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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동(江東洞)은 행정동 명칭이며, 멀리 삼국시대부터 하나의 독립된 행정구역을 갖고 있었던 역사 깊은 고장이다. 신라 파사왕 때(80년 ~ 112년) 이곳에 현치(縣治)를 둔 율포현(栗浦縣)이 농소·방어진·감포까지의 영역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경덕왕 16년(757년) 12월에 율포현이 동진현으로 개칭되어, 경주시 모화지방의 임관군 영현으로 있었다.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동진현이 흥려부에 편입되면서 현치가 없어지고, 현종 2년(1011)에 유포진(柳浦津)이 되었다. 조선 태조 때 유포면이 되었고, 고종 24년(1887년)에 강동면으로 고치고 면소재지를 유포리에서 정자리로 옮겼으며, 동천강의 동쪽이 되므로 강동면이라 하였다. 1914년 4월 1일 전국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울산군 강동면(9개리로 관할)이 되었고, 1915년 2월 1일 경북 경주군 양남면 신대리 일부를 대안리에 편입하였다.
1917년 10월 1일 제령 제 1호(면제시행 - 1917년 6월 9일 공포)에 따라 면제(面制) 시행으로 면에 직원을 두고 사무를 처리하였으며, 1952년 4월 25일 초대 강동면의원 12명이 선출되어 면자치제를 실시하였다. 1956년 8월 8일 2대 면의원(11명) 및 초대면장, 1960년 12월 19일 3대 면의원과 12월26일 2대 면장을 선출하였다. 5·16직후인 1961년 9월 1일 읍·면자치제가 폐지되고 군이 지방자치단체가 되면서 면은 단순히 군의 하부기관이 되었다.
1962년 6월 1일 울산시 설치로 울주군 강동면, 1991년 1월 1일 울주군 명칭변경으로 울산군 강동면,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에 따라 울주구 강동면이 되었다.
1997년 7월 15일 울산광역시 승격으로 북구(자치구)가 설치됨에 따라 강동면을 강동동으로 개편하여, 신명·대안·산하·정자·무룡·신현·구류·당사·어물 등 9개 법정동을 관할하고 있다.
<< 강동해변 >>
어물동에서 신명동까지 길이 13㎞, 폭 40m로 동해 남부해안에 위치해 청정해역과 주상절리, 흑몽돌 등 수려한 해안 자연경관을 지니고 있으며, 국도 31호선을 따라 경주·포항과 지리적으로 연계돼 신라문화권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종합관광지로 매년 이 지역에서 신년해맞이축제·정월대보름 달맞이 행사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리고 있다.
또한 피서철에는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 신명동(新明洞)
경상북도와 경계가 되므로 지경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임내동과 공암동을 병합하여 신명리라 하였다. 울산광역시 교원연수원(옛 신명초교)이 있다.
■ 굼바우(구멍바우, 공암) - 신명 북쪽에 있는 바위. 구멍이 뚫렸다.
■ 수반(임내) - 신명동에 있는 마을. 앞에 숲이 있었다.
○ 대안동(大安洞)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우산·신안과 경북 경주군 양남면의 신대동 일부를 병합하여 대안리라 하였다.
신라 제10대 내해왕 17년(212)에 골포(경남 의창군), 칠포(경북 영일군)와 고사포(경남 고성군)의 세 나라가 갈화성(울산)을 침입하니, 임금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서 적을 크게 쳐부수어 편안히 지내게 되었으므로 대안동이라 하였는데, 이를 파군성의 역이라 한다.
■ 김씨 열녀각 - 대안동에 있는 열녀각. 좧제 망녀 정려각좩이라고도 한다. 김덕기의 아내 김씨가 홀시아버지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남편이 병들어 수개월이 되자 늘 하늘에 기원하기를 대신 죽게 하여 달라고 하였다. 남편이 죽으니 뒤따라 자결하였다. 고종 41년(1904)에 정려하였다.
■ 다음곡(다음골·다음밭골·다음리) - 대안동에 있는 마을. 주막이 있어 시끄러웠다고 한다.
■ 달기미산(달기미) - 대안 동남에 있는 산. 옛날에 바닷물이 넘쳐 그 산봉우리가 닭 한마리 앉을 만큼 남고 모두 물바다가 되었다 한다.
■ 삼동광산 - 대안동에 있던 금광
■ 상대안(웃대안) - 대안동의 위쪽 마을.
■ 신안 - 대안동에 새로 이룩된 마을.
■ 신흥사 - 어전마을 서남에 있는 절.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4년(635) 명랑조사가 창건 하였다. 문무왕 16년(678)에 만리성을 쌓을 때 승병 100여명이 이 절에서 무술을 닦았다 한다.(86쪽 참조)
■ 어전(재말리) - 대안동에 있는 마을. 지대가 높다.
■ 우음곡(우잉이·우음) - 대안동의 골짜기에 있는 마을.
■ 중마을(대안중리·중말) - 상대안과 신안 중간에 있는 마을.
○ 산하동(山下洞)
삼바우(삼암)가 있으므로 삼바우 또는 삼암, 변하여 산음, 산하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지경동의 일부와 화암을 병합하여 산하리라 하였다.
■ 갈밭미기(갈산) - 산하 서부에 있는 마을. 갈밭이 있었다.
■ 불못골 - 산음 서남에 있는 마을. 풀뭇간이 있었다.
■ 산음 - 중묘 서쪽에 위치한 마을
■ 삼성화암 광산 - 산하동에 있는 고령토 광산.
■ 중묘(중미) - 산하동에 있는 마을. 중앙에 묘가 있다.
■ 화암 - 산하동에 있는 마을
○ 정자동(亭子洞)
220여년전에 마을 가운데 24그루의 포구나무 정자가 있어 정자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죽전동과 달동 일부를 병합하여 정자리라 하였다.
강동동 소재지로서 강동파출소, 강동초등학교, 강동중학교, 강동우체국, 강동농협, 울산수협 강동지점, 활어직판장, 시장 등이 있다.
■ 낙끄테(용의머리) - 북정자 동북에 있는 바위.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 남정자 - 정자동 남쪽에 있는 마을.
■ 북정자 - 정자동 북에 있는 마을. 정자성터가 있다.
■ 분두골(분곡) - 남정자 서남에 있는 마을. 분토가 났다.
■ 버드내(유포, 유등포) - 정자에 있는 마을. 버드나무가 많았다.
■ 선창 - 북정자 앞에 있는 나루터.
■ 옥녀봉 - 분두골 남에 있는 산. 옥녀산발형이라 한다.
■ 유포석보 - 75쪽 참조.
■ 죽전(죽림) - 분두골 서남에 있는 마을. 옛날에는 대밭이었는데 오죽(烏竹)이 많이 났다.
■ 장승배기 - 남정자 북쪽에 있는 마을. 장승이 박혀 있었다.
■ 추보당 - 진사 김원문 이하 5대까지의 재실. 이규린의 기(記) 등이 있다.
■ 축간(축항) - 선창 남쪽에 있는 마을. 축항 시설이 되어 있다.
○ 무룡동(舞龍洞)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주념동·달동 일부를 병합하여 무룡산 밑에 있었으므로 무룡리라 하였다.
현재 청소년체육활동장(옛 무룡분교)이 이곳에 소재하고 있다.
■ 구산재 - 달골에 있는 동지중추부사 김득훈의 재실. 장석영의 기(記)가 있다.
■ 달골(월곡·달동) - 무룡동에서 으뜸가는 마을. 강동동, 농소1·2동과 경주시 양남면으로 가는 길이 사통오달로 나 있다.
■ 명촌(맹촌·비석거리·참새미) - 달골 밑에 있는 마을. 조재선의 영세불망비와 물이 찬 샘이 있다.
■ 무룡산 - 울산의 진산(452.3m). 연암동, 화봉동, 무룡동 일대에 걸쳐 있다. 「동국여지승람」, 「문헌비고」, 「울산읍지」 등에는‘무리룡산(舞里龍山)’이라 기록되어 있고, 산자락 사람들은‘매봉산’이라고도 부른다.
■ 아랫주렴(하주렴) - 주렴골의 아래쪽 마을.
■ 주렴골(주렴·주념) - 무룡동에 있는 마을.
■ 큰골(대곡) - 무룡동의 큰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
■ 탕건산 - 무룡·산하·정자동 경계에 있는 산. 탕건처럼 생겼다해서 이름 붙여졌다.(높이 295m)
○ 신현동(新峴洞)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전동·장등동·구남동 일부를 병합하여 신전과 장등의 뜻을 따서 신현리라 하였다.
■ 구남 - 마을의 산과 바위가 거북이 같이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
■ 달현(달골재, 달현령, 작은 잘령재) - 장등 서남에서 화봉으로 넘어가는 고개.
■ 못안(지내) - 신현동에 있는 마을. 못 있는 골짜기의 안쪽이 된다.
■ 무제당터 - 못안 동쪽, 무룡산 중턱에 있는 기우제단 터. 무룡산이 영검하다하여 가뭄에 무제(기우제)를 지내는 당집이 있었다.
■ 불매골(부뭇골, 야곡) - 장등만등이 서북에 있는 마을. 불맷간(대장간)이 있었다.
■ 신전 - 신현동에서 으뜸가는 마을. 밭에 집을 지었다. ■ 신전양지 - 신전 동남, 양지쪽에 있는 마을.
■ 영구재 - 신현동에 있는 이득곤의 재실. 후손 이석정의 기(記)가 있다.
■ 장등 - 신전에 있는 마을. 무룡산의 긴 등성이 밑이 된다. ■ 장등만등이 - 장등에 있는 등성이
■ 장명골(장명곡) - 신현동에 있는 마을.
○ 구유동(舊柳洞)
버드개 또는 유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유포·복성·판지·지동·저전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유포면 소재지였으므로 「옛날 유포」라 하여 구유리라 하였다. 여기서 담근 유장은 맛이 좋아 나라에 진상하기도 했다.
■ 미역바위(곽암) - 유포에 있는 바위.(80쪽 참조)
■ 지동 - 판지 서쪽에 있던 마을.
■ 복성 - 판지 남쪽에 있는 마을
■ 제전(저전, 딱바) - 구유동에 있는 마을. 옛날에 닥밭이 있었다. 앞에 저전나루터(딱 바나루)가 있다.
■ 판지(판기) - 구유동 바닷가에 있는 마을. 해안 일대에 반석이 판자처럼 깔려 있다.
■ 판지홈나무끝(큰껏, 홈들끝) - 판지 동쪽에 있는 들. 홈통이 놓여 있었다.
○ 당사동(堂舍洞)
마을 입구에 당산제를 지내는 당집이 있었으므로 당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우가·어물·저전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당사리라 하였다.
옛 동해초등학교가 있다.
■ 까칫골(작동, 깐추골) - 당사에 있는 마을. 까치가 많았다.
■ 거무섬 - 당사 북쪽에 있는 섬.
■ 용동굴(용난터, 요왕미기, 굴방구) - 당사에 있는 굴. 어물·금천·당사의 경계가 되는데, 거센 풍랑에 깎인 앙상한 바위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다. 길이 약 5m, 높이 2m쯤 된다. 옛날, 천국에서 내려온 아그락 할머니가 살고 있었는데, 해안의 큰 뱀이 그 남쪽 해안의 거북이보다 착하다고 여겨 옥황상제에게 뱀을 추천하여 뱀이 용이 돼 승천하는 날, 일진풍우가 몰아치고 천지를 진동하는 소리가 나더니 바위산 하나가 둘로 갈라졌다. 그러자 용은 무룡산 위에서 춤을 춘 후에 승천하였다.
■ 우가(소집골) - 당사 동남쪽에 있는 마을. 우가산 밑이 된다.
■ 우가산 - 북구 당사동과 구유동 사이에 있는 173.5m의 산. 간봉망인 유포봉수대가 있었다.
■ 유포봉수대(우가포 국수봉) - 우가포 마을 뒷산 꼭대기에 있었던 봉수대. 조선시대의 해안군사 통신 수단인데, 남으로 남목천(주전)봉수대, 북으로 경주부 하서지(하서 봉수대)에 응하였다.
○ 어물동(於勿洞)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구남동 일부 지역과 구암동을 병합하여 어물리라 하였다.
‘금천 아름마을가꾸기 사업’이 추진중에 있다.
■ 가운데고개(중령) - 가운데마을에서 연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 구암 - 금천 동북에 있는 마을. 거북같은 바위가 있다고 한다.
■ 강릉유씨 정려각 - 어물동에 있는 박영헌의 아내 강릉 유씨의 열녀각. 18세에 남편과 사별했는데 출가 한지 불과 한 달밖에 되지 않았다. 시부모 봉양에 효성이 지극하고, 지아비의 탈상이 가까워지자 조카를 양자로 맞아들여 놓고 자결하여 남편의 뒤를 따랐다. 조선 고종때 정려하였다.
■ 고래논 - 물청청 골짜기에 있는 고래실논. 옛날 동구 주전동 해안에 살고 있던 한 어부가 조그마한 고깃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큰 고래 한 마리가 물기둥을 내뿜으면서 다가와 큰 입을 쩍 벌리더니, 그만 그 어부와 고깃배를 송두리째 삼키고 만 것이다. 어부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답답해서 견딜 수 가 없었다. 둘레를 살펴보니 고래의 뱃속이었다. 밖으로 나가면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뱃장에 있던 칼을 잡고 고래의 배를 갈라 그 사이로 탈출에 성공했다. 그 고래의 크기는 삼간 집채만 하였는데 이것을 팔아서 이 논을 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금천 - 어물동에서 으뜸가는 마을. 다섯 손가락 모양의 산이 있는데, 그 앞산을 거문고판이라 하며, 그 아래로 냇물이 흐른다.
■ 마애여래좌상 - 부처봉 동남쪽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마애삼존불상(높이 3.5m, 폭 1m). 가운데 불상은 상반신이고 양쪽의 불상은 전신 입상인데 1933년에 발견되었다. 불교 신도 김불불에게 부처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내가 지금 비바람을 맞고 있으니 덮어다오. 나는 지금 동쪽 10리 안에 있다’하여 깨어보니 꿈이었고 찾아보니 불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71쪽 참조)
■ 모동 - 물청청 위쪽에 있는 골짜기.
■ 물청청(물청진. 물칭칭, 수청진) - 가운데고개 동남에 있는 마을. 물이 맑고 좋다.
■ 방방골(방방곡·방방아골·방방웃골) - 황토전 동남에 있는 마을. 방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 봇골(보곡, 복곡) - 금천 북에 있는 마을. 수원이 좋은 보가 있다.
■ 부처봉 - 어물리에 있는 산. 부처(미륵삼존불상)가 있다. 부처를 봉안하여 1938년 김불불 신도가 석불암을 중창했다. 이 부처를 1997년 지방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 하였다.(71쪽 참조)
■ 산두골[산두곡(山頭谷)] - 가운데고개 서남에 작은분지를 이루고 있는 마을.
■ 산맥(산막) - 어물동에 있는 마을. 산막이 있었다.
■ 성골(성곡) - 구암 서남에 있는 마을. 방어진목장의 마성이 있었던 곳이다.
■ 황토전(활토전) - 방방골 서에 있는 마을. 흙빛이 누렇다하여 이름 붙여졌다.‘무룡산의 선녀와
용’에 얽힌 옛이야기
옛날 이 산 꼭대기의 연못에 7마리의 숫용이 살고 있었는데, 한 마리는 눈이 멀어 다른 용들에게 따돌림을 받았다. 어느날 선녀 7명이 이 연못에 내려와 목욕을 하게 되어 7선녀와 7용의 상봉이 이루어졌다. 마음씨 착한 한 선녀가 눈먼 용과 짝이 되어 즐겁게 놀았다. 목욕을 마친 선녀와 용들은 서로 정이 들어 함께 하늘로 오르기로 하였다.
그러나 마음씨 착한 선녀는 눈 먼 용이 하늘로 오를 수 없음을 알고 연못에 그냥 남아 있었다. 그런데 6선녀와 6용들이 하늘로 오르자마자 천둥이 치며 장대 같은 비가 퍼부었다.
옥황상제의 노여움으로 6용과 6선녀들은 다시 그 연못으로 내려와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한다. 눈 먼 용과 착한 선녀는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고 올라가, 실명된 용은 상제의 조화로 눈을 뜨고 착한 선녀와 배필이 되었다. 그 뒤 옥황상제의 노여움이 풀리어 6용의 부부들도 승천했다고 한다.
그런 뒤로 무룡산 꼭대기에는 못이 없어졌으며, 거기에 묘를 쓰면 울산에 비가 오지 않았다고 한다.
알아보기 죂반석(盤石)죃 - 넓고 편편한 바위. 너럭바위, 죂닥죃 - 닥나무의 준말, 한지의 원료로 쓰인다.‘모동’에
‘모동’에 얽힌 옛이야기
옛날 어떤 과부가 호동이라는 아들 하나를 데리고 여기서 살았다. 어느 날, 캔 약초를 팔러 나간 아들이 날이 어두워도 안 돌아왔다. 불안한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 뛰어가다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 발길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그곳에는 문둥이가 호동이를 타고 올라 앉아 입에 솜을 틀어막고 간지르며 시퍼런 칼을 뽑아들고 위협하고 있었다.
호동 어머니가 죽여 봐라고 하며 가슴을 풀어 헤치고 덤비니 그 기세에 꺾인 문둥이는 그만 칼을 던지고 꿇어 앉아 잘못 했다고 빌었다. 옛말에 사람을 간질러서 간이 부풀게 한 다음 배를 갈라 그것을 꺼내 먹으면 문둥병을 고칠 수가 있다고 했다. 정신이 돌아온 호동이와 어머니, 그들 모자가 함께 안도의 눈물을 흘리니,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문둥이는 수없이 절을 하며 잘못을 빌었다.
호동이는 어머니에게, ‘아저씨가 저 칼로 찔러 죽일 수 있었는데 살려줬고, 또 저렇게 빌고 있으니 마음씨 착한 아저씨라고 생각해요. 우리 이 골짜기에 함께 삽시다’하여 드디어 문둥이와 함께 모동골에 살게 되었는데, 거처만 따로 하는 한집 식구가 된 것이다. 어느날, 뇌성벽력이 치고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더니 짚단만한 잉어 한 마리가 마당에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잉어를 잡아 끓여 먹고 난 문둥이는 사흘 만에 전신에서 딱지가 줄줄 떨어지며 몸이 홀가분하고 기분이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날부터 세 사람은 한 식구가 되어 한집에서 살았다. 하루는 이 아저씨가 약초를 팔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날이 저물어 어두운데 이상한 빛이 번쩍거렸다. 가까이 가보니 금덩이었다. 세 사람은 이 금덩이를 팔아 부자가 되었다고 하는 얘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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