 끊고, 현토(玄菟)를 싸고돌아, 황하(黃河)에 도달시킨 것은, 이적(夷狄)의 난동(亂動)으로부터 중화(中華)를 막는 것이며, 이는 미리 방비하는 것과 같다.〕
➡ 위 진서(晉書)로 보면 : 천산(天山)과 현토(玄菟)와 황하(黃河)가 함께 등장(登場)하는데,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처음 시작(始作)된 곳이라는 림조(臨洮)의 험한 지형(地形)을 이용하고, 천산(天山)의 지맥(支脈)을 끊어, 현토(玄菟)를 감싸 안고, 황하(黃河)에 닿도록 한 것은 바로 중화(中華)를 이적(夷狄)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것이다.』라는 이야기다.
천산(天山). 현토(玄菟). 황하(黃河)가 있어야 할 곳은, 천산(天山)과 황하(黃河)가 있는 현(現) “신 강성(新疆省)”지방(地方)일 수밖에 없다. 천산(天山)은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곳이며, 황하(黃河)는 총령(蔥嶺 : 곤륜)으로부터 동(東)쪽으로 흐르는 하천(河川)임은 모르는 이 없을 것이다.
【당시(當時)의 사람들은 황하(黃河)가 총령(蔥嶺 : 곤륜)으로부터 발원(發源)하여, 흐른다고 인식(認識)했다. 옛 사람들의 생각을 오늘날 21세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수준(水準)으로 이해(理解)하려 한다면 역사(歷史)공부(工夫)는 천년(千年)을 해도 진도(進度)가 없을 거다. 곧 포기(抛棄)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 고구려(高句驪)가 하서회랑(河西回廊) 주변(周邊)과 그 서(西)쪽에 있었다는 통전(通典)의 기록(記錄)을 보자. <通典 189. 邊防 5 / 西 戎 一 / 序 略. 羌 無 弋. 湟 中 月 氏 胡. 氐. 蔥 茈 羌.>중에서 “저(氐)”족에 관한 내용(內容)이다. 〔저(氐)족은 서융(西戎)의 일족으로 중원(中原)의 서쪽지방에서 살던 자들이다.〕
〔滎 陽 句 驪 本 居 遼 東 塞 外 , 正 始 中, 幽 州 刺 史 毋 丘 儉 伐 其 叛 者, 徙 其 餘 種, 戶 落 百 數 , 子 孫 孳 息, 今 以 千 計 , 數 代 之 後 , 必 至 殷 熾 。 今 百 姓 失 職 , 猶 或 亡 叛, 犬 馬 肥 充, 則 有 噬 齧 , 況 於 夷 狄 , 能 不 為 變 !: 형 양(滎 陽) 구려(句驪=高驪)는 본래 요동(遼東) 새외(塞外)에서 살았는데, 정시 (正 始) 중에, 유주자사 “관구검(毋 丘 儉)”이 칠 때, 그에(관구검을) 배반(背叛)한 자들이다. 그 여중(餘 種)이 옮겨갔는데, 백 수십 호(戶)가 흩어졌는데, 자손을 많이 나아, 지금은 천(千)에 이른다. 수대(數 代)가 흐른 후, 반드시(必至) 크게 성하여 기세가 성할 것이다(熾). 지금 백성들은 실직(失職 : 직분을 잃어버려)하여, 혹 망하고 배반하였으나, 개와 말을 살찌게 하고, 땅을 갈아 채울 것이며, 곧 이를 부득부득 갈며 이를 것이다. 하물며 이적(夷狄)으로써, 능히 변하지 않을 것이로다!〕하였다.
※ 위 이야기는,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高句驪)를 칠 때, 관구검(毌丘儉)에게 끝까지 싸운 자(者)들을 말하는데, 고구려(高句驪)가 패(敗)하자, 일부 무리들이 관구검(毌丘儉)을 피해 이주(移住)한 것을 말한다.
➡ 저(氐)족은, 롱서(隴西)의 서(西)쪽 지방에서 살던 종족(種族)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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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營). 평(平) 2 주(二州)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高句驪)본기(本紀) : ㉮ 문자명왕(文咨明王), 3년 / 齊帝策王爲使持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州征東大將軍樂浪公. : 제나라 임금이 왕을 사 지절 산기상시 도독 영. 평2주 정동대장군 낙랑(樂浪)공으로 봉하였다. ㉯ 안장왕(安藏王) / 二年,二月,梁高祖封王爲寧東將軍都督營,平二州諸軍事高句麗王,遣使者江注盛,賜王衣冠劒佩. : 2년 2월, 양 나라 고조가 왕을 ‘영동장군도독 영. 평2주 제 군사 고구려왕’으로 봉하고, 사신 강 주성을 보내 의관, 칼, 패물 등을 보내었다.
대륙 사(大陸史)에서도, 『사 지절, 도독 영 주 제 군사, 정동장군, 고려왕, 낙랑 공> 또는 <지절, 독 영 평 2주제군사, 영동장군으로 봉(封)했다고』 하였다. 여기서 「영(營). 평(平)」이란 『영주(營 州)와 평주(平 州)』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고구려(高句驪)의 도읍지(都邑地)는, 영주(營州) 또는 평주(平州) 안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대륙 사(大陸史)에서 영주(營州)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알아보자.
㉮ 北 史 卷 9 6 列 傳 8 4 / 氐 : 〔文 成 時 ,拜 難 當 營 州 刺 史 , 還 為 外 都 大 官 。 卒 ,諡 曰 忠 。 子 和 , 隨 父 歸 魏 , 別 賜 爵 仇 池 公 。 子 德 子 襲 難 當 爵 , 早 卒 。 子 小 眼 襲 , 例 降 為 公 , 拜 天 水 太 守 , 卒 。子 大 眼 , 別 有 傳 . : 『문 성 (文 成) 때, 난 당 (難 當)에게 영주자사(營 州 刺 史)의 벼슬을 내렸다. 돌아온 외도대관(外都大官)이었다.』 (난당(難 當)이) 죽자, 충(忠)이라 시호를 내렸다. 아들 “화(和)”는 아버지를 따라 위(魏)나라로부터 돌아와 별도로 “구지(仇池)공”의 작위(爵位)를 하사받았다. 아들인 “덕”은 “난당(難當)”의 작위를 세습 받았다. 일찍 죽자, 그 어린 아들 “안”이 이어 받고, 예에 따라 공(公)을 받고, “천수태수”의 벼슬을 받았다. 죽다. 아들 “대안”은 별도 전(傳)이 있다.〕고 하였는데,
서융(西戎)인 저 족(氐族)의 지도자였던 『“난당(難 當)”에게 “영주자사(營州刺史)”라는 벼슬을 내렸다.』는 말은 『“영주(營州)”라는 곳이 저 족(氐族)들이 살던 곳에 있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 신구(新舊)당서(唐書)에서 : 〔安 祿 山, 營 州 柳 城 雜 種 胡 人 也. : 안 록 산, 영주(營州) 유성(柳城)의 잡종(雜種) 호인(胡人)이다. (일부(一部) 대륙사(大陸史)는 돌궐(突厥)과 혼혈(混血)이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 <永 徽 六 年(655)) 三月, 營 州 都 督 程 名 振 破 高 麗 於 貴 端 水. : 영휘 6년, 영주(營州)도독 ‘정 명진’이 귀단수(貴端水)에서 고려(고구려)를 파하였다.> 고 하였으며, <營 州 上 都 督 府. 隋 柳 城 郡. : 영주(營州) 상도독부. 수(隋) 유성군>이라 하였고, <營 州 西 北 百 里 曰 松 嶺, 其 西 奚, 其 東 契 丹. : 영주(營州)서북(西北) 백리에 송 령, 그 서쪽에는 해(奚), 그 동쪽에는 글란(契丹)이 있다.> 하였으며, <唐 高 宗 顯 定[慶])3年 (658) 6月, 營 州 都 督 兼 東 夷 都 護 程 名 振 : 당 고종 현정(경)3년 6월, 영주(營州)도독 겸 동이도호 정 명진>이라고 기록해 놓고 있는데, 또 통전(通典)에서는 :〔營 州 今 理 柳 城 縣 。 殷 時 為 孤 竹 國 地. : 영주(營州) 【유성(柳城)현에서 다스렸다.】 은(殷)나라 때 고죽국(孤竹國)의 땅이다.〕라 하였다.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 산서(山西) 편 : 〔祁連城,在漠南,唐貞觀四年,李靖破突厥於陰山,徙其羸弱數百帳於雲中,使阿史德為之長,後為阿史德時健部.二十二年內附,置祁連州,隸營州都督府. : 기련 성(祁連城), 막남【漠南 : 대 사막(沙漠)의 남(南)쪽 지대를 뜻함】에 있다. 당 정관 4년, 이정(李靖)이 음산(陰山)에서 돌궐(突闕)을 깨뜨리니, 그 가장 약한 수백(數百)장(帳)이 운중(雲中)으로 옮겨갔는데, 파견사 ‘아 사 덕’이 장(長)이었다. 그 후 ‘아 사 덕’ 때 튼튼해져, 22년에 내부하니, 기련 주(祁連州)를 두니, 영주도독부(營州都督府)에 예속하였다.〕고 하였는데, 기련(祁連)이란 토착(土着)어로 하늘(天)이란 말이니, 천산(天山)을 말하는 것이다.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권 9 :〔洪武二十二年,曰朵顏.泰寧.福余,統名曰兀良哈,故營州北境地也. : 타안(朵 顏). 태 녕(泰 寧). 복 여(福余)의 땅은 통칭하여 이르길, 올 량 합(兀良哈)이다. 이곳은 옛 영주(營州) 북쪽 지경의 땅이다.〕라고 하였는데,
명사(明史) 열전(列傳)에셔는 : 삼위(三衛)의 땅은 「한(漢)나라 시절의 선비(鮮卑)의 땅이요, 당(唐)나라 때 토 곡 혼(吐谷渾)의 땅이며, 송(宋)나라 때의 글란(契丹)의 땅」이라고 분명(分明)하게 기록(記錄)해 놓고 있다. 이곳이 영주(營州)의 북쪽지경의 땅이라고 한다면 “영주(營州)”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는 : 영주(營州)를 현(現) ‘하북성(河北省)’ 동(東)쪽 지방에, 영주(營州)의 치소(治所)인 유성【柳城 : 유성(柳城)은 신 강성(新疆省)에도 있다. 청사고(淸史考)에, 선선(鄯善)은 포창해(蒲昌海) 서쪽지점에 있으며, 이곳에 “유성(柳城)”이 있다. 선선(鄯善)이 곧 유성(柳城)이란 이야기다.】은 하북성(河北省)에 있다고 하는데, 이곳지방에 돌궐(突厥)과 번족(蕃族 : 청해(靑海)호 주변 종족)과 여러 오랑캐들이 살았다는 해설(解說)대로라면, 현 ‘하북성(河北省)’지방의 중국인(中國人)들은 돌궐(突闕)과 번족(蕃族)과 여러 오랑캐들의 혼혈인 잡호(雜胡)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무슨 ‘얼어 죽을 한족(漢族)’이란 말인가!
● 이렇게 역사(歷史)는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되어 우리 곁에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과 거짓을 분별(分別)할 능력(能力)도 없고, 고의적(故意的)으로 식민사관(植民史觀)을 전파(傳播)하고 있다. 친일파(親日派)와 친미파(親美派)가 정권(政權)을 잡고, 득세(得勢)하고 있는 한,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은 찾을 수 없다. 심지어는 담배 값을 인상(引上)하는데 미국(美國)과 협의(協議)를 해야 한다는데, 할 말을 잊었다.
최고(最高)통치권자(統治權者),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민(國民) 4-5백 명이 탄 여객선(旅客船)이 침몰(沈沒)하는 그 시간(時間)! 자신(自身)의 근무시간(勤務時間)을 비운 것에 대해서 일언반구(一言半句) 해명(解明)이나 설명(說明)도 없으면서, 그 7 시간(時間)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을 검찰(檢察)과 경찰(警察)을 동원(動員), 조사(調査)하라고 지시(指示)했다. 이 나라가 어찌되려고, 이런 막장 드라마를 보아야 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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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高句驪)의 평양(平壤)은, 서울을 뜻하는 대명사(代名詞) 또는 고유명사(固有名詞)라 할 수 있다.
본문(本文) 당회요(唐會要)의 기록(記錄)대로라면 : 고구려(高句驪)는 여러 번에 걸쳐 천도(遷都)를 하는데, 처음 평양(平壤)은 “현토군(玄菟郡)”에 있었으며, 동진(東進)하면서 천도(遷都)를 하다가 마지막 평양(平壤)인 장안(長安)에서 일천(一千)년 고구려(高句驪) 왕조(王朝)는 문을 닫게 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평양 부(平壤 府)를 보면, 한반도(韓半島) 평양(平壤)과는 전혀 다른 특색(特色)과 지형지리(地形地理)등을 말하고 있다.
㉮ 군명 : 기성(箕城)ㆍ낙랑(樂浪)ㆍ장안(長安)이다. 당서(唐書)에, “평양(平壤)을 또한 장안(長安)이라 이른다.”했다. 서경(西京)ㆍ서도(西都)ㆍ호경(鎬京)ㆍ유경(柳京) 최자(崔 滋)의 〈삼도 부(三都 賦)〉에 있다.
㉯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三方 서ㆍ남ㆍ북)과 다르며 유순하고 삼가는 기풍이 있다. 모두 한서(漢書)에 있다.
㉰ 수서(隋書)에, “사람들이 배우기를 즐겨하여 궁벽한 마을의 천한 집에서도 서로 삼가고 힘쓰며, 네거리 옆에 모두 서당을 지어놓고 결혼하지 않은 자제(子弟)들이 한데 모여 경서를 외고 활쏘기를 연습한다.” 하였다.
㉱ 최자(崔滋)의 부【賦 : 삼도부(三都賦)】에, “뭇 물줄기 모였으니 이름이 대동강(大同江)이라, 해맑고 넘실넘실, 번쩍여 출렁출렁. 호경(鎬京)을 안고 풍수(灃水)를 모아온 듯, 깨끗하긴 흰 비단을 깐 듯, 해맑기는 청동(靑銅 거울) 같은데, 비단 닻줄을 풀고 목란(木蘭) 배를 띄워 중류(中流)에서 머리를 돌리니 황홀하여 병풍 속에 있는 듯하네.” 하였다.
㉲ 영숭전(永崇殿) 부의 성안에 있는데, 우리 태조의 어진(御眞)을 모셨다. 전(殿)은 바로 고려 장락궁(長樂宮)의 옛터이다. 고려의 숙종(肅宗)과 예종(睿宗)이 매번 서경에 행행(行幸)할 때마다 장락궁에서 뭇 신하들과 잔치하였다.
㉳ 신숙주(申叔舟)의 기(記)에, “경진 년 초겨울 초하루에 상(上)이 서토(西土)를 순성(巡省)하여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시찰하고, 군사와 말을 엄숙히 하여 평양에 이르셨다.
㉴ 김 극기의 시에, “오색구름 속의 백옥루(白玉樓)가 땅 위에 날아왔으니, 임금 노시기에 적당하네. 북쪽 난간에 병풍처럼 열린 천 개 봉우리가 빼어나고, 동헌(東軒)엔 거울이 쏟아지는 듯한 강물이 흐르누나. 이끼 돋은 길엔 호석(虎錫)을 편안히 하였고, 버드나무 늘어선 물가엔 일찍이 용주(龍舟)를 띄웠네. 지금까지 어필(御筆)이 현판에 머물러 있어, 은하수처럼 환하게 멀리 어두운 데를 비추누나.”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중신기(重新記)〉에, “평양은 삼조선(三朝鮮)과 고구려의 옛 도읍인데, 고려가 서경(西京)을 두었고 또 호경(鎬京)이라 일컬었으며, 뒤에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했다가 또 고쳐 평양(平壤)부라 하였고, 본조(本朝)에 들어와 이름을 그대로 썼다. 부(府)가 서북 한 도(道)의 도회지로, 그 땅이 넓고 그 사무가 많으며 그 풍속이 순박하다. 번화하고 아름답기가 동방에 으뜸으로 이따금 신선의 자취와 신령스러운 유적이며 기특한 형상과 이상한 구경거리가 있어 전 시대 인물의 풍류를 상상할 것이 많다. <인용/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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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오늘도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을 고착(固着)화하는데 심혈(心血)을 기울인다. ‘공주(公州)나 부여(夫餘)가 백제(百濟) 땅이었다.’고 하면서 그곳에서 무슨 목곽(木槨)이 발견되었다느니, 삼천(三千)궁녀(宮女)가 낙화유수(落花流水)하였다는 낙화암(落花巖)이 어쩌니........하고 거짓과 음모(陰謀)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을 잘도 떠들어댄다. 삼천(三千)궁녀(宮女)가 어디에 있었는지, 어느 왕조(王朝)에 있었는지 조차 모르는 자(者)들이 말이다. 삼천(三千)궁녀(宮女)와 술타령에 외적(外敵)이 쳐들어오는지 조차 몰랐다는 의자왕(義慈王)이 “부모(父母)에게 효도(孝道)하고, 형제(兄弟)간에 우애(友愛)가 깊어, 모두들 칭하기를, 해동(海東)증자(曾子)”라 하였다는 이야기는 꾸어다 놓은 보리자루였더냐?
2014년 09월 24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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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가 찰 노릇이죠. 영주 북쪽이 한나라 때 선비, 당나라 때 토곡혼, 송나라 때 글란 지금 글란이 어디인지 솔직히 대륙에서도 정확히 비정하지 못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사서에는 있는데 영토는 비정할 수 없는 역사가 키타이의 역사라고 하더군요. 해석하는 사람에 따랏 다르게 비정할 수 있는게 현실이라고 합니다. 최근에 키타이의 후손들을 발견했다는 기사도 보았습니다. 지금의 기준보다 한참 서쪽으로 갔더군요. 정확한 명칭은 기억이 안 나네요. 키타이의 후손들이라고 주장하는
소수민족이 있다고 합니다. 아마 보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불과 몇년 전에 나온 거니까요.
동천왕 때 밀려서 동진하여 평양에 도읍을 했다고 하는데 왕험 또는 평양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결국 왕험이라는 것은
기자를 말하는 것이기에 재야사학에서 주장하는 왕검 혹은 단군은 허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일본놈들이 단군이라는
요임금의 그림자를 이용하여 자기들의 역사를 승급시키려는 조작질에 우리의 재야들이 놀아난 것 같습니다.
글란은 현 서유럽의 흉노에게 밀려 중앙아세아에서 신강성쪽으로 넘어옵니다. 이때 역사서는 기록하기를, 일만여호(戶)가 고구려에 의탁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곳은 현 신강성과 중아지방의 경계쯤 됩니다. 이것은 대륙사에서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따라서 글란이 현재의 중원지방이나 그 동쪽지방으로 온 일은 없다는 것이지요. 키타이를 중국이니 중앙을 뜻하는 말이라고 하는데 이는 서쪽과 동쪽의 중간지점인 현 중앙아세아의 종족이란 뜻도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왕험은 왕검성을 말하는데, 이것 역시 한 번 재고찰을 해보아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됩니다. 성원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특히 요임금은 제곡고신씨의 아들입니다. 또 고구려는 제곡고신의 후예(직계)이므로 성을 고씨라 했다는 것으로 보면, 더 많은 증거를 찾아야겠지만, 요임금과 단군은 한 인물일 것으로 사료됩니다.
고쥬몽의 의 선조에는 고진 고등왕 등이 [한단고기]에 나오는데 이들은 한나라보다 더 오래된 사람들 입니다 고주몽의 시조를 북방 전욱고양씨라고 하는 말도 있는데 모두 팩트가 아닙니다 이런 작위는 상대방을 쳐서 이길 수 없을 때 그를 잠시 인정해주는 말 입니다 마치 수박으로 셍사결전을 하다가 결판이 안나면 휴전 하고 나서 막걸리 한잔 나누면서 노형! 대형 ! 하면서 존칭으로 부르다가 세월이 흐른 후에 상대가 약해지면 기습 공격하여 명망시켜 버리는 것과 같은 겁니다 때문에 이른 바 삼황 오제라는 하화족이 만든 설들은 고구려가 천손이라는 사실 그리고 유럽 과 유라시아 그리고 현재의 지나대륙 스촨 섬서성까지 그리고
베링해를 넘어간 잉카까지 고구려였다는 사실을 하화족 이 자기들 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기 위해 만든 허구 입니다 동북공정 과 맥락을 같이 하는 허구입니다 고구려 보장왕은 베이징에서 당이 내려준 조선후라는 허울 뿐인 벼슬로 살면서 동족들의 마음을 어루 만지며 반란을 사전에 방지하는 일을 하여 당이 주는 생활비에 보답하다가 죽었다고 추측 됩니다 흉노가 순누고 순누가 선(태양) 입니다 로마 카토릭의 대신전 도 서천한 고구려의 굿당 입니다
예! 성원감사드립니다. 조선사를 중국사로 왜곡, 조작한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상황오제는 조선사이며, 다만 호칭만이 서로 다르게 표현된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한단고기는 아직 검증이 완료되지 않은 기록이기 때문에 인용치 않고 있습니다.
조선사를 지구사로 생각하는 것은 확대재생산이라고 봅니다. 지금도 풀리지 않은 여러 왕조의 유적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장왕에 대한 이야기도 많은 부분이 잘못 전달되고 있으며, 베이징이 현 북경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는 큰 오류라 봅니다. 고주몽의 시조가 전욱고양씨 또는 제곡고신씨 중에 누가 되든 두 분은 가까운 사촌간입니다. 조선사 이야기를 중국사로 만든 것이라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됩니다. 한단고기는 우리나라에서만 일부가 인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공식적으로 인용이 되려면 기록의 검증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한단고기의 편찬과정을 보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는 것이죠. 이게 문제라고 봅니다.
진서의 내용중에 천산 현토 황하가 나오는데 천산과 황하사이에 현토가 있는 것 같습니다. 현토는 유주의 땅으로 상곡, 어양, 우북평, 요동, 요서, 낙랑이 포함되는데, 상곡을 아무다르여강 상류라 하셨고, 영주를 현 청해호 동쪽이라 하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유주와 영주는 요해(발해)와 직접 관련있는 곳인데 요해(발해)의 위치 비정이 어렵습니다.
幽 州 在 渤 碣之 間 并 州 北 有 代 朔 營 州 東 暨 遼 海 (遼史)
낙랑 현토 요동은 유주로 서로 인접지역이고, 영주 역시 발해의 인접지역이니 유주와 영주는 서로 붙어있는것 같습니다. 영주 북쪽에 한의 선비요, 당의 토곡혼이요, 송의 거란이 있다 했으니 결국 발해가 어디인지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