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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메토디스트다
오늘은 웨슬리회심기념주일이다. 감리교인을 영어로 ‘메토디스트’(Methodist)라고 부른다. 메토드(Method) 곧, 방법이란 단어에 사람을 뜻하는 어미 이스트(ist)를 붙인 합성어이다. 방법주의자, 원칙주의자라는 의미의 좀 고리타분한 이름이다. 애초에 ‘메토디스트’는 고지식한 경건적 태도 때문에 조롱받던 별명이었지만, 한동안 자랑스러운 명예를 누렸다. 그러나 이젠 한물간 브랜드 취급을 받는 실정이다.
우리나라에 와서 찬양 사역을 한 침례교 목사 스카렛 브레더는 감리교인을 이렇게 평가하였다. “감리교인은 형식적인 원칙주의자가 아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새로운 방법을 사모하는 사람이다.” 과연 ‘메토디스트’로서 감리교인 다움은 무엇일까?
2007년 12월 초, 바티칸을 방문하였다. 에큐메니칼 순례단이란 이름으로 한국의 정교회, 천주교, 개신교회가 함께 3대 그리스도교 총본산인 제네바, 로마, 이스탄불을 차례로 방문하던 길이었다. 교황은 매주 목요일마다 바티칸을 방문한 여행자들 앞에서 강론하였다. 세계에서 온 참석자들은 교황에게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으려 했고, 행여 눈길이라도 마주치려고 앞다투었다. 그 열기는 웬만한 아이돌 가수 공연장의 진풍경을 방불케 하였다.
우리 일행은 행사장의 맨 앞줄에 앉는 호사를 누렸다. 줄을 잘 선 덕분에 나는 예배를 마치고 퇴장하는 교황과 악수하고, 간단한 인사말까지 나누었다. 독일인인 베네딕트 교황에게 눈치껏 독일어로 인사했더니 더욱 친밀감을 표시하였다. 물론 교황에게 나를 지목해 소개한 분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천주교 김희중 대주교가 느닷없이 “이 사람은 메토디스트입니다”라고 했더니, 교황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나 자신 ‘메토디스트’임을 실감하였다. 다양한 그리스도인 정체성 가운데 ‘메토디스트’라고 불리니 으쓱하였다. 잇달아 방문한 교황청 교리성 장관 발터 카스퍼 추기경에게 내 소개를 할 때에도 당당히 ‘나는 메토디스트’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2006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WMC)에서 칭의교리에 관한 ‘감리교-가톨릭’ 공동선언을 한 당사자였다.
나는 오래도록 감리교인이었지만 ‘메토디스트’란 정체성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무심하였다. 그러다가 바티칸 한복판에서 비로소 ‘메토디스트’임을 실감한 것이다. 한동안 유럽에 사는 동안 자신이 어떤 그리스도교회의 신앙과 고백을 지니고 있는지가 매우 소중하다는 사실을 느꼈다. 교단이 크거나 작거나, 뿌리가 깊거나 짧거나 하는 규모의 논리가 아니었다. 정체성에 대한 자각의 문제였고, 이는 저마다 고유한 그리스도인답게 사는가였다.
첫 ‘메토디스트’ 존 웨슬리는 철저한 믿음과 삶을 통해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웨슬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켜 원칙주의자 혹은 규칙쟁이란 유별난 별명으로 불린 것이다. 웨슬리는 ‘교리와 훈련’(Doctrine and Discipline)을 함께 강조하였다. 자신의 믿음 그대로 사는 방식이다. 웨슬리의 규칙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원리와 다름없다. 바울이 정리한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윤리(롬 12-15장)에 대한 요약이기도 하다.
본래 감리교회는 ‘뜨거운 가슴과 정직한 생활로 복음전도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였다. ‘영혼 구원과 이웃사랑’을 자전거 앞바퀴와 뒷바퀴로 생각한다. 사실 감리교회만큼 신앙과 인간에 대해 관용과 사랑이 넘치고, 사회 및 역사와 소통하는 신학과 전통을 지닌 이만한 그리스도교 교파를 찾기는 쉽지 않다. 도그마에 갇혀있는 보수적 신앙전통에 비해 한결 자유롭고, 공동체적이며, 믿음과 행함에 있어서 진보적이다.
그런 아쉬움과 회한 때문일까? 오늘 웨슬리 회심기념주일 만큼은 마치 3.1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듯 그렇게 낮은 목소리일망정 변호하고 싶은 미련이 남는다.