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그한국사 > 신라 > 30대 문무왕(文武王)
[참고] 고구려:보장왕 중국:당(唐)
서기 661년, 문무왕(文武王)이 즉위하였다.
왕의 이름은 법민(法敏)으로 태종 무열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로 문명왕후 소판 서현의 막내딸이며
김유신의 누이동생이다.
일찍이 문명 왕후의 언니인 보희가 꿈을 꾸었는데,
꿈에 서형산(경주에 있는 산) 꼭대기에서 오줌을 누니,
그 오줌이 도성 안을 가득 채웠다.
꿈에서 깨어난 언니는 동생인 문희에게 꿈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러자 동생 문희는,
"언니, 그 꿈을 나에게 파시오." 하였다.
그리하여 문희는 꿈 값으로 비단 치마를 언니에게 주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유신이 춘추공과 함께 공을 차다가 춘추공의
옷끈을 밟아 떨어뜨렸다. 유신은 춘추공에게,
"마침 우리 집이 가까이 있으니 가서 옷끈을 달도록 하자."
하고는, 춘추공과 함께 집으로 가서 주연을 베풀고,
조용히 보희(유신의 첫째 여동생)를 불러서 바늘과 실을 가져와
춘추공의 옷끈을 꿰매라고 하였다.
그러나 보희는 다른 일이 있다 하여 나오지 않고 그 대신
동생인 문희가 나와서 옷끈을 달아 주었다.
문희의 아름다운 모습과 예쁜 얼굴은 보는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하였다.
춘추는 그녀를 한번 보고는 크게 마음이 끌려 혼인을 청하고,
마침내 결혼하여 사내아이를 낳으니, 이 아들이 바로 법민이다.
왕비는 자의 왕후인데 파진찬 선품의 딸이다.
법민은 용모와 자질이 뛰어나고 총명했으며 지략이 많았다.
그는 영휘(당 고종의 연호) 초기에 당나라로 갔었는데,
당 고종으로 부터 대부경의 벼슬을 받았으며,
태종 무열왕 원년(서기 654년)에 파진찬 벼슬에 올랐다가,
병부령을 거쳐 마침내 태자로 책봉되었다.
660년에 태종 무열왕이 당나라 장군 소정방과 백제를 정벌할 때
법민은 함께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는데, 왕이 돌아가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이다.
원년(서기 661년) 6월, 당나라에 들어가서 당나라 황제를 모시고
있던 김인문 (왕의 아우)과
유돈이 돌아와서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나라 황제는 이미 소정방을 보내어 수륙 35만의 군사를 병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왕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서 당군과 호응하라고 하는데,
비록 복상(부모의 상)중이라 하더라도 황제의 칙명을 어기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7월17일, 왕은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그리고 김인문과 진주와 흠돌을 대당 장군으로,
천존과 죽지와 천품을 귀당 총관으로,
품일과 충상과 의복을 상주 총관으로,
진흠과 중신과 자간을 하주 총관으로,
군관과 수세와 고순을 남천주(이천) 총관으로,
문후와 진순을 하서주 총관으로, 진복을 서당 총관 으로,
의광을 낭당 총관으로, 위지를 계금 대감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8월에 대왕은 모든 군사를 이끌고 시이곡정에 머물렀다.
그 때 사자가 와서,
"백제의 잔당들이 옹산성(甕山城)을 차지하여 길을 막고 있으니
앞으로 나가지 말라."
하고 알렸다. 대왕은 먼저 사람을 보내어 그들 백제인을 달래
보았으나 항복하지 않았다.
9월19일에 대왕은 웅현정에 진군하여 머물면서 모든 총관과 대감을
모이게 하여 굳게 결의한 다음, 옹산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27일에는 큰 목책을 불사르고 수천 명을 베어 죽여
끝내 항복을 받았다. 싸움이 끝나고 전공에 따라 상을 주었는데,
각간이나 이찬 벼슬로 총관이 된 사람에게는 칼을 하사했으며,
잡찬, 파진찬, 대아찬으로 총관이 된 사람에게는 창을 하사하였다.
또한 그 아래 지위의 사람들에게는 각각 1품씩 벼슬을 올려 주었다.
이 때 웅현에 성을 쌓았다.
한편 상주 총관 품일은 일년산군 태수 대당과 사호산군 태수 철천과
함께 군사를 동원하여 우술성(회덕)을 공격하고 적병 1천여 명을
베어 죽이니, 백제의 달솔 조복과 은솔 파가는 모든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왕은 조복에게 급찬 벼슬을 내려 고타야군(안동) 태수로 임명하고,
파기에게도 급찬 벼슬을 주고 집과 논밭, 의복을 하사하였다.
10월29일에 대왕은 당나라 황제의 사자가 도성에 왔다는 말을 듣고
도성을 돌아왔다.
당나라의 사자는 조문을 겸하여 전 왕(무열왕)에게 제사 지내고
여러 가지 색깔의 옷감 5백 단을 내놓았다.
한편 김유신 등은 중간에서 군사를 쉬게 하면서 왕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 단나라 함자 도총관 유덕민이 와서 평양으로 군량을
수송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2년(서기 662년) 정월에 왕은 김유신(庾信), 김인문(仁問),
문훈(文訓), 양도(良圖) 등 9명의 장군에게 명하여 수레 2천여 량에
쌀 4천 석과 벼 2만 2천여 석을 싣고 평양으로 가서 당나라 군사를
돕게 하였다.
1월18일에 김유신 등은 풍수촌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땅이 미끄럽고 길이 험하여 수레가 갈 수 없으므로 군량과 함께
수레를 소와 말에 싣고 갔다.
1월23일에는 칠중하(임진강 하류)를 건너서 산양에 도착하였다.
이 때 귀당 제감 성천과 군사 술천 등이 이현에서 고구려 군사를
만나 이들을 베어 죽였다.
2월1일에 김유신 등이 장새(황해도 지방)에 도착하니,
평양과의 거리는 3만 6천 보였다.
그래서 먼저 보기감(무관 벼슬 이름) 열기 등
15명을 당나라 진영에 보내어 알리게 하였다.
이 날은 눈보라가 심하고 몹시 추워서 사람과 말들이
많이 얼어 죽었다.
2월6일 양오에 도착한 김유신은 아찬 양도와 대감 인선 등으로
하여금 당나라 진영에 군량을 보내게 하였다.
그리고 소정방에게는 은 5천7백 푼, 좋은 베 30필,
가발용 머리털 30냥, 우황 19냥을 보냈다.
군량을 받은 소정방이 갑자기 싸움을 그만두고 돌아갔다.
김유신 등도 당나라 군사가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거두어 돌아오게 되었다.
과천(임진강)을 건너올 때 고구려 군사가 추격해 왔다.
그러자 김유신은 곧 군사를 돌려 적과 싸워서 1만여 명을
베어 죽이고, 소형 (벼슬 이름) 아달혜 등을 사로잡았으며,
병기구 1만여 점을 노획하였다.
이 싸움에 공을 세운 유신과 인문에게는 많은 재화와
논밭, 노복을 상으로 주었다.
이 무렵 탐라(耽羅)국(제주도)이 항복하였다.
탐라국주는 백제의 속국이었던 까닭에 좌평(백제의 계급)이라는
벼슬을 했는데 이 때부터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
3월에는 죄수를 석방하였다.
또한 왕이 이미 백제를 평정 했으므로 관리에게 명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다.
7월에는 이찬 김인문을 당나라로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8월에는 백제의 남은 저항군이 내사구성(지금의 유성)에 모여
반항하므로 흠순 등 19명의 장군을 보내어 토벌하였다.
이 때 대당 총관이었던 진주와 남천주 총관이던 진흠이 거짓으로
병으라 핑계대고 한가롭게 놀며 임무를 소홀히 하므로
그들을 죽이고 그 일족까지 죽였다.
3년(서기 663년) 정월에 남산 신성(경주 남산성)에 큰 창고를 짓고
또 부산성을 쌓았다.
2월에는 장군 흠순과 천존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거열성
(지금의 거창)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7백여 명을 베었다.
또한 거물성과 사평성을 쳐서 항복받고, 덕안성(지금의 은진)을
쳐서 적병 1천7십여 명을 베었다.
4월에는 당나라가 신라를 계림 대도독부로 삼고 왕을 계림주
대도독에 임명하였다.
이 때 백제의 옛 장수인 복신과 중 도침이 백제 왕자였던
부여 풍(夫餘豊)을 임금으로 세우고, 당나라 장군 유진 낭장
유인원이 머물고 있는 웅진성(공주)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에 당 고종은 장군 유인궤를 검교대방주 자사로 임명하여
전 도독 왕문도의 군사와 신라 군사를 이끌게 하여 백제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곳곳에서 싸움이 벌어져 싸울 때마다 이기니,
백제 부흥군은 계속 쫓겼다.
마침내 복신 등은 유인원이 포위하고 있는 웅진성의 포위를 풀고
임존성(충남 대흥)으로 퇴각하였다.
얼마 후 복신은 도침을 죽이고 도침의 병력과 뿔뿔이 흩어져 있던
자들을 모으니, 그 세력이 매우 커졌다.
당나라 장군 유인궤와 유인원은 각각의 군사를 합하여 휴식시키며
당나라 황제에게 증원병을 요청하였다.
당나라 황제는 우위 장군 손인수에게 군사 40만 명을 이끌고
덕물도(지금의 덕적도)를 거쳐 웅진성으로 향하게 하였다.
문무왕은 김유신 등 38명의 장군을 이끌고 당군과 연합하여
두릉윤성 (豆陵尹城), 주유성(周留城) 등을 쳐서 모두 항복받았다.
이때 백제의 부여 풍은 몰래 도망치고 백제 왕자인 충승, 충지
등은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그러나 지수신 등은 임존성을 차지하고 항복하지 아니 하였다.
그래서 10월21일 부터 임존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11월4일 군사를 돌려 설리정(경북 예천지방의 영취산성)으로
물러가서 공이 많은 장병들에게 상을 주었다.
4년(서기 664년) 정월에 김유신이 늙음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왕은 성천, 구일 등 28명을 선발하여 웅진성으로 보내 당나라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7월에는 왕이 장군 김인문과 품일, 군관 등에게 명하여 일선(선산),
한산(광주) 2주의 병사를 거느리고 웅진성의 병마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돌사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5년(서기 665년) 8월에 왕이 당나라 칙사 유인원과 웅진 도독 부여
융(전 백제왕자)과 함께 웅진의 취리산에서 화친을 맹세하였다.
처음 백제는 부여 장(백제 무왕)이 고구려와 화친을 맺으면서
부터 자주 신라의 영토를 침범하였다.
이 때문에 우리(신라를 가르킴)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끊임없이
구원을 청하였다. 그 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고 군사와 함께
돌아가자, 남은 무리들이 또다시 배반하므로 왕은 당나라 장군인
유인원, 유인궤 등과 함께 수년 동안 이들을 쳐서
겨우 평정하게 되었다.
이 때 당나라 고종은 백제의 왕자인 부여 융에게 명하여 본국으로
돌아가서 반항하는 무리를 무마시키고 신라와 화친하도록 하였다.
이 때 흰 말을 잡아 맹세를 했는데, 먼저 하늘과 땅, 산과 강의
신에게 제사하고 그 피를 마셨다. 맹세하는 글을 보면,
"전에 백제의 선왕(무왕)이 하늘의 뜻을 깨닫지 못하여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였다. 또한 신라와 혼인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고구려와 연합하고 왜국과 사귀면서 함께 난폭한 행동을 하며
신라의 성읍을 침범하여 노략질하므로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이에 중국의 천자는 무고한 백성을 불쌍히 여겨 자주 사신을 보내어
평화롭게 지내라 하였다. 그러나 백제는 지리가 험하고 중국과의
거리가 먼 것만을 믿고 늘 으스대더니 중국의 황제가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니 하루 아침에 평정되었다.
따라서 마땅히 궁궐과 집을 헐고 연못을 만들어서 뒷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항복하는 자를 받아들이고
배반자를 치는 것은 옛 왕들로부터 내려온 일이며,
망하는 것을 일으켜 주고 끊어지는 것을 잇게 하는 것이
예로부터 있어 온 바른 일이니, 모든 것은 반드시 역사에
전하게 될 것이다.
이에 전 백제의 대사가 정경(당나라 벼슬이름)인 부여 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 그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옛 땅을 보전하게 하니,
신라와 상의하여 오래도록 가까이 지내며 지난 숙원을 풀고 우의를
맺고 화친할 것이다."
하였다. 이 해에 왕자 정명을 태자로 책봉하고 죄수를 풀어 주었다.
6년(서기 666년) 2월, 도성에 지진이 있었다.
이 때 장군 천존의 아들 한림과 김유신의 맏아들 삼광은 둘 다
내마(벼슬 이름)의 직위에 있으면서 당나라로 건너가 황제를 모시고
있었다. 한편, 왕은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으므로 다시 고구려를
평정하기 위해 당나라에 원병을 청하였다.
12월에 당나라는 이적을 요동도행군 대총관으로 삼고, 사열
소상백(당나라 벼슬)
학처준을 부장으로 삼아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이 때 고구려의 대신 (貴臣) 연정토(淵淨土 연 개소문의 동생)가
12개 소의 성읍에 있는 7백63호, 3천5백43명을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하여 왔다.
이 때 왕은 연정토와 그를 따라온 부하 24명에게 의복과 양식,
집을 주어 도성과 각 주에 나누어 살게 하고, 12성 중에서 8성을
취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7년(서기 667년) 7월에 왕은 3일 동안 큰 잔치를 베풀었다.
이 때 당나라 황제가 칙령을 내려 지경(문무왕의 다섯째 동생),
개원(문무왕의 여섯째 동생)을 장군으로 삼아 요동의
고구려 정벌군에 참가하게 했다.
왕은 지경에게 파진찬, 개원에게 대아찬 벼슬을 주었다.
또한 당나라 황제가 대아찬 일원을 운휘 장군으로 삼았으므로
왕은 일원에게 명하여 궁중에서 칙령을 받도록 하였다.
이 때 당나라 고종은 유인원과 김인태(문무왕의 이복 형제)에게
명하여 비열도 (지금의 평안도 안변)로 가게 하고,
신라는 병사들을 징집으로 다곡과 해곡의 두 길을 거쳐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으로 하여 다곡과 해곡의 두 길을 거쳐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으로 진격하라 하였다.
그래서 왕은 8월에 대각간 김유신 등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도성을
출발하여 9월에 한성정(경기도 광주)에 도착해서 당나라 장군
이적을 기다렸다.
이적은 10월 2일에야 평양 북쪽 2백리 되는 곳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동혜촌주인 대내마 강심(신라의 장군)에게 글안(러란)
기병 80여명을 데리고 아진함성을 거쳐 한성에 도착하거든
병기를 보내라는 글을 전하게 하였다.
대왕은 이 적의 편지대로 11월11일에 장새(황해도 수안)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장군 이적이 회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왕도 군사를 거두어 돌아왔다.
그리고 강심에게 급찬의 벼슬과 좁쌀 5백 석을 하사하였다.
8년(서기 668년) 봄에 아마(지금의 여수 남쪽 섬)가 항복하였다.
왕은 원기와 연정토(淵淨土)를 당나라로 보냈다.
그런데 연정토는 당나라에 머물러 돌아오지 않고 원기만 돌아왔다.
6월 12일에 유인궤가 황제의 칙령을 받들고 황제를 모시던
사찬 김삼광과 함께 당항진(남양)에 도착하였다.
왕은 각간 김인문에게 이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6월 21일, 왕은 대각간 김유신을 대당 대총관으로 삼고,
각간 김인문, 흠순 천존, 문충과 집찬 진복, 파진찬 지경,
대아찬 양도, 개원, 흠돌을 대당 총관으로 삼고,
이찬,진순,죽지를 경정 총관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찬 인태를 비열도 총관으로, 집찬 숭신, 대아찬 문영,
아찬 복세를 비열 성주 행군 총관으로, 파진찬 선광과 아찬
순장을 하서주 행군 총관으로, 파진찬 의복과 아찬 천광은
서당 총관으로, 아찬 일원과 홍원을 계금당 총관으로 삼았다.
6월 22일, 웅진부성의 유인원이 귀간 미힐을 보내어 고구려의
대곡(평산)과 한성(광주) 등 2군 12성이 항복하였음을 알려왔다.
왕은 일길찬 진공을 보내어 축하 인사를 하였다.
이때 김인문, 천존, 도유 등에 일선주(선산)등
7군과 한성주의 군사들을 이끌고 당군의 지영으로 향했다.
6월 29일에는 각도의 총관이 모두 출발했지만 김유신은
풍병(신경통)이 있어 도성에 머물렀다.
김인문 등은 당나라 장군 이적을 만나 함께
영류산 밑으로 진격하였다.
7월 16일에 왕은 한성주에 행차하여 여러 총관에게 어서 빨리
당나라 대군과 합류하라고 당부하였다. 이때 김문영 등이
사천 벌판에서 고구려 군사를 맞아 싸워서 크게 무찔렀다.
9월26일에 모든 군사들이 당나라 대군과 합세하여
평양성(平壤城)을 포위 공격하였다. 마침내 고구려 보장왕은
먼저 천남산 등을 보내어 이적에게 항복을 청하였다.
이적은 보장왕과 왕자인 복남, 덕남, 그리고 대신 등 20만명을
데리고 당나라로 돌아갔는데,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도
함께 따라갔다. 또한 인채, 의복, 수세, 천광, 홍원 등이
이들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앞서 당나라 대군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왕은 한성(광주)을
출발하여 평양으로 가던 도중, 힐차양에 이르렀을 때 당나라
장병들이 이미 떠나갔다 하므로 다시 한성으로 돌아왔다.
10월 22일, 왕은 김유신에게 태대각간, 김인문에게는 대각간,
그밖에 이찬과 장군 등에게는 각간의 벼슬을 내리고,
소판 이하에게는 모두 벼슬을 1급씩 올려 주었다.
또한 대당 소감 본득은 사천 싸움에서 공이 가장 컸으며,
한산주 소감 박경한은 평양성 안에서 군주 술탈을 죽인
제일 공로 자였고, 흑악령인 선극은 평양성 성문 앞의 싸움에서
공이 가장 컸으므로 일길찬의 벼슬과 벼 1천석을 내렸다.
또한 서당 당주인 김둔산은 평양 군영의 싸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워 술간 (사찬) 벼슬과 벼 1천석을 주었다.
군사인 남한산 사람 북거는 평양성 북문의 싸움에서 가장 큰공을
세웠으므로 술간 벼슬과 벼 1천석을 주었다,
그리고 가군사인 비열흘(안변)사람 세활은 평양의 소성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워 고간(급찬) 벼슬과 벼 5백석을 내렸다.
한산주 소감인 김상경은 사천 싸움에서 전사했는데,
일길찬의 벼슬을 추증하고 벼 1천석을 내렸다.
한편 아술(아산)사람인 사찬 구율은 사천 싸움에서 다리 밑으로
냇물을 건너가서 적과 싸워 크게 이겼지만,
명령 없이 멋대로 위험한 곳으로 들어갔다 하여 공은
비록 컸으나 상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홧김에 목을 매어
죽으려 하다가 지나가던 사람에게 구조되었다.
11월 5일, 왕은 포로로 잡은 고구려인 7천명을 이끌고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6일에는 문무의 모든 신하들을데리고 선조 묘에
참배하여 아뢰기를,
"삼가 선조의 뜻을 받들어서 당나라와 함께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백제와 고구려의 죄를 물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못된 우두머리들이 엎드려 죄를 빌었고,
나라가 태평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감히 고하오니 신이여 들으소서." 하였다.
18일에는 나라를 위해 죽은 자에게 폐백을 내렸다.
9년(서기 669년) 2월21일, 대왕은 여러 신하들을 불러 분부하기를,
"그동안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두 나라와 상대하여 북벌과
서침으로 잠시도 편안할 때가 없었다. 이로 인해 싸움에 나선
군사들의 뼈가 들판에 쌓이게 되었고, 그들의 몸과 머리는
온 나라 안에 흩어져 있게 되었다.
선왕(죽은 무열왕을 일컬음)은 이 같은 백성들의 참혹함을
불쌍히 여겨 하늘이 내신 귀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바다를
건너 중국에 가서 황제에게 군사를 청하였다.
이것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여 영원히 싸움을 없애고자
함이었으며, 쌓이고 쌓인 원한을 갚고 백성들의 남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비록 백제는 평정하였지만 고구려는 멸망시키지 못했는데,
내가 선왕 (부왕)의 간절하신 유업을 이어받아 마침내
그 뜻을 이루게 되었다. 이제 두 나라가 평정되고 나라 안이 모두
안정되었다. 싸움터에서 공을 세운 자들에게는 이미 상을 내렸고
전사한 혼령들에게는 벼슬을 추증했다.
그러나 저 감옥 속에는 아직 은총을 입지 못한 채 칼을 쓰고
고생하는 자들이 재생의 은혜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이 일을 생각하면 자고 먹는 일조차 편안하지 않다.
그래서 국내의 죄수들을 풀어 줌이 옳다.
총장 2년(당 고종의 연호, 서기 669년) 2월 21일 새벽이전에 다섯가지 큰 죄를 지어 사형에 처하게 될 죄인 외에는 모든 감금된 자들을 살펴 그 죄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풀어 줄 것이다.
또한 지난 번 죄수를 풀어 준 이후 다시 죄를 지어 관직을
박탈당한 자들도 모두 용서하여 전과 다름없이 다시 벼슬을
줄것이며, 도둑질한 사람은 몸만 놓아주되 그만한 재물을
변상할 수 없는 자는 훔친 물건의 값을 되돌려 받지 아니 할것이다.
그리고 집안이 가난하여 남의 곡식을 훔쳐 먹은 자 중에서
농작물이 잘 되지 않는 밭을 가진 자는 원금과 이자를 모두
갚지 않게 할 것이다.
그러나 농사가 잘되는 땅을 가진 자로서 금년에 곡식을
잘 거둘 수 있다면 원금만 갚게 하고,
이자는 물리지 않도록 하는데, 기한은 30일로 정하도록 하라.
소속 관원들은 이 뜻을 받들어 곧 시행하라." 하였다.
10년(서기 670년) 3월에 사찬 설조유가 고구려의 태대형(太大兄)
고연무 (高延武) 와 함께 각각 정예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옥골 (屋骨)이란 곳에 이르렀다.
이 때 당나라의 명을 받은 말갈병(靺鞨兵)이 먼저 개돈양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4월 4일에 말갈병과 싸워 신라군이 크게 이기고,
적병을 벤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자 당나라 군사가 계속 진격해 오므로
신라군은 백성으로 후퇴하여 지켰다.
6월에 고구려 수임성(水臨城) 사람인 대형(大兄 고구려의 벼슬)
검모잠 (劍牟岑)이 고구려 백성을 모아 궁모성으로 부터
패강(지금의 대동강) 남쪽으로 와서 당나라 관리와 중 법안
등을 죽였다.
그리고 신라를 향하여 서해의 사치도(지금의 소야도)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정토의 아들 안승(安勝)을 만나보고 한성(
지금의 경기도 광주)으로 맞아들여 임금으로 삼았다.
또한 소형(고구려의 벼슬 이름) 으로 있던 다식 등을 신라의
도성으로 보내면서 말하기를,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세대를 잇게 하는 것은 온 세상이
옳게 여기는 일이니, 오직 큰 나라(신라)의 뜻만 바랄 뿐입니다.
우리 나라의 지난 왕은 바른길을 잃어 멸망을 당하였습니다만,
지금 저희들은 옛 고구려의 귀족 안승 (安勝)을 임금으로 모시고
영원히 신라의 속국이 되어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하고 간절히 애원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안승을 나라의
서쪽(國西)에 있는 금마저(金馬渚 지금의 익산)에 살게 하였다.
7월에 왕은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또다시 반란을 일으킬까
의심하여 대아찬 유돈을 웅진 도독부로 보내어 화해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않고 도리어 염탕꾼을 신라 진영으로
보내어 정세를 엿보게 하였다.
그래서 왕은 그들이 신라군을 습격하려는 것을 알고 염탐꾼을
잡아두고, 군사를 일으켜 백제의 무리를 치게 하였다. 품일,
문충, 중신, 의관, 천관 등이 63성을 쳐서 빼앗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신라 땅으로 옮기게 하였다.
이 때, 천존, 죽지 등은 7성을 빼앗고 적병 2천 명을 베었다.
군관 문영은 12성을 쳐서 빼앗고 적병(당나라군에 속한 병사)
7천 명을 베었을 뿐만 아니라 말과 병기 등을 매우 많이 얻었다.
왕이 싸움터에서 돌아올 떄, 중신, 의관, 달관, 흥원 등이
싸우다가 후퇴한 일이 있어 당연히 사형에 처할 일이었지만
특사를 내려 직위만 빼앗았다.
이 해에 왕은 사찬 수미산을 보내어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책봉하면서,
"신라 왕은 고구려의 서자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봉한다.
공의 태조(동명성왕) 는 덕을 비산에 쌓고 공을 남해에 세워
위풍과 어진 가르침을 동방에 널리 폄으로써 자손이 서로 대를
이어 끊이지 않았다. 그 동안 개척한 땅은 천리나 되고,
역사는 8백 년을 헤아렸다.
그런데 남건과 남산 형제에 이르러 화근이 집안에서 일어나
나라가 멸망하고, 백성들은 혼란에 빠져 마음조차 의지할 곳을
잃게 되었다. 공은 이러한 어려움을 피하여 외로운 몸을
이웃 나라에 의탁하니 떠돌아 다니면서 겪은 괴로움이
얼마나 컸겠는가?
또한 이미 멸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자 하니,
백성들에게 임금이 없어서는 안 될 일이다.
또한 선왕(보장왕)의 정식 아들은 오직 공이 있을 뿐이니
제사를 맡아 볼 사람도 공 이외에 누가 있겠는가?
그래서 공을 고구려 왕으로 삼는 바이니, 공은 마땅히 나라 잃은 백성들을 모아 잘 어루만져서 옛 왕업을 일으키도록 하라. 그리고 영원한 이웃이 되어 형제와 같이 지내야 할 것이다."
하였다.
12월에 왜국이 나라 이름을 일본으로 고쳤다. 해 뜨는 곳에서 가까우므로 그와 같이 이름한 것이라고 한다.
12년(서기 672년) 고구려군과 더불어 당과 싸우니 고보(高保)등이 퇴각하자 이를 추격하다 크게 패하고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다.
13년(서기 673년) 7월 김유신이 죽었다.
14년(서기 674년) 정월, 당나라 황제는 신라 왕이 고구려 유민을
받아들이고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였다 하여 왕의 관작을
박탈한다는 조서를 내리고, 당나라 수도에 머물던 왕의
아우 김인문을 신라 왕으로 세워 돌아가게 하였으며,
유인궤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치게 하였다.
15년(서기 675년) 2월에 유인궤가 칠중에서 신라군을 쳐부수었다.
이에 왕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고 사죄하였다.
당나라 황제는 왕을 용서하고 관작도 회복시켰다.
귀국길에 올랐던 김인문은 도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그러나 왕은 백제의 땅을 많이 탈취하고 고구려의 남쪽 경계까지
신라의 고을을 넓힌 다음, 당나라 군사가 글안,
말갈병과 함께 침범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임전 태세를 갖추게 하였다.
그 해 9월, 신라 장군 문훈이 설인귀가 이끄는 당나라 군사와
싸워 1천 4백 명의 머리를 베고, 병선 40척을 빼앗았다.
또 당나라 이근행(李謹行)이 군사 20만 명이 매초성 (買肖城)에
와 주둔하므로 신라군이 이를 쫓아 버리고, 말 3만 3백 80필과
그 밖의 병기를 상당히 빼앗았다.
당나라 군사는 다시 글안, 말갈병과 함께 칠중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 무렵 아달성, 적목성, 석현성 등이 적에게 짓밟혀 성주와
현령들이 힘껏 싸우다 죽었다. 그러나 신라군은 크고 작은
전투를 18회나 치르면서 모두 승리하여, 적 6천 47명의 머리를 베고,
말 2백 필을 빼앗았다.
16년(서기 676년) 2월에 고승 의상 대사가 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였다.
11월에는 사찬 시득(施領)이 배와 병사를 이끌고
소부리주(所夫里州 부여)의 기벌포(伎伐浦 장항)에서
설인귀(薛仁貴)와 싸워 패하였다.
그러나 그 뒤 크고 작은 22회의 전투를 거듭한 끝에 마침네
이기고 적병 4천여 명을 죽였다.
19년(서기 679년) 2월에 사신을 보내어 탐라국(제주도)의 항복을
받았다.
21년(서기 681년) 정월 초하룻날은 하루 종일 밤과 같이 어두웠다.
7월 1일에 왕이 돌아가니 시호를 문무라 하고,
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 입구(東海口)의 큰 바위섬(대왕암)에
수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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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변화시키는 인터넷①』
(≫≪) 미군 희생 여중생들의 죽음을 애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