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테이블시대 | 고대/남북국/통일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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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법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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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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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행일 | 788년(원성왕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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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고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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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788년 원성왕(元聖王) 4년에 설치된 통일신라의 관리등용 방법.
개설
국학(國學)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던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의 설치의도는 관리선발 뿐만 아니라, 신라 하대에 들어오면서 유명무실해진 국학의 기능을 강화하려는 측면이 있었다.
원래 국학은 삼국통일 이후 보다 확대된 정치제도를 운영하기 위해 유교정치사상을 이해할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682년(신문왕 2)에 설치된 것이었다. 그러나 진골귀족들의 족적 전통에 대한 강한 고집으로 인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독서삼품과를 설치했다는 것은 국학의 강화에 커다란 의미가 있는 진행이었다.
내용
독서삼품과는 신라의 새로운 관리등용 방법임과 동시에 국학의 졸업생을 상대로 국학에서 배운 학과에 대해 시험을 보는 제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국학의 졸업시험제도와 같은 성격의 것이었다.
시험과목을 보면 하품(下品)은 『곡례(曲禮)』·『효경(孝經)』을 읽은 자, 중품(中品)은 『논어(論語)』·『곡례』·『효경』을 읽은 자, 상품(上品)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예기(禮記)』·『문선(文選)』을 읽어 그 뜻을 잘 통하고 아울러 『논어』·『효경』에도 밝은 자, 특품(特品)은 오경[五經: 주역(周易)·시경(詩經)·서경(書經)·예기(禮記)·춘추(春秋)]·삼사[三史: 사기(史記)·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書)를 능히 통달한 자로서 순서를 가리지 않고 등용하였다.
이처럼 하품에서 특품으로 이르는 순서가 기본적인 것에서 광범한 지식으로 확대되도록 하고 있다. 즉, 『곡례』와 『효경』을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삼아 유교에서 실천도덕의 근본인 효와 일상생활에서의 도덕적인 예의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품에서는 『논어』가 첨가되고, 상품에서야 비로소 충의 대의(大義)를 강조하는 『춘추』와 문학서인 『문선』이 더해지고 있다. 특품에서는 더욱 광범위한 지식을 그 자격으로 요하고 있다. 따라서 신라에서는 일반적으로 가정과 국가가 요구하는 윤리도덕을 기본 지식으로 중시하였고, 그 위에 문학(文學)을 첨가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독서삼품과를 통해 형성된 관리층은 육두품이 중심이 되었으며, 국학의 입학생도 주로 육두품이었다.
이 제도를 마련한 이듬해(789년)에 자옥(子玉)을 양근현 소수(楊根縣少守)에 임명하려 할 때, 집사사(執事史) 모초(毛肖)가 자옥이 문적(文籍) 출신이 아님을 들어 반대한 일이 있었다.
여기서 나타나듯이, 특히 분우지직(分優之職)이라는 태수(太守)·현령(縣令)·소수(少守) 등의 수령직(守令職)이나 그 밖에 중앙관부의 사(史)와 같은 특정한 관직은 국학에서 유학을 공부한 다음에 독서삼품과를 거친 사람을 임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대에 이르러 국학의 중요성이 감소되어 가는 것과 비례해서 독서삼품과의 비중도 점차 낮아지게 되었다. 그것은 당나라에 유학하는 학생 수가 많아지고, 나아가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해서 귀국하는 사람의 수가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자옥의 경우이다.
자옥은 문적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수령직을 맡을 수 없다는 의견에 대해서 “비록 문적으로 출신하지는 않았으나, 일찍이 당에 가서 학생이 되었으니 또한 가히 쓸 만하지 않으냐.”고 하는 집사시중(執事侍中)의 건의에 따라 그는 결국 양근현 소수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3년 뒤인 애장왕 즉위년에도 역시 도당유학생(渡唐留學生)인 양열(梁悅)이 두힐현 소수(豆肸縣少守)로 임명되는 것을 볼 때, 독서삼품과 출신 대신에 도당유학생이 이때부터 대두하고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국학과 독서삼품과가 쇠퇴하는 반면에 도당유학생의 중요성은 후기로 갈수록 더욱 커졌다.
의의와 평가
독서삼품과가 관리의 임명을 골품에 토대를 둔 족벌적(族閥的) 세력의 크고 작음에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윤리와 정치사상으로서의 유학을 공부한 학문적 능력에 기준을 두었다고 한다면, 비로소 학문적 소양을 갖춘 관리가 일부에서나마 탄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하대에 이르러 신분적 폐쇄성이 증가하고 도당유학생의 적극적인 대두로 인해 독서삼품과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고려시대에 본격적으로 시행된 과거제도의 선구적 제도로서의 역사적 위치와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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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신라집권관료제연구』(하일식, 혜안, 2006)
- 「신라의 인재양성과 선발: 신라하대 독서삼품과」(홍기자, 『신라문화제학술발표회논문집』19, 1998)
- 「신라 골품체제하의 유교적 정치이념」(이기백, 『신라시대의 국가불교와 유교』, 한국연구원, 1978)
- 「신라통일기 유교사상의 성격」(이기백, 『한국민족사상대계』3,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74)
- 「숙위학생고」(신형식, 『역사교육』11·12합집, 1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