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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사 항일운동의 재인식
김 광 식 *
1. 서언
2. 주도세력의 논란
3. 항일투쟁의 원인
4. 결어
1. 서언 51)
1918년 10월 5∼7일, 제주도 중문의 법정사에는 일제를 처단, 구축하려는 승려·불교도·선도교도·농민 등 수십여명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제주도의 일제, 일본인을 제주도에서 내몰고 국권회복을 기하려는 목적에서 무장 항일투쟁을 개시하였다.
그들은 화승총과 곤봉 등을 들고, 서귀포를 향하여 그 행보를 내딛기 시작하였다. 중문지역의 농민들도 그 대열에 참여하면서, 400여 명에 달한 항일투쟁 세력은 중문지역에서 일제의 통치기관, 시설을 파괴하였다. 나아가서 이 세력은 * 부천대학 겸임교수
14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5집 일본인, 개신교인에게도 위해를 가하였으며, 일제에 구금되어 있었던 농민 13명을 석방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 항쟁은 일제의 적극적인
반격, 진압으로 말미암아 중도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법정사의 항일투쟁 세력은 퇴각하였으며, 그 주도자들은 체포되었고, 일부 관련자들은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에 피체되어 검거된 인원은 66명이었으며, 재판에 회부되어 실형을 받은 대상자는 31명이었다.
이러한 법정사 무장 투쟁은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1910년 국권상실 이후부터 1919년 3 1운동 발발 이전까지의 한국독립운동사의 흐름을 유의해 보아도 그 구체적인 내용, 지향이라는 면에서 특이한, 주목할 만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지금껏 이 운동에 대한 전체적인 개요·내용·성격·위상 등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는 역사학계, 불교계 등 관련 학문분야에서 전혀 수행되지 않았다.
다만 최근 이 운동의 전모와 내용을 밝힐 수 있는 일제측 기록( 형사사건부 , 수형인명부 , 판결문 , 고등경찰요사 )1)이 발굴되면서 운동의 내용이 파악되었고, 신문에서도 보도하기2) 시작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이 운동을 주제로 한 토론회(중문청년회의소)와 심포지엄(제주학회)이 개최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은 관련 논문이 집중적으로
발표되었다.3) 그 결과 운동의 전개과정, 참가자의 분석, 참가자의 사1) 그 자료는 다음과 같다. 1918년도 형사사건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검사분국), 수형인명부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 정구용의 대구복심법원 판결문(1923.6.29, 정부기록보존소), 고등경찰요사 (1934, 경상북도 경찰부).2) 불교신문 1994. 3. 2, 3 1절 특집, 무오년 제주법정사 항일무장봉기 .3) 그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
김봉옥, 1995 법정사 항일운동의 재조명 제주도사연구 4.임혜봉, 1995 제주 법정사 스님들의 항일투쟁 중문청년회의소 창립20주년, 해방50주년 기념 학술토론회 자료집 .안후상, 1995 무오년 제주 법정사 항일무장 봉기 연구 중문청년회의소 창립20주년, 해방50주년 기념 학술토론회 자료집 .안후상, 1996 무오년 제주 법정사 항일항쟁 연구 종교학연구 15.박찬식, 1996 1918년 중문지역의 항일운동 제주도 99.법정사 항일운동의 재인식 143
회경제적 배경, 1910년대 제주도 종교 현황 등이 정리되면서 운동에 대한 이해는 상당히 진전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에 대한 전모와 성격을 이해하기에는 아직도 해결할 문제가 적지 않다. 때문에 이 운동이 한국근대사·독립운동사·근대불교사·한국종교사·제주사 등 각 분야의 일반사에 포함시키기에는 난점이 제기되는 것이다.
현재, 이 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어렵게 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우선 이 운동은 그 참가자의 구성원이 승려·불교도·선도교도·농민 등 다양한 구성원이 포함되었기에 그 성격을 파악하기에는 적지않은 난점이 제기되어 왔다. 두번째는 일제하의 제주도내에서의 선도교도에 대한 비판적인 정서의 유물이 잔존하고 있다. 간혹 이 운동이 선도교(보천교)난,4) 폭동으로 매도당하고 선도교의 성격을 약화시키려는 것은 그를 예증한다. 세번째는 그 관련 자료가 미흡하다는 것이다. 현전하는 자료는 일제측 재판 관련의 기록과 약간의 보도기사 뿐이다. 재판 기록도 중요하지만, 재판 기록의 한계도 있음을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이다. 네번째는 이 운동을 연구, 발표한 선학의 연구에 있어서 일부 편향적인 접근과 지나친 해석이다. 운동을 초기에 연구한 개척적인 의미는 있지만, 그 이후 연구의 일정한 장애로 작용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연구와 해석은 자유, 자율이지만 학문탐구에 있어서는 實事求是적인 기본하에서 엄정한 학문적인 자세, 냉정한 객관성, 자료중심의 이해, 적절한 해석, 풍부한 상상력의 활용이 기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섯번째는 이 운동의 해명과 연구는 그 출발 박찬식, 2002 법정사 항일운동의 역사적 성격 제주도연구 22.조성윤, 2002 일제하 제주도의 종교상황과 법정사 항일운동 제주도연구 22.
김창민, 2002 법정사 항일운동 가담자와 운동의 성격 제주도연구 22.김정인, 2002 법정사 항일투쟁의 민족운동사적 위상 제주도연구 22.4) 본고찰에서는 보천교, 태을교라는 명칭보다는 법정사 항쟁에 관여된 선도교라는 표현으로 통일하여 정리하겠다. 보천교는 1920년대 초반부터 등장한 명칭이고,태을교와 선도교는 1910년대에 함께 쓰인 명칭이지만 제주도에 연관이 보다 많은 선도교라는 명칭을 활용하고자 한다.
144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5집 자체가 관련의 유족, 지방자치 단체가 개입, 주도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 측면은 일면으로는 연구의 활성화를 촉발시키는 것은 분명하지만 지원과 개입의 역할은 분담되고, 조율되어야 할 것이다. 비판적으로 본다면 연구자들이 주최측의 원심력에 이끌린 면이 없었는가도 생각해볼 문제이다. 다만 자료수집, 증언 청취, 자료 제공 등이라는면에서 적극성을 발휘한다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본 고찰은 발표자의 이 운동에 대한 최종 분석, 해석이라는 입장에서 발표하는 것은 아니다. 발표자가 이 운동에 대한 개요와 성격을 접한지는 오래되었으나, 연구의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그러나 최근 제주의 근현대 불교사의 연구에 관련을 갖게 되면서 구체적인 자료를 접하였다. 이런 배경하에서 본 고찰은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이 운동을 살펴본 것이다. 그는 우선 1910년대, 혹은 개항 이후의 제주도 종교계동향, 불교계의 움직임을 거시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였다. 1919년 3 1운동의 이전과 이후는 종교사뿐만 아니라 여타 분야에서도 그 이해의차별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불교의 정황을 발전적, 동태적
인 관점에서 접근하였다. 지금껏 연구자들은 제주 근대불교를 불교의 황폐화, 부진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보았으며, 최근 발표된 연구성과를5)참조하지도 않는 경향이 있었다. 본 고찰은 이를 극복하려는 의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이 운동은 불교, 선도교(보천교)가 개입 5) 김광식, 2000 해방직후 제주 불교계의 동향 근현대불교의 재조명 민족사.김광식, 2002 근대 제주불교의 전개와 성격 근대 제주 불교사 자료집 출간기
념 세미나 자료집 .오 성, 2002 근대 제주불교의 태동과 관음사 창건 근대 제주불교사 자료집출간 기념 세미나 자료집 .
이경순, 2002 이회명과 제주불교협회 근대제주불교사 자료집 출간기념 세미나자료집 .
한금순, 2002 이일선과 제주불교연맹 근대제주불교사 자료집 출간기념 세미나자료집 .
제주불교사연구회, 2002 근대제주불교사 자료집 .
법정사 항일운동의 재인식 145
된 종교운동이다. 때문에 연구자는 종교운동과 해당 종교에 대한 상식, 이해의 폭을 갖고 분석, 해설에 임해야 된다고 본다. 요컨대 불교,선도교의 입장을 유의하여 분석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고찰은 법정사 항일운동의 주도세력의 논란, 항일투쟁의 원인을 재검토하고자 한다. 이 문제는 어찌보면 매우 단순한 문제이지만 운동의 성격, 본질을 다룸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볼수 있다. 그러나 본 고찰도 이 문제를 완전 해결할 수는 없고, 그렇게 될수도 없다. 다만 그 문제에 관한 필자의 관점, 생각을 제시하는것에 머무를 것임을 전제한다.
2. 주도세력의 논란
법정사 항일운동에 대한 이해의 첫 출발은 그 운동의 성격의 문제이다. 그 성격은 대체적으로 항일투쟁·항일운동·국권회복·독립운동·민족운동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운동의 개념 및 성격은 대략 항일운동으로 집약되고 있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의 주도 세력, 주체의 문제는 간단하게 접근되고 처리될 것은 아니다. 이는 운동의 이념과 목적에서 나온 항일운동이라는 개념에 뒤질 수 없는 초미의 관심사인 것이다. 운동의 수식어로 법정사를 포함시킬 것인가의 여부와 운동이 중문·제주도 차원에서 전개되었다는 이해는 바로 그 단적인 예증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운동의 이해와 서술에 있어서도 불교 중심적인가, 혹은 그렇지 않다는 주장도 주도세력의 논란에서 제기 된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지금까지의 그 주도세력의 논란에 있어서, 그 논란을 제공한 당사자들의 현실적인 입장, 가치판단, 개별적 학문의 취향이 과도하게 개입되었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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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연구에 있어서 자신이 처한 환경·입장·사상 등이 자연스럽게 개입됨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도 학문의 작업에 있어서는 상식적인 객관성이 있어야 할 것이며, 보편 타당한 설명이 성립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입장하에서 필자는 주도세력의 문제를 이해함에 기록에 나오는 것을 중심으로 하고, 실사구시적인 입장에서 해석하고자 한다. 본 고찰의 해석과 논리가 지나치거나, 잘못되었다면 본 고찰도 수정을 받아야 할 것이다. 다만 필자는 근대 제주불교의 동태적인 입장과 급증한 이 시대 불교사의 연구 성과를 적극 반영하고자 하는 것이다.
본 고찰에서는 주도세력의 이해를 운동 참가자들의 성향에 의거 재검토하고자 한다. 즉 그 역할, 참가 동기, 일제 피체 및 구형량에 따라서 일정하게 구분하고, 그에 따라 주도세력 문제를 재검토하자는 것이다. 법정사 항일운동에 참가한 400여 명6) 대부분은 국권회복, 일제의 타도 및 구축을 원하였고, 그를 위해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사전 준비, 전개과정에 있어서는 그 역할이 상이하였다. 이제 그 운동의 준비·주도·참여·동참이라는 내용에 따라서 주도세력 이해에 관련된 보다 구체적인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 운동의 참가자 400여 명을 주동세력·동참세력·참가세력·단순 가담자 등으로 대별화 시키고자 한다. 주동세력은 이 운동의 모의, 준비, 주도적인 진행을 담당한 대상자로 보고자 한다. 동참세력은 이 운동의 초기 단계에서는 배제되었지만 운동의 준비단계에서부터 동참하고 운동의 전개에 깊숙이 관여한 대상자로 보고자 한다. 참가세력은 운동의 초기의 모의 및 준비 단계에는 관여되지 않았지만 운동의 전개과정에 참여한 당사자들을 지칭한다. 그밖에 단순가담자는 운동의 전개시에 일제 타도라는 목적에 부응한 일반 대중들을 말한다.
6) 매일신보 1920.12., 불무황제 체포 에서는 그 대중을 700명이라고 전한다.
법정사 항일운동의 재인식 147 이러한 주동·동참·참가세력·단순가담자라는 구분은 운동의 시간적인 흐름에서도 구별된다.
주동세력은 운동의 제안자이면서 주동세력의 핵심인 법정사 승려인 김연일7)이 1914년 경 법정사의 주지로 머무르기 시작할때부터 운동을 구체적으로 모의하였다는 1918년 8월 경까지 법정사에 머물렀던승려, 제주도 거주 승려, 법정사 거주의 불교도 등이라고 본다. 정구용판결문에서 김연일은 수명의 동지와 계획하여 불교도 및 농민을 모악 작당하였다 고 한정황을 말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운동의 주동은 김연일과 그의 동지인 것이다. 이러한 운동의 주동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지금껏 나온 기록을 종합하면 김연일·강창규·방동화·강민수·정구룡·김상언·장임호·김용충·김인수·김삼만·한윤옥 등 11명이라고 보겠다. 이들중 김연일·정구용·강민수·강창규·방동화는 그 당시에는 승려이었음이 기록에 나온다.8) 김상언은 당시 기록에는 승려라고 나오지 않지만 제주도 지역 주민의 증언에 의해서 승려로 보고 있다.9) 그러나 잔여 인물은 법정사에 거주하면서 사찰의 소임을 보았던 대상자들이었기에 지금의 관점으로는 승려라기 보다는 불교도라고 볼수 있을 것이다. 이들중에서도 장임호와 김용충은 일제의 기록에 법정사 거주, 무직이라고 나온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일제의 기록인
수형인 명부에는 법정사 승려와 법정사에 거주하며 소임을 본 인물 전체를 직업란에 無職이라고 적고 있다는 것이다.10) 때문에 무직이라7) 김연일의 호적명은 基仁이었다.(김연일의 손자 김갑출 증언)8) 그 기록은 일제의 고등경찰요사 , 해방공간 제주도에서 발간한 교적부, 승적첩이다. 고등경찰요사 266면에 김연일·정구용·강민수는 승려로 나오고, 교적부에는 강창규가 승려임이, 현전하는 방동화의 승적첩에는 그가 1913년 기림사
에서 출가하였음이 나온다.
9) 김봉옥과 임혜봉의 이해이다.
10) 일제측 1차 기록인 형사사건부 에서는 김연일은 법정사 주직이라고 표시하였
지만, 수형인 명부에서는 무직이라고 표기하였다. 이 연유는 혹시 불교, 승려라
는 것을 대외적으로 공개하기를 꺼린 것에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148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5집고 기재된 인물들은 법정사의 승려, 법정사에 머무르면서 법정사의 소임을 보았던 준승려로 볼수 있다. 그들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김삼만은 법정사의 인부, 김인수는 김연일의 조카,11) 한윤옥은 법정사의행자(下男)이었는데 이들은 법정사에 머물렀던 준승려인 불교도들이라고 볼수 있다.
한편 이들중 김연일·강민수·정구용·김용충·김인수 5인은 경북영일에서 건너온 외지인이었는데, 이들의 중심 인물은 물론 김연일이었다. 그러나 강창규·방동화·김상언·김상만·장임호·한윤옥 등 6인은 제주도 지역의 출신들이었다.12) 여기에서 우리는 주동세력은 육
지인 영일출신과 제주도출신들로 이원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수있었다. 그런데 강창규는 1892년에 전북 임실의 죽림사에서 출가 득도한 승려이었지만,13) 일제 기록에는 법정사 거주로 나오지 않고, 무직이며 그 주소는 안덕의 사계로 나온다. 방동화와 김상언도 당시에는 승려였지만 법정사에 머물렀다는 일제측 기록은 없다. 이 내용들은 이 운동이 법정사 승려들만으로, 주동세력이 구성되지 않았음을 말하는 증거이다. 요컨대 법정사 외곽의 제주도내 승려들도 이 운동에 가담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 운동의 전개 과정을 세밀히 살피면 운동의 추진에 가장 적극적인 인물은 金蓮日(총괄, 주모, 징역 10년), 姜昌奎(실행 및 무장투쟁선도, 징역 8년), 房東華(기획 및 준비, 징역 6년)이었다. 지금껏 일제측 기록에 의거 이 항쟁의 주도는 김연일이고, 그는 선도교의 책임자11) 김인수는 당시에는 승려가 아니었으나 운동이 종료되고, 수감생활을 마친 1940년대 초반에는 승려가 되었으며, 경북 연일이라는 곳에서 절을 갖고 있었다.(김연일의 손자 김갑출의 증언)12) 이중 장임호는 본적이 함북출신으로 되어 있지만 제주도에 들어온 것이 오래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13) 근대제주불교사자료집 (제주불교사연구회, 2002), 230면. 출생지는 북제주군 제주읍 오등리로 나온다.
법정사 항일운동의 재인식 149인 박주석(징역 7년)을 포섭하여 항쟁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항쟁의 진행 경과를 유심히 보면 실제 항쟁에서 제주도 출신
승려인 강창규가 최일선에서 가장 강력하게 항쟁을 진두지휘하였음을알수 있다. 또한 육지에서 건너 온, 외지인으로서 제주도 사정을 완전파악할수 없는 김연일이 항쟁을 준비, 주도함에는 적지 않은 한계가 있었음을 이해할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강창규, 방동화와 같은 제주출신의 가담, 활동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아래의
매일신보 기사는 우리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다.
제주도 중면 사계리 강창규라는 자는 자칭 불무황제 겸 치민황제 김연일이라는 자와 공모하고 선위선봉대장이라고 한후 대정 8년 10월 6일 밤에 좌면 도순리에 있는 승려 수명과 부근의 주민 수십명과 단결한 후 각 리 구장에게 현지로 이번 옥황상제에게 성덕 주인이 출세하여 조선 백성을 구할터인즉14)이 기록은 강창규가 항쟁 이후 도주하였다가, 1922년 12월 28일에 일제에게 체포되었음을 보도한 기사이다. 이 기사제목에는 강창규를
자칭 황제라는 표현을 하였고, 기사의 내용에는 그가 김연일과 공모하고, 항쟁에서는 선위선봉대장을 역임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즉 법정사 외부에 있는 제주출신 승려인 강창규가 항쟁에 큰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김연일의 제의를 받고 항쟁에 참여한 박주석과는 그 성격이 전연 다르다. 강창규는 김연일이 법정사에서 항쟁의 지도부를 구성할때에도 선봉대장이었으며, 실제 항쟁에서도 선두에서 강력한 투쟁을 한 것에서 항쟁을 공모하였다는 정황을 뒤받침해 준다. 후술하겠지만 김연일과 강창규, 방동화는 거사 이전부터 친근한 관련을 맺고있었다. 추측을 한다면 제주출신인 강창규와 방동화는 거사를 준비하14) 매일신보 1923.2.18, 자칭 황제 강창규, 제주도에 잠복중 드디어 체포 주재소
에 침입하여 가구 문서와 건축물에 방화한 자칭 황제 .150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5집
면서 방동화는 법정사 내부에서 기획을 담당하고, 강창규는 법정사 항쟁의 투쟁준비 역할을 분담한 측면을 생각할 수도 있다. 지금껏 중문지역 이외에서도 항쟁에 참여한 대상자가 있었던 것을 갖고 선도교도인 박주석의 역할을 고려한 경우도 있었지만, 이제는 강창규와 방동화의 역할을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당시 기록에는 승려로 전하지 않지만, 증언에 의해 승려로 추정한 김상언의 판결이 징역 6년이었음을 보면, 김상언에 대한 성향과 역할도 검토할 과제이다. 추후 이에 대한 자료수집이 요망된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제주출신으로서, 제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법정사 외부의 승려의 참여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인석의 경우 그는 당시 38세로 농업으로 나오지만,필자가 원인상15)과 제주불교의 증언 청취의 대화에서 그는 방동화의 사형이라고 회고하였다.16) 사형이라 함은 승려로서의 선배를 지칭한다. 오인석은 1945년 해방직후 제주불교의 교구를 구성할 당시, 방동화가 대표인 교무원장이었을 때 그는 김석윤과 함께 고문으로 추대된 인물이다. 요컨대 오인석도 당시에 승려일 가능성이 높다. 이 사례도 더욱 세부 검토가 요청된다.
이상과 같은 분석을 통하여 우리는 주동세력은 불교에 관련된 인물들 중심으로 구성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적인 중심은 물론 법정사이었다. 예컨대 정구용이 그 관련을 다음과 같이 개진하였음에서 그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나는 1918년 음 4월부터 9월까지는 법정사에 머물렀는데 그때 나와 함께있던 자는 장임호 외 6명 등으로, 김연일은 기회 있을때마다 우리들에게 제주도에 있는 일본인 관리 및 일본인을 몰아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었다.(정구용 판결문)
15) 서귀포 원만정사에 주석한 혜관스님을 말한다.
16) 22인의 증언을 통해 본 근현대 불교사 (선우도량, 2002), 205면.
법정사 항일운동의 재인식 151한편 선학의 연구에서 지적한 승려(스님)가 12∼13명이었다는 애매한 표현은 보다 구체적으로 정리해야 할 것이다. 승려였다면 그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간혹, 당시에는 불교신자였다가 운동이 종료된 이후에 출가하여 승려가 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럴 경우이면 그에 대한 세부 사정을 제시해야 하며, 승려로는 볼 수없고 불교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제주불교가 완전 토착화되지않은 여건을 고려하면 처사, 사찰의 소임을 본 대상자들도 광의의 승려로 볼수는 있다. 그러나 현재적인 관점과는 차이점이 있다.
다음으로 검토할 것은 운동의 동참세력이다. 이 동참세력은 법정사중심의 운동의 주동세력이 제시한 운동의 목적과 방법에 대하여 동의하였으며, 그 운동의 초창기 준비 과정에 적극 가담한 세력을 지칭한다. 즉 운동의 준비단계부터 참여한 대상자를 지칭한다. 요컨대 이들은 무장 대오의 간부, 선두에 있었으며 운동의 중추로서 1918년 10월7일, 법정사를 출발할 당시의 결사대원 33명을17) 말하는 것이다. 물론이중에서 앞서 말하였던 운동의 주동세력은 제외해야 될 것이다. 그러면 그 대상자는 20명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김연일을 중심으로 한 법정사의 내외의 주동세력이 운동을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신도및 대중들에게 동의를 얻었던 1918년 7월 직후에 가담한 대상자로 보인다. 김연일은 8월, 9월에 자신이 구상한 운동의 취지를 법정사의 신도 및 주변 농민들에게 알리기 시작하였다. 그 해 9월 19일(음력 8월15일, 추석), 법정사에서 개최된 盂蘭盆의18) 행사에서 불무황제가 나17) 결사대원은 떠나기 이전 항쟁의 의지를 다지기 위한 차원에서 서명(원형의 모양으로, 사발통문)을 하였다. 이 서명자는 김연일, 김인수, 정규룡을 포함한 33명이었다. 그런데 이 서명부는 김연일의 손자가 보관하다, 그의 외사촌이 빌려가서 분실하였다고 한다. 김연일의 유품이었던 피묻은 태극기도 함께 분실되었다.(김갑출 증언)
18) 불교의 우란분 행사는 음력 7월 15일이다. 한편, 9월 19일(음력)은 증산도에서 말하는 고수부가 강증산의 성령을 받은 날인 기념일이기에 선도교와의 관련을 지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기록은 기록 자체로 수용해야 한다고 본 15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5집타나 국권의 회복이 가능할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김연일의 행적은 그 예증이다.
이 즈음 운동에 찬동한 세력으로 가담한 대상자는 불교도와 선도교도를 검토할 수 있다. 우선 지금껏 논란이 가장 많았던 것은 보천교도 (선도교도)의 가담이었다. 보천교 즉 선도교 리더격은 박주석이었다.19) 박주석은 선도교 본부에서 파견한 인물은 아니고, 당시 제주도내 한림의 금악에 거주하였던 농민이었다. 그런데 박주석 그가 운동에 가담한 것은 법정사에 거주하고 있었던 김연일을 비롯한 불교도들의 협조 요청에서 나온 것이다. 아래의 글은 박주석의 회고이다.
1918년 음력 6월 말, 피고 방동선이 자택에 와서 법정사에 와 달라고 함으로써 음력 8월 4일 그 절에 가자 거기에는 피고 김연일, 강민수, 장임호, 김용충, 김인수 등이 함께 있었는데 그들로부터 이번 폭동의 상담을 받았다. 법정사에 있었던 피고들은 나를 선생으로 호칭하였는데, 김연일은 나에게 자기는 김해 김씨의 후예이며 제주도에 있는 일본인 전부를 몰아내고 이어 육지에 나가 불교를 넓히고 싶은바, 그 수행에 조력해달라고 하였다.(정구용 판결문) 우리는 이 회고에서 일단은 박주석으로 상징되는 선도교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였을 가능성을 추론한다. 필자는 현재 박주석 이외의 인물로 누가 선도교도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선학의 연구에서는 강봉환, 김무석, 조계성을 그 대상자로 비정하고 있다.20) 추측하건대 선도교도는 66명의 대상에서, 그리고 전체 참가자다. 불교 우란분의 행사가 간혹 추석인 음력 8월 15일에 지내는 경우도 있다.
이 우란분제에 선도교와 공동행사를 개최할 가능성도 추정할수 있지만 이는 별도의 문제이다.
일본은 양력을 기준으로 생활하는 것임은 상식화되어 있었고, 증산도(보천교,선도교 등)에서는 음력으로 제반 행사를 이해, 처리하고 있다.
19) 박주석이 선도교 수령임은 고등경찰요사 에 나온다.
20) 김봉옥과 임혜봉이 여기에 해당된다.
법정사 항일운동의 재인식 153400여 명을 고려한다면 더욱 추가될수 있으리라고 이해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도교 세력이 동참세력에 포함되었음을 수긍한다. 제주도 내에서 법정사 항쟁을 보천교난이라고 한 것은 운동이 종료된 이후 에 그 참가대중이 대거 보천교에 입교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도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일반적인 견해를 재검토할 사정에 직면하였다. 그는 우선 박주석이 선도교라는 증거, 기록에 대한 문제이다. 박주석이 仙道敎首領이라고 전한 고등경찰요사 는 1934년에 발간된 책자이다. 즉 운동이 발발된 15년후에 나온 기록이기에 그 기록의 이면을 보아야 한다.21) 박주석에 대한 운동이 종료된 직후의 일제측 기록(형사사건부, 수형인 명부)에는 선도교라는 표현이 전혀 없다. 주목할것은 형사사건부에는 농업, 한림의 금악(주소), 55세로 나와 있다. 발굴된 정구용 판결문에도 선도교라는 표현은 전혀 없다. 그런데 수형인 명부의 박주석의 인명란에 處士라는 표현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처사라 함은 불교신자로서 사찰에 왕래하는 재가신도, 혹은 사찰의 일을 보는 재가신도, 불교 교리와 신앙에 밝은 지식인, 사찰의 신도로서 신도회 간부 등을 지칭하고 있다. 실제 정구용 판결문에는 박처사 가 항쟁을 진두 지휘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박처사를 바로 박주석으로 볼수 있다. 때문에 박주석은 항쟁 전후에는 법정사의 처사로 보는 것
이 순리일 것이다. 다만 그가 그즈음에 선도교로 전향되어 가던 시기이거나 내면적으로는 선도교도, 혹은 항쟁 이후에는 완전한 선도교의 간부로 활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일단 그를 외적으로는 불교신도이나, 이면적으로는 선도교도라고 보고자 한다. 한편 김연일을 비롯한 법정사 거주자들이 그를 선생으로 호칭하였고, 그도 항쟁의 지도21) 경북의 고등경찰요사 는 일제 고등계 형사들의 업무 지침서의 성격이다. 때문에 그 당시 경상북도내 요시찰 인물들의 관련 내용을 종합, 정리한 것이다. 때문에 1934년 직전의 상황일 가능성이 추론된다.
154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5집
부였으며,22)일제에 피체되어 징역 7년을 구형받았기에 박주석도 일단은 운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을 사실이다. 박주석은 당시에는 불교신도로서의 신도 간부격이며, 선생을 칭함에서는 상당한 지식인 이었고, 그를 포섭한 것은 그 지역에서의 일정한 인망이 있었기에 운동의 대중화를 기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자 한다.
그러면 추가의 동참세력이 있었는가를 살펴 보겠다. 이를 단적으로 알수 있는 단서는 김연일이 운동의 선봉대를 정함에 강창규를 선봉대장, 방동화와 강민수를 좌·우대장, 양남구를 중군대장, 김상만을 후군대장, 장임호를 謀士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이를 보면 운동의 추진체는 법정사내 거주자가 기본이었으며, 법정사 밖에 있었던 대상자는 강창규, 방동화, 양남구 뿐이었다. 방동화는 법정사 외부에 거주한 것으로 나왔지만 그 당시에는 승려였고, 양남구는 1918년 음력 2월부터 불교도가 되었다. 그러므로 동참세력은 법정사 외부의 승려와 불교도,그리고 선도교(박주석 계열)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즉 무장투쟁세력은 법정사, 불교도, 선도교도 등 3개 출신으로 성립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김연일 등 운동의 주동세력이 왜 박주석을 끌어들이고, 항일무장대의 지도부 일원으로 내세웠음을 설명해야 한다. 법정사내 거주자와 법정사 신도인 불교도들은 거의 동참을 유도하였다.
그리고 선도교는 선도교에 영향력이 있는 대상자인 박두석과 그와 연결된 것으로 보이는 강봉환(징역 2년), 김무석(징역 2년), 조계성(징역2년)이 동참세력으로 참여한 것이다. 이는 법정사 주위 뿐만 아니라 여타 지역에서도 일반 농민, 불교도, 선도교들이 혼재되어 삶을 영위하였던 사정을 고려하면 그 결정은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서귀포를 향하여 운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하였을 당시 33명에 포함된 대22) 박찬식은 법정사 항일운동의 역사적 성격 에서 박주석을 운동의 都大將으로 표현하였는바, 어느 기록을 근거로 그렇게 주장하였는지 알 수 없다.
법정사 항일운동의 재인식 155
상자들이라고 하겠다. 즉 불교도와 선도교도 중에서 항쟁의 선도대인 33명에 포함된 인물들을 동참세력으로 보고자 한다.
다음은 운동의 참여세력이다. 참여세력은 운동의 최종 결과로 일제에 체포된 66명의 대상중에서 앞서 언급한 주동, 동참세력을 제외한 대상자를 일컷는다. 단순하게 구분하면 피체된 대상자중에서 실형이언도되지 않은 대상자를 말한다. 이들에게는 벌금형, 불기소 처분이내려졌다. 이들은 주동, 동참세력들이 법정사에서 대오를 갖추어 서귀포, 중문지역으로 일제를 처단하러 내려갔을 때, 촌락에서 적극 동참한 대상자들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검토할 대상은 단순 가담세력이다.23) 이들은 법정사 항일운동 전체를 400여명으로 볼 경우 앞서 살핀 주동·동참·참여세력을 제외한 잔여 대상자를 일컫는다. 이들의 숫자는 대략 340여명에 달할 것이다. 이들중에는 불교도와 선도교도 있었을 것이다.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농민들도 있었을 것이며, 간혹 이들중에서 1920년대 초이후에는 보천교도로 입교하였을 가능성도 고려할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법정사 항쟁이 그간 제주도에서 보천교의 난으로 불리워졌는가에 대한 단서도 찾을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단순가담자에 대한연구의 관심은 매우 미흡하였다고 보인다. 이는 사료의 부족에서 기인
한 것이지만, 연구자의 관점과 시각 자체에서도 약간의 문제점은 내재하였다고 보인다. 민중운동, 중문·제주도지역의 항일운동이라는 관점을 강조한 연구자들은 이 대상자들에 대한 검토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아닌가 한다.
지금껏 법정사 항일운동의 주도세력의 논란과 관련하여 활동 내용,가담 시기 등을 고려하여 주동·동참·참여·단순 가담 등으로 대별23) 이들도 운동 세력의 범주에 넣을수 있다. 이들도 실제 일제 처단의 일선에 섰으며, 10월 4일 각 이장들에게 격문을 보냈지만 이를 일제에 알리지 않았음도 고려할 대목이다.
156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5집 하여 살펴 보았다. 이는 운동의 본질을 더욱 더 새롭게 보려는 차원에 서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에 의하면 우리는 불교계의 세력이 주
동, 동참, 참여를 주로 하였다면, 선도교는 동참, 참여세력에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단순가담은 불교도, 선도교, 일반 농민들이 모두 포함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 운동을 불교가 중심적으로 주도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다. 그러나 선도교가 전적으로 배제하거나, 일부의 역할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이제 우리는 왜
이 운동이 불교 중심으로 주도, 진행되었지만 선도교가 결합된 채로 운동이 발발하였고, 전개될 수밖에 없었는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 기묘한 사실, 역사성을 제주도내부의 특수성으로 해명해야 한다. 그 연후에 특수성에서 보편성(종교운동), 일반화(항일민족운동)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3. 항일투쟁의 원인
법정사 항일운동의 원인 및 전개과정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법정사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불교만의, 불교도가 전적으로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법정사가 운동의 출발처, 공간 제공처, 운동의 대중화로 나아감의 기반은 법정사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법정사가 이 운동에서 그러한 역할과 성격을 갖게 되었나를 설명해야한다.
지금껏 이 운동의 해설 및 연구에 있어서 당시 일제의 침략상, 일본인의 경제 수탈, 참가자들의 핍박과 피해, 참가자들의 생활상 등을 분석하고 그것이 운동의 일정한 요인이 되었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운동 발발에 대한 구체적, 보편적인 설명은 흡족하지 않았다고 보인다.
그러면 왜, 어떤 연고로 법정사가 운동의 기반이 되었는가? 그리고 김법정사 항일운동의 재인식 157연일을 비롯한 다수의 승려들은 어떤 연유로 일제를 처단하려고 무장항일 투쟁을 하였는가? 그리고 박주석을 비롯한 선도교도는 법정사승려들의 항일투쟁에 무엇 때문에 기꺼히 참여하였는가? 이 의문을 해소시킬 때 이 운동에 대한 개요 및 성격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선적으로 법정사라는 사찰의 건립, 성격 등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법정사는 근대 제주불교의 산파역인 봉려관에 의해서 창건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이해이다.
제쥬도 아미산 관음사(蛾眉山觀音寺)라는 절은 봉려관(蓬慮觀)이라는 녀승이 자기 한 사람의 힘으로 창죠한 절인바, 그 뒤에 안도월(安道月)을 쥬지로 삼어 젼도에 죵사하던즁, 신도의 수효가 수백명에 이루엇슴으로 근쟈에 그 절의 규모를 확댱하기 위하야 법당을 새로히 짓기로 하얏고 또 이왕에는 법정산 법돌사(法井山法乭寺)라는 절도 건설하얏더라24)위의 1918년 3월의 기록에서 우리는 일단 법정사도 봉려관과의 연고가 있음을 알수 있다. 그러면 관음사와 법정사는 언제 창건되었는가.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1937년의 기록이지만 아래의 내용을 참조할 수 있다.
이 관음사는 봉려관이라는 비구니가 창건하였는데 …… 이때 문득 한 노스님이 나타나 저 산천단으로 내려가거라 하므로 다시 발심해서 산천단으로 내려왔다. 운대사(雲大師)라는 이상한 스님이 계셨는데, 오래 기다렸더니 이 제야 본다 하시며 가사(袈裟) 한벌을 내어 주었다. 다시 다음해(1909)에 마을에서 구재(鳩財)하야 초암(草庵) 여러 칸을 지었다. 또 다시 다음해(1910)에 영봉(靈峰)화상과 안도월(安道月) 처사등이 바다를 건너 제주에 들어오면서 용화사(龍華寺)의 불상과 각 탱화 등을 모시고 와서 반가이 맞이하여 봉안하였다. 다음해(1911) 9월에 법정암(法井庵)을 창건하였다. 그리하였으나 도민은 24) 매일신보 1918.3.2. 제주도 아미산 봉려관의 기적, 꿈갓흔 기괴한 이야기 .158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5집계속 내쫗으려 하였는데, 다음해(1912) 4월에 돌을 던지는 폭행에도 상처가없는 기적으로 인하여 드디어 복종하게 되니 여기다 관음사를 이룩하게 된것이라 함이 이 절의 창건 삽화이다.25)요컨대 관음사는 1909년에, 법정사는 1911년에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일 것은 근대 제주불교에는 봉려관에 대한 신화, 찬사, 신비성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그 신비적인 기록, 구전에 나온 것을 재구성하고, 역사적인 내용으로 정비할 필요성을 만난다. 또한 봉려관의 신앙, 원력, 노력이 뛰어나다고 하여도 사찰의 불사는 일개인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예나, 지금이나 동질적인 사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본고찰의 초점인 법정사는 과연 봉려관의 단독적인 사업으로만 가능하였을 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과 관련해서는 그를 상의한 동지,승려, 후원자, 그 지역의 불교도들의 지원 등등을 거론할 수 있다. 사찰 불사, 더욱이 새롭게 창건한 지역에서, 제주도처럼 불교세가 미약
한 현실하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에 관하여 우리의 시각을 넓힐 자료가 있다. 그는 위의 기록에 운대사 라고 표현된 스님으로, 1909년 제주도의 항일의병의 주도자로 널리 알려진 金錫允이다.26) 김석윤은 제주읍 이도리 출신으로서, 1894년 전주 위봉사에서 박만하를 은사로 사미계를 받고 제주도로 돌아와서는 제주 광양 서재에서 통감, 사서, 사략 등 유교경전과 반야경 등의
불경을 공부하였다. 그는 1898년에는 대흥사에서 초등과를, 1902년에 는 통영 용화사에서 사교과를, 1910년에는 용화사에서 수선안거를,1916년에는 위봉사에서 비구계를 받고 부산 범어사에서 불교를 공부한 승려였다.27) 그러나 그는 단순히 승려로 지내기보다는 서당, 학교25) 이은상, 두륜산인관음사사적기 탐라기행 (1937).26) 모충사 항일독립운동 선열록 (광복회제주도 지부, 1999) 참조.법정사 항일운동의 재인식 159에서 교사로도 근무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이를테면 당시 근대 제주에서의 다방면의 지식이 충만한 지성인으로 볼수 있을 것이다. 이런 그의 사상과 신앙은 불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보천교에도 관심이 있었고, 의병을 모의하여 일제에 체포되었음을 보면 그는 민족의
식이 내재된 지성인으로 보인다.
바로 이런 성격을 갖고 있던 김석윤이 법정사의 창건에 관여되었다
는 것은 우리의 주목을 받을수 있는 대목인 것이다. 그의 일생을 총정리한 기록에 법정사는 김석윤이 세웠다는 내용이 있다.
공은 본디 세상을 초탈하는 불교를 좋아하였다. 대구에서 돌아온 후 여승봉려관과 함께 색수수(塞水藪, 새미털)에 불사(佛舍)를 창건하였다. 남주(南州)의 사찰들은 이 곳에서 시작되었다. 또 법정(法井)에 도량을 세웠는데, 모두 시사(施舍)가 있었다.28)요컨대 관음사와 법정사도 봉려관 혼자 창건한 것이 아니라 김석윤도 동참한 결과라는 것이다. 김석윤은 의병의 주도로 일제에 피체되어 대구의 일제 감옥에서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1909년 7월에는 제주도로 돌아온다. 그 직후 그는 관음사에서 관음사 서무로 근무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법정사의 창건과 설립 정신에는 김석윤의 의지, 의도, 의식이 개입됨을 파악한다. 때문에 법정사는 일반 사찰과는 약간의 이질성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추측하건대 민족의식이 개입되지 않았는가하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위의 기록에서 관음사와 법정사에 施舍가 있었다는 표현을 주목할 수 있는데, 이는 곧 불교도, 신도들의 후원인 보시가 있었음도 말해주는 것이다.29) 이러한 기록들에서 우리는 법정 27) 근대제주불교사자료집 214면의 김석윤의 이력서(교적부).28) 김석익, 亡兄石惶道人行錄(1937), 근대제주불교사자료집 .29) 방진주에 의하면, 법정사가 창건되기 이전에 그 곳에는 방동화의 부친(처사)과 방동화가 수행을 하였던 초당 이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이전부터 절터였다는
160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5집 사는 법정사 주위의 신도들과 밀접한 관계하에 창건되었고, 김석윤으로 대변되는 민족정신이 일정하게 개입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최근 관음사와 근대 제주불교를 연구, 발표한30) 제주도 출신 승려인 오성은 법정사에 김연일이 머무르게 된 것을 설명하였다. 그는 제주출신 승려인 혜관(원인상)이 방동화에게 전해들은 증언에 기초하여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 것인데, 필자는 그를 참고하고 방동화의 자제인 방진주의 증언도 고려하여 그를 재구성하겠다.
1909년 관음사가 봉려관과 김석윤의 협력하에 창건, 기초를 닦은후에는 방동화 처사가 봉려관을 돕고 있었다. 그러나 김석윤은 의병주도자였던 연고로 일제의 감시가 심하자, 1910년 1월 제주를 떠나 통영의 용화사로 가서 수선안거를 시작하였다. 1911년 1월에는 다시제주로 돌아와 해월학원 교사로 근무하였다. 그는 제주도에 있는 것이 여의치 않아 제주를 다시 떠나, 1912년부터 1916년까지는 범어사의 강원에서 대교과 과정을 수료하였다. 그런데 1910년 경 통영 용화사에서 조성된 불상과 탱화가 관음사로 오면서 용화사 승려인 안도월이 관음사로 오게되었다. 추측건대 여기에는 용화사에서 수행하였던 김
석윤의 중재, 연결 역할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당시 관음사에 처사로 있던 방동화는 불교에 발심하고, 관음
사의 강창규에 영향받아 출가를 하기 위해 1913년에 기림사로 가게
되었다. 그가 기림사로 가게 된 것은 범어사에 있었던 김석윤에게 자
문을 받은 결과로 보인다. 범어사에서는 김석윤의 은사 승려인 박만하
를 통하여 기림사로 가는 주선을 받았다. 방동화는 기림사에서 입산,
득도하였으며 기림사에서 김연일을 만났다. 방동화는 당시 김연일이
것이다. 방동화가 유년시절에 그곳에서 생활한 것은 집안의 독자였고, 절에 보
내야 오래 산다는 말을 민간의 말로 인한 것으로 회고한다. 이에 방동화는 관
음사로 간 것이다.
30) 오성, 2002 근대 제주불교의 태동과 관음사 창건 근대제주불교사 자료집 출
간기념 세미나 .
법정사 항일운동의 재인식 161
한소식 을 하였다고 할 정도로 불교에 정통하고, 법문에 능하여 김연
일을 관음사에서 초빙하도록 주선하였다. 방동화는 입산 득도한 이후
에는 문경 대승사 강원에 가서 사미과·초등과·중등과·수의과를 배
웠다.31) 이에 그는 1915년에 사미계를 받고 제주도로 복귀하였다. 그
러므로 김연일의 제주도 초빙은 방동화의 주선과, 강창규의 주관에 의
하여 진행되었다고 보인다.
바로 이런 연고로 김연일이 관음사로 오게 되었다. 강창규는 김연일
이 법문 즉 불교의 대중강연에 능하고 신도들이 환호를 하자 그를 관
음사에 머물도록 하였으나, 봉려관과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김연일
을 법정사로 보내게 되었다. 이처럼 법정사는 1913년 경부터 김연일
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게 된다. 김연일 일행이 봉려관과 서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이유는 앞서 김석윤과 연계된 인맥에서 제주도로 건
너온 김연일이 관음사에 머무름으로 인해, 봉려관이 일제의 탄압을 받
을수 있음을 우려함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아니면 대중강연에
능한 김연일로 인해 자신의 위상이 위축될 것을 염려한 면도 있었을
것이다. 항일의병 출신인 김석윤이 개입된 용화사의 탱화 전래, 김석
윤과 친근한 강창규의 관음사 주석, 방동화와 강창규가 김연일을 관음
사 법사로 요청과 머무름 등의 변동은 봉려관으로서는 여러 측면에서
거북한 입장이었을 것이다.32) 이런 문제를 타개하는 방안으로 김연일,
강창규, 방동화 일행을 법정사로 가도록 유도하였다고 보인다.
그러면 여기에서 김석윤과 연계되어 나오는 姜昌奎라는 인물에 주
목을 해보자. 강창규의 수행 이력서에 의하면,33) 그는 북제주군 제주
읍 출신으로 1892년 전북 임실군 죽림사에서 출가하였다. 당시 그의
사미계사가 박만하이었고, 그는 1905년에는 하동 칠불암에서 수선안
31) 방동화의 승적첩 과 수행이력서 참조.
32) 방진주는 방동화와 안도월도 상호 불편한 입장이었다고 증언하였다.
33) 위의 제주근대불교사 자료집 230쪽.
16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5집
거를 시작하여 그해에는 강원도 건봉사로 가서 사미과 및 사집과를 수
료하였다. 바로 이 같은 강창규의 이력에서 우리의 시선이 가는 것은
그의 사미계사가 朴萬下라는 점, 그리고 박만하는 김석윤의 은사, 법
사라는 점이다.34) 이를테면 같은 스승밑에서 출가 득도를 한 것이다.
이는 이들이 제주출신이라는 동향과 함께 긴밀한 인연을 갖을 수 있는
요인이 아닌가 한다.35) 더욱이 당시 근대 제주불교에는 제주출신 승려
가 희귀한 상황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김석윤은 1877년생이고,
강창규는 1872년생이었으며, 입산 출가는 강창규가 2년이 앞서기에
이들은 거의 동지와 같은 입장이었을 것이다.
이 증언에 기초한 당시 상황을 유의하면 우리는 우선 김연일·강창
규·방동화라는 법정사 항일운동의 주동세력이 김석윤과 연계되어 있
음을 알수 있다. 그리고 김연일, 강창규는 봉려관과의 노선이 이질적
임도 나오고 있다. 여기에서 말할 수 있는 이질성은 어떤 측면인가?
자료가 없어 단정하기는 어려워도 추측을 하면 관음사의 봉려관과 안
도월은 순수불교를 지향하였다면 김연일·강창규·방동화는 식민지
불교, 일제의 국권강탈과 식민지 수탈을 직시, 극복하려는 민족불교적
인 노선을 염두에 두었지 않았는가 한다. 이는 김석윤·김연일·강창
규, 방동화가 모두 민족불교, 항일운동이라는 공통적인 노선을 걸었던
인물들이었다는 연유에서 그렇게 이해하였다.
한편 김연일이 제주도에 내방한 것은 관음사에 머물던 강창규와 방
동화가 법사로 초청한 저간의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다시 주목해 보
자.36) 김연일이 제주도에 초청되어 행한 법문과 대중강연에 제주지역
의 신도들이 큰 감명을 나타내자, 강창규와 방동화가 김연일에게 제주
34) 김석윤의 교적부.
35) 강창규는 1933년 위봉사에서 도첩을 받았는데, 위봉사는 김석윤의 출가사찰이
다. 김석윤도 위봉사에서 1938년에 도첩을 받았다.
36) 방동화의 자제인 방진주 증언.
법정사 항일운동의 재인식 163
도에 머물면서 불교 포교에 앞장서 달라는 간청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연일이 육지로 돌아가려고 하자, 그를 무마시키기 위해 강창
규는 자신의 딸(17세)에게 김연일을 모시고 살도록 하기까지 하였다
는 것이다.37) 또한 거사 이전에 김연일·강창규·방동화가 결의 형제
를 하고, 항일 결의를 위한 관음사 인근의 산천단에서 하였지만 사정
이 여의치 않아, 백일기도를 법정사에서 하였다는 것도 이들의 인연을
말해주는 단서이다. 이런 사정을 통해 우리는 김연일·강창규·방동
화가 운동 이전에 깊은 연관을 갖고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김석윤은 의병의 참가로 피체, 수감된 이후 친지들의 구명
노력으로 석방되어 1911년 이후에는 해월학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
고, 1912년에는 범어사로 가서 강원의 대교과 과정을 마치러 떠났기
에 자신이 법정사의 주지, 책임자로 일선에 나설 수 없었다. 이에 그는
그와 친근한 강창규를 통하여 김연일을 법정사에 머물게 하도록 한 것
임을 추론을 할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방동화가 기림사로 가서 출
가를 하고 1918년에 제주도로 돌아온 이후 법정사 항쟁에 동참하게
된 사정, 강창규가 법정사에 머무르지도 않고 김연일과 함께 법정사
항쟁에 동참하게 된 이면을 알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방동화는 출가
이전에 하원의 한문사숙에서 김석윤에 한문을 배우고, 나아가서는 불
교 수행에 지도를 받았다는 것도38) 우리가 유의할 내용이다.
이제부터는 김연일이 1914년 무렵부터 법정사 주지로 활동하면서,
37) 법정사에 주석한 비구니 법의와 방진주 증언. 강창규의 딸은 김연일의 첫 번째
부인이되었는데, 여기에서 딸을 하나 두었다. 그 딸은 육지에 나와 살고 시집을
가서는 아들 1명을 두었다. 이 아들은 제주도로 들어가서 살았다고 한다. 김연
일은 일제에 피체, 수감, 석방 이후 고향에 와서 다시 결혼을 한 것으로 보인
다. 그 부인은 강성돈이었는데(마산 출신) 김연일이 일제의 감시와 집을 불지르
는 등의 연고로 인해 출가하여 비구니로서, 경북 영일군 동해면에 관음사라는
절을 창건하였다. 강성돈은 1978년, 76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현재 그 절은
도시 팽창과정에서 없어 졌다. 이상은 김갑출의 증언에서 나온 것이다.
38) 방진주 증언.
164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5집
선도교와 연관을 갖게 된 연유를 살펴 보겠다. 김연일은 승려로서 법
정사를 기반으로 포교활동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제주도에
는 불교세력이 미약한 상황이었다. 그 미약한 불교의 상황, 그리고 조
선후기 이래의 탄압 또는 제주도만이 갖고 있는 종교 상황으로 인해
정상적인 포교 활동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당시 제주도의 종
교는 무속신앙과 습합된 상태로 존립되었던 정황, 간혹은 유교와 불교
가 혼재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여건하에서 1914년 경부터 제
주도에 전래, 파급되기 시작한 선도교의 영향은 김연일에게는 적지 않
은 도전으로 나타났을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김
연일은 대중교화에 능하였기에 법정사에는 많은 신도들이 운집하였을
가능성을 추론할 수 있다. 이 운집 대중에는 불교에 호감을 갖고 있으
면서도 선도교에 경도되기 시작한 부류도 있었을 것이다. 이에 김연일
은 선도교로 경도되는 대중들을 불교 신앙으로 유지시키려고 고심하
였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김연일과 선도교와의 연계를 추론한다.
그런데 선도교는 강증산의 사후인 1911년에 교단 창립을 한 증산교
단 최초의 교단이다. 선도교는39) 그 교리 자체가 유불선의 종합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선도교는 일본의 패망과 한민족의 부흥을 내포
한 교리의 성격상 일제의 탄압을 받고 있었다. 일제는 선도교를 유사
종교로 간주하여 일반 종교로 취급치 않고, 정치단체, 비밀결사체로
간주하면서 집회 자체를 규제하였다.40) 선도교단은 1914년에 접어들
면서 강증산의 부인인 高首婦와 고수부의 이종사촌인 車京石간의 교
권 장악을 둘러싼 내분이 일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16년 12월무렵
에는 차경석 중심의 교권 장악이 일단락되었다. 이에 차경석은 교권강
화를 기하기 위하여 24방주체제라는 전국적인 조직체계를 시도하기
시작하였다.41) 이러한 선도교단의 변화는 제주도에도 일정하게 미쳤
39) 임경석, 2000 일제하 증산교단의 성립과 분화 증산도사상 3.
40) 성주현, 2001 1920년대초 태을교인의 민족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9.
법정사 항일운동의 재인식 165
을 것이다. 요컨대 1917년 이후에는 중앙의 선도교단에서 제주 포교
를 위한 인물을 파견하였을 것이다. 선도교의 신도 증가세는 구체적으
로 전하는 기록은 없지만 총독부 기록을 재구성한 것을 유의하면
1912∼1916년에는 2∼4%의 증가세였지만 1917년에는 7.64%, 1918
년 22.87%가 증가한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42) 즉 1917년, 1918년에
는 비약적인 증가 추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통계는
제주도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43)
선도교의 교리 및 성향이 민족주의적인 면이 내포되어 있었지만, 일
반 농민들의 입교는 무병·생활안정·소원성취·자손번창·교주 등극
후의 지위 획득 등44) 개인 취향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선
도교의 신도들은 선도교의 교리 및 사상에 대한 관념이 강하다고 말하
기도 어려운 것이다.45)다만 그들은 일제의 패망 및 개벽이라는 선전에
마음이 기울었고 구습을 고집하면서 신식문화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
다.46) 이러한 성향은 선도교도들이 선도교의 교리 및 사상보다는 일제
침략, 일제의 수탈, 비참한 현실 등을 탈피하려는 현실 구원의 사상에
젖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구원의식, 메시
아를 고대하는 정황은 선도교도에만 있다고는 볼수 없다. 당시 일반
농민들에게도 그 의식은 유포되어 있었다. 조선후기 이래 새 세상이
와야 한다는 바램과 개벽사상은 미륵사상과 접목되었다. 이는 미륵신
앙과 민중적 요청과의 만남으로 그 미륵의 도래는 각처에서 자생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 미륵사상은 각처의 현실에 맞게 변용되어 민중철학
41) 임경석, 앞의 논문, 259-266쪽.
42) 임경석, 앞의 논문, 256쪽.
43) 김석익의 심재집 (1990)의 1917년 조항에 보천교가 처음 들어와 십여년간 몰
래 활약하였다고 한 것도 이를 말한다.
44) 조선의 유사종교 (계명대출판부, 1990), 713쪽.
45) 위의 자료, 722쪽.
46) 위의 자료, 789쪽.
166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5집
으로 전이되었는데 기아, 착취, 탄압으로부터 해방을 염원한 농민사회
에서 미륵블교는 민중의 역사의식을 키워 갔던 것이다. 때문에 이 미
륵사상은 일제치하에서도 결정적인 사건, 운동과 결합되어 나타날 가
능성이 농후하였다.47)
그런데 당시 1910년대 제주도의 선도교는 교단 조직이 정비되지 않
았고, 포교가 증대되어 가는 현실이었다. 특히 일제의 감시와 집회의
불허는 종교행위의 존립을 가늠하는 중차대한 문제였다. 이에 그들은
선도교의 의식 및 집회를 행하기 위한 공간 확보가 절실한 여건에 부
닥쳤다고 보인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도교가 법정사에 왕래하였을 가
능성을 추론한다.
이처럼, 김연일과 선도교는 상호간에 접촉의 가능성을 우리는 파악
하였다. 그러면 이 양자간의 구체적인 만남을 가능케 한 계기를 어디
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물음과 답변은 법정사 항쟁에
선도교가 참여한 사정을 밝힐 수 있는 단서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에 대한 기록이 부재하기에 하나의 추론으로써만 이야기할 수 있다.
현전하는 일제측 기록과 선도교 관련 교단의 기록에는48) 선도교가 간
접적으로 연계되었다고 전하고 있다.49) 다만 1922년 동아일보 의 기
47) 고은, 1988 미륵과 민중 한국근대 민중종교사상 학민사.
48) 그러나 현전하는 보천교연혁사 , 대순전경 , 증산교사 , 증산도의 도전 등
에는 선도교의 책임자인 차경석의 검거 개시, 태을교도의 소행으로 일제가 파
악, 치성금(교금) 7만원을 갖고 나오다 목포에서 체포, 선도교의 고수부(고판례)
를 배후로 몰고 체포, 구금한 사실 등이 산견한다. 그러나 이 기록에 보천교(선
도교)가 주도하였다고는 서술되어 있지 않다. 김연일을 승려 혹은 보천교 간부
로 서술치 않고, 術士로 제시하고 있다.
49)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법정사 항쟁이 보천교, 선도교, 증산교에 주도한 것이라
는 서술은 거의 없고, 그 사건으로 인해 자신들의 교도들이 피해를 보았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차경석이 일제에 지명수배를 받았고, 제주도 신도들의
성금인 7만원을 갖고 나오다 목포에서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로 인하여 지역
책임자인 방주가 체포, 구금되었으며, 고수부도 목포 경찰서에 구금되었다는
내용들이다.
법정사 항일운동의 재인식 167
록에 1918년 11월에 제주에서 선도교도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는 내
용은50) 주목된다. 그런데 당시 승려 및 불교도 측의 후손들은 선도교
의 관련을 부인하고 있다. 심지어는 방동화의 후손인 방진주는 법정사
항일운동의 선발부대 33명 전원이 승려였다는 말을 방동화에게 들었
다고 증언한다.
이에 대한 추론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이해는 할수 있다. 우선 첫
째로는 당시 법정사에 왕래하였던 선도교도들이 자신들이 선도교도임
을 밝히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에는 김연일을 비롯한 승려
들은 이들을 불교신도로 보고 그들에게 불교의 사상 및 교리를 전달하
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이 일제에 의해 피해를 볼 경우에는 그를
차단하고, 신도들을 보호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혹은 그들이 선도교도
라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김연일은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을 수도 있
다. 두 번째로는 선도교도들이 법정사 승려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선도교도들이 집회 및 신앙의 공간 확
보 차원에서 양해가 이루어진 전제에서 가능하다.
이러한 가정에서 현실적으로 실현성이 있는 것은 전자의 경우이
다.51) 박주석이 처사라고 나온 기록도 있지만, 선도교 간부라는 기록
이 동시에 나온 것이 그 예증이다. 그런데 이 두가지 경우에 있어서
선도교도가 법정사 왕래를 한 보다 결정적인 요인은 없는가? 그것은
법정사에서의 미륵사상이 구현되었을 가능성이다. 만약 이 추론이 긍
50) 동아일보 1922. 2.24, 독립당의 단체로 관헌의 엄중, 종적잃은 차경석 , 풍
설이 전하는 태을교 一敎主의 死와 대분열 . 그런데 이 보도기사에는 3.1운동
이후임에도 불구하고 제주도 보천교도의 검거의 원인을 독립운동, 일제 타도로
전하지 않고 있다. 그 요인은 총독부에서 집회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아, 많은
교도가 모이는 것을 정치운동의 음모로 인정 하였기에 1918년 11월에 검거하기
시작하였다고 서술하였다. 이는 선도교와 법정사 항쟁과의 연계는 이러한 이질
성을 주목해야 한다는 사례이다.
51) 심재집 의 1917년 조항에 보천교가 처음 들어와서는 십여년간 暗躍하였다는
것도 이를 말하는 것이다.
168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5집
정적이라면 법정사와 선도교의 연결 고리는 미륵사상으로 설명이 가
능하다. 선도교가 포함된 범증산종단에서는 미륵사상과의 연계를 갖
고 있는데,52) 그것은 강증산이 생전에 내가 미륵이라 고 하였으며, 자
신의 사후에 자신을 보고 싶으면 금산사의 미륵상이 자신임을 이야기
하였다. 그래서 강증산의 사후, 일제시대에도 증산교도들은 금산사의
미륵불상을 친견하고, 자신들의 신앙대상으로 보려는 움직임이 지속
되었다. 그리하여 1920년대 초에는 강증산의 제자인 김형렬이 미륵불
교라는 교단을 만들은 후, 자신의 교도들을 이끌고 금산사 왕래를 하
였다. 그러나 후에는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고 불교신도로 귀의하겠다
는 의사를 표시하고 왕래하였다. 그러나 이면적으로 그 미륵상에서 증
산교 의식을 거행하여, 그 정체가 폭로되고, 미륵상에 치성금을 바치
게 하고 그 자금을 횡령, 독립자금으로 전용하였다는 사건으로 일제에
피체된 사건 즉 증산교 圖得運動이 있었다.53) 요컨대 증산교(보천교,
선도교)에서는 미륵신앙과의 연계가 깊으며, 미륵하생 신앙에서 나온
메시아 강림이라는 의식이 투영되었던 것이다.54) 후술하겠지만 김연
일이 항쟁을 주도하면서 불교신도들에게 말한 佛務皇帝의 하강, 玉皇
上帝聖德主人의 등장, 상제의 가호는 미륵 하생신앙의 변용으로 볼수
있는 대목이다.
바로 이러한 금산사의 실례가 법정사의 정황을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추론의 성격을 넘지 못한다. 필자는 본고찰에
서 법정사와 선도교와의 관계를 선도교도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법정
사측에 밝히지 않고 법정사를 왕래한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므
로 김연일이 법정사 인근의 불교신도, 선도교로 경도되고 있는 불교신
52) 김탁, 1994 한국종교사에서의 불교와 증산교의 만남 홍찬유선생팔순
기념논총 .
53) 김광식, 2000 일제하 금산사의 사격 근현대불교의 재조명 민족사.
54) 최정규, 2000 증산도와 미륵신앙 증산도사상 3.
법정사 항일운동의 재인식 169
도, 일반 농민들에 강력한 피해가 왔을 때 법정사와 자신의 사상, 의
식, 정신적인 관할 안에 있었던 다수 민중들을 위한 거사를 감행할 수
있었다고 본다.
지금껏 우리는 법정사항쟁이 법정사를 중심으로 일어났음에도 불구
하고 그 참가자에 선도교도가 포함된 연유에 대한 배경을 추론하였다.
그럼에도 법정사 항쟁은 김연일의 항일의식, 민족불교 지향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전라남도 제주도 도순리 한라산 서남쪽 기슭 법정사의 주지 김연일은 일찍
부터 제국(일본)정부의 조선통치에 대해 불평을 품어(정구용 판결문 )
수괴 김연일은 경상북도 영일군 출신으로 4년전 제주도 좌면 법정사에 살
면서 항시 교도들에게 반일사상을 고취하고 있었는데( 고등경찰요사 )
위와 같은 기록은 김연일의 항일의식이 거사의 원동력으로 볼수 있
는 증거이다. 김연일의 후손의 증언에 의하면,55) 김연일은 제주도에
가기 이전에는 동학혁명과 관련된 농촌의 지식인과 유대가 깊었으며,
특히 대구와 영천지역의 독립운동가들과도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이
점은 그가 제주도 래방 이전에 이미 일정한 민족의식, 항일의식을 소
지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되는 증언이다. 김연일은 운동의 주
도로 일제에 피체·수감되고 석방된 이후, 고향에 돌아와서도 일제의
감시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수 없어 고향을 떠나 만주지역으로 독립운
동을 하러 떠난 것으로 후손은 전하고 있다.56)
55) 이는 주로 김연일의 부인이 현재 생존하고 있는 김연일의 손자인 김갑출에게
전해준 내용이다.
56) 김연일은 1년에 1∼2회 정도 집에 왔고, 늘 몇 명이 함께 다녔으며, 그러면 1∼2
말 정도로 밥을 하면 그것을 먹고 남은 것은 주먹밥을 만들어 갖고 떠났다. 그
중에는 승려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영일에 있는 그의 선대의 묘를
제주도로 이장하였는데 이것은 육지의 자금을 제주도로 옮겨, 군자금으로 활용
170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5집
그러면 김연일이 결정적이면서도 구체적인 항쟁을 촉발케 한 단서
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김연일의 항일의지, 김연일과 함께
거사에 동참한 승려, 불교도들의 항일의식은 인정한다 하여도 일제와
무장투쟁을 하게 된 요인은 어떻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현재 이에
대해서는 만족스러운 답변을 줄수 없다. 지금껏 이에 대한 추론으로
일제의 식민지 수탈의 가속화, 토지조사사업의 완료에 즈음한 수탈의
심화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의 최우선적인 과제와 임무는
해당 종교의 교단 수호, 종교 조직의 보호로 볼 수 있다. 이는 물론 일
반적인 정황이다. 또한 당시 제주도민들의 천주교와의 갈등, 제주민란
을 통해 나타난 전통수호 정신도 일정하게 영향은 주었을 것이다. 그
러나 김연일을 비롯한 승려들이 일제와의 무장항쟁을 한다는 것은 사
찰의 존폐를 건 것이었으며, 일면으로는 목숨을 건 투쟁이었다고 볼수
있는데 이러한 안위, 존립을 걸 정도의 항쟁을 촉발케 하였으리라는
정황은 현재 찾을 수 없다. 다만 항쟁의 과정에서 일제에 구금된 13명
을 석방한 것을 보면 당시 일제는 법정사 관련 농민들에게 가혹한 수
탈을 자행하였고, 수감된 농민들은 그에 저항하였으리라는 것은 납득
할 수 있다. 종교운동으로서의 저항을 가정할 경우에는 일제가 선도교
의 증가를 감시하면서 선도교도가 법정사 왕래를 빈번하게 한다면 그
는 곧 법정사 전체에 대한 탄압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일제의 기
록인 고등경찰요사 에서 거사의 원인을 선도교에 대한 경찰의 취체
가 심한 것에서 찾은 것은 바로 이 정황과 부합하는 단서이다. 또한
법정사의 기반이었던 불교신도들에 대한 수탈도 법정사의 존립을 위
한 것으로 후손은 추정하고 있다. 김연일은 해방 직전 고향에 와서 사망하였다
고 한다. 동리 사람들의 회고에 의하면 기골이 장대하고, 머리가 백발이었으며,
늘상 사람들에게 백두산 천지에 가서 기도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고 한다. 이는
일본놈의 등쌀로 인해 살기가 어려우니 일본놈들이 빨리 망하도록 기원하는 기
도를 해야 한다는 취지이었다.(김갑출 회고, 증언)
법정사 항일운동의 재인식 171
태롭게 하였을 것이다.
바로 이런 정황이 1918년 초반부터 구체화되었기에 김연일은 항쟁
을 준비하게 된 연유로 보고자 한다. 방동화와 친근하게 지냈던 원인
상이 항쟁의 준비를 3년간이나 하였다는 증언을 남긴 것도57) 일제의
탄압이 서서히 시작되어 1918년에 접어들면서는 폭발 지경에 달하였
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김연일은 1918년 8월(음력 6, 7월 경)
부터 거사를 보다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법정사 거주자들과 항쟁을 상
의, 동의를 받고, 이후에는 박주석을 거사에 동참시켰던 것이다. 당시
김연일은 박주석에게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김연일은 내게, 자기는 김해김씨의 후예이며 제주도에 있는 일본인 전부를
몰아내고 이어 육지에 나가 불교를 넓히고 싶은바 그 수행에 조력해달라고
말했다.(정구용 판결문 )
김연일은 일본인 구축과 불교의 포교라는 거사의 목적을 개진하였
다. 이를 보면 김연일과 박주석은 친교가 오래동안 있었음을 알수 있
고, 김연일의 목적에 쉽게 동의한 박주석도 김연일의 취지에 찬동함을
엿볼수 있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는 김연일과 박주석은 동질적인 사고
(민족의식)를 갖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만약 김연일이 박주석이 완전
한 선도교도이고, 자신의 제의를 거부할 대상자라고 판단하면 그 포부
를 밝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점에서 필자는 박주석이 자신이 선도
교도 임을 밝히지 않았다고 이해하고자 한다. 그 이후 김연일은 박주
석과 함께 항쟁의 구체적인 계획을 상의하였다. 그러면 박주석은 어떤
인물인가. 당시 그의 나이는 55세로 김연일(48세)보다 7살이나 연상이
었다. 김연일이 그와 親交가 있었고, 선생으로 호칭하고, 거사를 상의
하고 도움을 요청한 것을 보면 그는 이를테면 지방의 지식인, 법정사
57) 죽비소리 2호(1999.2), 노장에게서 듣는다, 원인상스님을 찾아서 .
17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5집
신도의 간부의 일원이라고 보면 지나친 억측일까? 때문에 그는 지식
인으로서 선도교의 저항성, 개벽 지향에 경도되어 이면적으로는 선도
교의 책임자일수도 있는 것이다.
법정사 항쟁의 첫 봉화는 1918년 9월 19일(음력 8월 15일)의 우란
분 행사이었다. 당시 김연일은 그 행사에 참여한 불교신도들에게 다음
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왜놈이 우리 조선을 병합하였을 뿐만 아니라 병합후에도 관리는 물론 상인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 동포를 학대하고 있다. 불원 佛務皇帝가 출연하여 국권
을 회복하게 될 것이니 우선 제일로 제주도에 사는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상
인들을 도외로 구축하여야 한다.( 고등경찰요사 )
이러한 발언은 당시 그 행사에 참가한 양남구의 신문조서에도 나오
고 있다.
그 해 음력 8월 15일 법정사에 참배한 남녀 30명쯤이 모여 있었다.
김연일은 모두에게 이번에 불무황제가 이 세상에 나타나 조선불교를
멀리 포교하고 또한 조선을 잘 통치해서 옛날의 독립국으로 만드는데
진력하기로 했음으로 모든 사람은 불무황제의 명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느지라 우리들은 모두가 찬성했다.(정구용 판결문 )
김연일은 우란분 행사에서도 일제의 침탈을 지적하면서, 이번에 불
무황제가 나타나 국권회복과 불교포교에 도움을 줄 것임을 예고하였
다. 이런 내용에서 우리는 불무황제로 나타난 미륵 하생신앙을 파악할
수 있다. 김연일의 발언을 당시 불교도들이 대부분 찬동하였음도 파악
하였다. 이는 김연일의 제안, 계시를 암묵적으로 동의하였다는 내용인
바, 여기에서 당시 법정사 불교도들의 미륵신앙의 수용을 조심스럽게
법정사 항일운동의 재인식 173
수긍한다.
우란분절의 행사 이후 10월 4일, 법정사 주위의 마을 이장 앞으로
보내는 격문을 발송하였다. 그 요지는 일제를 처단할 기회가 왔으니
10월 7일 오전 4시에 하원리에 집결하라는 통보였다. 제주성을 습격하
고 나아가서는, 일제를 제주도에 추방한다는 계획을 첨부하였다. 10월
5일에는 각 지역에서 선발된 장정 33명을 법정사에 소집하였다. 김연
일은 이 자리에서 자신이 불무황제로서 일제의 처단, 구축에 나설 것
임을 선언하였다.
김연일은 그들을 향해 자신은 불무황제이다. 지금부터 조선 정치를 개량하
려고 하는데 우선 그 수단으로 일본인 관리를 이 섬으로부터 추방하지 않으
면 안되므로 여러분은 나의 명령에 의하여 부락 인민들에게 명을 전하고 인
민들을 끌어 모아 우선 중문리의 순사주재소를 습격, 일본관리를 추방토록
하라고 명령함으로(정구용 판결문 )
이제 법정사 항쟁은 깃발을 올리게 되었다. 10월 7일 새벽, 법정사
를 출발한 무장 대오는 서귀포 방면을 향하여 떠났다. 여기에서 우리
가 주목할 것은 10월 4일, 이장들에게 격문을 발송하고, 10월 5일부터
는 항쟁이 이미 본격화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일제의 차단, 일제에게 밀
고한 농민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일제의 식민 수탈이
심하였음을 말해준 단서이지만, 법정사의 신뢰와 위상이 강력하였음
도 파악할수 있는 것이다.
서귀포로 향한 항쟁의 대오는 마을에 내려가 주민들을 항쟁의 대열
에 가담시켜 그 숫자가 400여명에 달할 정도가 되었다. 그후에는 일제
의 시설물을 제거하고, 일본인과 개신교 목사를 린치하였으며, 주재소
건물을 방화하고, 구금된 농민 13명을 석방시켰다. 그러나 일제의 강
력한 진압에 항쟁세력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174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5집
4. 결어
지금껏 본고찰에서는 1918년 10월, 제주도 법정사의 항일운동에 대
한 개요와 성격을 재인식하기 위한 목적에서 몇 가지 문제점을 검토하
였다. 그 문제점은 주도세력의 논란, 운동의 발발 원인이었다. 이제부
터는 앞서 살핀 제반 내용에서 나타난 주요 사항을 갖고 운동의 성격,
추후 이 운동의 연구 활성화를 위한 제언을 요약하는 것으로 맺는말에
대하고자 한다.
첫째, 우선적으로 이 운동에 대한 명칭에 대한 문제로 필자는 법정
사 항일 이라는 개념적인 표현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본다. 지
금껏 이 운동의 주도세력, 운동의 공간적인 범위를 갖고 법정사 항쟁
의 성격에 대한 우려를 피력한 연구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본 고찰에
서도 나온 것 처럼 운동의 준비, 가시화, 전개의 무대가 법정사 임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운동의 주체라는 면에서도 운동의 주
동, 동참은 불교세력이 분명하였다. 여기에는 법정사 내부, 외부의 승
려들이 주체적으로 관여되었다. 더욱이 법정사의 성격이 민족불교적
인 성향이 창건 직후부터 자생적으로 대두되었음을 간과해서는 곤란
하다. 그리고 김연일이 항일의지를 밝힐 때에도 분명 불교발전, 포교
라는 목적을 표시하였으며, 거사 선언일도 우란분절이었고, 그 우란분
절에 모인 대중들도 불교도, 불교신도라는 것이 전하고 있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의 종료 이후에 나타난 일제측 기록에
선도교의 책임자, 향토사 차원의 조사 과정에서 그 가담자에 선도교도
가 나오고 있다. 이는 선도교도가 이 운동에 참여한 것은 분명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불교만의 운동이라고 강변해서도 안
될 것이다. 다만 우리가 주의를 기울일 것은 어떤 연유로 선도교도가
참여하였는가에 대한 보편적, 상식적인 설명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간혹 1920년대, 1930년대 제주도의 보천교, 태극무도교에 대한 정황
법정사 항일운동의 재인식 175
과 인식을 갖고 1910년대의 선도교의 현실을 즉각적으로 대입시켜 이
해하는 것은 신중을 기할 문제이다. 그 비교는 참고에 머물러야 한다.
셋째, 이 운동에 대한 지금까지의 이해는 근본적으로 제주 근대불교
의 낙후성, 열악성에 근거한 것이다. 본 고찰에서도 나왔지만 강창규,
방동화로 대변되는 제주출신 승려의 움직임을 더욱 주목할 필요가 제
기된다. 이는 곧 근대 제주불교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더욱 요청되
는 문제이다. 관음사, 법정사 그리고 여타 사찰로 고찰의 범주를 확대
해야 한다.
넷째, 제주도 전체의 종교 상황에 대한 이해가 절실하다. 제주도는
불교, 유교, 무속신앙이 습합된 채 내려온 전통이 있다. 이런 정황하에
각 종교의 동향, 성격이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본 고찰에서도 김석윤
의 경우가 단적인 실례인바, 이런 제주 종교의 특성을 다양한 방면에
서의 접근이 요청된다.
다섯째, 광범위한 자료수집과 분석이 요청된다. 지금껏 이 운동에
활용된 지료는 주로 일제의 판결문 , 수형기록 , 고등경찰요사 등
인데 일제측의 기록은 기록 생성 과정에 이미 편견, 편향이 개입되었
다. 그리고 고문, 취조, 재판 과정에서 운동 참여자들은 자연적으로 피
해를 예방하기 위한 자위적 입장에서 그 진실을 왜곡, 축소시킬 가능성
이 농후한 것이다. 최근 관련자들의 호적중초를 분석한 연구도 나왔지
만 더욱 다양한 자료 발굴이 요구된다. 이점과 관련하여 추후의 연구자
들은 이 운동에 참여한 400여 명에 달한 일반농민들의 관련 기록을 찾
아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기록들은 현전하지 않기에 서귀포시, 지역
연구단체, 관련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그 후손, 구전 청취자, 제주 향토
사의 서술자 등을 대상으로 한 구술사 작업을 요망한다. 구술사(증언 청
취, 기록, 해석)는 문헌 기록이 부재한 상태를 타개하는 차원에서 최근
에는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시도되고 있다.58) 그 결과 그 성과물도 상
당하고, 각 기관 및 연구단체에서 구술사 작업은 계속 증대되고 있다.
176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5집
여섯째, 이 운동의 접근과 이해는 순수 학술검토의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 아니다. 즉 관련 지방자치단체·후손·종교계의 이해관계가 일부
개재되어 있다. 이는 연구 활성화를 유도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제기
된다. 이에 그 각 기관, 단체, 후손 등은 역할분담을 통하여 진실을 밝히
고, 역사적 성격을 정립하고, 이를 통하여 역사교육, 민족교육에 활용해
야 할 것이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일 것은 무엇보다도 운동의 진실과
개요를 밝히는 것이다. 그후 운동의 성격 파악·역사성 부여·위상 정
립·교훈 찾기·계승사업 등은 별도로 더욱 천착할 문제인 것이다.
접수일 : 2005. 11. 1 / 심사완료일 : 2005. 12. 12
주제어 : 법정사, 기림사, 관음사, 김연일, 강창규, 방동화, 보천교,
선도교, 우란분절, 민족불교
58) 김광식, 2003 구술사연구의 필요성 ; 근현대불교의 공백을 메우자 불교평
론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