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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濠洲아이가
한국韓國의 참외를 먹고 있다.
호주濠洲 선교사宣敎師네 집에는
호주濠洲에서 가지고 온 뜰이 있고
뜰 위에는
그네들만의 여름하늘이 따로 또 있는데
길을 오면서
행주치마를 두른 천사天使를 본다
<김춘수 幼年時 1>
"나는 댓살 났을 때 호주 선교사가 경영하는 이른바 미션 계통의 유치원에 다녔다. 그 유치원은 여황산이라고 해발 200m가 될까 말까한 산(통영의 서북쪽에 위치한)의 산발치에 깎아서 터를 닦고 목조 단층의 교실과 한 100평 남짓한 운동장을 마련한 그런 곳이다.
선교사인 원장은 유치원에는 나오지 않고, 유치원의 운동장과는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쳐서 구분한 선교사네 이층 벽돌집의 그 이층 베란다에 흔들의자를 내놓고 의자를 흔들며 거기 몸을 싣고 무슨 책을 꺼풀이 검은 책을 읽고 있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었다.
눈이 푸르고 머리가 붉은 그의 아내는 유치원의 보모다. 늘 한복을 입고 있었다. 노란 저고리에 남빛 치마다. 천사란 말을 곧잘 하곤 했다. 풍금을 힘차게 타며 노래를 하이 소프라노로 예쁘게 불어 주곤 했다. 나는 여기서 인생의 첫눈을 뜨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산발치의 그 유치원에서는 통영시가가 한눈에 잘 내려다 보였다.
멀리 수평선 까지가 훤히 내라보였다. 우리는 일과를 마치면 으레히 삼삼오오 모여서는 시가와 바다를 한동안 내려다보며 뭐라고 저마다 재잘거리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러는 것인즉 그 시각(열두시쯤 되는)에 부산에서 여수로 가는 철선(600톤급)이 항구로 들어오는 것을 보기 위함이다.
기독교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그곳에는 천사와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처음 배웠고, 크리스마스 때 만국기가 펄럭이는 곳에서 아동극을 보면서 낯선 분위기에 젖었다."<김춘수 시전집, 통영바다, 내마음의 바다 中에서>
5살 여름 몹시도 무더운 날, 김춘수는 땀띠로 고생, 머슴 등에 업혀 병원에 가면서 선교사의 집 탱자나무 울타리 틈새로 보인 얼굴이 희고 눈이 푸른, 전혀 사람같지가 않은 선교사 집 남매를 통해 그는 전혀 다른 세계의 신선한 이미지를 체득, 후에 유년시1이라는 시를 남겼다.
어린 시절의 이 기억은 김춘수에게 강렬한 무의식으로 자리 잡아 유년시, 처용단장 시리즈 , 거울 속의 천사 곳곳에서 호주 선교사의 집과 천사가 자주 등장한다.
통영 최고의 천석꾼 인동집 자제 김춘수가 다닌 그 유치원이 바로 통영 최초의 유치원, 호주 선교사가 설립한 진명유치원이다.
비단 시인 김춘수 뿐이랴.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도 그 당시 체류했던 선교사들이 등장하고, 토지의 주인공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용빈은 어릴 때 주일학교에 나가면서부터 영국인 힐러 선교사와 전도사 케이트 양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들은 총명한 용빈을 가리켜 신의 축복을 받은 아이라 하였다. 그들이 살고 있는 붉은 벽돌집은 김 약국 집에서 과히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김 약국 집에서도 바라볼 수 있었다. 우묵한 숲속의 붉은 집. 그들 영국인들은 아침 저녁으로 김 약국 집을 지나가고 교회당으로 나가고 전도하러 나간다. 힐러 목사는 말라깽이다. 언제나 천천히 명상하듯 걸어간다. 케이트 양은 뚱뚱하다. 김약국 집 뜰 안에 살구꽃이 만발하는 봄날이면 가끔 케이트 양은 한복을 입고 지나간다."<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中에서>
통영근대문화의 제1세대라 불리는 동랑 유치진, 청마 유치환, 음악가 윤이상, 극작가 박재성, 시조시인 김상옥, 미술가 전혁림, 시인 김춘수 등이 활약한 통영문화협회도 호주선교사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제4대 영부인 공덕귀, 97년의 살아있는 문화교과서 제옥례, 부산대 오점량 전 학장, 통영 최초의 제1호 미술가 김용주, 수천당 병원 박기영, 하동집 박희영, 소의 화가 이중섭, 화가 박종석, 서각 임종안, 통영 최초의 교육자 신애미 여사, 유치환의 부인 권재순, 항일운동가 최덕지, 제10대 대법원장 이일규 부인 최익련, 통영상고 재단 이사장 송경훤 부인 박필순(박연주)….
이들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연적 단어가 호주선교사의 집이다.
과연 일제 강점기 대화정(현 문화동) 한 고을을 차지한 호주선교사의 집에는 어떤 재미난 비밀이 숨어 있을까. 또 현재 통영에게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수산 1번지 통영, 경남 최고의 인구수
파란 눈의 기독교 외국인 '놀라운 사건'
1895년 통제영 폐지 이후 일본의 대륙침략이 본격화, 1905년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요하고 거제 등지에 해군기지를 설치하는 등 통영은 혼란의 시기였다.
하지만 바다로 인한 신문물 흡수가 빨랐던 통영은 수산업 발달로 인한 경남 최고의 인구수를 자랑했고, 1910년대 칠기와 갓 생산으로 연간 50만원 이상의 수익을 올리던 공업 도시이기도 했다.
이 도시에 호주 선교사가 파견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 언제 왔을까.
1890년대 파란 눈의 손님의 첫 대면은 "웬 서양오랑캐가 마을 처녀들에게 연애 편지를 나눠주느냐"며 마을 사람들이 선교사를 피투성이로 만든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 선교사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순신 장군의 의전관 김기철 후손의 김치몽에 의해 생명을 구했다.
호주 장로교 선교회는 부산을 근거해 경남지역을 선교지역으로 삼았는데, 통영은 1895년부터 시작됐다.
영국성서공회 소속으로 중국에서 활동하던 아담슨 목사(한국이름 손안로)가 1894년 부산에 도착하고 거제도, 통영, 마산포 지역에 전도를 시작했다.
이보다 앞서 내한한 선교사 무어 역시 1894년부터 통영을 정기적으로 방문, 신자들이 생겼고 1905년 4월 5일 통영 최초의 대화정 교회(현 충무교회)가 설립됐다.
초대 목사는 아담슨이며 교인은 남자 4명, 여자 2명이었다.
와트슨 부부, 1911-2년 진명학원·유치원 설립
통영교육의 선구자 스키너, 한국여성사 한 획
충렬사에서 산복도로를 따라 무전동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SK 통제영 주유소가 나온다. 우리에겐 새문화주유소라 불리고 있다.
그 건물 맞은편 거송 문화빌라 나지막한 언덕에 폐허가 된 건물터 흔적이 잡초 속에 버려져 있다. 부서진 건물의 잔해와 우물이 있는 곳이 우리에게 흔히 호주선교사의 집이라 불리던 양관(洋館)이다. 1층은 병원, 2층은 붉은 벽돌의 양식 기와집 구조였다.
제옥례(97) 전 통영예총회장, 오점량(96) 전 부산대학장, 충무교회 위탁으로 호주선교사의 집 양관에 살면서 10년간 관리를 한 양철계(84) 문화동새마을금고 이사장, 박형균 충렬사 이사장, 호주선교사의 집 아래채에 살았던 서형일 화백 증언을 종합해보면 호주 선교사의 집과 유치원, 학교는 허물어진 전 문화주유소에서부터 현 문화주유소를 기점으로 산복 도로를 건너 문화빌라 옆 언덕 전체 대밭 앞까지가 그 범위다.
양철계 이사장은 30-40대 관리 당시 2층 벽돌집 3채와 교회, 학교, 유치원까지 총 2800평 정도라고 증언했다.
호주선교사의 집은 그 당시 와트슨 선교사 부부가 중국 선교활동에서 알던 기술자들을 데리고 와 일본식 아카렌카(붉은 벽돌)를 붙이고 지붕은 기와식으로 만들었다. 이 신기법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 현재 통영문화원(당시 통영청년회관)이다.
통영청년회관 짓는 비용은 서각하는 시목 임종안 화백의 아버지 정량동 부자 고 임철구씨가 충당했다.
통영에서 교육선교활동을 본격 시작한 선교사는 와트슨 선교사 부부였다. 와트슨은 1910년 내한 선교사 무어양과 함께 통영과 인근 도서지역을 순회 전도하면서 교육기관이 없음을 알고 1911년 내한한 부인과 함께 통영에서 유치원과 학교를 시작했다.
진명학원 설립자 와트슨 목사 부인이 1912년 통영진명유치원을 설립했는데, 이것이 통영 최초의 유치원이었다.
처음에 이 부부는 보통학교 설립을 계획 추진, 1915년 진명보통학교 설립 허가원을 제출했으나 조선총독부 개정 사립학교 규칙이 정하는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허가를 받지 못했다.
와트슨 부인은 학령을 넘긴 여성들을 위한 학교로 전환했는데 이것이 진명강습소이다.
인가받은 학교는 아니었으나 보통학교에 준하는 과목을 가르쳤다. 지정학교가 아닌 까닭에 성서를 가르치고 민족정신도 심어주었다.
또 야간학교를 개설, 통영지역 여성들에게 더없이 귀한 교육의 기회도 부여했다. 1928년 보고에 따르면 와트슨 교장에 보통과 학생이 125명, 교사가 9명에 달했다.
1914년 선교사 스키너(한국이름 신애미)는 교육학을 전공한 교육선교사로 1916-1920, 1927-1928년을 제외하고는 1940년 귀국하기까지 통영선교사업을 했다.
진명유치원 원장으로 봉직했고, 와트슨이 은퇴하고 1929년 귀국하자 그녀는 진명학교 교장이 됐다.
스키너 교장은 학령을 넘긴 여성들을 위한 학교인 진명강습소를 야간에도 운영하면서 특히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를 부여했고 가난한 장애인들에게 미싱과 자수 등을 직접 가르쳐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직업훈련까지 시켰다.
통영에서는 그녀를 신교장이라 불렀고, 통영에서 그녀의 정신적 교화와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흔히 진명학교로 불린 진명강습소는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인한 일제의 강압에 의한 철수와 함께 폐교됐다.
하지만 스키너는 훗날 영부인이 된 공덕귀 여사와 신사참배를 거부한 여성 항일운동가 최덕지, 청마의 부인 권재순 여사와 함께 학교와 유치원을 이끌어 한국여성사와 교육사에 한 획을 긋었다.
이를 증명하는 1931년 3월 19일 통영사립기독교유치원 진명유치원 제2회 졸업기념 사진은 한산신문 643호(2004년 1월 31자 1면, 4면 기획)에 이미 공개됐다.
의료 사업, 항일 투쟁의 본산지
1941년 태평양 전쟁 강제 추방
1916년 9월 중순 통영 선교부 의료기관이 신설 됐다. 테일러 박사는 나병 환자를 위해 의료기관을 통영읍에 설립했고, 일반 진료소와 보건소도 설립했다. 의료기관의 협력자는 왕대선, 멕켄지, 라이트 등의 선교사들이 물질적, 정신적 도움을 주었다.
또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민족 교육을 지향했고, 통영민들의 사회운동의 정신적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3.1 운동 당시 통영읍 진평헌과 선교사들이 함께 만세 시위를 벌였고 거제에서는 주종찬과 옥포교회 청년들이 시위에 참여, 호주선교사들은 한국의 독립을 지원했다.
1920-30년에는 선교사들이 10여명에 이르렀지만, 1938년 이후 신사참배문제, 태평양 전쟁 등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로 선교활동은 통제됐고, 조선인 목사들도 탄압을 받았다. 결국 선교사들이 1940-41년 항일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강제 추방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통영의 호주 선교부의 역할은 통영의 귀중한 씨앗이 됐다.
호주선교사의 집 양관은 1964년 전기누전으로 인해 불타 버렸고, 밑에 또 다른 집은 산복도로 개설로 사라졌다. 그리고 학교와 유치원, 운동장은 도심 속 빈 땅으로 남겨져 있다.
이젠 120년 전의 역사로 추억되지만 호주선교사들은 통영문화와 교육을 살찌웠고, 그들의 모습과 활동은 역사가의 사진, 이중섭과 김용주와 그림, 김춘수의 시와 박경리의 소설 등 다양한 작품으로 통영 문화를 아직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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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한·호주선교 120주년을 맞아 통영호주선교사들의 후예 25명이 통영을 방문했다. 감격과 동시에 호주선교사의 집이 남아 있지 않아 아쉬움도 있었다. 이 사진은 충무교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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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선교사의 집 위에 언덕에서 명정골 하동집쪽으로 내려다 본 모습. ㅁ자 모양의 기와집이 하동집이고, 그 인근은 전부 초가와 밭이다. 충렬사도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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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동래행 기차에서의 호주 선교사들의 모습이다. 맨왼쪽이 통영에서 활동한 맥컨지 선교사, 한 가운데 모자쓴 여인도 통영에서 활동한 무어 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